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테일러. <헤겔>. 완독 후.

Reading 2015. 4. 14. 03:11

찰스 테일러. <헤겔>. 정대성 역. 그린비, 2014. Trans. of _Hegel_ by Charles Taylor, 1975.


꽤 오랜 시간을 걸쳐 테일러의 <헤겔> 국역본을 다 읽었다. 정리는 따로 하지 않겠지만(포스트잇이 빼곡히 붙어있는데 그걸 다 옮길 수는 없다), 확실히 2014-15년간 내게 가장 많은 사고의 계기를 제공한 책임은 분명하다. 그 두꺼운 책에서 버릴 부분이 하나도 없음에, 동시에 헤겔의 사유를 간명하게 풀어내면서 본인의 사상사적 인식을 동시대의 다양한 사상적 조류에 빗대어 설득력 있게  제시할 수 있는 시야의 폭넓음에 감탄할 수밖에 없는 책이다(헤겔과 비트겐슈타인을 필요에 따라 스스럼없이 오갈 수 있는 연구자가 흔할 거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나는 <현상학>과 <논리학>을 간결하게 그러나 위력적으로 설명하는 파트만으로도 이 책이 충분히 위대하다고 생각했는데, 이후 역사철학 및 정치철학을 다룬 파트를 보면서 테일러의 주목적이 근대사회에서 더 좋은 인간학적 이해의 모델을 구축하는 것임을 다시금 깨닫는다.


전체의 1/5 넘는 분량을 차지하는 1부는 헤겔이 처해있던 역사적/사상사적 맥락을 다룬다. 이러한 관점은 이후 테일러에게 수학한 프레더릭 바이저에게도 이어지는데, 헤겔로부터 단순히 철학적 구조물을 끌어내는 걸 넘어 서문에서 밝히듯 "헤겔의 철학적 비전은 그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그 세대의 문제에 대응한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를 투영한다. 여기에 헤겔이 직면했던 문제들, 정확히는 헤겔 시대의 서구가 맞닥트린 문제들이 이 책이 출간된 1975년 또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중요하다는 명제가 덧붙여지는 순간 우리는 곧바로 헤겔의 사유를 재검토하는 작업이 오늘날에도 시의성을 갖는다는 연역적 결론에 도달한다. 테일러는 1부에서 매우 공들여 헤겔 사유의 지적 배경을 설명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고대철학, 17세기 이후 계몽, 종교개혁의 흐름 및 그러한 제반 문제와 직면한 독일의 철학자들이 어떻게 반응했는가--낭만주의의 역할을 강조한 것은 확실히 테일러의 사상사가 갖는 고유의 강점이다--를 다룬다. 테일러는 1부 이후에도 계속해서 헤겔이 이전 및 동시대의 철학적 사고들을 어떻게 흡수하고 비판했는가를 줄기차게 환기시킨다. 이러한 방법은 철학을 사상사로, 사상사를 역사로 연결시킴으로써 자연스럽게 이 책의 핵심적인 목표, 곧 헤겔의 질문과 논리를 현대사회를 성찰하기 위한 철학적 수단으로 다시 도입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2부 정신현상학 및 3부 논리학 파트는 부정할 수 없이 <헤겔>의 정수다. <현상학>을 설명하는 연구서들은 제법 여럿이 있지만, <논리학>을 제대로 풀이하고 설명하는 한국어 텍스트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도 이 책의 의의는 충분히 드러날 것이다. 두 파트는 이미 변증법적 논리&개념적 어휘들에 익숙한 독자가 아니라면 순서대로 읽기를 권한다. 헤겔 자신의 철학이 시간적 전개에 따른 상승을 표현하듯, 테일러의 설명 또한 이전 부분에서 설명된 내용을 이해했다는 전제 위에서 전개된다. 내가 여기에서 테일러가 설명한 내용을 되풀이 하는 것은 무의미할테지만, 이 파트를 충실히 읽은 독자라면 "정-반-합"이 헤겔의 사유를 얼마나 실소가 나올 정도로 초라하게 축소시킨 잘못된 구호인지, 그리고 변증법적 사고방식이 그 자체로 우리의 사물과 사태에 대한 이해방식 자체를 뒤바꿀 수 있는 매우 매력적인 지적 도구임을 이해하게 되리라 확신한다--헤겔의 최대 강점은 사유를 단순한 논리장치나 개념으로 분해하는 대신 그것들을 연결해 하나의 역동적 체계로 구축한다는 데 있다. 두꺼운 책을 다 읽을 자신이 없는 독자라면, 이 두 파트만이라도 꼼꼼히 읽기를 바란다.


2부 및 3부를 읽고 도대체 무엇을 더 읽어야 한단 말인가라고 의문을 품을 독자들은 4부 "역사와 정치"를 읽으면서 스스로의 성급한 판단을 수정하게 될 것이다. 제목 그대로 헤겔의 역사철학 및 정치철학(<법철학>)의 주요논리를 상세히 설명하는데, 테일러는 고대의 정치철학(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그가 '계몽'이라 부르는 (공리주의에서 가장 현격하게 드러나는) 근대의 특정한 합리성의 윤리 및 도덕이론의 쟁점을 정리하면서 헤겔의 정치철학이 여기에 어떻게 응답하는가를 밝힌다(당연하지만, 계몽과 프랑스혁명이라는 역사적 맥락을 헤겔이 어떻게 숙고했는가도 강조된다). 개인의 윤리와 공동체의 도덕이 결합한 인륜성sittlichkeit의 개념에서 볼 수 있듯 헤겔에게 윤리와 정치는 공동체적 삶에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며, 이는 그의 정치철학이 윤리적 난제들에 대한 답변으로 제시될 수 있었던 까닭을 보여준다. 헤겔의 정치철학이 일종의 사회이론이기도 하다는 사실 또한 강조해둘만 한데, 이는 4부에서 테일러가 근대사회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꽤나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테일러가 견지하는 바와 같은 헤겔주의라면 철학적 입장은 항상 구체적인 역사적 맥락과 결부되어 있을 터, 4부는 그러한 견해를 제시하기 위해 가장 최적화된 장소이기도 하다.


5부에서 예술, 종교, 철학에 대한 성숙한 헤겔의 입장을 정리하고 6부에서는 결론으로 헤겔 사후 그의 사유가 후대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를 광범위하게 조망한다. 이때 맑스주의에 대한 언급이 꽤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데, 1970년대의 시점의 영미권에서 맑스가 어떻게 이해되었는가는 그 자체로 흥미로운 주제이기도 하다(예를 들어 J.G.A. 포칵은 <마키아벨리언 모멘트>의 마지막에서 역시 맑스주의 전통에 나름대로의 코멘트를 남긴다). 4부와 함께 6부는 그 자신이 독자적인 견해를 갖고 있는 정치철학/사회철학자로서 테일러가 지닌 면모를 가장 잘 보여준다. 예를 들어 자유를 이해하는 상이한 전통을 정리하고 자신의 자유관--특정한 상황에 대한 대응으로서 출현하는 자유--을 피력하는 부분 및 (자유주의적 인간관을 비판하는) 표현주의적 인간관에 대한 설명은 숙고해볼 가치가 있다. 테일러의 입장이 오늘날에도 공동체주의의 주요한 흐름 중 하나임을 감안한다면, 그가 던지는 질문들은 여전히 중요한 질문이기도 한 셈이다.


 사유를 과거로부터 현재, 나아가 미래의 시간적 진동 속에서 생성되는 삶과 연결시킨다는 점에서 테일러의 방법은 그 자신이 설명하는 헤겔의 사유와 닮아있다--사유의 역사는 사회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는 현대사회를 계몽-공리주의와 그에 투쟁하는 표현주의적 전통으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내가 상정하는 근대의 자기이해역사에도 주요한 버팀목이 되어줄 수 있다. 다른 저자의 책 한 두권을 더 건너고 테일러의 다른 주저들로 넘어갈 예정이다. 올해는 _Sources of the Self_랑 _A Secular Age_를 다 읽는 게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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