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툰과 도시하층계급의 삶: 윤필의 작품들
Reading 2015. 4. 26. 04:15평소에 자주 이야기하는 주제는 아닌데, 나는 웹툰을 한 주에 대략 90작품 정도--그중 일부는 몇 주에 한번씩 몰아서--본다. 네이버웹툰이 60여편 정도, 다음만화속세상이 20여편, 레진코믹스가 두세편(금전이 넉넉하진 않아서 여기는 그다지 많이 보지는 못한다), 최근 <즐거우네 우리네 인생> 때문에 가보게 된 올레마켓웹툰이 두어편 정도 비중을 차지한다(예전 같으면 네이트의 스포츠웹툰까지 챙겨봤을텐데 요즘은 거기까지는 안 간다...혹시 괜찮은 곳이 더 있다면 언제든 추천해주시면 감사하겠다). 이른바 '덕'의 수준이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하나 대략 이 필드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커다란 흐름 정도는 그럭저럭 느낄 수 있는 정도의 수치일 순 있겠다. 솔직히 말해 나는 부분적으로는 문화적 생산물을 다루는 전문연구자 지망생으로서 웹툰이라는 장르 자체를 주목한다.
웹툰은 영화, 드라마, 예능과 함께 2010년대 중반의 한국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대중서사예술에 속한다(게임은 여기서 다루지 않겠다). 그중에서도 나는 웹툰의 특권적 성격을 좀 더 강조하고 싶다. 예술생산의 관점에서, 웹툰은 하나의 작품이 만들어지고 시장에 진입하기까지의 문턱이 다른 세 장르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낮으며 거대자본이 투입되는 산업적 기획의 역할보다는 작가 개개인의 표현역량이 더 중요하게 간주된다는 특성을 갖는다--단적으로 '기업/서비스홍보웹툰'인 <워킹히어로>나 <아직도 안 깔아 보았나? 넵스토어!> 같은 작품을 보라. 그런 점에서 웹툰은 형식/내용 양자에서 아직까지 다양성과 역동성을 보존하고 있는 드문 사례다. 웹툰이 주요 포털서비스에 기반해 있다는 사실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으나, 레진코믹스처럼 웹툰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독립매체가 등장하고 여러 포털들이 계속해서 경쟁구도에 참여하는 상황을 볼 때, 그리고 결정적으로 공식화된 시장 바깥에 좋은 작품이 출현했을 때 이것이 영화나 드라마 등에 비해 온라인 생태계의 많은 독자들과 훨씬 직접적으로 접촉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현재의 영화시장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유형의 문제가 웹툰시장에도 발생하기까지는 좀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그 수와 표현범위 양자 모두에서 지속적인 확장세를 보여주는 웹툰장르에서 내가 특별히 주목하는 주제 중 하나는 도시빈민/하층계급 노동자의 삶이 어떻게 재현되는가이다. 예를 들어 폐지/고물을 수거하는 사람들의 삶의 사이클은 어떻게 움직이는가? 대학이나 공공시설, 기업처럼 거대한 소비건물의 폐기물을 배출하고 '언제든 사용가능한' 상태로 유지하는 노동을 수행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1년 365일 항상 어딘가에서는 건물이 만들어지고 또 부서지는 토건국가 한국에서 가장 값싼 노동을 수행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마모되고 또 버티어내는가? 이와 같은 질문들을 간접적으로나마 다룬 서사예술은 놀랍게도 그다지 많지 않다; 다큐멘터리와 같이 아직은 비대중적인 장르를 제외한다면, 예능, 드라마, 영화와 같이 대량소비를 목적으로 만들어지는 문화상품들이 어떤 형태로든 희망찬 답변을 제출하기 힘든 소재를 좀처럼 다루지 않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전규환이나 김기덕과 같은 주목할 만한 예외는 존재하지만 그 자체로 상품판매과정의 일부가 된 한국의 영화평론은 이들을 제대로 다룰 역량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주로 다음만화속세상에서 주요한 커리어를 쌓아온 웹툰작가 윤필의 작품들을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 읽어야 할 작품으로 추천하고 싶다. 오늘날 노동과 빈곤, 소외된 삶을 다루는 가장 유명한 작가는 단연 <송곳>의 최규석이겠지만, 적어도 웹툰이라는 장르 형식 내에서 윤필이 구축해온 영역은 결코 그에 부족하지 않다. 윤필의 작품목록(http://webtoon.daum.net/artist/webtoon/6390)에서 가장 먼저 얘기하고 싶은 작품들은 <흰둥이>, <야옹이와 흰둥이>, <검둥이 이야기>, <청둥아 진정해!>로 이어지는 '도시의 동물들' 시리즈다. 이 작품들은 일종의 '윤필 월드'를 구성하는데, 그 세계는 오늘날 한국의 도시하층계급의 삶에 대한 섬세한 재현으로 구성되어 있다. 웹툰의 형식적인 특성을 거의 활용하지 않은 채 동일한 크기의 컷들만을 나열했다는 것에 심심함을 느낄 독자들이 있겠지만, 특히나 도시의 풍경 및 노동묘사에서 하나하나의 컷들을 유심히 살핀다면 대상의 디테일을 잡아채는 저자의 관찰력을 무시할 수 없음이 명백히 드러난다.
인간처럼 행동하는 귀여운 동물 주인공들은 모두 버려진 존재들로서 그들은 인간처럼 자신의 노동과 신체를 판매해서만 살아갈 수 있다; 그들은 삶을 지탱할 수 있는 고정된 토대를 소유하지 못했기에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아야하는 오늘날의 하층계급들을 직접적으로 재현한다. 어느날 갑자기 버려진 반려동물 흰둥이는 '개 짖는 소리를 막기 위해' 성대가 제거되어 목소리를 낼 수 없으며, 야옹이 또한 오갈데 없는 길고양이의 새끼다. 검둥이는 농업노동자로, 밀렵꾼의 조수로, 투견으로, 마지막에는 사채업자의 시다로 계속해서 타인의 소유물로 살아가며 청둥이 역시 (남북한이 통일된 미래의 세계에서) 남한으로 내려와 자신의 노동밖에 팔 수 없는 북한 출신 이주자다. 오늘날의 한국처럼 장기불황 및 실업이 만연한 윤필의 세계에서 이들은 생존을 위해 없이 노가다, 청소노동, 마트 알바, 고물수거와 같이 가장 취약한 일자리를 전전해서만 살아갈 수 있다. 그 일자리들은 문자 그대로 신체적 노동력을 요구하며, 고용주의 이해관계에 의해 노동권을 박탈당할 수 있고, 언제든 신체는 갖가지 부상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때때로 죽음을 맞는 인물들도 있다).
윤필의 동물 주인공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인 삶에 대한 희망과 서로 간의 유대를 보존한다는 점에서 텍스트가 자연주의적 비관/냉소로 빠지지 않도록 한다. 물론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세계의, 체제의 냉혹함은 이들의 삶에 개입할 준비가 되어 있다; 미끄러져 노동을 할 수 없는 할머니는 부양가족이 있다는 이유로 생활비지원을 받을 수 없으며, 동물-노동자들은 생명이 위험할 정도의 상황에서도 보험처리가 되지 않기 때문에 병원치료를 받을 수 없다. 마치 곳곳이 칼날처럼 도시하층계급의 삶을 집어삼킬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은 이 세계의 잔혹함이 드러나는 순간은 마치 주머니 속의 송곳이 튀어나오듯 묘사된다. 세계의 잔혹함과 주인공들의 '인간다움' 사이의 갈등이 일견 특별한 갈등구도를 제시하지 않는 윤필의 작품들에 감정의 선율을 만들어낸다. 고전적인 교양소설들이 세계의 위로 솟구치고 싶어하는 욕망의 인간들과 마치 대지처럼 굳어져 튼튼한 세계의 갈등을 다루었다면, 윤필 월드에서 서스펜스는 세계가, 도시의 삶 자체가 위협적이라는 데서 비롯된다. 고전적인 비극성이 위대한 인물과 운명의 충돌에 기초한다면, 윤필 월드의 비극성은 평범한 삶 자체를 허락하지 않는 세계가 인간적인 삶을 찢고 들어와 할퀼 때 발생한다. 그 앞에서 동물-인간들은 세계의 잔혹함과 대면한 이들의 고통을 공유하며 감내한다. 이 작품들이 이끌어내는 감상주의가 있다면, 이 감상성은 권정생의 청소년소설이나 전태일 전기의 그것들과 닿아있다.
<흰둥이>에서 부분적이지만 섬세한 시선으로 다루어진 소재 중 하나는 학교폭력과 왕따의 문제다. 이 문제는 윤필이 스토리를 맡은 <일진의 크기>에서 훨씬 본격적으로, 발전된 형태로 다루어진다. 언젠가 별도의 글을 쓰고 싶기 때문에 여기에서 더 길게 말하지는 않겠으나 <흰둥이>를 읽고 <일진의 크기>를 본다면 작가가 학교 내에서의 갈등을 대부분의 사람들보다도 깊고 진지하게 사고했음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청소년 독자들이 상당수를 차지하는 웹툰에서 학교폭력과 왕따를 어떤 형태로든 다루는 작품들은 많다. 그러나 '사회적인 것'을 고민하면서 이 주제를 소화해낸 작품은 거의 보지 못했다. 윤필의 작품은 극소수의 예외에 속한다. 초반부와 중반부까지는 다소 독특한 설정을 도입한 학원폭력물 정도로 읽히겠지만, 후반부에서 <일진의 크기>가 제시하는 관점은 상당히 깊은 사고를 촉발한다.
나는 이 30대 중반의 작가가 왕성하게 활동할 시기가 많이 남았다는 사실을 환영하고, 그와 같이 사회의 주변부에 천착하는, 그로부터 깊은 정념과 날카로운 현실인식을 끌어내는 작가들이 더 많이 등장하기를 바란다. 윤필과 같은 작가들이 계속해서 등장한다면 한국의 웹툰은 현재의 비평적 빈곤에도 불구하고 지금보다도 더 생명력 있는 대중예술장르로 지속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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