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렉 램버트. <누가 들뢰즈와 가타리를 두려워하는가?>
Reading 2015. 2. 4. 23:11그렉 램버트. <누가 들뢰즈와 가타리를 두려워하는가?>. 최진석 역. 자음과 모음, 2013. Trans. of _Who's Afraid of Deleuze and Guatarri?_ by Gregg Lambert, 2006. 을 읽었다.
현재 시라큐즈 대 교수인 램버트(한국 서울대에 세미나하러 온 적도 있다)는 데리다에게 박사지도를 받아 들뢰즈를 전공한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다(데리다가 직접 권했다고 한다). 전에 푸코 및 들뢰즈 관련해 괜찮은 코멘트가 있다고 해서 한 권 사 놨는데, 이번에 수유에서 역자 사인이 적힌 선물본을 한 권 더 받는 덕에(...) 내가 전에 샀던 새 책을 다른 지인에게 주기로 하고 이참에 쭉 읽었다. 번역은 좋고 각주도 성실한데 원래 텍스트 자체가 꽤 까다롭다. 대략 정리를 해본다면, 현재 '이론' 필드에서 들뢰즈가 독해되고 있는 방식에 대해
1. 표현(프레드릭 제임슨과 각을 짓고, 부제에서 드러나듯 들뢰즈의 스피노자 연구를 좌파 대항운동의 맥락으로 재조명한다)
2. 정신분석(지젝의 들뢰즈 독해를 비판하면서 라캉 정신분석과의 비교를 통해 정신분석에 대한 들뢰즈/가타리의 입장을 독해한다)
3. 정치(알튀세르와 들뢰즈의 맑스주의 전용을 비교하고, 네그리의 들뢰즈 활용, 특히 <제국> 및 다중에 관한 개념을 고찰하고 네그리의 입장이 <앙티 오이디푸스>와 닿아있음을 확인한다)
4. 푸코 세미나(특히 권력이론에 중점을 두고 들뢰즈의 푸코 독해를 따라간다.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와는 조금 대립각을 세운다) 라는 총 네 가지 주제를 잡아 비평적 개입을 하는 텍스트다.
이 주제들을 통해 들뢰즈, 특히 <앙띠 오이디푸스> 이후 후기 들뢰즈에 대한 오해를 교정하고 들뢰즈의 좌파 정치이론에서의 현재적 의미를 다시 발굴하는 게 램버트의 의도라고 할 수 있겠다. 위의 각 항목에 대한 간략한 요약에서 알 수 있듯, 어느 정도 이론판에 대해 대략적인 지형도가 없는 독자라면 처음부터 꽤 헤맬 가능성이 높다. 1번에서 나는 이전에 제임슨의 <정치적 무의식> 및 스피노자를 읽은 독자였고 그래서 정작 들뢰즈 자체에 대한 이해가 0에 수렴했음에도 불구하고(내가 읽은 건 수년 전 <디알로그>가 전부다...<매저키즘>은...고딩 때 SM 책인 줄 알고 봤지만--중딩 때 꿈 해몽 책인 줄 알고 <꿈의 해석>의 옛날 번역본을 읽은 것과 비슷하다; 프로이트는 내 인생을 바꿨지만 들뢰즈는 글쎄;;--기억나는 건 부록으로 실린 <모피를 두른 비너스> 뿐...) 특별한 어려움 없이 읽었던 데 비해, 라캉에 대한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 읽은 정신분석 파트는 거의 이해를 하지 못하고 그냥 끝까지 읽었다. 3장은 알튀세르-푸코-들뢰즈-네그리로 가는 흐름을, 4장은 들뢰즈의 푸코를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전제 하에서 꽤 빠른 사유의 흐름을 보여주기 때문에 사전지식이 전혀 없이 책을 잡으면 헤맬 것이다. 즉 들뢰즈 본인이나 들뢰즈를 둘러싼 맥락들에 어느 정도 친숙한 독자들이 읽으면 꽤 재밌게, 이런 저런 사고를 촉발하면서 읽을 수 있겠다; 램버트의 책은 단순한 안내서가 아니라 꽤 깊은 부분까지 서술에 들어가는 어느 정도 전문적인 비평/연구서에 가깝다. 바꿔 말하면 들뢰즈가 궁금해서 배경지식없이 책을 잡는 건 그다지 권하고 싶지 않다.
어차피 이해할 수 있는 범위 안쪽에서만 가볍게 훑자고 읽은 거였는지라 진지한 코멘트를 하기는 힘들고 그냥 내가 느꼈던 인상들만 체크한다. 다른 무엇보다도 (램버트가 안내하는) 들뢰즈의 스피노자 독해는 흥미롭고 한번 따라가보고 싶다. 이전까지 들뢰즈는 딱히 챙겨볼 생각이 없었는데, 적어도 스피노자 독해는 책을 좀 구해놓으려고 한다(국내에는 국가박사학위 부논문--논문은 저 유명한 <차이와 반복>--인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와 이후에 좀 더 짧게 나온 <스피노자의 철학>이 나와 있다). 마트롱의 책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와 함께 들뢰즈의 스피노자론은 역량/힘/코나투스와 같은 개념에 정치적인 함의를 부여하는 것 정도로 알고 있다. 스피노자에 대한 독해를 포함해서 들뢰즈는 (어떻게 보면 푸코의 문제의식을 이어받아) 주체가 갖는 변혁의 힘/역량을 강조했다고 거칠게 말할 수 있는데, 나는 이러한 문제의식이 자유주의에 대항하면서 공동체의 문제에 참여하는 시민의 역량/덕성virtus을 강조하는 시민적 인문주의(역사학계의 스키너, 포칵) 및 공화주의/공동체주의 전통(철학계의 테일러, 매킨타이어)의 틀과 근본적으로 공유하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미 그러한 연구가 행해졌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램버트는 언급하지 않는다. 실제로 프랑스 철학과 영미 역사/철학의 매우 상이한 전통들에서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구도가 나왔다는 것은 그 자체가 역사적으로 캐치해볼 만한 주제다. 실제로 푸코의 경우 1980년부터 고대로 올라가면서 주체가 스스로를 형성하는 기술과 힘에 대해 관심을 갖기도 하고, (연결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알튀세르가 마키아벨리-스피노자에 관심을 기울인 것도 사실이기 때문에... 상이한 학문적 언어를 갖고 작업했던 서유럽 및 미국의 진보/좌파들의 큰 틀에서의 유사성이라는 것을 대략의 감이라도 잡고 싶다. 실제로 자유주의에 대항하는 공동체주의/덕성/공화주의/시민적인문주의/역량 등의 논리가 내 박사논문주제의 한 기둥이기도 하고.
기타 조금 작은 사항들은, 네그리를 전혀 안 읽은 것에 대한 부채감이 약간 생긴 것, 그리고 들뢰즈의 푸코 독해, 정확히는 들뢰즈를 경유한 램버트의 푸코 독해가 강의록 발굴 이후의 연구성과를 제대로 수용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 정도. 물론 램버트-들뢰즈의 초점 자체가 주체라는 관심사에서 접근한 권력의 문제이기 때문에 통치성 개념 이후의 연구작업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2006년이라는 조금은 애매한 시점에서 나온 이 책이 수년 만 더 뒤에 푸코 연구의 대전환이 확고해지고 나왔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 및 호기심. 마지막으로, 특히 1장을 읽으면서, 들뢰즈적 소수자-되기가 어떻게 개인의 틀을 넘어 유의미한 사회적 세력/운동의 형성으로 이어질 수 있는가는, 내가 램버트의 논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탓이겠지만, 여전히 불투명해보인다. 국가 및 자본권력의 강고함에 비해 주체에 대한 이론은 아직도 너무나 작은 단위, 즉 '개인'이라는 틀 안에서 사고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을 계속해왔는데--쉽게 말해, 개인의 주체성의 혁신을 통해 사회 전체의 혁신을 가져온다는 발상은 그것을 거부하는 현재의 지배구조를 존속시키려는 국가 및 자본의 집합적인 권력에 비해 너무도 미약하지 않은가 하는 것, 혹은 서구의 사회처럼 개인 및 개체성에 그만한 자유와 권리를 부과하는 특정한 국가의 조건에 기반한 방법론이며 내가 속한 한국 사회에서는 곧바로 채택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 등이 있어 왔고, 램버트의 들뢰즈 독해가 이걸 명쾌하게 해소해준 것 같지는 않다.
대충 일회독 한 뒤의 총 감상을 적자면, <누가 들뢰즈와 가타리를 두려워하는가?>는 내게 들뢰즈에 대한 연구자로서의 흥미를 불러일으켰지만, 그 흥미가 정치적 입장에서의 가능한 선택지로서의 매혹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어쨌든 언젠가 다시 돌아오면 달리 보이는 게 있을 터, 유보적인 입장으로 일단은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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