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야민. <독일 낭만주의에서의 예술비평 개념>. 읽고 인용 정리.

Reading 2015.01.26 04:23

발터 벤야민. <독일 낭만주의의 예술비평 개념>. 심철민 역. 도서출판b, 2013. Trans. of _Der Begriff der Kunstkritik in der Deutschen Romantik_ by Walter Benjamin, 1920.


발터 벤야민이 베른 대학에서 쓴 박사학위논문 <독일 낭만주의의 예술비평 개념>(이하 <예술비평>) 국역을 읽었다. 전에 두어 번 집어들었을 때는 30쪽도 가기 전에 나중에 읽겠다고 미루어두었다. 이제 (박사학위와는 다른) 교수자격논문으로 집필된 <독일 비애극의 원천>을 (특히 2부의 알레고리/우의론을) 읽기 전의 정지작업이라 생각하니 조금 마음에 결의 비슷한 게 생기는지 이틀 정도 시간을 쪼개어 보았다. 국역은 심철민의 번역 답게 딱딱하고 전혀 좋은 한국어가 아니지만 익숙해지면 큰 무리 없이 꾸역꾸역 읽을 수 있다. 복무 시절 <괴테의 친화력>(이하 <친화력>)을 아무 맥락도 이해하지 못한 채로 읽었는데--그리고 잊었는데--, <예술비평>-<친화력>-<원천>으로 이어지는 벤야민의 문예비평론 독서계보를 짤 수도 있겠다. 이번에 <원천>을 한번 더 본 뒤 설에 <친화력>을 고향에서 다시 가져올 생각이다.


<원천>이 인식비판적 서설과 비애극 전통 및 알레고리에 대한 두 개의 파트로 이루어져 있었다면, <예술비평>은 독일 낭만주의의 반성개념 및 예술비평개념에 대한 두 개의 파트가 주를 이루고 보론으로 (후에 <친화력>으로 이어질) 괴테와 낭만주의자들의 예술이론을 비교대조하는 짧은 글이 붙어 있다. <예술비평>은 기본적으로 학위논문답게 독일 낭만주의자, 그중에서도 슐레겔 형제 중 동생 프리드리히 슐레겔과 노발리스를 중심으로 그들의 예술이론을 해명하는데 집중한다. 1부 "반성"은 독일 (초기) 낭만주의자들을 다루는 텍스트 답게 피히테의 이론에서 반성개념 및 주체/객체의 관계가 어떻게 설정되는지를 요약하고 낭만주의자들이 피히테로부터 출발해 어떻게 다른 결론으로 이르게 되는가를 설명한다. 2부에서는 예술-예술작품-예술의 이념 순으로 낭만주의 예술론의 주요개념을 통해 예술비평 개념 및 예술론의 체계를 조망한다. 요컨대 1부에서 낭만주의자들의 예술이론의 골격을 이루는 보다 포괄적인 인식론의 체계를, 2부에서는 그러한 골격과 논리에 기반해 예술이론이 어떻게 성립되는지를 보다 구체적으로 풀어낸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철학전공자가 아닌 이상에는 피히테와 낭만주의자들의 디테일한 차이를 조망하는 1부가 퍽 지루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는데, 참고 읽기를 권한다. 칸트에서 피히테 및 독일낭만주의(슐레겔 형제, 노발리스, 셸링 등)를 거쳐 헤겔로 이르는 18-19세기 독일철학의 흐름 및 주요한 논점들을 대략적으로라도 이해하고 있다면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독일 낭만주의에 관해서 내가 본 것 중에 가장 좋은 책은 (아직 앞의 글 두어 개 밖에 못 읽었지만) 철학사가 프레더릭 바이저의 <낭만주의의 명령>으로, 바이저는 초기 독일 낭만주의자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철학과 문학을 분할할 수 없다는 지극히 타당한 입장에 있다. 헤겔 입문서 중 철학적 배경을 설명하는 텍스트들도 필연적으로 낭만주의의 주요 이론적 쟁점들을 다룬다(적어도--바이저의 스승이기도 한--테일러 이후로 헤겔에 대한 철학사적 이해에서 피히테, 셸링 및 독일 낭만주의자들을 주요한 배경으로 간주하는 게 당연한 듯 하다). 테일러의 <헤겔>의 1장이나 테리 핀카드의 전기에서 제법 상세한 수준으로 다루고 있으니 <예술비평>의 서두가 고통스러우신 분들은 참고하시라.


<예술비평>은 외관상으로 볼 때는 그 제목처럼 꼼꼼히 텍스트를 뒤져가며 개념적 대상을 해명하는 논문이지만, 몇 가지 주목할 점이 있다.

 첫째, 벤야민이 스스로 밝히듯 이 텍스트는 통상적으로 주관주의에의 함몰로 이해되는--이는 특히 헤겔의 낭만주의 비판에서 두드러지는데--낭만주의가 적어도 예술 이론 및 비평개념에 있어서 (인식론의 '반성' 개념에서부터) 주체 바깥의 대상의 성질 혹은 객관성을 배제하거나 말소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벤야민은 비평 개념의 객관적 계기를 강조하는 입장에 있다. 이후 <원천>에서 통념을 비판하며 바로크 비애극 장르 및 (비애극의) 알레고리 개념에 새로운 인식을 부여하는 바와 마찬가지로 그는 <예술비평>에서 지배적인 이해에 거스르고 있다.

 둘째, 주관적인 자아의 반성으로부터 객관적인 것을 끌어낼 수 있다는 모티프는 벤야민의 이후 이론적 작업에도 마찬가지로 유지되는 특성 중 하나이기에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아도르노가 보들레르론에 가한 유명한 비판처럼 벤야민에게는 구체적인 사물과 자본주의라는 세계사적 동력 사이에, 그러니까 미시적인 수준과 거시적인 수준 사이에 개념적 매개가 결여되어 있다면, 이는 벤야민의 비평이 (그가 이해하는) 독일 낭만주의자들의 것과 근본적으로 닮아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물론 괴테에 대한 비평을 다시 읽고 점검해봐야겠지만, 벤야민의 독자들은 <예술비평>에서 벤야민 비평론의 핵심을 이루는 진술들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수많은 인용문의 중첩을 통해 결과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구축하는 벤야민 특유의 방법은 이 텍스트도 예외는 아니며 독일 낭만주의의 독해는 벤야민 자신의 입장의 서술이기도 하다.

 셋째, 흥미롭게도 특히나 내재적 비평 및 예술'작품'의 개념 자체를 포함한 낭만주의 예술이론의 몇몇 지점에서 우리는 아도르노의 비평적 규범에도 마찬가지로 해당되는 진술들을 찾을 수 있다. 물론 그의 미학/예술이론이 칸트와 헤겔의 미학 개념을 주로 참고하되 플라톤에서 모더니즘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범위를 섭렵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나, (적어도 벤야민이 해석한) 독일낭만주의 예술이론의 주요한 원칙들이 아도르노의 이론에서도 중요한 이론적 전제로 등장한다는 사실은 무척이나 흥미로운 것이다. 만약 우리가 두 번째 항목에서 언급했듯 이 논문이 벤야민 자신의 비평관을 보여주는 텍스트이기도 함을 인정한다면, 그러한 관계는 이 논문과 아도르노 비평관에도 부분적으로 참일 것이다. 어쩌면 아도르노와 벤야민의 비평관 사이에 내재한 결정적인 차이를--천재 벤야민을 영재 아도르노가 질투하고 시기했다는 식의 심리비평은 설령 그러한 추측이 사실일지라도 그 자체로 이론적인 분기점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바는 아무 것도 없다--이해하는데 이 텍스트가 나름대로의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이후 벤야민의 <원천>을 읽고 다시 헤겔로 돌아가겠다. 틈틈이 읽어 <아케이드 프로젝트>까지 보는 것--그러면 적어도 한국에 번역된 벤야민의 주요텍스트는 전부 한번씩은 읽는 셈이 된다--이 방학 기간 동안의 과제 중 하나다.



 나는 이 책이 단순히 벤야민의 이해 혹은 독일낭만주의 예술이론의 이해라는 주제를 넘어 예술연구자, 그중에서도 비평적 작업과 무관할 수 없는 이들에게 나름의 의미가 있을 거라 생각한다. 다른 무엇보다도, 인용문들을 보면 알겠지만, 독일 낭만주의자들은 오늘날까지 비평 작업의 의의를 두고 따라붙는 근본적인 질문들을 한발 먼저 숙고했다; 벤야민의 작업은 그러한 질문들의 의의를 재구성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오늘날의 문학전공자들은, 적어도 나는 학부생 때부터 문학전공자로 산 10년간 그러했는데, 자신들의 작업에 놓여있는 이론적인 전제들을 사고하는 방법을 특별히 배울 기회가 없다. 문학 전공의 바깥에서 그 방법의 핵심적인 전제들을 건드리는 질문들이 종종 쏟아져나오는 순간에서조차 우리들은 단지 그 질문들로부터 고개를 돌리는 것 이상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의 작업에 놓인 근본전제들을, 근본적인 입장들과 그 의의를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은 그 어떤 변명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나는 벤야민의 박사논문이, 벤야민 자신에게 그러했듯, 우리에게도 현재적인 의의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문학연구가 학적으로 매우 다른 작업들까지도 포괄할 수 있게 된 이 순간에.



이하는 주요한 대목 인용이다.


<서론>


"'비평'kritik이라는 술어를 낭만주의자들은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이하의 고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예술비평으로서의 비평이지, 인식론적 방법이나 철학적 입장으로서의 비평이 아니다. [...] 당시 이 말[비평]은 칸트와 연관되어 후자의 의미로까지 높여져 있었다. 그것은 비할 데 없이 완벽한 철학적 입장을 나타내는 비교적秘敎的인 술어였다. 그렇지만 일반적인 용법에서의 이 말은, 근거지어진 가치판단이라는 의미로서만 그 뜻을 관철하고 있었다. 이는 아마도 낭만주의의 영향 없이는 생각될 수 없을 것이다." (12)


<1부 반성>

 <2장 초기낭만주의자들에게서 반성의 의미>

"반성이란 직관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체계적인 사유, 개념적 파악이다." (47)

"자아로부터 자유로운 반성이 예술이라는 절대자 속에 있는 반성인 것이다." (59)


 <3장 체계와 개념>

"여기에서 개시되는 분석은 자연스럽게도 하나의 작가가 말한 것, 표현하려고 했거나 또는 단지 표현할 수 있었을 뿐인 것에 대한 '문학적인'[축어적인?] 의미의 배후에까지 육박해가는 일이 자주 있다. 이 분석은, 지향작용이 스스로 수행해야 하는 것을 인식했을 때, 이 지향작용을 파악하는 것이다."--"문학사를 위해서는......바로 이 점으로부터 여러 전제들--비록 작가 자신의 반성에 의해서는 대부분 이들 전제들이 적중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에 소급하는 하나의 고찰이  해명되는 것이다." (63-64, 엘쿠스Elkuss로부터의 인용문)


"비판이라는 개념은 칸트의 철학적 저서를 통해서 젊은 세대에게 말하자면 마술적인 의미를 획득하고 있었다. 어쨌든 이 개념과 뚜렷한 방식으로 결부되어 있었던 것은 결코 단순히 판정할 뿐인, 비생산적인 정신적 태도라는 의미가 아니었다. 오히려 비평적이라는 용어는 낭만주의자들과 사변철학에게는 사려깊음에서 출발한 객관적이고 생산적이며 창조적인 것을 의미했다. 비평적이란, 여러 속박의 그릇됨을 통찰함으로써 말하자면 마술적으로 진리의 인식이 울려 퍼지는 곳까지 일체의 속박을 넘어 사유를 고양시키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이러한 적극적인 의미에서 비평적인 방식은 반성적 방식과의 생각될 수 있는 가장 밀접한 친근성을 획득하며 [...]" (78)

: 비평적=객관적, 생산적, 창조적인 것, 사유를 고양시키는 것.


 <4장 초기낭만주의의 자연인식론>

"인간 내에서의 반성의 정도의 고조는 오히려 자기 자신에 의해 인식되는 것과 타자에 의해 인식되는 것 사이의 경계를 사물에서 폐기시키고, 이리하여 반성의 매체 속에서 사물과 인식하는 존재자가 서로 상대방 속으로 이행하는 것이다. 양자는 반성의 단지 상대적인 단위들이다. 그러므로 실은 주체에 의한 객체의 인식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인식은 절대자 내에서의, 또는 만일 그렇게 말하고자 한다면 주체 내에서의, 하나의 내재적 연관이다. 객체라는 술어는 인식에서의 어떤 관계를 칭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관계의 결여를 칭하고 있으며, 여하튼 인식관계가 드러날 때 그 의미를 잃는 것이다." (89-90)

: '내재적 연관'이라는 단어를 숙고하기. (분할된, 독립된 존재로서 단수적인) 객체는 이러한 연관을 포착하지 못하기 때문에 단수로 보이는 것 뿐이라는 지적은 매우 헤겔적이다.



<2부 예술비평>

 <1장 초기낭만주의의 예술인식론>

"무언가를 산출하는 일종의 사고, 따라서 우리가 자연의 자아와 세계-자아에 있다고 믿는 어떤 창조적 능력과 형식상 매우 유사성을 갖는 일종의 사고가....존재한다. 즉 그것은 창작하는 일Das Dichten로서, 이는 어느 정도 그 소재 자체를 창조하는 일이다." (100, 프리드리히 슐레겔에서의 인용문) : 창조로서의 창작.


"예술이라는 반성매체에서의 인식이 예술비평의 과제이다. [...] 따라서 비평은 예술작품에 대해, 관찰이 자연물에 대한 것과 동일한 관계에 있으며, 대상의 차이에 의해 변화된 모습을 취하면서도 거기에 명확히 각인되어 있는 것은 동일한 법칙들이다. [...] [노발리스는] 비평과 관찰 사이의 인접한 동류관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비평이란 말하자면 예술작품에서의 실험인 것으로, 이 실험을 통해 예술작품의 반성이 환기되고 또한 예술작품은 자기 자신을 의식하고 인식하게 된다." (104)


"반성의 주체는 근본적으로는 예술형성물 자체이다. [...]

 비평이 예술작품의 인식인 한, 그것은 예술작품의 자기인식이다. 또한 비평이 예술작품을 판정하는 한에서, 그것은 작품의 자기판정 속에서 행해지는 것이다. 이 후자의 특징에 의해 비평은 관찰을 넘어가는 것이며, 예술의 대상과, 판정을 허용하지 않는 자연의 대상 간의 차이가 나타나는 것도 이 특징이다. 반성을 기반으로 한 자기판정이라는 사상은 예술의 영역 외에서도 낭만주의자들에게 낯선 것이 아니다." (105)

: 예술(작품)과 비평의 관계를 설정하기 위한 진술들. "비평이 예술작품의 인식인 한, 그것은 예술작품의 자기인식이다"는 문장은 숙고해볼 만하다. 인식하다라는 술어와 연결된 주어가 비평하는 자라는 주체에서 예술작품이라는 객체로 넘어간다는 것, 혹은 주어에 예술작품이 위치함으로서 이전에 주체였던 것과 객체였던 것이 자연스럽게 연결된다는 이해를 할 수 있는 게 중요하다.


"따라서 비평이란, 개개 작품의 한정성이 방법적으로 예술의 무한성에 연관되고 마침내 그 무한성 속으로 옮겨가는 그러한 매체이다. 왜냐하면 예술은 저절로 이해되듯이, 반성매체로서 무한하기 때문이다. 노발리스는 앞서 인용된 매체적인 반성을 일반적으로 낭만화Romantisieren라고 부르고 있는데, [...] 그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는 점은 정확히 예술비평의 과정이다. "개별적인 계기를 절대화하고 보편화하며 분류하는 것이......낭만화의 고유한 본질이다."--"자아는......유한한 것에 무한한 가상을 부여함으로써 그것을 낭만화한다." 비평가의 입장으로부터도--왜냐하면 그 뒤에 나오는 '참된 독자'란 비평가라고 생각되기에--노발리스는 비평적 과제를 이렇게 나타내고 있다. "참된 독자는 확장된 작가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하급 재판소에 의해 이미 앞서 처리된 사건을 넘겨받는 상급재판소인 셈이다. 독자의 감정은......다시금 책의 생경한 것과 도야된 것을 구별한다. 그리고 만일 독자가 그 이념에 따라 책을 개작한다고 한다면, 제2의 독자는 더욱 더 그 순화의 정도를 높일 것이다. 이리하여......대중이 마침내......활동적인 정신의 구성원이 된다.""(108, 인용 내 인용은 전부 노발리스의 것)

 : 비평 혹은 독자의 읽기/해석작용이 작품을 보다 고차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린다는 구도가 비평을 예술보다 상위의 활동으로 규정하도록 한다.


"필요한 것은 모든 개개의 것을 추상할 수 있다는 것, 보편적인 것을 요동적[움직이고 꿈틀대는 것]으로 파악하는 일이다." (109)

"[...]비평이 수행해야 할 것은 작품 자체의 감춰진 구상을 드러내고 그 숨겨진 의도를 실행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작품 자체가 지닌 의미에서, 즉 작품의 반성에서, 작품이 작품을 능가하여 그것을 절대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낭만주의자들에게 비평이란 작품의 판정이기보다는 오히려 작품을 완성하는 방법임이 분명하다." (110)


"노발리스가 스스로 신화적인 비평이라고 칭하는 모종의 번역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할 때, 그가 염두에 두는 것은 그와 같이 완성시키는 적극적인 비평의 예들이다. "이들 번역은 개성적인 예술작품의 순수하고 완성된 성격을 제시한다. 그것들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현실의 예술작품이 아니라 그 예술작품의 이상ideal인 것이다.""(112, 인용 내 인용은 노발리스의 것)

: 벤야민의 번역론, 특히 <번역자의 과제>와 비교해볼 대목.


"슐레겔은, 근대의 작가들이 그들 자신의 사고의 흐름에 따라 매우 자주 그를 오해했듯이, 예술작품을 주관성의 단순한 부산물로서 삼았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정신의 법칙들을 예술작품 자체 속으로 담아냈다. [...] 이들 전제가 그것들의 해방적인 성과와 아울러 이론적으로 이전에는 절대로 도입될 수 없었던 하나의 근본개념, 즉 작품이라는 근본개념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근대비평은 간과하고 있다. 왜햐하면 슐레겔의 비평개념은 타율적인 미학적 교의로부터의 자유를 획득한 것만이 아니라--오히려 규범과는 다른 예술작품의 시금석, 즉 작품 자체가 지닌 확실한 내적 구조라는 시금석을 확립함으로써 그는 이 자유를 실현가능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 그는 객체 혹은 형성물의 측면으로부터, 이전에 칸트에 의해 예술비평에서의 판단력에 부여되고 있었던, 예술의 영역에서의 저 자율성을 보증했다. 작품을 그 내재적인 시금석에 의해 판정한다는 낭만주의 이후의 비평 활동의 제1원칙은, 그것들이 확실히 그 순수한 형태에서는 오늘날의 사상가를 완전히 만족시키는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낭만주의의 이론들에 바탕하여 획득된 것이다. [...] 노발리스는 이 원칙에서도 슐레겔과 일치한다. "여러 예술개체들이 가장 본래적인 의미에서 비로소 이해되도록 하는, 그것들을 위한 정식들을 발견하는 것이 예술적 비평가의 임무이며, 그의 작업은 예술의 역사를 준비하는 것이다." 합리주의가 자신의 규범들을 위해 원용하는 취미geschmack에 관해, 그들 규범이 순수하게 역사적으로 정초되지 않는 한, "취미는 단지 소극적으로만 판정할 뿐"이라고 노발리스는 말한다.

 이리하여 엄밀하게 규정된 작품이라는 개념이 낭만주의적 이론에 의해 비평 개념의 상관개념이 되었다." (114-15, 인용 내 인용은 전부 노발리스)

: 이전까지 독일 예술비평이론의 두 흐름이 전통적 규범(독단론) 또는 이전의 규범을 깨부수는 천재(회의론) 사이의 대립구도였다면, 슐레겔은 마치 칸트가 인식론상의 독단론과 회의론 사이에서 그러했듯 전통적 취미규범과 모든 객관적 규범을 무화시키는 천재 양자를 비판하는 새로운 객관성의 창출을 추구한다. 이때의 핵심개념이 바로 "작품이라는 근본개념"이며, 이를 통해 예술작품은 (마치 칸트의 인식론에서 각각의 인간이 각자의 인식구조를 보편적으로 지니고 있듯이) 각각의 내적 구조를 갖는다고 설명된다. 이러한 예술작품의 개념으로부터 (아도르노에게도 마찬가지로 강조되는) '객관성을 갖는' 내재적 비평이 출현가능하게 된다. 이러한 논리에서 비로소 비평은 비평가의 자의적 판단으로부터, 동시에 단순한 사실의 나열으로서의 '문헌학'이나 전통적 규범의 강요로부터 해방되어 객관적 해석을 위해 날아오를 수 있다.


 <2장 예술작품>

"낭만주의적 예술작품 이론은 예술작품의 형식의 이론이다. 초기 낭만주의자들은 형식이 지닌 한정하는 성질을 모든 유한적 반성의 한정성과 동일시하고, 또한 오로지 이 점을 고려함으로써 예술작품의 개념을 그들의 작관세계의 내부 속으로 규정했다. [...] 낭만주의자들에게 반성의 순수한 본질은 예술작품의 순수하게 형식적인 현상에서 표명된다. 따라서 형식은 작품의 본질을 이루고 있는, 작품의 고유한 반성의 대상적인 표현이다. 형식이란 작품에서의 반성의 가능성이며, 따라서 그것은 현존원리로서 아 프리오리하게 작품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즉 예술작품은 그 형식을 통해 반성의 생동하는 중심을 이룬다." (117)


"작품에는 우연성이라는 계기가 늘 붙어 있다. 이 특수한 우연성을 원리적으로 필연적인 것, 즉 피할 수 없는 것으로서 시인하는 것, 그 우연성을 반성의 엄격한 자기 제한을 통해 인정하는 것, 이것이 형식이 지닌 엄밀한 기능이다. 자기제한이라는 실제적인, 즉 규정된 반성을 형성하는 것이 예술작품의 개성과 형식이다. [...] 비평은 반성의 여러 배아, 즉 작품의 적극적으로 형식적인 계기들에 의거하면서도 이들 계기를 보편형식적인 계기들로 해소시킨다. 이렇게 해서 비평은 개개 작품이 예술의 이념과 맺는 연관을 제시하며, 동시에 개개 작품 자체의 이념을 명시한다." (118)


: "형식"이 아도르노 예술비평의 또 다른 중심키워드라는 것을 강조해두자. 여기에서 자세한 설명을 하지는 않겠지만, <미학강의>나 <미학이론> 등을 통해 아도르노가 예술작품의 형식에 대해 발언하는 내용들은 비평을 하는 이라면 한번 정도 숙고해둘 만하다.


"[낭만주의 예술비평 개념에서] 작품의 내재적인 경향 및 그에 적합한 작품의 내재적 비평의 척도는, 작품의 근저에 있는 그리고 그 형식 속에 각인되어 있는 반성인 것이다. 그러나 이 반성은 실은 판정의 척도라기보다는, 오히려 무엇보다도, 판정하지 않는 입장에 서 있는 전적으로 다른 비평의 기반이며, 이러한 비평의 중점은 개개 작품의 평가 속에서가 아니라 개개 작품이 다른 모든 작품에 대해 그리고 마침내는 예술의 이념에 대해 지니고 있는 관계들을 제시하는 데 있다. 프리드리히 슐레겔은 "개개의 점에서는 자주 지나치게 꼼꼼할 정도로 노력함에도 불구하고,......그럼에도 역시 전체로서는 판정하면서 평가를 내리는 태도가 아니라 오히려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비평적 작품의 경향이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비평은, 그 본질에 대한 오늘날의 이해와는 전혀 반대로, 그 중심의도에서 판정이 아니라 한편에서는 작품의 완성, 보완, 체계화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절대적인 것 내에서의 작품의 해소이다. [...] 만약 작품의 판정을 위해 작품에 내재하는 척도가 명시된다면, 그것은 모순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작품의 비평이란 오히려 작품의 반성으로서, 당연히 이 반성만이 작품에 내재하는 비평의 맹아를 전개시킬 수 있다." (125-26)

: 작품의 판정(가치평가)과는 다른 비평관.


"오늘날의 이해로는 가장 주관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비평이라는 것이 낭만주의자들에게는 작품이 성립할 때의 모든 주관성과 우연성 그리고 자의에 대한 규제적인 측면을 의미했다. 오늘날의 개념에 따르면 비평은 구체적인 인식과 작품의 가치평가로 이루어지지만, 낭만주의의 비평개념을 두드러지게 눈에 띄게 하는 것은 취미판단에 의한, 작품의 어떤 특수한 주관적인 평가와는 관계가 없다는 점이다. 가치평가는 작품의 구체적인 탐구와 인식에 내재해 있다." (129)

: 가치평가의 순간에서조차도 주관성을 넘어서는 비평.


"사람들이 서술형식이라고 부르고자 하는 개개 작품의 일정한 형식은, 아이러니에 의한 해체의 희생이 된다. 그러나 아이러니는 이러한 형식 너머로 영원한 형식이라는 우주를 열어젖힌다. 그것은 곧 절대적 형식이라 일컬어도 좋은, 여러 형식들의 이념이다. 이리하여 아이러니는 작품이 살아남는 것을 증명하며, 작품은 그 고립된 반성의 표현인 경험적 형식이 아이러니에 의해 흡수된 연후에도, 이 영역으로부터 작품 자신의 파괴불가능한 존립을 창출해낸다." (139)

"형식의 아이러니는 근면이나 성실함 같은 작가의 지향적 태도가 아니다. 그것은 보통 행해지고 있듯이 어떤 주관적인 무제약성의 지표로서 이해될 수는 없고, 오히려 작품 자체에서의 어떤 객관적인 계기로서 평가되어야만 한다. 형식의 아이러니는 형성물에서 더욱 더 해체를 통해 건설하려는 역설적인 시도이다. 즉 작품이 이념과 맺는 관계를 작품 자체 속에서 명시하려고 하는 시도를 뜻한다." (140)

: 벤야민은 "낭만적 아이러니"라고 부르는 태도가 예술비평에서는 작품의 내용/소재에 대한 아이러니와 형식에 대한 아이러니로 나뉜다고 한다. 이중 강조점은 후자에 두어지는데, 형식의 아이러니는 예술작품의 경험적으로 만들어진 형식에 대해 거리를 두고 결과적으로 작품을 전자로부터 떼어내어 보편적인 "영원한 형식" 혹은 "이념"으로 고양시킨다. 이 점에서 (형식의) 아이러니는 통념과 달리 단순히 주관성이 강조된 태도가 아니라 작품을 객관성에 접근시키는 하나의 비평적 방식이 된다.


 <3장 예술의 이념>

 "예술적 반성의 기관organ은 형식이기 때문에, 예술의 이념은 형식들의 반성매체로 정의된다. 이 매체에서 모든 서술형식들은 부단히 서로 연관해 있고, 서로 이행해 있으며 하나로 결합되어 예술의 이념과 동일한 바의 절대적인 예술형식이 된다. 예술의 통일성이라는 낭만주의의 이념은 그러므로 형식들의 연속체라는 이념 속에 존재한다. [...] 칸트의 판단력이라는 개념과 낭만주의의 반성개념의 구별은 이러한 연관 속에서는 어렵지 않게 드러날 수 있다. 즉 반성은 판단력이 그러하듯 주관적으로 반성하는 태도가 아니라, 작품의 서술형식 속에 포함되어 존재하고, 비평에서 전개되며 결국 형식들의 합법칙적인 연속체 속에서 실현되는 것이다." (143)


"예술의 이념이라는 개념이 단지 경험적으로 발견된 여러 예술작품들로부터 추상해낸 것이라는 [세간의] 오해로부터 이 개념을 지키고자 하는 [슐레겔의] 노력이었다. 그는 이 개념을 플라톤적인 의미에서의 하나의 이념, 본성상 보다 앞선 것으로서, 즉 모든 경험적인 작품의 실제근거로서 규정하려고 했다." (145)


"비평은 이 사실이라는 개념을 통해 지극히 엄격하게--단순한 의견으로서의--판정과 구별되지 않으면 안 된다."(175)



<초기낭만주의의 예술이론과 괴테>


"낭만주의자들은 예술작품들이 예술과 맺는 관계를 전체성 내에서의 무한성으로서 규정한다. 즉 작품들의 전체성 속에서 예술의 무한성이 실현된다. 괴테는 그것을 다수성에서의 통일로서 규정한다. 즉 작품들의 다수성에서 예술의 통일이 거듭 발견된다는 것이다. 저 무한성이란 순수한 형식의 무한성이고, 이 통일이란 순수한 내용의 통일이다. 괴테의 예술이론과 낭만주의 예술이론의 관계라는 문제는 따라서 순수한 내용이 순수한 (그리고 그 자체 엄격한) 형식과 맺는 관계 문제와 일치한다. [...] 형식과 내용의 관계라는 문제는 그러한 영역 속으로 높여져야 하는 문제이다. 왜냐하면 이 형식과 내용은 경험적인 형성물에서의 기체가 아니라 예술철학의 필연적인 순수한 구별들에 기초를 두고 행해지는, 형성물에서의 상대적인 구별들이기 때문이다. 예술의 이념이란 예술의 형식의 이념이다. 그것은 예술의 이상이 예술의 내용의 이상인 것과 동일하다. 예술철학의 체계적인 근본문제는 따라서 예술의 이념과 예술의 이상의 관계라는 문제로서 정식화될 수 있다. 이 문제의 문턱을 본 연구는 넘어갈 수 없다." (193)

: 형식과 내용의 관계. 아도르노는 이것을 조금 다른 맥락에서 변증법적으로 풀어내는데, 역으로 벤야민이 괴테 대 낭만주의자라는 도식에서 제기하는 질문을 아도르노에게 던지는 것이 생산적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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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소년의 노래 2015.01.26 10:08 Modify/Delete Reply

    이 글과 관련되는 것 같은 글을 하나 게시해봅니다.

    "작품에 대한 만듦새 따지기를 넘어 이면의 의도를 읽고 징후에 대해 논하는 순간 비평의 가치가 작품에서 떨어져나올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 짓거리는 작품 자체에서 연유한 게 아니라 이를 바라보는 평자로 말미암은 것이니까요. 아실테지만, '이 영화가 얼마나 잘 만들었지?'와 '이 영화가 시사하는 바가 무엇일까?'는 아주 다른 질문입니다. 근데 이건 모르시는 거 같아 말씀드린 건데, 그렇기에 후자가 온당한 비평으로 성립하기 위해선 갖추어야할 바가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이 여기에서 실책을 저지릅니다. '이 영화를 ~~게 볼 수 있다'고 할때 ~~게 왜 봐야하는지(이때 왜는 근거는 물론이고, 효용성 역시 포함됩니다) 그때 우리 앞에 주어지는 인식이 어떠한 것인지 치열하게 파고 들어가야하죠. 그냥 이 영화는 이렇게도 저렇게도 볼 수 있다는 말이라면 "나는 이 영화보고 저러저러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라는 초등학생 감상문과 그 양상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실상 대부분의 비평서가, 아니 비평으로 말미암지 않되, 자신의 저술에서 다른 텍스트를 (특정하게)전용專用하는 많은 가치있는 글쓰기가 이를 충족합니다. 비평적 저술이란 점에 포커스를 맞춰, 이 부분이 두드러지는 것들만 훑어봐도 앞서 언급한 카뮈의 시지프 연작이나 고진의 저술만이 아니라 루카치의 저술, 리꾀르의 해석학 논쟁의 종합과 등이 있겠지요(워낙 대표적이라서 꼽은 겁니다.)...... 아니 사실 이렇게 꼽는 것도 뭣하긴 하네요. 대부분이 그 사례로서 들 수 있을테니(그래도 제딴에는 떠올려보는 것만으로도 제가 어떤 말을 하는 것인지 알만한 방식으로 구성된 저술을 든 것이긴 했는데요)...

    여하간 이렇게 말해서 될 거 같으면 제가 이 지경까지 답글을 달 필요도 없었을테니 비유를 바꾸지요. 싸커라인도 다니셨으니 여러 축덕후의 분석놀음를 예로 들겠습니다. 축구에서 제가 어느 경기 하나에 대해 논한다고 칩시다. 그런데 저는 이 경기에서 누가 잘했고 못했고 이런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저 이 경기가 일정한 맥락에서 따져볼 여지가 있기 때문에 해당 경기를 분석하려는 것이지요. 그 시사하는 바란... 뭐, 예를 들어 수비형 미드필더의 포백 보호라고 치죠. 그리고 그 중 사람들이 쉬이 이해하는 커버 플레이가 아니라 포켓 플레이를 논하기 위해서입니다. 대개 축구 사이트에서 이루어지는 경기 분석내지는 개념 분석은 이 수준에서 그치기 마련입니다만 이것이 온당한 비평의 꼴을 갖춘다면 그 이후, 다른 경기나 혹은 다른 (기존의 확립된)개념들과의 연동을 말하는 게 옳겠지요. 중요한 건 그저 해당 경기를 따져보는데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해당 경기를 설명하기 위해 요구된 무엇이라면(그리고 이 자체가 해당 비평의 목적이 되어야한다는 점에서 가치 이야기를 한 것인데) 이것이 다른 경기들에도 마찬가지로 적용이 되고, 따라서 포켓 플레이란 개념을 통해 이전까지 설명하지 못했거나 미진하게 설명했던 여러 부분에 대해 이러저러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해당 분석 속에서 밝혀야죠. 그렇지 않으면 그 경기를 다룬 이유 역시 공중으로 붕 떠버리며, 개별 국면에서의 타당성이야 다르겠습니다만 해당 분석을 써야만했던 이유에 대해선, 굳이 해당 경기를 포켓 플레이란 개념으로 바라봐야하는 이유에 대해선 답하지 못하게 될테니까요.

    제가 말하고자 하는 건, 글쓰기를 하는 사람이 가장 기본으로 갖추어야할 바에 대한 것입니다. 더욱이 인문학적 저술에 대한, 혹은 인문학적 저술에 있어 전용과 도용이이라면, 객관성을 세우는 것은 불가능하고 자칫 논리의 보편성마저 결핍하기 쉽죠. 따라서 자신의 글 속에서 기준을 세우려는 노력이, 그리고 자신의 글이 어디에 어떠한 맥락 하에서 어떠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파악하려는 노력이 필요하고 이에 답하려는 시도가 당연히 요구되어야한다는 말입니다."

    객관과 주관을 이원화하고 하나를 위해 하나를 억압해야한다는 마인드(대게는 주관이 억압되는 경우가 많죠.)는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흔히 보이는 모습들인데, 그런 식의 선긋기를 정말 싫어하는 저 같은 사람 입장에서 이론의 현실화(혹은 현실의 이론화)를 시도하는 begray님의 글은 그저 고맙기만 합니다.

    3번째 단락은 축구글이니 스킵하셔도 될 듯..ㅎㅎ..

    • BeGray 2015.01.26 10:47 신고 Modify/Delete

      소년의 노래 님//

      인용하신 글(직접 쓰신 건가요?ㅎㅎ)에서 주장하는 입장에 저도 전적으로 동의합니다-ㅎㅎㅎ 비평이라는 개념의 역사를 파고들어가면 18세기 영국에서부터 비평의 근거/정당성이 도대체 어디에서 생기느냐를 치열하게 논의하는 걸 볼 수 있는데(장기적으로 이쪽도 좀 살펴보고 싶은 분야이기도 합니다...문헌탐구랑 근본전제 구축하는 논의를 좋아하는 편이기도 하고^^), 한국에서는 그러한 논의들이--학문 또한 '압축적 근대화'를 겪으면서--생략되었기 때문에 심지어 학자들조차도 이런 질문들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게 아닌가 싶네요.

      아마 장기적으로 여기에 관련된 글은 조금씩이라도 쓰게 될 듯한데, 앞으로도 좋은 코멘트 부탁드립니다^^

  2. 소년의 노래 2015.01.26 13:13 Modify/Delete Reply

    당황스럽네요.;;;;...저는 begray님이 해당글을 비판하실 줄 알았거든요. 평소 begray님께서 주장하시는 '이론과 현실의 치밀한 비교 및 대조'와 해당글은 반대되는 입장이 아닌지요?

    참고로 제가 쓴 글은 아닙니다.(전 그냥 인터넷찌질이라 저런 글 쓸 능력 없습니다. ㅋㅋㅋ)

    http://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yke0123&logNo=40195400176&navType=tl

    댓글에 있습니다.

    • BeGray 2015.01.26 19:19 신고 Modify/Delete

      소년의 노래 님//

      그런 의도이신 줄은 몰랐군요 ㅎㅎㅎ 댓글로 인용하신 부분이 조금 표현이 거칠어서 오해의 소지가 있긴 한데, 저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요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영화를 ~~게 볼 수 있다'고 할때 ~~게 왜 봐야하는지(이때 왜는 근거는 물론이고, 효용성 역시 포함됩니다) 그때 우리 앞에 주어지는 인식이 어떠한 것인지 치열하게 파고 들어가야하죠. 그냥 이 영화는 이렇게도 저렇게도 볼 수 있다는 말이라면 "나는 이 영화보고 저러저러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라는 초등학생 감상문과 그 양상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자신의 글 속에서 기준을 세우려는 노력이, 그리고 자신의 글이 어디에 어떠한 맥락 하에서 어떠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파악하려는 노력이 필요하고 이에 답하려는 시도가 당연히 요구되어야한다는 말입니다."

      제가 링크해주신 원글의 논쟁(?)의 맥락을 전부 따라가고 있지는 않고 또 인용문의 글쓴이가 자신의 논의를 다소 혼란스러운 언어로 진술하고는 있습니다만, 적어도 제가 거기서 따온 몇몇 대목들은 그냥 상식적으로 긍정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어쨌거나 태생적으로 주관적 판단일 수밖에 없는 비평이 객관적인 근거 및 논리를 갖추어야 한다는 이야기니까요(물론 저 댓글에서 댓글을 단 이의 진술은 대화라기보다는 혼자 떠드는 것 같은 감이 없잖아 있습니다만)--적어도 저는 그렇게 이해했습니다 ㅎㅎㅎ 물론 객관적인 계기를 강조하다보니 즉물적인 사실, 이른바 '팩트'에만 붙들리는 함정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만, 인용하신 대목만 봤을 때는 거기까지 나간다는 생각은 안 들었거든요-

  3. 소년의 노래 2015.01.26 20:10 Modify/Delete Reply

    제가 배움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당황스럽다는 표현은 실망했다는 표현이 아니니 혹시라도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립니다.

    추가로 저 글을 쓰신 분이

    http://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bakereattack&logNo=80190197402&navType=tl

    이 훌륭한 글(?ㅋㅋㅋ)을 봤다면 동일한 반응을 보였을까가 궁금하네요.
    (자꾸 대댓글 달아서 귀찮게 하는 것 같네요. 답변은 걍 스킵하셔도 돼요.)




    • BeGray 2015.01.26 20:27 신고 Modify/Delete

      소년의 노래 님//

      특별히 불쾌감을 느끼지 않았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누구나 자신이 의도한 내용이 전혀 다르게 수신될 때는 당황할 수밖에 없죠!ㅎㅎ). 링크해주신 글은... 자신의 원칙에 충실한 사람이라면 비슷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까요. 영화에 대한 분석이라기보다는 영화의 몇몇 이미지와 줄거리를 통해 지젝의 개념을 변주하는 셈이니까요. 적어도 제게는 그렇게 읽히네요 ㅎ 지젝은 흥미로운 사람이지만, 이런 방식의 글쓰기가 매력적이거나 유용하게 되기는 쉽지 않지요-

  4. 소년의 노래 2015.01.26 20:55 Modify/Delete Reply

    자...잠깐만요. 저거 본인이 쓴 글 아닌가요?

    • BeGray 2015.01.27 04:18 신고 Modify/Delete

      소년의 노래 님//

      그러니까 최초에 인용하신 리플과 3번 리플에 링크된 글의 필자가 같다는 말씀이시죠?

      일단 최초의 링크에 달린 리플을 클릭했을 때 나오는 블로그와 두 번째 링크가 나오는 블로그는 다른 블로그입니다만... 동일인이 두 개의 블로그를 운영하는지의 여부는 제가 알 수가 없군요(두 사람이든 한 사람이든 저는 저 분들을 모릅니다); 저는 최초의 인용에서 제가 이해하는 원칙들에 견주어 봤을 때 두 번째 가져오신 글이 어떻게 읽히는지를 이야기할 따름입니다-

  5. 소년의 노래 2015.01.27 08:18 Modify/Delete Reply

    메.....멘붕................

    어떻게 된 건지를 설명드리겠습니다. 제가 이 사이트를 알게된 건 한 트위터 유저의 링크 때문이었습니다. 당연히 링크글 하나 때문에 님을 그 분으로 착각하진 않았고 그 분 역시도 책을 좋아하고 또 많이 읽으시는분이고 도서목록을 작성하여 트위터에 게시하시는 등, 무엇보다 생각이나 사상이 거진 비슷하지 않나 해서 님과 그분을 동일인으로 착각을 했습니다. 네. 저 블로그의 주인을 님으로 말입니다. 당연하 블로그 이전을 했구나 생각을 했죠. 무려 몇 달을 그렇게 지냈군요.

    ㅋㅋㅋ 살다보니 이런 일도 있네요. 뭐 누군들 어떻습니까. 이 블로그를 알게된 건 저에게 행운이었고 그럼 된 거죠.

    본문과 관계없는 글이 쓸데없이 길어졌네요. 죄송하구요. 그럼 진짜 전 이만...총총

    • BeGray 2015.01.28 08:15 신고 Modify/Delete

      소년의 노래 님 //

      ㅎㅎㅎ 저는 이 블로그가 처음으로 운영하는 공간이라 ㅎㅎㅎ (그리고 트위터를 하지 않습니다- 거긴 제 글쓰기 스타일 치고는 너무 짧은 작성공간만을 허락해서 ㅎㅎ) 온라인에서 겪을 수 있는 재밌는 해프닝 중 하나로군요!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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