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빌의 팔뚝: 『빌리 버드』(Billy Budd) 또는 남근의 처형

Reading 2015.05.01 00:38

수업 발제.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측면에서 분석글을 써본 것은 처음이었다. 정신분석과 알레고리 독해라는 입장에서 글을 쓰려니 역사와 이론적/철학적 논증에 더 익숙한 내 사고방식의 '논증엄밀성' 척도를 조금 낮춰야 했다. 결론적으로 막가자는 심정으로 킬킬거리면서 매우 유쾌하게 글을 썼는데--정신분석적 독해자들이 왜 그런 글을 쓰는지 조금은 알 법도 했다...약간 뽕 맞은(?) 기분으로 죽죽 논리를 만들어낸다--수업에서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이걸 발전시켜 기말페이퍼를 써 볼까 하는 생각을 조금 하고 있다; 그때는 세즈윅을 여기에서 다룬 것 보다 좀 더 진지하게 상대해야 할 터이다.




멜빌의 팔뚝: 『빌리 버드』(Billy Budd) 또는 남근의 처형


1. 빌리 버드와 덕성(virtue)


소설의 등장인물 빌리 버드가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이래 전형적인 된 특정한 인간형의 이상을 과도할 정도로 체현한다는 사실이 먼저 눈에 띈다. 그 이상이란 바로 덕성을 갖춘 ‘자연인’이다. 바버라 존슨(Barbara Johnson)과 이브 코소프스키 세즈윅(Eve Kosofsky Sedgwick) 모두 빌리 버드에게서 “자연”("nature")이라는 키워드를 주목하지만, 조금 더 역사적인 입장을 취한다면 소설에서 강조되는 “자연”은 덕성의 인간을 표현하는 한 가지 속성에 가깝다. 『에밀 또는 교육론』(Émile, ou de l'éducation)과 같은 텍스트에서 루소는 타락하기 이전의 인간 혹은 자연을 이상적인 지향점으로 제시하고 그와 같은 자연에 근접할 때만 인간의 미덕/덕성이 함양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와 같이 자연과 덕성을 결합시키는 담론은, 예컨대 18세기 영국의 로맨스 소설들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듯, 다양한 변화를 거치면서도 지속되었다. 이는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Robespierre)의 “덕성의 공화국”("Republic of Virtue")과 같은 구호가 보여주듯 프랑스 혁명기까지 서유럽의 담론장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빌리 버드가 본래 토머스 페인(Thomas Paine)이 혁명을 지지하기 위해 집필한 책 『인간의 권리』(Rights of Man)에서 이름을 딴 배에 소속되었던 것도(297) 그를 덕성의 전통과 연결시키기 위해 의식적으로 행해진 알레고리적 배치라고 할 수 있다.

빌리 버드는 “힘과 아름다움”("strength and beauty" 292)을 동시에 갖추었으며, 입을 열지 않아도 주변의 사람들을 달래는 덕성이 풍겨져 나오고("a virtue went out of him, sugaring the sour ones" 295) “모두가 그를 사랑하여 [...] 누구나 빌리 버드를 위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행복한 가족을 이루고 있다”("they all love him .... Anybody will do anything for Billy Budd" 296). 신체적 힘, 아름다움, 그리고 공동체를 구성하는 역량에 이르기까지 빌리 버드가 문자 그대로 ‘덕성의 인간’이다. 그의 덕성에는 자연 그대로의 순수함 혹은 거의 ‘원시적’이라고 부를만한 수사들이 결합되어 있다. “그는 예절을 교육받은 적이 없었으며”("that decorum he had never instructed" 297) “자연 그대로의 표정의 순수함”("purity of natural complexion" 299)을 잃지 않은 존재로 “촌에서 자라 옮겨 심어진 시골풍의 아름다움”("a rustic beauty transplanted from the provinces") 그 자체다. 그의 자연인으로서의 성격과 이어지는 특징으로, “그는 글을 모르는”("He was illiterate" 301) “순진무구함”(innocence)의 결정체다―의심할 줄 모르기에 타인의 말과 행위의 속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중요한 순간에는 극심한 말더듬이가 된다는 사실까지 감안한다면1) 빌리 버드는 사실상 언어를 통해서는 어떠한 소통도 나눌 수 없는 “야만인”("barbarian")인 셈이다. 그에게는 항상 표층의, 혹은 제스처와 같이 ‘투명한’ 형태의 의사소통만이 가능하기에2) “문제의 지식의 사과”("the questionable apple of knowledge")를 따먹을, 혹은 ‘타락할’ 가능성은 없다.

그렇다면 절대 타락하지 않는 야만인 혹은 덕성의 인간이라는 개념에서부터 출발할 때, 어떻게 『빌리 버드』를 젠더 혹은 섹슈얼리티와 결부지어 읽을 수 있을까? 존슨이 인용하는 정신분석적 비평들은 여기에서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순수함과 같은 규범은 실제로는 “수동성”("passivity")이나 “힘없음, 약함, 무력함”("powerlessness, weakness, helplessness")과 같은 상태를 전도시켜 치장하는 개념에 가깝다(578-79). 존슨이 정신분석적 비평으로부터 끌어오는 전제와 같이 덕성-자연-순진무구함과 같은 개념들의 연결체를 일종의 자기 억압과 같이 이해한다면, 자연스럽게 그러한 억압이 감추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억압된 것이 어떻게 표출되고 또 귀환하는지를 묻게 된다. 물론 『빌리 버드』는 억압-표출이라는 키워드로 파악될 수 있는 구도를 선명하게 품고 있다. 선원들을 감찰하는 역할을 맡은 선임 위병 하사관(master-at-arms) 존 클래거트(John Claggart)에게로 시선을 돌려보자.



2. 존 클래거트, 유혹과 고발


존슨(577)과 세즈윅(92)이 동시에 지적하듯, 클래거트는 (최소한 ‘잠재적’ 층위에서나마) 동성애자로 간주되어왔다. “그의 손은 힘든 일을 도맡아하기에는 너무 작고 맵시 있었으며”("His hand was too small and shapely to have been accustomed to hard toil" 313) 그리스의 메달에 새겨졌을 법한 얼굴에는 “수염이 없다”("beardless"). 그를 묘사하기 위해 “체질이나 핏속에 무언가 결함이나 비정상적인 것”("something defective or abnormal in the constitution and blood" 314)이 있다는 식의 우회적인 표현이 반복된다. “악한 본성의 광기”("the mania of an evil nature" 326), “천성에서부터 타락”("a depravity according to nature")과 같은 관습적인 표현에서 결국 멜빌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클래거트가 빌리 버드에게 특별한, 허용될 수 없는 ‘사악한’ 감정을 품고 있다는 사실이다―물론 그 감정은 동성애다. 그는 빌리의 순수함에서 “미적인 차원에서 매력을 느끼는”("in an aesthetic way he saw the charm of it" 328) 인물로 빌리를 “달콤하고 기분 좋은 젊은 친구”("the sweet and pleasant young fellow" 320)라 부르며, 특별히 그를 부를 때만 “달콤한 목소리”("a sweet voice" 321)를 낸다. 선원들 간의 동성애가 언어화되지조차 못하는 상황에서 덕성의 인간이자 순진무구함의 화신인 빌리 버드는 클래거트의 신호와 그것에 함축된 감정을 이해하지 못한다. 마치 버틀러(Judith Butler)의 우울증적 주체를 예비해 만들어진 인물이기라도 한 것처럼,3) 일종의 동성애 금제와 마주한 클래거트는 “우울함”("melancholy" 338)과 “슬픔”("sorrows")을 느낀다. 서술자는 클래거트의 심리를 “부러움과 반감”("envy and antipathy" 327)라고 설명하는데, 우리는 이를 성취될 수 없는 애정에 따른 반작용과 같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빌리 버드를 향한) 클래거트의 마음을 애정과 원망이라는 양가적 구도로 이해한다면, 클래거트가 비어 선장(Captain Vere)에게 빌리를 반역죄로 고발하는 상황 또한 마찬가지로 두 가지 층위에서 해석할 수 있다. 그는 비어에게 빌리가 외면과는 달리 “음흉한 녀석”("a deep one" 344)이며, “불그레한 꽃 아래 함정이 숨겨져 있다”("A mantrap may be under the ruddy-tipped daisies" 345)고 말한다. 실제로 겉과 속이 다른 존재는 빌리가 아니라 (자신의 성적 지향을 감춘, 그러나 빌리를 유혹하는) 클래거트 자신인데, 이때 그는 마치 배의 “아버지”("father")이자 “법”("law")을 대표하는 비어 선장에게 찾아가 자기 자신의 본질을 타인에게 덮어씌움으로써 스스로의 혐의를 벗고 ‘정상적’ 질서에 투신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로버트 K. 마틴(Robert K. Martin)이 말하듯 클래거트의 고발행위는 “빌리를 도발하여 결과적으로 자신이 빌리에게 강간당하기를 바라는 욕망”("a desire to provoke Billy, so that he (Claggart) can be raped by Billy" Sedgwick 104에서 재인용)의 산물이기도 하다. 이러한 욕망은, 마찬가지로 마틴이 지적한 바와 같이, 클래거트가 빌리 버드의 가격을 맞고 사망함으로써 충족된다.

이 펀치 장면이야말로 『빌리 버드』의 핵심 중 하나다. 먼저 지적할 것이 있다면, 이를 “멜빌의 주먹”("Melville's Fist")이라고 명명한 존슨의 선택은 이 장면의 요점을 드러내기보다 오히려 가려버린다는 사실이다. 서술자가 직접 “오른팔”("his right arm" 350)이라고 적고 있는 것을 좇아 우리는 이 장면에서 강렬한 주먹이 아니라 펀치처럼 쭉 뻗은 팔뚝의 이미지를 떠올려야 한다―웅크린 뱀이 먹이를 잡아채기 위해 갑자기 몸을 일자로 곧추 세우듯, 힘이 들어가지 않은 채로 내려져 (또는 굽혀져) 있던 팔의 근육에 일순간 긴장이 부과되어 팽팽하게 일자로 펴지면서 클래거트의 앞이마에 꽂힌다. 이 대목은 세즈윅의 표현을 빌리면 “남근화된 신체”("the phallicized body" 125)를,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남근화된 신체를 통해 재현된 남성 간의 강간으로 읽힐 수 있다. ‘꼿꼿하게 서 있음’("erecting himself as in virtuous self-assertion" 346)이 강조되던 클래거트의 몸은 빌리 버드의 팔뚝에 ‘관통당한’ 뒤 “꼿꼿했던 몸이 기울어지면서”("tilted from erectness" 350) “코와 귀로 진한 검은 피를 흘린다”("thick black blood was now oozing from nostril and ear" 351), 죽은 클래거트의 몸은 흐물흐물하게("flexibly" 350), 만지는 손길에 따라 움직이게("inertly") 되어버려 “마치 죽은 뱀을 움직이는 것 같았다”("It was like handling a dead snake")―당연하지만 뱀 또한 남근을 표상하는 전통적인 이미지에 속한다. 여기에서 삽입/관통(당함), (당하는 측의) 오르가슴-사정- 남근 긴장의 완화와 같이 남성 간 강간 판타지의 전형적인 요소들을 찾아볼 수 있다(이 구도는 덕성의 체계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성적 쾌락-수동성·복종-타락의 연쇄와도 이어져 있다; 이러한 논리에서 삽입‘당한’ 남성은 수동적인 위치에 놓일 뿐만 아니라 쾌락을 통해 동성애로 ‘타락’한다).4) 클래거트 자신의 죽음을 초래한 ‘도발’은 빌리 버드에게 덕성 혹은 순진무구함과 같은 규범으로 억압되어 있던 동성애적 욕망을 일깨우는 유혹이기도 하다. 쭉 뻗은 근육질의 팔뚝은 (발기된) 남근화된 신체의 등가물로 억압된 동성 간의 욕망을 충족시킨다. 우리는 빌리 버드에게 이러한 각성/표출이 처음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가 ‘인간의 권리’ 호에서 근무하던 시절 한 동료가 그에게 집적거렸고, 빌리의 팔뚝을 겪은 뒤 “그 붉은 구레나룻은 지금 정말로 빌리를 사랑하게”("the Red Whiskers now really loves Billy" 296) 되지 않았던가.



3. 비어 선장과 처형


‘아버지의 법’을 대리한다고 할 수 있는 비어 선장이 결국 빌리 버드를 처형하는 결말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21절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점은 그가 빌리 버드를 상관살해의 죄목으로 재판에 부치는 과정이 일견 군율을 엄격히 적용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클래거트가 제기한 반역혐의를 포함해 자신이 처리하기 곤란한 모든 일들을 은폐하는 방향으로 향한다는 사실이다. 그가 “법적인 관점”("in a legal view" 354)이나 행위의 결과만을 보자고 주장할 때("confine its attention to the blow's consequence" 358), 이는 세즈윅이 해석하는 “보다 상위의 법을 대표하는 [...] 전시법”("marial duty ... represents a higher law" 113)에의 충성이 아니며 오히려 사태의 본질을 부인하고 그로부터 회피하는 것에 가깝다. 그는 직접 사건을 맡는 대신 재판을 진행할 다른 이들을 선정하고("he electing the individuals composing it" 355) 자신은 평결에 간접적인 형식으로만 개입한다. 비어가 이 소설에서 누구보다도 가장 많은 이야기를 할 때(361-64), 그리고 빌리 버드를 침묵시킬 때 사건의 진짜 쟁점이 무엇인가는 잊힌다. 이는 비어가 빌리 버드가 표방하는 것과 클래거트가 표방하는 것을 “복속시킨다”(subordinates" 589)는 존슨의 주장과 달리 오히려 그 혹은 그가 표방하는 법이 사건의 한 가운데에 묻혀 있는 것, 다시 말해 남성 동성애의 문제를 다룰 능력이 없음을 보여준다. 비어가 대변하는 ‘아버지의 법’은, 마치 동성애자 자식의 성향을 부인하고 ‘교정기관’에 그를 가둬버리는 부모처럼, 동성애를 부인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공식적으로’ 처벌하기 위해 발화할 수는 없다.

빌리 버드의 죽음으로 일단은 성공적으로 억압/부인된 것처럼 보였던 동성애의 욕망은 결국 비어 선장 본인에게 되돌아온다. 그는 (종교라는 ‘법’을 무시하는) ‘무신론자’("Athée" 381) 호와의 전투에서 팔뚝, 뱀과 함께 또 하나의 남근 기표인 길고 매끈한 머스킷 총의 탄환("musket ball")에 ‘관통’당한다. 그가 죽음을 맞이하면서 마지막으로 남기는 말은 “빌리 버드”인데, “이 말이 후회의 억양이 아니었다”("these were not the accents of remorse" 382)는 것만은 확실하다. 세즈윅은 그것이 빌리 버드 혹은 남근적 신체의 처형에서는 억압되었던 “경련의 움직임”("spasmodic movement" 127)이 실현된 게 아니냐는 암시를 남기는데, 만일 그렇다면 비어 선장 혹은 ‘아버지’ 역시도 오르가슴을 통해 전염되는―빌리를 사랑하게 된 선원처럼―남성 동성애의 연쇄 속으로 끌려 들어온 것인지 떠올려볼 수 있겠다.


<참고문헌>

Johnson, Barbara. “Melville’s Fist: The Execution of Billy Budd.” Studies in Romanticism 18 (1979): 567-99.

Melville, Herman. Billy Budd and Other Stories. ed. by Frederick Busch. NY: Penguin Books, 1986.

Sedgwick, Eve Kosofsky. Epistemology of the Closet. Berkeley: U of California P, 1990.


1) 피터 브룩스의 고전적인 연구서 『멜로드라마적 상상력』(Melodramatic Imagination)을 참고한다면, 침묵 및 제스처 자체가 덕성을 (과잉되게) 표현하는 하나의 주요한 양식이기도 하다는 점을 상기하자.

2) ‘투명성’은, 장 스타로뱅스키(Jean Starobinski)가 지적하듯, 루소적 덕성의 핵심개념이기도 하다. 『장 자크 루소: 투명성과 장애물』(Jean-Jacques Rousseau, La Transparence et L'obstacle) 참고.

3) 『젠더 트러블』(Gender Trouble), 특히 2장 3절 참조(73-84).

4) 미셸 푸코는 그리스의 남성 간 동성애에서 능동성/수동성의 문제가 얼마나 중요했는지 언급한다. 『성의 역사』 2권 및 3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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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소년의 노래 2015.05.01 15:50 Modify/Delete Reply

    정신분석 얘기 들으면 늘 생각나는 글

    http://freecracy.egloos.com/5405185(이런 꿀잼 키배를 얼마 전에서야 알았다는 사실...ㅠㅠ)

    나중에 begray님께서 정신분석학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글 하나 써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문제는 거의 대부분 '실증주의(ex 과학)vs주관주의(ex 인문학)' 양상으로 흘러가는데 도저히 접점이 나오질 않더군요. 예상컨대 begray님은 조금 비판적인 입장에 서지 않을까 싶습니다. 쨌든 전 라캉파에 한 표!

    • BeGray 2015.05.01 16:34 신고 Modify/Delete

      저는 저 논쟁에 참여하진 않았는데 흥미롭게 관전했었죠. 제 입장은 저 논쟁에서 아이추판다를 비롯한 '과학주의자'들은 대체로 학의 역사에 대해 무지했으며 결과적으로 무익한 논의를 제출했다는 것입니다. 조금 심술궂게 말하면 자기 전공 밖에 모르는 사람이 다른 필드에 와서 엉뚱한 소리를 하는 건데--지금은 부디 그들이 그 한심한 수준에서 벗어났기를 바랍니다--, 그 비판의 내용조차도 클리셰라...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면, 저 논쟁은 사람이 자기가 전혀 공부하지 않은 내용에 대해 언술할 때 져야 하는 책임을 전혀 지지않고 말하는 전형적인 사례를 보여준다는 거죠.


      애초에 20세기 초반 탄생한 정신분석의 목표 자체가 프로이트가 누차 말하고 있는 것처럼 당시의 생리학에 의해 실증될 수 없는 (저의 용어로) '존재론적인' 프로세스에 대한 해석을 제공하는 것이었습니다. 프로이트는 한편으로 생리학적 훈련을 받았고, 다른 한편으로 살페트리에르의 샤르코가 대변하는 정신의학 전통의 영향을 받았는데 대표적으로 히스테리를 포함해 당시 양자의 논의로 충분히 설명될 수 없는 현상들을 마주합니다. 이를 풀어내기 위해 프로이트는 인간의식의 '내적 논리'를 설명하는 해석학적 가설을 형성했고, 그 가설의 설명력이 폭발적인 영향력을 얻어 정신분석이 학적 범위 안에 들어오게 되는거죠. 따라서 정신분석적 논의의 타당성은, 그것이 생리학적 사실들과 명백히 충돌하지 않는 한--생리학적 혹은 경험과학적 진술들은 정신분석이 다루는 대상의 외부 경계선을 그려줄 수는 있어도 그 내부의 논리를 검토할 능력이 없습니다--, 생리학적 논증도구로 검토될 수 없습니다; 정신분석이 생리학적 진술들을 (그것으로부터 일종의 '상징적인' 뉘앙스를 읽어내는 걸 제외하고는) 직접적으로 다룰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의 의미에서 말입니다.

      라캉의 작업이 의도한 요지는 20세기 중후반 프랑스 구조주의 운동의 맥락과 연결시킬 때 좀 더 분명해집니다. 레비-스트로스를 대표적으로 당시의 프랑스 인문사회학자들 중에서는 사회의 여러 영역이 (칸트적인 의미에서) 일종의 초월론적인 작동방식을 갖는다는 믿음 하에 개별적인 경험자료의 축적을 넘어선 모델링을 제출하는 작업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라캉 역시 이런 사람들 중 한 명이었고, 그는 프로이트 작업의 핵심이 경험자료가 직접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층위를 해석/설명하는 논리를 만들어낸다고 믿고 "보다 프로이트적으로" 사고하길 요구하는 거죠; 프로이트가 수사적 차원에서나마 계속해서 생리학의 영역을 존중했다면, 라캉은 프로이트를 급진화함으로써 애초에 생리학적 영역과의 단절을 주장합니다. 요컨대 인간 의식의 작동방식은 생리학이 아니라 (생리학이 논의할 수 없는) 사회-문화적인 체계로서 설명되어야 하며, 정신분석 역시 그러한 틀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가 생물학적인 남성의 음경penis을 사회-문화적인 층위에서, 혹은 라캉 자신의 용어를 빌어 "상징적인" 층위에서 기능하는 남근phallus으로 대체하는 사례는 이 때문입니다.


      프로이트/라캉과 같은 이들이 문화적인 텍스트를 굉장히 많이 다루었고, 그들의 해석이 상당히 설득력 있었기 때문에 문학연구에서는 정신분석을 문학텍스트를 분석하는 하나의 방법론으로 받아들입니다. 이 과정에는 심리학이나 다른 학문분야에서 초래되었던 식의 저항이 비교적 적었는데, 이는 문학연구의 핵심이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에 있었고 해석과정은 애초에 경험적/실증적 분석이 극도로 제한적인 영향을 발휘할 수 있었기 때문이죠. 어떠한 해석이 제출되었을 때 초역사적인--혹은 그렇게 믿어지는--기준이 아니라 동료 연구자들의 검증에 맡겨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문학연구의 본질적인 성격이니까요(물론 여기에 반발하는 연구자들도 있고, 그에 따른 전통도 있습니다); 이건 문학만 갖는 게 아니라 일부 철학전통 및 역사학 전통에서도 발견되는 특성이기도 합니다. 이택광 선생 등이 위치한 문화연구는 본래 그 기원에서 문학연구의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았고, 지금도 문학연구와 상당한 연계를 갖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문화의 분석에 정신분석이 들어가 있는 거죠.


      한국의 자칭 '과학주의자'들, 혹은 노골적으로 실증주의를 천박하게 전유하는 사람들의 논증은 사실 그 전제에서부터 문제가 있습니다. 냉정하게 말하면 그들은 (대표적으로 포퍼가 그러했듯) 자신들에게 친숙한 지극히 국지적인 영역에서 일반과학의 원리를 도출/설정한 뒤, 그걸 자의적으로 다른 학문분과에 요구합니다. 그들이 자기 학문분야에서 훈련받은 것보다 딱히 적게 훈련받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그리고 그들보다 일상에서 딱히 비합리적으로 살고 있지도 않은 저로서는 그게 일종의 지적 자위행위랑 뭐가 다른지 잘 모르겠습니다.

  2. 소년의 노래 2015.05.01 21:27 Modify/Delete Reply

    어이쿠! 너무 성실한 답변 몸서리치게 감사합니다........만 가급적 이런 긴 양질의 글은 본문글로 작성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래야 트랙백도 할 수 있고 sns에 공유도 가능하니까요. 티스토리가 진입 장벽이 높은 사이트라 잠잠한 편인데 이글루스처럼 댓글 활동이 활발한 곳이였다면 이곳에서 관련 논쟁이 보다 활발하게 벌어질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어요.(그 외 아까운 떡밥들이 너무 많아요. 훌륭한 글들이 있었는데 트위터에 공유되기만 할 뿐 실질적인 논쟁은 거의 없어서 아쉽네요.)특히나 요즘처럼 유물론적 세계관이 극대화된 사회일수록 세계의 추상성/비합리성을 이해하고 분석하려 애쓰는, 계량화/수치화가 아닌 윤리와 주체의 문제로 인식하려 노력하는 사람들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타국이라고 다르겠습니까만은 특히나 우리나라는 이러한 부류들이 너무 적습니다. 모두가 하나같이 확고한 실증주의 앞에 순한 양이 되어 고작 '우리에게는 우리만의 가치가 있다!'고 항변하는 게 전부인 안타깝고 답답한 상황들이 자주 반복되는 것도 지긋지긋해요. 다소 오류가 있을 수 있어도, 다소 주관적인 견해가 깊숙이 개입될 여지가 있더라도, 그것이 보다 더 나은 보편의 윤리를 확보해나갈 수만 있다면 기꺼이 그러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근데 써놓고 보니 본문과 큰 관련 없는 글을 제가 이렇게....글 어지럽혀 죄송....;;

    • BeGray 2015.05.02 11:28 신고 Modify/Delete

      괜찮습니다 ㅎㅎㅎ 원래 이런 대화를 위해 댓글란이 존재하는 거니까요.

      사실 제가 블로그에 본문으로 올리는 글을 봐오셨으니 아시겠지만, 이 정도 길이에 이 정도로 간략한 설명만을 한 내용을 굳이 본문으로 쓸 이유를 못 느껴서...ㅎ 필요하시면 긁어가셔도 상관 없습니다.

      2010년대 초반 이후로 온라인을 통한 인문사회적 논쟁 자체가 매우 줄어들었다고 느끼는데, 이글루스는 아직 괜찮게 운영하는 사람들이 좀 남아있는 편인가요? / 제가 블로그를 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제 관심분야에서 읽을만한 글이 온라인 공간에서 그닥 잘 생산되고 있지 않아서입니다. 트위터는 논쟁을 한다기보다는 감각적인 표현을 주고받는 곳에 가까워보였고요. 사실 그래서 논쟁이나 접근성을 크게 고려하진 않았고(이런 주제와 이런 스타일로 글을 쓰는데 13개월만에 방문자가 45000명이 넘은 건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일입니다)--그랬으면 네이버 블로그를 썼겠죠--티스토리를 쓰게된 건 (네이버의 조잡한 포맷이 아닌) 최대한 단순하고 직관적인 디자인의, 무료 블로그를 사용할 수 있는 기회가 블로그를 시작하려고 했던 바로 그 때 생겼기 때문입니다. 여튼 온라인에서 제대로 된 논쟁을 할 역량을 가진 사람들이 나오게 된다면 (그럴만한 글이 있다고 했을 때) 적당히 발굴되지 않을까 싶습니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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