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야민. <독일 비애극의 원천>

Reading 2015.01.30 13:12

발터 벤야민. <독일 비애극의 원천>. 조만영 역. 새물결, 2008. Trans. of _Ursprung des deutschen Trauerspiels_ by Walter Benjamin, 1928. [Suhrkamp 출판사 발터 벤야민 전집 (_Gesammelte Schriften_) 1.1]


 벤야민의 <원천>을 다시 한 번 읽었다. 2011년쯤에 최성만/김유동 선생 역(한길사 출판, 2009년 2월)으로 이 책을 처음 읽었고, 지난 해 말 기말 페이퍼를 쓰기 위해--당초 아도르노의 "자연사의 이념"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이 책을 집었는데, 결국 이 책에서 더 많은 도움을 받았다--조만영 선생 역(새물결 출판, 2008년 11월)으로 두 번째 읽었다. 그때 2부 "우의[알레고리]와 비애극"이 잘 다가오지 않아서 이번에 도서관에 반납하기 전 2부만 한번 더 읽었다. 조만영 판의 "인식비판적 서설"을 따로 꼼꼼히 한번 더 챙겨서 보고 정리할 생각인데, 일단 지금까지 읽은 부분에 대해 간략한 기록을 남겨둔다.


 먼저 판본에 대한 이야기부터 하자. 최성만/김유동 판을 한번 더 읽지 않고, 무엇보다 독어판을 참고하지 않은 상태에서 번역의 질을 말하는 건 무용하다. 다만 도서관에서 두 판본에 수록된 "서설"의 몇 페이지를 통째로 비교해보았다. 번역 내용은 거의 같았다. 내게는 세밀한 부분에서 어느 번역이 좀 더 정확한지를 직접적으로 판단할 능력이 없다; 다만 로쟈의 블로그 게시물http://blog.aladin.co.kr/mramor/2390953 및 그에 달린 리플을 참고해 볼 때 조만영 판이 다른 판보다 덜 성실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이 점을 제외하고 본다면, 솔직히 말해 두 가지 이유에서 조만영 판을 추천하고 싶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조만영 판이 최성만/김유독 판에 비해 훨씬 한국어로 잘 읽힌다는 것이다. 최성만 선생이 주로 번역을 맡은 국역본 벤야민 선집의 가독성에 대해서--번역의 정확도는 별개로 하고--제법 불만의 목소리가 있는 걸로 아는데, 똑같은 문장을 옮길 때 조만영 판이 좀 더 부드럽고 명료한 한국어로 기술한다. 이는 문장의 내용과 뉘앙스를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에너지 자체가 결코 적지 않은 벤야민과 같은 저자를 읽을 때 매우 큰 강점이 된다. 최성만/김유동 역은 문장의 요지를 옮겼다는 데서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를 독자의 머릿속에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노력이 적지 않게 들어간다.

 두 번째 이유는, 이 역시 간과될 수 없는 부분인데, 조만영 판을 읽을 때 벤야민을 이전의 사상적 맥락과 연결시켜 이해하기 훨씬 좋다는 것이다. 물론 조만영 판이 벤야민을 과도하게 철학적 맥락과 연결시키는 무리수를 두는 게 아니냐는 반론이 제시될 수 있으나 이는 독어역과의 대조만이 해결할 수 있는 의문이니 가능한 분께 맡겨둔다. 우리 문학연구자들이 벤야민의 낭만적인, 우울한 정서만을 강조하면서 쉽게 간과하는 부분이지만, 벤야민은 아도르노가 그러했듯 신칸트주의 학파 안에서 훈련받았고 그에 따라 칸트 이후 독일철학의 언어와 논리 위에서 작업한다; 정확히 말해, "서설"에서 명확히 드러나듯, 예술의 진리를 포착함에 있어 회의주의적 경험론과 자의적 테제를 설정하는 독단론 양자를 거부하고 마치 별자리처럼 여러 요소들의 배열을 살핌으로서 전체적인 구도를 진실되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벤야민의 입장이다--이것이 이전의 예술철학 및 인식론에 대한 비판을 통해 자신의 새로운 인식론-미학을 구축하려는 작업임은 분명하다; 이러한 구도 자체는 박사학위논문 <독일 낭만주의에서의 예술비평 개념>에서도 마찬가지로 드러나는 것이다. 따라서 특히 칸트를 포함한 이전의 철학적 논의들을, 단순한 개념이라기보다는 모티프 및 논리의 차원에서, 이해하는 정도에 따라 벤야민의 언어가 추상적이고 마술적인 언어인지 아니면 깊은 정념을 포함하는 와중에도 명징한 논리적 구도 위에서 사고했음이 분명한 언어인지가 달리 읽힌다(그러니까 벤야민의 애독자라면 적어도 <순수이성비판>은 읽어야 한다--헤겔을 이해하느냐의 여부에 따라 아도르노가 완전히 달리 읽히는 것과 맞먹는 차이가 있다). 적어도 "서설"의 몇 대목을 대조했을 때 내 인상은 조만영 판이 최성만/김유동 판보다 벤야민을 이전의 개념적 언어들에 연결시킨다는 점에서 '덜 마술적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원천>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맨 처음에 방법론의 층위를 다루는 "인식비판적 서설"이 있고--수잔 벅-모스의 책에서는 이 글이 불필요하게 난해하다고 투덜거리지만, 실제로 벤야민의 입장을 이해함에 있어 무척이나 중요한 글이다--, 독일 바로크 비애극 장르를 설명하는 1부 "비애극과 비극", 그리고 바로크 비애극 내에서 알레고리(우의)가 수행하는 역할을 세밀하게 파고드는 2부 "우의와 비애극"이 있다. 쉽게 말해, <예술비평 개념>에서 그러했듯, 가장 추상적인 수준에서 가장 구체적인 수준으로 점점 좁혀들어 간다고 이해할 수 있겠다--본래 이 책이 교수자격논문 용도로 집필되었음을 감안하면 나름의 학적인 논리가 있는 셈이다.

 세 부분 모두에서 벤야민은 공통적으로 기존의 통념에 대한 반박을 시도한다. "서설"에서 예술인식론에 대한 기존의 철학적 입장을 비판하고 자신의 방법론을 개진한다면, 1부에서는 비애극 장르에 대한 기존의 이해를 비판하고 30년 전쟁을 겪은 독일이라는 역사적 맥락에서 이 장르의 성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며, 2부에서는 그동안 상징과 대조되어 폄하되어 온 알레고리 전통이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고 있으며 특히 바로크 비애극에서 알레고리가 수행하는 역할을 다시 이해해야 한다고 밝힌다. 즉 방법론, 장르의 역사적 이해, 장르의 한 형식-모티프의 의미를 이해하는 식의 순서를 취하고 있음을 안다면 이 책을 전반적으로 조망하는 데 어느 정도 가닥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텍스트가 난해한 까닭은 서술 자체가 마치 직접적으로 논리적 연결이 결여된 듯한 기나긴 절들의 연쇄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과 함께, 위에서 적은 것처럼 모든 부분이 기존의 통념을 반박하는 글쓰기라는 점이 한몫을 한다. 특히 2부 알레고리에 대한 설명은 주의해서 천천히 읽어야 하는데, 이는 벤야민이 길게 기존의 알레고리에 대한 비판을 수행하다가 어느 순간 급작스럽게--이런 급작스러운, 마치 비약과도 같은 반전이 벤야민의 특질이라 할 수 있다--자신의 논리를 진전시켜나가는 데 있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독자들에겐 2부 3장에서 갑자기 벤야민이 알레고리의 연쇄에 따른 만물의 영원한 추락을 구원과 연결시키는 대목이 매우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이는 벤야민의 변증법, 즉 바로크 비애극에서 우울과 절망의 이미지들을 알레고리적으로 무한히 이어나가면서 비롯되는 세계의 침강이 갑자기 뒤집혀 그 역시도 신의 계획 안에 있음을 표상하는 깨달음, 구원으로 이어지는 논리 자체의 기이함에도 이유가 있겠지만, 그의 서술이 점차적인 진행이라기보다는 정체와 단절-비약을 반복한다는 점에도 하나의 이유가 있다; 정확히 이러한 단절된 논리들로부터 종합적인 사고가 가능하다는 이론적인 신념이 벤야민에게 있다.

 마찬가지로 "파편과 형세"를 사고한 아도르노가 실제로는 (각각의 부분들이 전체의 논리를 담는다는 점에서) 라이프니츠의 모나드 및 헤겔과 유사한 구조를 띤다면, 벤야민의 변증법은 부분적으로 매개되지 않는 단절된 지점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칸트를, 동시에 이러한 단절들의 나열에서 급작스러운 종합과 구원을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가히 초월적인 신학적 논리를 닮아있다. 이것 자체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러한 사유의 전개 자체가 어려우리라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어쨌거나 <원천>이 이러한 사유의 전개 및 그러한 사유의 전개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특정한 정념을, 즉 벤야민이 무언가의 정념에 대해 말할 때 사실은 필자 자신의 정념과 분리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는데, 가장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벤야민의 대표적인 텍스트로 꼽는데는 이견이 없을 듯하다.

 무한한 전개가 헤겔적인 악무한, 즉 질적인 상승없는 반복으로 그치는 듯 하다가 갑작스레 뒤집혀 천상으로 상승하는 식의 논리를 그러한 전환에서의 매개를 강조하는 아도르노가 쉽사리 수용하기 어려웠음은 당연해 보인다(아감벤은 "왕자와 개구리"에서 이 문제를 다룬 적이 있는데, 그가 매개의 문제가 중요하다고 지적한 것은 옳지만 그는 이 문제를 풀어내면서 매개라는 개념의 중요성을 벤야민 자신보다도 간과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떤 점에서, 타락한 세계와 천상의 구원이 본질적으로 매개되어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면--물론 이는 그저 가설에 불과하다--벤야민이 단순히 무매개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모든 것이, 심지어 가장 타락한 것을 포함해서, 구원을 향한 신의 계획 안에 있다는 논리가 그저 신학인지, 아니면 그 자체로 변증법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지의 여부는 추가적으로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어쨌든 바로크 비애극에 단지 파편의 형태로만 숨겨진 이러한 모티프를 끌어내려는 필사적인 노력이라는 점에서 <원천>이 어떠한 진리내용을 담고 있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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