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치볼드.『단순한 이야기』(A Simple Story): 해석과 입증
Reading 2015. 5. 1. 00:27수업 response로 짧게 쓴 글. 18세기의 영국 로맨스에서 19세기의 제인 오스틴으로 넘어가는 과정에 엘리자베스 인치볼드(Elizabeth Inchbald)의 텍스트를 위치시킬 수 있겠다. 루만은 이럴 때 정말 유용하다. 루만, 푸코, 세즈윅 정도를 끌어들여 이야기를 좀 더 키워 기말 페이퍼를 쓸까 고민 중.
『단순한 이야기』(A Simple Story): 해석과 입증
『단순한 이야기』는 사실상 별개나 다름없는 두 편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이중 서사 전개의 기술적인 측면에서 보다 흥미를 끄는 첫 번째 이야기는 크게 두 개의 플롯으로 읽을 수 있다. 전반부의 초점이 도리포스(Dorriforth)의 피후견인 밀너 양(Miss Milner)이 누구에게 연심을 품고 있는지 밝혀지는 과정에 놓여 있다면, 후반부의 과제는 도리포스 또한 그녀를 사랑한다는 사실이 이미 드러난 상황에서 그의 애정이 어느 정도인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각각 해석과 입증의 서사라고 부를 수 있겠다. 전자의 서사에서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도리포스에 이입하여 밀너 양의 진심을 해석하는 과정에 동참한다. 자신과 상이한 배경을 지닌 밀너 양을 피후견인으로 받아들인 도리포스가 직면한 최대의 문제는 그가 그녀의 감정이 어떤 성격을 띠고 있는지를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I remain wholly unacquainted with your sentiments" 55). 피후견인의 품행을 올바르게 지도하고 그녀를 좋은 남편에게 빨리 인도할 의무감을 느끼는 후견인은 그녀의 예기치 못한 행동에 계속해서 혼란을 느낀다. 이는 그가 계속해서 그녀에게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길”("to reveal these sentiments" 83) 요구할 뿐만 아니라 그녀의 정념을 이해하기 위해 “가장 사소한 말들까지도 해석”("to interpret the slightest words")하기 위해 고민하기까지 하는 상황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해석과정이 결국 밀너 양과 도리포스가 서로가 서로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까지 이르렀을 때 해석의 서사는 갑작스럽게 입증의 서사로 전환된다. 해석의 대상이었던 밀너 양은 “나는 그[도리포스]를 시험할 거예요”("I'll put him to the proof" 148), “나는 그가 자신의 [밀너 양을 향한] 사랑에 굴복하도록 만들 거예요”("I will force him still to yield to his love")라고 선언한다. 이는 도리포스가 자신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이 얼마나 진실되고 강렬한지를 시험해보겠다는 이야기로, 여기에서 밀너 양은 도리포스의 정념의 크기를 입증하도록 요구하는 주체가 된다.
이와 같은 해석과 입증의 서사에서 눈여겨봐야 할 지점 중 하나는 해석과 입증의 대상이 이전까지의 로맨스에서 규범적 덕목으로 기능했던 덕성이나 선행과 같은 개념으로부터 정념, 구체적으로 “열정”("passion")으로 옮겨갔다는 사실이다. 『단순한 이야기』가 전제하는 로맨스의 구도에서 인물들은 자신의 도덕적 탁월함을 입증하는 대신 진실된 사랑의 크기를 보여주어야 한다―예를 들어 전체적인 로맨스의 얼개가 결과적으로 두 남녀의 순수함과 덕성을 확인하는 구도로 짜여진 『이블라이나』(Evelina)와 비교할 때 인치볼드(Elizabeth Inchbald) 소설의 성격은 좀 더 분명해진다. 저자가 직접 “진정한 질투심을 느껴본 적이 있는 사람은 드문데, 왜냐하면 진정한 사랑을 느껴본 사람이 드물기 때문이다”("There are but few persons who ever felt the real passion of jealousy, because few have felt the real passion of love" 119)라고 말하는 부분은 이러한 의미론적(semantic) 전환을 예시하는 가장 흥미로운 대목이기도 하다. 정념("passion")을 인간행위의 근원적인 동력으로 제시한 홉스(Thomas Hobbes)에게서 분명히 드러나듯 이전까지 정념은 그 자체로는 참과 거짓을 구별할 수 없는 가치중립적인 에너지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저자는 정념에 “진짜”("real")와 같은 형용사를 덧붙임으로써 참된 감정과 거짓된 감정의 분할을 도입하고 나아가 참된 감정에 그 자체로 가치를 부여하는 의미체계가 등장했음을 보여준다.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이 “열정으로서의 사랑”("Liebe als passion")이라고 불렀던 논리가 등장한 것이다. 감정의 지배("my passions now dictate" 131)와 그에 맞서는 이성의 투쟁("my reason shall combat to the last")라는 전통적인 구도 위에서 사고하려는 도리포스가 자신의 열정을 인정하고 밀너 양과 결혼하는 결론은 정념을 새롭게 정의하는 사고방식이 승리를 거두었음을 의미한다―그러한 사고방식과 가장 대립적인 듯 보였던 샌드포드(Sandford)가 급작스럽게 해결사로 등장한다는 사실 또한 의미심장하다.
‘진정한 정념’에 기반한 가치체계를 염두에 두었을 때 우리는 『단순한 이야기』 전면(적어도 2권까지는)에 제시된 강렬한 감정들을 조금 달리 이해할 수 있다. 사랑과 질투의 열정 못지않게 이 소설의 갈등구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차지하는 정념 중 하나는 분노(rage)다. 단적으로 밀너 양에게 추근대는 프레더릭 경(Lord Frederick)을 향한 “도리포스의 목소리는 노기를 띠고 있으며”("The sound of Dorriforth's voice in ager" 61), 프레더릭은 다시 도리포스를 향해 “사랑의 분노, 또는 도리포스를 향한 분노”("the rage of love, or to rage against Dorriforth")를 표출한다. 분노와 혐오가 극에 달해 프레더릭의 얼굴을 후려쳐 그를 쫓아낸 도리포스는 곧바로 “내가 나 자신으로부터 떨어져 나왔다”("I have departed from myself" 62)고 자책한다. 물론 이러한 행위는 도리포스의 자책과 별개로 밀너 양의 후견인이 대한 감정을 확인하는 계기가 됨으로써 서사 내에서 긍정적인 가치를 부여받는다. ‘열정적’(passionate)이 정확히 이성적으로 스스로를 통제하는 능력을 상실하고 정념에 따라 행위하는 상태를 가리킨다면, 『단순한 이야기』의 첫 이야기는 도리포스가 점차 열정적인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서사이기도 하다. 긴 이별을 앞두고 밤을 샌 도리포스(엘름우드 경Lord Elmwood)는 “극심하게 몸을 떨고, 안색이 창백해졌”("He trembled extremely, and looked pale" 161)을 뿐만 아니라 직접적으로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정념에 휘말려 있다고("What passion thus agitated Lord Elmwood at this crisis, it is hard to define" 162) 묘사된다. 그리고 이야기는 도리포스가 이처럼 더 많이 분노하고 더 많이 열정적이 될 때에만 로맨스의 완성―결혼―에 도달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단순한 이야기』는 열정적인 인간이 스스로를 다스려가는 고전적 성숙의 과정을 뒤집어 스스로를 이성과 덕성에 부합하게 다스리던 인간이 열정적이 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그리고 그 결과를 로맨스의 성취를 통해 보상한다. 이야기 내에서 분노와 같은 강렬한 감정의 분출은 이제 인물의 진정성을, 참됨을 드러내는 하나의 기제로서의 위상을 부여받는다. 분노의 범람은 부분적으로 그러한 맥락 하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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