리오타르, <포스트모던의 조건>을 읽으면서: 포스트모던 재고.

Reading 2015. 4. 27. 01:07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예상치 못했던 이유로 장-프랑수아 리오타르Jean-Francois Lyotard의 <포스트모던의 조건>_La condition postmoderne_을 읽고 있다. 애초에 영역 중역이었던 국역본 상태가 아주 맘에 들지는 않는다(가끔 의심이 가서 영역본과 비교해보면 명백한 오역이 있다...영역본 각주에서도 사소한 오타 하나를 찾았다ㅋ). 이제 1/3 정도를 읽었고 다른 읽을 게 너무 많이 쌓인 여건상 다음 주 주말에나 다 보게 될 것 같다만 기대했던 이상으로 흥미롭다. 사람들이 보통 리오타르 하면 포스트모더니즘 이야기만 하곤 하는데, 애초에 이 책은 자체가 퀘벡주 대학협의회의 의뢰를 받아 새로운 시대에 지식과 대학의 위상을 연구한 결과물이다...어떤 면에서 (한국에서는 극소수의 사람들만 사고하는) 대학과 고등지식의 변화에 대한 철학적 작업이라는 게 좀 더 어울리는 설명일 것이다.


영역본 앞에 덧붙여진 프레드릭 제임슨의 서문은 포스트모던의 수용을 둘러싸고 각축전을 벌이던 시점에는 나름대로 의의가 있었겠지만, 그 시절의 논의들로부터 한 발자욱 멀어진 지금에는 충분하지 않아보인다--제임슨이 20세기 후반 미국의 문학/이론담론장 내에서 위상을 획득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기본적으로 그가 독일 및 프랑스의 이론적 수용에 선구자적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마치 한국의 영문학 전공자들이 90년대 미국을 경유한 프랑스 이론의 수입자로서 독특한 지적 입지를 확보했던 것처럼 말이다(이후 그 바통을 프랑스 철학 전공자들이 넘겨받았을 때는 불운하게도 점차 이론 자체가 읽는 사람들만 읽는 컬트로 협소해지게 되었다). 지금 리오타르를 읽는다면, 포스트모던이라는 이름이 아니라 그를 그러한 입장으로 내몰았던 역사적 조건들 자체에 대한 숙고만이 그 독서를 가치있게 할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일군의 사상체는, 한국의 지적 담론 중 그러지 않았던 것이 몇이나 있었겠냐마는, 너무 빨리 오고 너무 빨리 사라져서 지금은 그 실체를 아스라한 기억에 의지해서만 떠올릴 수 있다. 10년 전 대학에 처음 들어왔을 때 통상적으로 "탈근대"로 번역되던 포스트모더니즘은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인식틀이자 새로운 윤리적 구호처럼 활용되고 있었다. 구시대의 갖가지 적폐들은 근대 혹은 "모더니즘"에 떠넘겨졌고, 모더니즘=엘리트주의=권위주의와 같은 등식이 설정된 후 그것을 부수고 넘어서는 몫이 포스트모더니즘=대중=탈권위/탈중심화 같은 가치체계의 몫으로 설정되었다. 그런 면에서 2000년대 중반은 90년대부터 이어진 "좋았던 시절"의 마지막 빛이었다--복되도다, 별빛이 가득한 하늘이 우리가 갈 수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들의 지도였던 시대, 별빛이 그 길들을 훤히 밝혀주었던 시대여.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새로운 대중지성을 일종의 새로운 진리로 믿었고 그것을 마치 마법지팡이처럼 휘두르곤 했다. 포스트모던을 따른다면 항상 틀리지 않을 수 있다는 순진함을 간직할 수 있던 시절이었다.


허공 위에서 사고하고 발언했다는 점에서 한국의 포스트모던 옹호자와 비판자 모두 대체로 얄팍했다. 포스트모던은 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가시화된 자유주의적 대중에게, 그 당시의 표현을 빌리자면 "진보적인" 사람들에게 윤리적 정당성을 부여해주었다. 도식적으로 말하자면 진보주의는 포스트모던적인 것을 통해 구질서를 부수고 새로운 시대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서사적 위상을 획득했다. 그런 점에서 포스트모던 옹호자들은 대체로 포스트모더니즘을 리오타르가 의도한 바와는 정 반대로 '거대담론'으로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그것이 실제로 어디까지 구체성을 획득할 수 있느냐라는 질문과는 별개로 뿌리깊게 사대주의적인 한국에서 '선진자본주의 국가에서 날아온 새로운 시대정신'으로서의 포스트모던은 효과적으로 먹혀들어갔다. 비판자들은 인식론적/윤리적 허무주의라는 이미 그 자체도 서구에서 먼저 전개된 카드를 활용했지만 대체로 무력했다. 합리적 이성의 전통이 애초에 형성되어 있지 않은 한국에서 과거의 질서를 옹호한다는 것은 90년대 이전의 권위주의로의 복귀처럼 받아들여졌고, 소수의 돈키호테들을 제외하면 그런 무리수를 진지하게 두려는 사람들은 잘 눈에 띄지 않았다.


한국에서 포스트모던의 유행을 설명하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지만, 그토록 지배적이었던 담론이 이토록 재빠르게 사라진 것을 해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마 세 가지 이유를 곧바로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첫째, 푸코-데리다-들뢰즈의 유행에 뒤이어 새로운 유행으로 포스트모던에 대한 비판적 전유자들(지젝, 바디우, 가라타니 고진, 그리고 아마도 버틀러)이 수입되었고 전자를 대체해 갔다. 둘째, 현실을 설명하는 담론으로서의 포스트모던이 거의 다루지 못했던 "물질적인 영역"이 한국인들을 급습했다. 부동산과 주식 투자를 통해 적어도 겉으로는 풍요로워지고 있는 것과 같았던 노무현 정부가 지나가고 이명박 정부부터 시민사회의 층위에서 경제적 압박이 본격적으로 가시화되었다. 그리고 '국가'의 힘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 현시되었다. 정권은 엄청난 규모의 촛불집회를 큰 어려움없이 제압했고, 북한과의 긴장관계가 커지면서 국가는 점차 비판할 수 없는 성역이 되어갔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이드와 같았다면, 국가권력과 경제라는 초자아가 이드를 제압했다. 셋째, (자유주의적 진보와 결합한) 포스트모던 자체가 일종의 지리멸렬한 상태에 빠져들었다. 그것은 (소수의 진지한 연구자를 제외하고) 인식적인 층위에서 동어반복적 클리셰를 생산하는 것 이상의 역할을 좀처럼 해내지 못했고, 운동의 차원에서는 시민사회적 영역을 해방하기보다 해체하는 위험을 보여주었다; 옳은 것도 없고 따를 것도 없다면, 그 힘든 저항을 왜 굳이 고집해야 하나, 저항을 해야 한다는 메시지 자체가 권위주의적 독단이 아니냐는 '상대주의적 독단론'이 포스트모던을 자신의 무기로 삼아 정치와 사회 양자를 무너트렸다. 포스트모던적 상대주의는 신자유주의적 개인 이론과 아주 잘 결합했고 진보-먹물들은 자기 자신들이 휘두르던 무기에 흠씬 두들겨맞은 셈이 되었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이유는 왜 포스트모던이 사라졌는가를 설명할 수는 있지만 왜 그것이 그토록 빠르게 사라졌는가는 말해주지 않는다. 확실한 사실은 2010년에 접어들 즈음 더 이상 포스트모던은 새롭지도, 희망차지도 않았고 우리들의 언어로부터 빠르게 잊혀졌다는 것이다. 분명 포스트모던의 자식들이 우리의 삶을 구성하고 있었지만 우리는 그것을 이전과 같은 이름으로 부를 수 없었다. 2009년 정도부터 점차적으로 전사회적 반동이 가시화되었고, 자유주의적 진보와 사민주의자들은 확실히 이전과 같은 영향력을 회복하지 못했다--그런 점에서 포스트모던의 망각은 한국 자유주의 진보의 쇠퇴와 완전히 구별되기는 어렵다. 포스트모던이 (물론 구좌파들은 이걸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진보진영에게 남은 20세기 최후의 거대담론이었다면, 2010년대부터 이러한 거대담론은 부서졌고 다시는 지배적인 위치를 꿈꿀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포스트모던을 위해 남겨진 피난처는 냉소주의였다. 적어도 그럭저럭 부유한 소비자로서 살아갈 수 있었던 중상층계급은 아이러니적 태도에 머무를 수 있었지만 그와 같은 물질적 토대를 갖추지 못한 사람은 분노하거나, 좌절하거나였다; 포스트모던은 우파적 반지성주의의 구성물이 되거나, 소비주의적 코드와 결합하거나(그나마 곧 잊혀졌다), 지적인 담론을 끌어안을 수 있는 소수계급의 전유물로만 남았다.


이와 같은 여정을 지난 뒤에 리오타르를 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한국의 포스트모던 수용을 되짚어 사고한다는 필수적인 작업--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를 도맡아 하는 이는 잘 눈에 띄지 않는다...우리는 우리 자신의 정신적 역사를 반추하는데 놀랍도록 무능력하고 무책임하다--이외에 무엇이 남을까? 오늘날의 독자들이 먼저 던질 수 있는 질문은, 리오타르 본인은 어디에 서 있었는가이다. 그는 소비에트 및 공산당을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급진적 좌파로 남아있고자 했던 '사회주의냐 야만이냐' 그룹의 편집자였다. 아직 신자유주의적 통치가 본격적으로 도래하기 전인 1979년의 텍스트에서 리오타르는 20세기 중후반의 사회이론들을 검토한다. 한편으로는 사회를 하나의 구성체 또는 체계로 간주하는 계보가 있고(수년 전부터 한국에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한 니클라스 루만과 그 스승 탤컷 파슨스가 언급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를 갈등하는 두 이질적인 세력 간의 대결구도로 파악하는 계보가 있다(자본가와 프롤레타리아의 대립을 상정하는 맑스주의 사회이론). 양자 중 한 쪽을 택하는 대신 그는 사회가 새로운 전환기에 있다고 상정하는 방향을 택한다. "사회의 컴퓨터화"라는 키워드가 핵심이다. 지식을 보존하고 유통하고 생산하는 물질적 장치가 기계화과정을 거치면서 급속도로 변모한다면...과 같은 일련의 미래 전망이 있고, 리오타르는 지식의 생산/처리/확정과정과 같은 것을 바라보는 메타적인 층위에 서기로 한다(물론 지식과 권력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따라서 그의 작업이 정치적인 의도를 탈각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의 독자들이 자동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 앞에 대면한다. 우리 시대/사회의 지식의 조건은 무엇인가? 지식은 어떻게 형성되고 작동하는가? 우리는 리오타르가 예측한 범위 안에 있는가, 아니면 그의 전망이 완전히 엇나갔는가(이는 그의 '포스트모던적' 당위제시의 타당성 검토와는 별개로 행해져야 한다)? 리오타르의 텍스트를 끝까지 읽지 않은 상황에서 나는 어떠한 유의미한 답변을 제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있다면, 적어도 사물의 질서에 대한 일관된 설명 혹은 도덕으로서의 거대담론의 붕괴 이후를 살아가는 세계에서, 그 상황에서조차도 여전히 앎과 참에 대한 문제는 첨예하게 남아있다는 사실이다--한편으로 반지성적 팩트숭배자들과의 대화라는 과제가 주어졌고, 다른 한편으로 사회적 지식을 생산하는 장소로서의   대학의 위상 자체가 급격히 후퇴했다. 우리는 지금도 계속해서 지식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지식을 어떻게 '교환'할지 또 무엇을 '생산'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단지 그것이 오늘날의 중요한 과제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리오타르 읽기가 여기에 어떤 답을 제공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언제나 치열하게 몸부림쳤던 사람들의 행보를 복기하는 일은 무언가 남는 것이 있다. 책의 수면 아래로 천천히 몸을 담그면서, 나는 이 책의 입자 하나하나가 적어도 그 표층에서는 허투루 쓰이지 않았음을 느낀다. 더 아래로, 더 깊이 내려갔다 다시 솟구쳐 올라와  머리를 내밀고 숨을 쉴 때 내게 무언가 전진이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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