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벨/캐스터잉-테일러, <리바이어던>.
Reading 2015. 1. 31. 04:08베레나 파라벨, 루시엔 캐스터잉-테일러. <리바이어던>(Leviathan). Arete Ton Cinema, 2012. [http://www.imdb.com/title/tt2332522/]
서울 아트시네마에서 <리바이어던>을 보았다. 북대서양에서 조업하는 어선을 촬영한 다큐멘터리라고 아주 짧게 요약은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요약으로는 이 영화에 시청각적으로 엄청난 이미지가 가득 채워져 있다는 것을 표현할 수 없다. 내가 영화를 많이 봤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평생 본 영화 중에서 가장 압도적인 시청각적 경험을 제공한 영화들 중 하나로 별 망설임 없이 꼽을 수 있다.
리바이어던Leviathan은, 영화의 제사epigraph로 제시되듯, <성경>의 욥기에 등장하는 거대한 바다괴물이다. 이 표현은 주로 큰 고래들, 예를 들어 모비딕과 같은 존재들을 지칭하기 위해서 쓰이곤 했으나, 이 영화에서는 어선 그 자체를 가리킨다. 참치잡이배, 새우잡이배로 흔히 불리곤 하는 먼 바다의 거대한 배는 <리바이어던>에서 그 시작과 끝이 불투명한 초월적인 존재로 나타난다; 우리는 어선과 고기잡이의 어떤 하나의 정념으로 언술할 수 없는 끔찍한 초월성을 들춰내는 시선, 일종의 낯설게 하기defamiliarize 정신에 입각한 시선을 제공받으며, 그 시선이 제공하는 이미지들을 겪어내고 최종적으로 어선의 삶-존재 자체를 거대한 바다괴물의 그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리바이어던> 감상의 핵심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카메라가 제일 중요하다. 어떠한 사전정보 없이 영화를 보는 사람은 처음의 초현실적인, 거의 초자연적인 대상을 다루는 호러영화--나는 러브크래프트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를 연상케하는 불분명하고 불길한 이미지들 앞에서 잠시 동안 혼란을 느낄지도 모른다. 이는 밤, 어슴푸레한 붉은 조명, 계속해서 움직이는 기계장치, 여과되지 않은 채 여기저기에서 무시무시하게 들리는 기계음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흐릿하게 그리고 부분으로서만 제공하는 카메라의 시야에 기인한다--실제로 영화가 끝날 때까지 카메라는 단 한번도 전체 배를 한번에 담아내지 않는다; 우리는 단지 부분만을 볼 수 있을 따름이다. 잠시 후에 감상자는 자신이 기계장치를 통해 포획한 물고기를 끌어올리는 어선 위의 협소한 풍경을 바라보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이 깨달음은 "별 것 아니잖아"는 안심이 아니라 오히려 어선의 작동 자체를 불길하고 초자연적인, 거의 공포스러운 대상으로 인식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 작업을 성공적으로 해낸 것만으로도 이 영화의 촬영과 편집이 기법적인 숙달의 완벽함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어두움, 불분명함, 그리고 그 안에서 철저히 동력에 따라 자신의 강철같은 작업을 반복하는 기계들의 저항불가능한 움직임 앞에서 무력해보이는 카메라가 있다면, 이러한 성격을 부여하는 기술적인 요소는 카메라의 위치에 있다. <리바이어던>에서 카메라는 항상 낮은 위치에 있다. 그것은 (휴식을 취하는 어부들을 촬영할 때를 제외하고) 거의 바닥에 붙어 있다. 대표적으로 그물로 끌어올린 물고기들이 바닥에 내팽개쳐져 있을 때 카메라는 그 물고기와 같은 눈높이에 있다. 이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 마지막 숨을 헐떡거리는 고기들에 대한 관객들의 동일시를 이끌어냄과 동시에, 그 위에서 물고기들에게 가해지는 기계적인 작업들을 마치 어떠한 경고 없이 하늘에서 내려찍는 망치처럼 보이도록 함으로서 어업에 초월적인 우월함을 부여한다. 마치 인물의 운명을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움직이는 괴물같은 기계들, 예를 들어 <토이 스토리 3>에서 장난감들을 컨베이어벨트로 끌어당겨 산산조각 내버리는 쓰레기 압축장치처럼, 어떠한 인간적인 정념없이 무시무시하게, 규칙적으로, 기계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끔찍하고 또 두려운 기계들이 있다. <리바이어던>의 시선이 기계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엄밀히 말해 틀렸다. 시선이 기계적인 것이 아니라, 시선이 마주하는 대상이 기계적이다. 시선 자체는 그러한 기계적인 것의 막강함 앞에서 한없이 무력한 존재, 얼어붙은 채로 기계의 작동을 그저 볼 수만 있는 존재가 느낄 체념과 덧없음, 묘한 거리두기와 같은 정념을 담아낸다.
기계화된 것은 인간의 노동행위 마찬가지다. 가오리의 양 날개를 잘라내고 남은 가운데 몸통부분을 바다로 폐기하는 장면들에서 어부들의 숙련된 노동은 한치의 오차없이 같은 행위를 반복한다. 여기서 가오리를 '손질하는' 작업은 마치 기계의 반복된 작동에 의해 무감각하게 행해지는, 그래서 더 공포스러운 처형작업을 떠올리게 한다. 꼬챙이로 양 날개를 꿰고, 양 날개를 순서대로 베어, 아니 차라리 쳐낸다. 이 장면에서 가오리에 어떤 형태로든 이입하지 않기는 어렵다. 인간의 노동은 처형기계처럼 무심하게 반복적으로 작동하고, 우리는 두려워한다. 포획한 물고기들로부터 부레를 발라내는 행위 역시 마찬가지다. 마치 오래된 처형장에 넘쳐나는 핏물들처럼 고기들의 피가 작업대의 수직벽을 따라 줄줄 흐르고, 그 위에서 오로지 칼을 든 팔뚝만이--어부들은 좀처럼 신체 전체가 드러나지 않으며, 오로지 파편화된 형태로만, 마치 특정한 기능만을 수행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계처럼 재현된다--똑같이, 빨리, 쉼없이, 그리고 어떠한 감정도 없이 움직인다. 멍하니 TV를 보다 꾸벅꾸벅 조는 중년의 어부처럼, 인간존재들에겐 그들이 어선의 일부가 아닐 때에는 유의미한 삶 따위는 없다.
밤의 배를 비추는 붉은 조명, 끊임없이 카메라로도 튀어오는 사방에 널린 물, 기괴하게 쿠르르 거리는 소리들... <리바이어던>의 첫 대목은 마치 일종의 내시경을 연상하게 한다. 카메라는 이 바다괴물의 내장을 훑고 있다. 내장 속으로 고기들이 가득 들어온다. 잡힌 고기들로부터 먹을 수 없는 부분이 잘려나가고 남은 토막들만 '소화'된다. '소화'될 수 없는 것들은 붉은 핏물과 함께 바다로 다시 버려진다--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깊은 장면은 가오리들의 몸뚱이가 버려진 뒤 배에서 배설하는 엄청난 양의 핏물들이다. <리바이어던>에 서사가 있다면, 그 서사는 바다괴물=어선의 신진대사 과정으로 이루어져있다. 배는 고기를 잡고, 손질하고, 남는 부분을 버린다; 괴물은 고기를 먹어치우고, 소화시키고, 배설하기를 반복한다. 그 과정에서, 마치 위액이 어떠한 감정없이 대상을 녹여버리듯, 기계와 (기계화된) 인간의 노동은 소화시킬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무감각하게 구별해 골라낸다.
이러한 신진대사과정의 촬영은 단순히 대상의 기계적인/괴물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데 멈추지 않는다. 그러한 신진대사 뒤에는 거의 묵시록적이기까지 한 순간이 있다. 배의 옆에서 생선의 토막들, 그리고 핏물들을 쏟아내는 광경을 관찰하는 카메라는 이윽고 바닷물 속으로 파고들어간다. 배에서 끊임없이 토해내는 잔해들, 핏물은 바다로 들어오는 햇빛과 만나 물거품 사이에서 빛을 발한다. 이 장면은 마치 (특히 파멸의 상황을 다룬 일본 애니메이션 등에서 때때로 나오는) 손상된 시체들의 잔해가 굴러다니는 절대적으로 절망적인 상황을 연상케한다. 갖가지 물고기의 토막들이 불그스름한 핏물, 하얀 거품들 곁으로 빠져나와 천천히 하강하고, 그 곁을 버려진 불가사리들과 무기력하게 생의 마지막 동작을 시도하지만 역시 가라앉을 수밖에 없는 가오리들이 스쳐지나간다.
버려진 신체들과 그것을 품고 있는 물거품에서 카메라가 잠시 벗어나 바다 위의 하늘을 보았을 때, 지금까지 배들을 따라다니던 갈매기들은 일제히 내려와 시체의 잔해들에서 먹거리를 찾아 바다를 파헤친다; 아마도 히치콕의 영화 이후로 새들로부터 이 정도로 비인간적인 공포감을 끌어낸 장면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마치 이 바다에서 유일하게 어선과 연관을 맺지 않고 무언가 구원의 이미지처럼 나타나던 흰 갈매기들이 사실은 시체를 파먹는 또다른 포식자/괴물들이라는 사실을 카메라가 덤덤히 비출 때, 우리는 바다괴물의 행보에 구원의 길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새삼스레 깨닫는다.
산업, 한편으로 기계화되었다는 점에서 또 다른 한편으로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유의미한 영역이 남지 않았다는 점에서 완전히 소외된 인간, 착취당하고 폐기되는 자연, 그리고 이 구조에 빌붙어 주둥이를 붉게 물들인 새떼들--이것들이 응축된 존재가 바로 바다 위의 거대한 괴물, 어선이다. 이것이 <리바이어던>이 드러내고 또 보여주는 '현실'이다.
이 압도적인 영화 앞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따름이다. 가장 인간적인 것이 가장 비인간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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