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니얼 디포. <록사나>, 불안과 자유.

Reading 2015. 3. 24. 23:57

수업 response paper로 짧게 쓴 글. 너무 급하게 썼긴 했는데 어차피 큰 요지는 들어가 있어서...





불안과 자유: 록사나』의 변화를 이해하기

1.

 

대니얼 디포(Daniel Defoe)록사나(Roxana) 전체의 5분의 1 정도를 차지하는 마지막 에피소드의 특징은 록사나를 비롯한 인물들의 정념(passion)이 거의 과잉에 가까울 정도로 텍스트에 산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독자들은 거의 매 문단에서 공포(horror), 분노(rage), 당혹(perplexity), 놀람/충격(thunder-struck)과 같이 강렬한 감정표현을 읽는다. 마지막 에피소드의 핵심문제는 록사나의 딸이 어머니의 정체를 밝혀내기 위해 추적해오는 플롯 상의 긴장에 달려있다. 이때 위기에 직면한 인물들이 느끼는--혹은 서술자로서의 록사나가 묘사하는--감정의 강렬함은 플롯이 유발하는 서스펜스를 강화하는 역할을 수행한다(사실 디포가 인물들의 내면묘사를 통해 조성하는 정념은 너무나 강한 표현들로 구성되어 오늘날의 독자들에게는 그 정념이 다소 과장되었다는 인상을 줄 정도다). 이때 텍스트에 대한 정념의 지배를 가능하게 하는 요인이 무엇인지, 그리고 정념들이 어떠한 의미망으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질문할 필요가 있다.

앞서 예를 든 정념들의 기초를 이루는 것은 자신의 과거가 타인들에게, 특히 남편에게 알려질 가능성에 대한 록사나의 두려움이다. 한편에는 남편 또는 정부(情夫)를 바꿔가는 과정이, 다른 한편에는 자본을 축적하고 증식시키는 과정이 록사나의 삶을 구성하는 두 가지 핵심요소로 자리했다면, 전자는 그녀가 여성에게 요구되는 사회적 규범을 위반했다는 점에서 후자가 보장하는 안정된 삶까지도 무너트릴 위험을 항상 품고 있다. 이러한 위험을 피하기 위해 그녀는 이때까지 수번에 걸쳐 자신의 사회적 정체성을 재구축했으며 또 첫 남편을 감시한 것과 같이 자신의 과거를 드러낼 위험요소들을 관리해왔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마지막 에피소드를 읽을 때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지점은 최초의 간통 이후 항존 해왔던 록사나의 두려움 자체가 아니라 무엇이 그녀의 두려움을, 불안의 감정을 표면화시켰는가에 있다.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우발적인 사건들에 의해 가장 비밀스러운 범죄가 드러나게 되었다”("the most secret Crimes are, by the most unforeseen Accidents, brought to light, and discover'd" 297, 강조 인용자)는 록사나의 서술은 사태를 간결하게 요약한다. “우발적인 사건”, 정확히 이 표현이 함축하는 사태의 통제불가능성이 문제의 핵심이다. 그녀의 삶이 다양한 요소들에 대한 통제와 지배를 통해 그 안정성을 보장받는다면, 대표적으로 어릴 적에 버려진 딸이 과거를 추리하고 추적하는 상황과 같은 사건들은 통제력을 벗어나는 지점에서 작동한다는 점에서 안정적인 삶을 토대에서부터 뒤흔든다.

마지막 에피소드의 정념의 충만 또는 과잉은 이러한 맥락에서 우연성(contingency)과 결부되어 있다. 딸은 갖가지 우연에 기초해서 자신의 과거를 추리하고 이는 그녀 자신을 합리적인 설득으로 제지할 수 없는, 정념으로 가득한 인물("a passionate wench" 269)로 만든다. 그녀가 점차 접근해오는 상황이 록사나와 에이미(Amy)에게 충격과 공포를 유발한다면, 록사나의 딸에 대한 에이미의 분노는 그녀가 록사나에게 갖고 있던 크나큰 감정”("her Excess of Affection" 271)과 결합하여 록사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도록 추동한다. 그리고 에이미가 자신의 딸을 살해했으리라는 판단은 록사나 자신의 정념을 폭발시킴으로서 그녀를 마치 미친 여자처럼”("like a Mad-Woman" 323) 만드는 것이다. 즉 인물들이 어떠한 합리적 판단도 할 수 없도록 정념에 사로잡혀가는 과정이 딸--에이미--록사나 자신에 이르는 순서로 제시되며, 정념이 더 많은 정념을 생산하는 일종의 자기증식과정은 플롯에 배치된 우연적인 사건들과 결부되어 진행된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마지막 에피소드는 한편으로는 우발적인 사건들로, 다른 한편으로는 폭발적인 정념의 지배로 인해 록사나가 지금껏 구축해왔던 사태에 대한 장악력을 상실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2.

 

통제력이라는 키워드를 염두에 둔다면, 록사나의 가장 흥미로운 대목에 속하는 결혼에 관한 논변은 그녀 자신이 평가하듯 허영심이라는 나쁜 정념에 붙잡힌("how ill our Passions guide us" 161) 결과물로만 읽기 어렵다. 만사를 부인의 의사에 따라 결정하겠다는 네덜란드 상인(Dutch Merchant)의 매력적인 제안을 거부하는 록사나의 요지는 혼인법이 지배력을 당신[남편]의 손에 쥐어준다”("the Laws of Matrimony puts the Power into your Hands" 151)는 말로 대변될 수 있다. 쉽게 말하자면 남편이 제 아무리 부인의 자유를 보장하겠다고 약속을 할지라도 궁극적으로 부인의 자유를 설정하는 권한 자체가 남편의 손아귀에 있는 한 그것은 부자유의 상태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각자가 자신의 지휘권을 직접 갖고 있는 편이 가장 안전하다”("the Staff in their own Hands, was the best Security in the World" 153). 이후 로버트 클레이튼 경(Sir Robert Clayton)에게 다시 한 번 설명하듯 재산권의 문제는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삶”("a Life of absolute Liberty" 171)과 이어져 있다.

자유의 개념을 둘러싸고 벌어진 17세기 중반 영국의 논쟁을 참고한다면 록사나의 입장이 조금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퀜틴 스키너(Quentin Skinner)자유주의 이전의 자유(Liberty before Liberalism)에 따르면, 자유의 개념을 정의하는 문제에서 크게 두 입장이 경쟁했다. 한편에는, 홉스(Thomas Hobbes)의 자유논변이 잘 보여주는 것처럼, 자유란 매순간 자기 자신의 의지를 행할 수 있는 상태를 뜻한다는 왕당파들의 입장이 있었다(5-10). 여기에 대항해 해링턴(James Harrington)이나 페일리(William Paley)를 포함해 스키너가 (기존의 공화주의적’republican이란 용어 대신 채택한) ‘신 로마적 관점’("neo-roman view")이라 부르는 입장은 자유란 자유로운 공동체/국가에서만 온전하게 보장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10-16). 후자는 자유롭다고 믿는 노예의 예시를 들면서 전자의 논리를 비판한다. 즉 주인에게 일시적으로 자유로운 행동을 허락받은 노예는 결국 언제든 주인이 그 자유를 거둬갈 수 있다는 점에서 진정으로 자유로운 게 아니다. 진정한 자유는 자유의 권리 자체를 스스로가 확보할 때만 성립할 수 있다. 우리는 스키너의 신 로마적 관점으로부터 진정한 자유는 자기 통치’(self-governing)로부터만 가능하다는 오래된 전통의 흔적을 볼 수 있다(단적으로 로크의 교육론Some Thoughts concerning Education 통치론Two Treatises of Government, 후자의 복잡한 성격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자기통치의 문제를 논의의 토대로 구축하는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요컨대 자유는 스스로에 대한 통치권이 스스로의 손에 있을 때만 가능하다.

결혼과 자유에 대한 록사나의 논변은, 비록 쟁점이 재산권에 국한되어 있지만, 17세기의 신 로마적 입장에서 주장하는 자유의 개념과 형식적인 유사성을 갖는다. 어떤 면에서 네덜란드 상인의 제안과 록사나의 응답은 일종의 사고실험을 닮아있다. 전자는 문자 그대로 모든 것을 약속하지만, 후자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자유 그 자체의 소재가 남편에게 귀속된다는 데 그 한계를 지닌다. 이런 맥락에서 록사나의 주장은 재산권의 자기통제라는 모티프와 분리되어 이해될 수 없다.

 

 

3.

 

결혼 논변에서 록사나의 주장이 갖는 성격은 록사나의 첫 에피소드에서부터 살펴볼 때 더욱 분명해진다. 첫 남편 양조자("Brewer")와의 결혼생활은 이후에 록사나의 삶에서 끊임없이 환기된다는 점에서 일종의 원초적 트라우마처럼 기능한다. 첫 결혼에서 록사나는 자신이 보유하고 있던 재산들을 행사하는 권한이 전부 남편에게 넘어가 문자 그대로 녹아 사라지는 상황을 경험한다. 파산을 눈앞에 둔 어느 날 남편이 하인들을 이끌고 갑자기 행방불명되는 순간에까지 록사나의 삶은, 다른 무엇보다 재산권의 행사가능성이라는 맥락에서, 철저히 수동적인 위치에 놓여 있다. 즉 이때 가난한 상태 그 자체만이 아니라 그 상황에 이르기까지 어떠한 능동적인 대응을 할 수 없는 여성의 결혼생활 내에서의 수동적인 위치 역시 문제적이 된다(두 번째 남편의 유혹에 그녀가 굴복하는 것 역시 그녀의 무력한 상황과 분리될 수 없다). 그녀는 두 번째 남편 보석상(Jeweller)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뒤 자신의 안녕을 포함해 스스로가 사태에 대한 통제력을 갖추지 못했음을 인식하고, 그때를 기점으로 기쁨을 주는 숙녀에서 스스로의 재산을 경영하는 여성으로”("become from a Lady of Pleasure, a Woman of Business" 131) 탈바꿈한다. 이때 재산을 파악하고, 운영하고, 증식시키는 과정은 단순히 자본의 축적과정으로만 이해될 수 없다. 이는 첫 남편의 도주, 둘째 남편의 피습, 악한 유대인의 음모를 포함한 삶의 모든 우발적인 사건”("every Accident of Life" 260), 나아가 불안정성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스스로의 삶에 대한 통제권을 획득, 유지, 확장시키는 과정이기도 하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록사나에는 세상의 불안정성과 그에 흔들리지 않는 자기 통치 간의 대립구도가 있으며, 재산권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결혼하지 않을 권리는 자기 통치를 유지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다. 그리고 결혼을 선택한 록사나는 삶의 우발성에서 자신을 지키고 보존하는 힘을 상실하며 최종적으로 정념에 굴복당해 마침내 천상의 폭풍”("the Blast of Heaven" 330)으로 묘사되는 운명의 손아귀에 놓인다.

tags : , ,
Trackbacks 0 : Comments 0

Writ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