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남성주체의 자기표상과 여성혐오 이데올로기: 심영, 빌리, 보슬아치

Critique 2014.08.10 04:37

사실 아래의 논의는 3년 전, 즉 2011년 경부터 그 대략적인 얼개가 갖추어져 있었다. 지금에서야 글로 옮기는 것은 다소 늦은 일일지 모른다는 아쉬움이 있으나, 원래 머릿속에 품은 생각은 어떻게든 한 번은 글로 풀어내는 게 성격에 맞기도 하거니와 나 자신이 오늘날의 현상을 설명함에 있어서도 일종의 전제로 간주하는 경우가 적지 않아 하루 시간을 잡아 글을 쓰게 되었다. 어색한 문장이라든가 군데군데 전개가 조금 튀는 부분이 있지만, 대략의 요지를 파악하는 데는 크게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나 보충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기탄없는 지적을 바란다. 어쨌든 이와 같은 논의를 기초로 우파적 심성을 분석하는 작업이 조금 더 잘 진행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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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일차적인 목적은 지난 수 년 간 한국의 여러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뚜렷이 나타나고 있는 여성혐오 이데올로기의 증대를 대중문화의 표상들을 통해 구축된 남성주체의 이미지와 연결지어 설명하는 것이다. 수년 간 온라인 상에서 확산되고 있는 여성혐오는 여성을 오로지 섹슈얼리티와 결합시킨다는 데서 여성-섹슈얼리티를 갈망하는 남성주체를 필연적으로 전제한다. 곧 현재의 여성혐오는 남성주체의 시선에서 구성된 여성혐오로서, 여성혐오의 증대 및 그 성격을 이해하는 작업은 상징적 차원에서 형성된 남성주체를 분석하는 작업과 분리될 수 없다. 흥미롭게도 지난 수 년 간 한국의 온라인 커뮤니티, 특히 '유머'와 관련된 대형 커뮤니티는 온라인 네트워크의 이용자들에게 한국 남성이 상징적으로 어떻게 이해되는가를 참고할 만한 서브컬처적 요소들을 지속적으로 드러내었다. 나는 우선 그러한 서브컬쳐적 요소들의 분석에서 출발하여 한국 남성주체의 상징적 자기표상을 재구성한 뒤, 이를 여성혐오의 논리와 연결시켜 설명하고 최종적으로 수 년 간 한국사회에서 진행되어 온 물질적 변화와 어떤 연관을 맺고 있는지 분석하는 기본적인 논리를 제공하고자 한다. 미리 말해두건대, 여기에서 다룰 자료와 현상들은 전혀 고상하지도, 사람의 마음을 위로해주지도 않는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이러한 논리에 따라 사고하며 때로 이것들을 적극적으로 향유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이데올로기는 자신이 파고들어야 할 논리의 귀천을 가리지 않는다. 따라서 이데올로기를 검토하려는 시도 역시 귀천을 가리지 않아야 할 것이다.




1. 심영(고자)과 빌리(게이)



 한국의 대중적인 온라인 커뮤니티를 조금이라도 접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지난 수 년 간 가장 지속적으로 활용되어 온 "필수요소", 곧 웃음을 유발하는 공통의 코드로 "내가 고자라니"라고 외치는 중년 남성의 이미지를 꼽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2002년 7월부터 2003년 9월 말까지 SBS에서 평균 시청률 30% 가량을 기록하며 인기리에 방영된 드라마 <야인시대>의 등장인물 '심영'은 정치적 혼란기의 적백갈등 속에서 고환("영 좋지 않은 곳")에 총을 맞고 "고자"="성불구자"가 된다. 중요한 사실은 드라마가 종영된 후 수 년이 지난 2008년 경부터[각주:1] 이 대목, 곧 인물이 총을 맞고 성불구자 진단을 받은 뒤 절규하는 내용이 DCinside를 통해 가장 널리 활용되는 이미지가 되었다는 데 있다. DCinside의 이용자들은 초기부터 패러디와 패스티쉬pastiche를 통해 기존의 이미지-질료들을 재구축하여 새로운 효과를 내는 "합성물"을 만들어 내어 네크워크 상의 유희문화를 주도해 왔다. 이들을 거쳐 심영 또는 고자의 이미지는 2008년을 전후로 가장 폭넓게 사용되는 질료가 되었으며 그 시점으로부터 다시 6년이 지나 DCinside가 당시와 같은 영향력을 갖지 못한 지금까지도 여러 대중문화 및 서브컬처에서 망각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나는 곧바로 고자, 즉 남성 성불구자의 이미지가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확산되었다는 사실을 해명하기 전에 그와 유사한 시기, 즉 2000년대 후반부터 마찬가지로 매우 넓게 활용되어 온 또 다른 '필수요소'를 지적하고자 한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게이, 즉 남성 동성애자의 이미지다. 유의해야 할 것은 필수요소로서 게이 이미지의 상승을 1990년대부터 이어져온 성소수자 운동 및 LGBT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변화와는 별개의 흐름에서 파악해야 한다는 점이다. 물론 한국 사회의 성차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바꾸는 데 있어 실제의 성소수자 운동이 수행한 역할을 무시할 수 없으며, 애초에 게이 이미지가 준-공식적인 문화적 요소로 등장할 수 있게 된 배경도 이와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온라인에서 발견되는 특정한 형태의 게이 이미지는 실제의 성소수자의 삶과 무관한, 철저히 (한국의 '표준적 주체'로서의) 이성애자 남성주체의 시각에서 구성된 타자의 상징적 표상이다. 실제로 서브컬처에서 가장 널리 활용되는 빌리 헤링턴("Ang?"이란 문구가 그를 대변하여, 심지어 텍스트로만 이루어진 환경에서도 그의 이미지가 상기된다)[각주:2]은 단순히 남성을 대상으로 성애를 품는다는 점에서 게이가 아니라 (근육질의 신체능력을 바탕으로) "남성을 강간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빌리 헤링턴을 필두로 한 서브컬처에서의 게이 이미지는 고전적인 동성애공포증homophobia에 입각하여 (이성애자) 남성을 성적으로 수동적인 '당하는' 위치로 몰아놓는 특정한 형태의 표상이라는 점에서 상징적인 독해를 요구한다.


 그렇다면 '고자'와 '게이'의 이미지가 동시대의 한국 온라인 커뮤니티 및 서브컬처에서 너무나 폭발적이어서 일상적인 표상으로 받아들여질 정도까지 수용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이와 같은 코드를 활용한 서브컬처 텍스트 두 편을 살펴보겠다. 먼저 2009년 2월에 DCinside 합성 갤러리에 올라와 상당한 인기를 끌었던 Dr. Gothick의 음성합성물 "肉중주"를 보자[각주:3]. 여기에서 Dr. Gothick("고두익")은 노골적으로 남성 강간의 구도를 활용한다. 저격을 당해 "고자가 된" 심영을 의사선생, 김두한, 상하이 조가 계속해서 삽입 섹스의 형태로 강간한다(침대의 삐걱거리는 소리와 신음 소리가 성행위를 가리키는 오래된 대체물임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미군"이 빌리 헤링턴임을 알려주는 소리(점점 커지는 "Ang")는 최종적으로 심영이 빌리 헤링턴으로부터 가장 끔찍한--왜냐하면 근육질 백인 게이의 남근은 앞서의 등장인물들의 것보다 더 클 것이므로--곤경을 맞이할 것임을 말해준다. 이 텍스트에서 심영=고자는 단순히 자신의 남근을 거세당할 뿐만 아니라 다른 남성들의 성기에 관통당함penetrated으로써 명백히 수동적인 위치에 놓인다[각주:4]. 특히나 빌리 헤링턴=(남성을 강간하는)게이와 대면하는 순간, 거세당한 남성은 오로지 삽입당할 수밖에 없는 기관인 항문(명백히 여성의 질에 대응하는)만을 가진 존재, 더 크고 강력한 존재의 성기에 삽입당하는 존재로서 기존 남성주체의 지배적인 위치를 상실하고 "여성화"되는 것이다. 이 작품 이상으로 인기를 끈 엉덩국의 온라인 만화 <성 정체성을 깨달은 아이>[각주:5]를 보자. 줄거리는 분명하다. 갓 "성 정체성을 깨달은", 그러니까 사실은 자신의 성 정체성을 아직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한 소년 "존슨"("존슨"은 남성 성기를 가리키는 온라인 상의 속어 표현이다)이 '진짜' 게이들을 만나고 결국에 몇몇 과정을 거쳐 그들의 일원이 된다는 이야기다. 여기에서 '게이바'의 (당연히 근육질의 건장한 육체를 가진 것으로 그려지는) 게이들 앞에 선 소년은 주저하고 두려움에 빠지며--'저택 입구의 문이 잠기는' 공포영화의 클리셰가 활용된다--이후 게이들은 존슨을 성적으로 추행한다. 게이들은 존슨의 (전형적인 여성적 외모의 상징인) "큰 엉덩이"를 스팽킹하고 항문에 딜도를 꽂아넣으며, 이후 추격전에서 붙잡혔을 때 아마도 삽입섹스-강간이 이루어질 것임이 암시된다. 핵심은 게이들과 대면한 존슨의 몸이 남성적 성행위의 대상으로서의 "여성적" 육체의 특징을 가진 것으로 표현되며, 게이들과 대면하여 남근 혹은 유사-남근을 삽입당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이 "게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평범한 이성애자 남성이었을) 존슨의 성 정체성이 실제로 변형된다는 것에 있다.


 이 두 텍스트를 독해했을 때 고자=남근 거세의 모티프와 게이=남성 강간(남성주체가 성기를 삽입당하는 것)의 모티프는 분리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하나의 의미를 표현하고 있음이 분명해진다. 곧 한국사회에서 표준적인 이성애자 남성은 기존까지 자신에게 부여되어 온 특권적인 위치, 곧 남근=권력을 가지고 있으며 삽입하는=능동적인/지배적인 위치를 상실했다는 것이다. 남성주체는 고자가 되었을(남근을 거세당했을) 뿐만 아니라 이제 더 강력한 남근을 지닌 타자(게이)에 의해 삽입당하는 주체로 전락한다. 요컨대 고자-게이 모티프는 2000년대 후반 이후 한국의 남성주체가 스스로를 어떻게 표상하는지를 상징적인 층위에서, 그러나 매우 직설적으로 드러낸다. 곧 일종의 무능력, 무기력, 수동성, 발기불능과 같은 좌절섞인 정념들이 이러한 모티프들로 둘러싸인 남성주체의 곤란을, 적어도 남성주체가 그와 같은 방식으로 이해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2. 보슬아치(여성혐오), 원한ressentiment의 심리구조



 흥미롭게도, "보슬아치"라는 단어가 남성중심적 온라인 커뮤니티 곳곳에서 사용되며 퍼져나가기 시작한 시점은 고자 및 게이의 모티프가 일반화되고 있던 때와 근접한 2009년 경이다[각주:6]. 이 속어적 표현은 직관적으로 알 수 있듯이 여성 성기를 지칭하는 표현과 "벼슬아치"가 결합한 단어로,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다양한) 이윤추구를 위한 하나의 수단("벼슬")으로 간주하는 여성의 행동양식을 가리킨다. 물론 그보다 수 년 전에 등장한, 그리고 아마 직접적으로 연계된다고 봐도 크게 틀리지 않을 "된장녀" 및 "꼴페미"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근대 서구를 포함한 다양한 시공간에서 여성폄하-혐오의 이미지는 무수히 발견된다. 그러나 "보슬아치"는 매우 노골적으로 섹슈얼리티와 여성, 그리고 자본주의적 인간관계의 문제를 결합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조금 주의깊게 살필 필요가 있다. 주지하다시피 사회의 자본주의화가 진행되면서 여성을 자본 혹은 그와 유사한 사회적 권력에 자신을 판매하고 그 부를 향유하는 '창녀'로 격하시키는 구도는 드물지 않게 나타난다. 예컨대 1910년대에 절찬리에 공연된 <장한몽>(長恨夢)[각주:7]은 오늘날까지 기억되는 "이수일과 심순애", 즉 자신의 사랑을 버리고 부유한 김중배와 결혼하는 여성인물을 묘사한다. 이러한 텍스트들에서 나타나는 여성의 성과 자본의 교환관계는 "보슬아치"에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이 표현은 직접적으로 여성 성기를 거명한다는 점에서 조금 더 노골적인 여성혐오/폄하 전략을 취하고 있는데, 곧 '동물적인' 섹슈얼리티[각주:8]를 표현하는 여성 성기--물론 이때의 섹슈얼리티는 이러한 명명을 수행한 남성주체의 삽입욕망을 투명하게 드러낸다--가 여성을 대체하며 다시 이러한 대체물이 자본주의적 상품교환관계의 판매되는 상품으로 간주된다. 즉 이 표현에서 여성은 시민이라기보다는 (푸코적 생명정치biopolitics를 염두에 두면 조금 더 이해하기 쉬울텐데) 동물적 존재로, 또한 자본 및 권력에 기꺼이 자신을 판매하는 (도덕적으로 열등한) 존재로서 이중적으로 비하당한다. 최근에 다시 유행하는 여성혐오적 유머[각주:9] 역시 '이중적 비하'의 이러한 도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나는 이러한 표현의 등장을 곧바로 사회적으로 분석하기 전에 이 표현에 함축된 전제들을 조금 더 밝혀보고 싶다. 앞서 짧게 말한 바와 같이 "보슬아치"는 여성을 두 가지 항목, 곧 (동물적인) 성과 자본주의 상품판매관계와 연결시킨다. 핵심은 그 두 가지 항목이 전부 남성주체의 성욕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다. 왜 여성의 성이 표상되는 질료가 여성의 성기여야만 하는가? 당연히 남성주체의 삽입이 가능해야 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벼슬아치' 또는 성 판매자의 역할은 성 구매자의 존재를 필요조건으로 요구한다. 그리고 삽입과 구매는 각각 성적인 관계와 상품교환관계에서 지배적인 위치와 연결되어 있다. 다시 말해 앞서 말했듯 "벼슬아치"가 성=동물적, 자본=비도덕적 존재로 이중적으로 여성을 비-주체화하는 표현이라면, 여기에서 여성에 대해 이중적으로, 곧 성과 자본의 관계를 통해 지배권을 행사하고자 하는 남성주체의 욕망을 끌어내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나는 단순히 이와 같은 여성혐오적 표현을 통해 남성주체의 지배욕망이 발현된다는 수준의 분석에 머무르고 싶지 않다. 엄밀히 말해 이와 같은 욕망은 대부분의 근대사회에서 편재한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그러한 구도의 존재 자체에 질문하기 전에 그러한 욕망이 거의 항존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왜 2000년대 후반의 시점에서 가시적으로 드러날 정도로 여성혐오가 나타났는가, 그리고 왜 새삼스럽게 "보슬아치"라는 표현이 등장해서 유행하는가를 질문해야 한다. 즉 여성을 종속시키려는 의지가 존재해왔고, "보슬아치"는 어떤 면에서 그와 같은 의지를 너무나 충실히 실현하는 여성상을 표현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왜 분노와 혐오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여기에 앞서 1절에서 수행한 분석을 참고할 수 있다. 즉 오늘날 온라인에서 한국의 남성주체는 스스로를 거세되었으며 강간에 취약한, 다시 말해 성적인 지배권을 박탈당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성적으로 지배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는 존재로 표상한다(이는 심지어 사회적으로 지배적인 위치에 있는 엘리트 남성들조차도 종종 "여성상위시대"를 노골적으로 불평한다는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상징적 표상'이 가장 곤란해 처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남성 주체에게 여성을 지배하는 역할을 요구하고 부여하는 기존의 논리와 맞닥트리는 순간이다. 쉽게 말하자면, "보슬아치"들은 남성에 의한 지배를 거부하기 때문에 남성주체를 곤란에 빠트리는 게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남성에게 지배자로서의 역할을 요구하기 때문에 무능력하게 표상된 남성주체를 곤란에 빠트린다; "보슬아치"는 남성주체에게 스스로의 무능력과 성취될 수 없는 성욕만을 상기시킬 뿐이다. 남성주체는 지배하기 위해서 폄하하는 대신 지배를 할 수 없기 때문에 분노하고, 증오하며, 원한ressentiment--정확히 "약자의 원한"이라는 니체적인 모티프를 참조할 수 있을 것이다--을 품는다. 그것이 무력한 스스로에 대한 질책이 아니라 마땅히 자신이 지배해야 하지만 지배할 수 없는 상대에 대한 원망으로 투사하는 기제와 여성혐오의 정서는 근본적으로 무관하지 않다. "나는 무력하다, 그러므로 네가 나쁜 것이다"; 이러한 심리구조가 여기에 있다[각주:10].




3. 조건: 물질적인 것과 이데올로기의 간극



 지금까지 두 절을 거치며 한국 남성주체의 자기표상과 이것이 어떻게 여성혐오의 심리구조로 이어지는가를 서술했다. 나는 3절에서 이러한 심리구조가 어떻게 등장하게 되었는가를 거칠게나마 설명해보고 싶다. 2절의 마지막에서 밝혔듯 "보슬아치"와 같은 여성혐오는(나는 여성혐오 일반을 서술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남성주체가 스스로의 무력함을 자각하게 되는 메커니즘과 무관하지 않다. 이를 조금 다르게 서술한다면, 남성주체는 성욕의 대상으로서의 여성 앞에서 자신의 현재적 조건(고자-게이의 모티프로 대비되는 무능력)과 자신에게 주어진 '규범'(성과 자본에서 지배적인 위치에 있을 것) 사이의 간극을 마주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원한의 심리구조는 이러한 간극이 기존의 논리로 포섭될 수 없을 때 출현하는 하나의 형상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눈을 돌려 이와 같은 간극이 드러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벌어지게 된 이유를 질문할 수 있겠다.


 그것이 연애의 형태이든, 결혼 및 (이성애적) '정상가족'을 생성하는 형태이든 여성을 소유/종속/지배/부양하는 과정은 그와 같은 이데올로기에 여전히 속박된 남성주체에게 일정 수준 이상의 지배력을 요구하며, 오늘날 그 지배력은 자본의 형태로 표현된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오늘날 한국의 조건은 2-30대 남성주체들에게 여성을 소유하기 위해 필요한 자본축적을 허락하지 않고 있다. 굳이 대단한 경제적 지표를 참고하지 않더라도 오늘날 이러한 인식은 결혼, 연애, 출산을 포기한 "삼포세대"[각주:11]와 같은 용어를 통해 사회구성원들 자신들에게 인정받았으며, 실제로 전체 가구수의 1/4에 육박한 1인 가구수[각주:12]와 같은 변화는 (집값을 제외하고--그러나 집값이야말로 가장 큰 비용이 아닌가?) 7천만원에 육박하는 평균 결혼비용[각주:13]과 함께 고려할 때 줄어든 실질소득의 압박이 연애 및 결혼, 그중에서도 특히 여성의 종속을 요구하는 관계를 성립시키기 위한 자본축적을 무척이나 어려운 것으로 만들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압박은 여성들에게도 마찬가지로 가해지며, 구직을 포기하고 결혼을 통해 생계를 확보하고자 하는 (아마도 여성의 경제적 독립을 주장하는 입장에서는 거의 반동적인 사태로 비춰질) "취집"과 같은 선택은 그러한 곤란을 보여준다. 요컨대 남성주체들이 과거에 가능하리라고 믿었던 형태로 여성에 대해 지배적인 위치를 확보할 수 있는 가능성은 상당히 줄어들었다. 물론 이전의 시대에도 가구의 실질적인 소득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작지 않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남성이 여성/가족을 부양하는 것처럼" 믿어져 왔으며, 그와 같은 믿음을 깨트리지 않을 정도의 자본을 남성들이 획득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하자. 오늘날의 차이는 그러한 믿음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는 데 기인한다.


 이와 같이 물질적인 조건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여성에 대해 지배적인 위치를 점유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가 한국 남성주체의 의식을 점유하고 있는 상황에서 (앞서 말했듯 여성에게도 작용하는 경제적 압박이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유지에 기여하는 면도 있다) 현실과 규범 사이의 간극은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분명히 나타난다. 지금과 같은 물질적인 조건 위에서 한국의 남성주체는 현재의 이데올로기가 그에게 부과하는 이상에 부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없다. 규범-이상에 부합할 방법을 찾지 못한 남성주체의 곤란은 앞서 1절과 2절에서 묘사한 두 가지 방식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남성주체 자체의 무력함을 상징적으로 표상하는 모티프들(고자-게이)이며, 다른 하나는 그와 같은 무력함으로 인해 발생한 원한을 (충족될 수 없는) 욕망의 대상에게 투사하는 여성혐오의 모티프다. 전술한 바와 같이 얼핏 무관한 것처럼 보이는 두 가지 모티프는 사실 동일한 구도를 구성하는 양면과 같다. 곧 무력함이 여성혐오를 낳으며, 여성과의 대면이 무력함을 일깨운다. "원한의 심리구조"는 이 둘을 연결시켜 하나의 현상으로 파악할 때 나타난다. 이는 애초에 한국의 남성주체가 이성애적 섹슈얼리티의 구도에 기초하는 한, 그리고 그 관계가 권력-지배관계의 형식을 띠고 있는 한 피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나는 모든 문제를 리비도의 차원으로 환원시킬 생각은 없으며, 원한의 심리구조는 리비도의 문제에서 나타났을지언정 리비도의 차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논의를 다소 비약시키는 것이 허용된다면, 나는 원한의 심리구조로부터 출발할 때 2010년대 한국에 새롭게 나타난 극우파적 성격을 해명하는 하나의 방법이 열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각주:14]. 곧 일베와 같은 초-극우파적 담론만이 아니라 '어버이연합'을 위시한 보수폭력집단 또한 그 심리적인 동력을 원한의 심리구조로부터 끌어내고 있는 면이 있다. 뒤집어 말한다면, 오늘날 등장하는 극우파적 성격은 물질적인/제도적인 조건에서의 전환만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차원에서의 전환이 함께 실행될 때 비로소 극복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글에서 시도된 것은 한국 사회의 이데올로기 비판을 위한 하나의 정초적 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 서브컬처에 대한 자료를 모아놓은 리그베다위키의 "내가 고자라니" 항목 참조(참조일 2014년 8월 9일). http://rigvedawiki.net/r1/wiki.php/%EB%82%B4%EA%B0%80%20%EA%B3%A0%EC%9E%90%EB%9D%BC%EB%8B%88 [본문으로]
  2. 리그베다위키 "빌리 헤링턴" 항목 참조(참조일 2014년 8월 9일). http://rigvedawiki.net/r1/wiki.php/%EB%B9%8C%EB%A6%AC%20%ED%97%A4%EB%A7%81%ED%84%B4 [본문으로]
  3.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composition_dc&no=75615&page= (참조일 2014년 8월 9일) [본문으로]
  4. 고대 그리스의 남성 동성애 관계에서 삽입 및 피삽입과 능동성/수동성이 갖는 의미에 관해 서술한 미셸 푸코의 <성의 역사 2권: 쾌락의 활용>을 참조한다면 내 진술이 조금 더 분명히 이해될 것이다. [본문으로]
  5. http://blog.naver.com/undernation/130100558497 참고일 2014년 8월 9일. [본문으로]
  6. 리그베다위키의 "보슬아치" 항목 참조. (참조일 2014년 8월 9일) 이 항목에서 제시하는 발생원인 등의 항목은 비판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http://rigvedawiki.net/r1/wiki.php/%EB%B3%B4%EC%8A%AC%EC%95%84%EC%B9%98 [본문으로]
  7. <장한몽>은 근대 일본의 작가 오자키 고요의 <금색야차>를 번안한 것이다. 기초적인 사실관계 및 줄거리는 한국어 위키피디아 <장한몽(조중환)> 항목 참조. (참조일 2014년 8월 9일) http://ko.wikipedia.org/wiki/%EC%9E%A5%ED%95%9C%EB%AA%BD_(%EC%A1%B0%EC%A4%91%ED%99%98) [본문으로]
  8. "보슬아치"와 연결되는 표현인 "부왁"이 애초에 여성 성기에서 갑자기 애액이 폭발적으로 분출되는 장면을 묘사하기 위한 의성어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는 마찬가지로 여성을 동물적인 섹슈얼리티에 종속되는--그러므로 특정한 성적 자극을 가하면 자기 주체성을 상실하고 동물적인 성욕, 남성의 욕망에 적극적으로 부응하는 성욕에 지배당하는--존재로 그려내는 서사와 관련이 있다(이 점에서 한국 남성주체의 표현에 일본의 성인만화가 끼친 영향을 분석하는 것은 흥미로운 작업이다). [본문으로]
  9. "연봉 5억 이상 결혼할 남성 구합니다"의 여성혐오 이데올로기에 대한 간략한 분석노트로 나의 글을 참조 . http://begray.tistory.com/115 [본문으로]
  10. 여기에서 다루지는 않겠지만, 한때 온라인만이 아니라 오프라인까지 한국사회를 뒤덮었던 "찌질이" 정서가 변모하는 과정은 이러한 구도와 무관하지 않다. [본문으로]
  11. 한국어 위키 "삼포세대" 항목 참조(참조일 2014년 8월 10일) http://ko.wikipedia.org/wiki/%EC%82%BC%ED%8F%AC%EC%84%B8%EB%8C%80 [본문으로]
  12. 중앙일보 기사 참조(참조일 2014년 8월 10일)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2309098 [본문으로]
  13. 링크한 중앙일보 기사 참조(2014년 8월 10일).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5200887&cloc=olink|article|default [본문으로]
  14. 우리는 2008년 여름, 곧 "고자"의 모티프가 본격적으로 출현하기 시작한 시점과 반정부/저항운동의 성격을 띠었던 광우병 촛불의 최종적인 패배의 시점이 꽤나 근접해 있음을 상기할 수 있다. 촛불의 패배와 극우파적 심성의 등장을 연결시키는 논의로 박가분의 <일베의 사상> 등을 참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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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박은하 2014.08.16 16:05 Modify/Delete Reply

    잘 읽었습니다. ㅎㅎㅎ

    1. 유머코드가 된 게이에서 분석을 시작한 것이 흥미롭네요. 난 생각도 못 했고 다른 글에서도 아직 본 적이 없는데. '근육질의 우락부락한 게이'에서 '강간당할 수 있다'는 공포를 읽는 대목이 설득력있어요. 여성 BL물에서 게이는 꽃미남의 이미지로 나오거든요. 최근엔 게이=여성스럽다는 공식이 깨지긴 했지만 여성향 소설에서 정말 '우락부락한' 게이는 드물죠. 어쨌거나 강간당할 수 있다는 공포에서 출발한 건 '일베=벌레' 이런 도식마냥 분석의 대상을 타자화하지 않은 점에서 좋았어요.

    2. 이수일과 심순애에서 읽는 보슬아치 ㅋㅋ 한국의 여성혐오는 꽤나 오래된 정서인데 일베가 주목받으면서 새로운 현상인 것마냥 조명되고, 여성혐오의 주체들이 한국에서 아주 특수한 사람들인 것인양 오히려 보통의 남성문화에 면죄부를 주는 게 불편했는데. 아예 이수일과 심순애 시대로 훅 끌어올리는 방법이 있었군요. (여성 스스로 느끼는 여성혐오는 다음 번에 만나면 전해드릴게요 )

    3.
    여하간 남성의 무력함이 여성혐오를 낳았다는 분석은 매번 나오던 것이지만, 게이 이미지에서 풀었다는 점이 흥미롭고 <무력함이 여성혐오를 낳으며, 여성과의 대면이 무력함을 일깨운다>는 요약이 선명하게 잘 들어옵니다.

    4. 다음은 결론에 대한 의견인데 <애초에 한국의 남성주체가 이성애적 섹슈얼리티의 구도에 기초하는 한, 그리고 그 관계가 권력-지배관계의 형식을 띠고 있는 한 피할 수 없는 문제> 부분은 궁금한 게 있네요. 일단 '이성애적 섹슈얼리티'라는 표현을 별로 안 좋아하는데 이것의 대립항이 '동성애적(동성애를 포함하는) 섹슈얼리티'인가 아니면 탈섹슈얼리티 맥락에서 문제를 바라보는 것인가. 늘 헷갈리거든요.

    5.
    모든 것을 리비도의 문제로 환원하지 않는 학자의 신중한 자세 좋습니다! ㅎㅎ 근데 전 요즘 리비도 측면에서 깊이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왜냐면 여성혐오는 (아마 하층계층에 퍼져 있을 거라 짐작은 되지만) 일베 학력인증에서도 나타나듯이 전 계층에게 다 나오거든요. 그런 보편성이 더 중요한 요소가 아닐까 해요.

    그리고 거세공포하니 떠올렸는데 어버이연합세대는 기본적으로 한국전쟁으로 인한 전쟁공포가 있는 사람들인데, 연결지점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6. 첨언으로 여성이라는 변수의 문제.

    물적 요소에는 1인가구, 결혼비용과 더불어....지금 80년대생 결혼적령기 남성들이 통상 결혼대상인 5세 연하 여성과 비교했을 때 인구가 30만명이 더 만다는...ㅠㅠ 남아선호사상의 부메랑이 어쩌면 계층을 초월해 가장 위협적인 요소가 되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이에 더해 여성에게 독신이란 자립, 쿨한 여성 이런 이미지가 있는데 남성에게 독신은 또 다른 이미지겠지요. 집나간 노라는 있어도 집나간 노라 남편은 없으니???

    여성의 경우 페미니즘, 알파걸, 여성상위시대의 시대가 보이는 듯 했으나....소위 말하는 부르주아 여성의 이슈가 부각되면서 이런 여성들은 겉으로는 여성상위시대니 뭐니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 여성집단 내에서도 소수죠. 얼핏 느끼기엔 90년대까지 엄마들은 내심 '딸들아 알파걸로 자라라'고 키웠지만, 막상 자라본 딸들은 알파걸은 소수만이 될 수 있음을 깨닫고, 오히려 보수정 남녀관계로 투항(그러나 여성의 입장상 완전히 남성이 바라는 여성의 성역할일 수는 없고)

    이것이 아마 남성이 여성을 만나 무력함을 확인하는 구조가 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 BeGray 2014.08.16 18:18 신고 Modify/Delete

      재밌게 읽으신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ㅎㅎ 꼼꼼한 코멘트도 감사하고요!

      2. 애초에 성과 권력관계가 분리되지 않는 남성중심사회에서 여성혐오가 없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ㅎ 특히나 여성지배를 두고 남성 간의 경쟁구도가 확립되는 곳이면 더더욱이요.

      4. 한국사회는 기본적으로 이성애적 섹슈얼리티 및 그에 기초한 가족구도가 너무나 광범위하게 '정상'으로 깔려있는 곳이죠. 물론 이것도 자본의 전개 앞에 빠르게 침식되고 있고, 그에 대한 반동이 나타나고 있지만요("어버이연합"이나 "엄마부대봉사단"도 이런 면이 없지는 않을 겁니다). 저는 이것의 참다운 대립항이 섹슈얼리티의 차원에서만 진행되리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어차피 우리가 목도하는 표현형들은 섹슈얼리티/계급/민족-인종/지역 등등이 함께 중층결정하는 것들이라...(방법적으로 섹슈얼리티에 집중해서 다룰 수는 있겠지만, 현실에서 그렇게 사고한다면 그건 정말 나이브한 거죠-) 일단 저는 섹슈얼리티 자체의 폐기보다는 (마치 맑시스트들이 계급의 폐기로 나아가는 것처럼) 섹슈얼리티에 결부된 지배 및 규범성의 계기들을 폐기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쪽입니다.

      5. 그런 보편성의 뉘앙스를 붙이기 위해서 '상징적' 이해라는 말을 쓰기는 했어요. 나 자신이 어떤 계급에 속해 있더라도, "우리 남자들은 이런 대우를 받는다"는 식의 이해랄까요. 예컨대 명백히 한국사회의 지배층에 편입한 남성들조차 여성상위 운운하는 피해의식을 갖는데, 이때 이 사람들은 자기의 계급의식 이전에 성정체성에 따라 자기를 규정하고, 그 기준점을 "한국 남자들은 이런 대접을 받는다"는 상징적 이해에서 참고하는 거죠. 다만 그 상징적 이해 자체가 전체적인 경제적 하강기 안에서 변모한다고 할 수는 있겠습니다.
      /
      어버이연합세대는 통상적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논리에 훨씬 잘 부합하는 것 같아요. 거세공포-아버지(국가=나랏님)에 대한 두려움-국가=자아 이상Ich ideal-"이제 내가 아버지다!"는 동일시. 그게 군사적 문화에 대한 강한 동질감("엄마부대"봉사단은 가족-군대-국가의 3일치를 보여주죠!)과도 연결이 되어 있을 거고.

      6. 실제로 인구 차이가 그 정도로 심하군요. 제가 통계를 아직 잘 참고를 못하다보니 ㅠㅠ 좋은 보충 감사합니다!

  2. 박은하 2014.08.16 16:07 Modify/Delete Reply

    인간의 정보처리능력은 별로 발달하지 않았는데 쏟아지는 정보만 발달하니 여유 갖고 진지하게 글 읽는 기회는 자꾸만 줄어드네요 ㅠㅠ 대학 때는 하루 2번 지하철 40분 동안 무언가를 읽는 게 지금 생각해보면 꽤 도움이 됐는데. 음 암튼 간만에 각 잡고 읽었습니다. 이런 재밌는데를 갖고 있었다니 ㅋㅋㅋ 종종 불러줍사~

    • BeGray 2014.08.16 18:24 신고 Modify/Delete

      저야 블로그에 꾸준히 뭔가 쓰기는 할 겁니다 ㅎㅎㅎ 가끔 관심있으실 글 같은 거 나오면 페북으로 보내드리겠지만, 종종 자발적(?)으로 와주세요 ㅎㅎ

      이전에 쓴 글 중에서...몇 개 흥미있으실지 모를 것들을 골라보면,

      "어버이연합의 정신구조"에 대한 짧은 메모가 담긴 것.
      http://begray.tistory.com/108

      한국어 학술문장 쓰기의 문제
      http://begray.tistory.com/79

      위키와 대중교육 문제
      http://begray.tistory.com/10

  3. 박은하 2014.08.16 16:12 Modify/Delete Reply

    아. 하나 더 첨언. 이 글의 주제와 약간 비껴서있을 수도 있지만) 90년대 이후 자라난 딸들의 입장에서 알파걸은 소수만의 전유물일 뿐 아니라, 막상 알파걸 돼 보니 경쟁사회 노출되고 육아부담 가중되고 더 피곤하기만 하더라 ㅠㅠ는 회의론이 들죠. 그래서 알파우먼이 되기로 선택한 이들의 전략은 아마도 결혼이나 출산을 포기한ㄴ 것일테고 (그리고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남성 경쟁들과, 알파우먼과 거리가 먼 여성 선후배들에게 적대적일테고) 아니면 오히려 자기 딸들에게는 살아보니 그냥 전통적 역할이 낫다더라....라고 말을 하거나 그런 상황이 아닐지. 어머니가 딸에게 원하는 직업군 중 1순위가 교사인데 아마도 이 타협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 BeGray 2014.08.16 18:28 신고 Modify/Delete

      여성주체들의 상징적 자기이해는 사실 제게 덜 친숙한 분야라 함부로 쓰기는 어려운데, 물적 조건의 변화에 따라 말씀하신 것처럼 '보수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경향도 있는 것 같습니다. 최근에 서울대에서 있었던 여성징병제 요구시위랑 국가주의의 문제로 쓴 노트를 첨부합니다(http://begray.tistory.com/103). 저의 감각은, (퀴어 정도를 제외하면) 지난 10년간 거의 모든 부분에서 한국사회의 가치기준이 보수적으로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은 교사도 점점 다니기 힘들어지고 있다는 게 또 문제랄까요. 가정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이전의 멀쩡한 직장들이 점점 인간적으로 괴로운 곳이 되어가고 있네요-

  4. 개선비 2015.06.10 18:55 신고 Modify/Delete Reply

    제가 저번에 말씀드렸던 것도 물질적인 토대에 대한 얘기였는데 약간 방향성이 다릅니다.
    무력함에서 여성혐오로 바로 가는 구도가 아닙니다.
    즉 이념적 양성평등이 아닌 물질적 평등의 요구(이것은 이념 추구와 같은 것이 될 수 없는 비열한 것입니다.)가 발생했지만,
    현재 상황이 그러한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지적하신 취집문제 또한 여기에 속할 수 있습니다.)

    남성이 지배하고 싶지만 지배할 수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제가 보기에는 지배하고 싶지 않지만, 지배구도로 몰고가기 때문입니다.
    이후 현상은 지배의 포기를 아예 생활패턴으로 만드는 초식남 형태가 될 것입니다.
    다만 지금의 분노는 일종의 시기심(jealousy)에 기인한다는 주장입니다.

    • BeGray 2015.06.10 22:25 신고 Modify/Delete

      음, 설명이 지나치게 간략해서 잘 와닿지 않습니다.

      1) "물질적 평등의 요구"가 무엇을 지칭합니까? 성차와 무관한 모든 사람의 재산의 평등?

      2) 저는 "지배하고 싶지 않다"는 프레임이 존재할 수는 있지만, 현재로서는 그게 한국사회의 남성성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기제로 작동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비교적 전통적인 가부장제의 프레임이 정상작동하지 않는 상태에서 그에 대한 대응으로 출현한 한 가지 생활양식 정도로 보는 게 맞겠죠. 물론 성 역할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가 급격히 바뀌고 있는 것도 중층결정의 한 가지 요소로 간주해야겠지만 말입니다.

      3) 지금 현준 씨의 설명에서 빠져있는 성욕의 해명을 어떻게 전개할 것인가가 중요한 관건이라고 봅니다.

      4) '시기심'이 성차라는 '형식'을 띄고 표현된다고 주장하려면, 왜 시기심을 갖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남성이라는 범주로 정의하는가라는 질문을 반드시 던져야만 합니다. 현준 씨가 가정하고 있는 흐름이 좀 더 명확해지려면 성차의 포기, 그러니까 스스로의 정체성을 성적인 범주로 포획시키지 않는--예를 들어 성차가 발가락 모양이 다른 정도로나 취급되는 상황을 떠올릴 수 있겠죠--국면을 지향한다고 전제해야 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지금의 설명에서 지배의 포기-초식남과 같은 개념을 사용하면서도 여전히 성차의 범주가 보존되고 있다는 상황 자체를 반문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 개선비 2015.06.11 00:05 신고 Modify/Delete

      1) 물질적 평등이라기보다는 누구 하나가 이득보는 꼴을 못보겠다는 마인드입니다. 정당한 이유(보통 여기서는 제도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과정, '노력' 같은 것만 해당됩니다)가 아닌 이상 배아프다는 거죠.

      2) 가부장제에서 탈피하고 있다고 보는지라... 제가 인터넷 커뮤니티에 기거했을 당시에 심도깊게 댓글놀이를 하면서 물어본 결과, 권위보다는 실리(그니까 데이트에서 자기가 부담을 다하면서까지 자존심 지키기보다는 반반 내든 어떤 합리적인 지점을 찾는)를 찾으려는 경향성이 뚜렷했습니다. 물론 이게 10년대 초반 인터넷 얘기라 지금 여성혐오주의자들에게 직접적으로 적용될 수는 없겠지만, DC가 현 조류의 원류임을 감안하면 나름 고려해볼만한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아 물론 여기서 가부장적이지 않다고해서 자유주의적 연애관인 것은 아닙니다. 세밀한 부분을 나누자면 길 거 같은데, 도식화하자면 남자는 이렇다 여자는 이렇다를 구별짓고 싶지는 않아하지만, 기본적으로 연애는 이러저러해야한다는 틀은 보수적이었습니다.

      3) 그래서 나오는 게 성매매/야동 합법화 담론이라고 봅니다.

      4) 성차라는 형식에 의해서 사회적인 규범성이 발생하니까요. 사실상 성차의 포기라는 것은 사회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봅니다만...?
      흠 반대의 경우를 상상하기 전 어려운데, 어찌 답할지 모르겠네요.
      제가 너무 관습적인가요?ㅋㅋㅋ

    • BeGray 2015.06.11 02:34 신고 Modify/Delete

      1) 그런 요소가 없지는 않겠지만 그게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기는 힘들 것 같아요. '시기심'이 성차와 별개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게 본문의 요지이기도 합니다.

      2) 실리를 찾으려는 경향은 한편으로 성 의식의 변화와 함께 물질적 조건의 변화가 함께 기인하는데, 애초에 '실리'가 무엇으로 구성되는지도 고려해봐야 하고 실리주의와 가부장제의 관계도 좀 더 고민해봐야 할 듯 합니다. 저는 과거에 비해 어느 정도의 실리주의가 등장했다는 건 동의할 수 있지만, 그게 가부장제를 대체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실제로 성 의식은 지난 수년 간 확연히 보수적인 방향으로 가고 있죠.

      3) 적어도 현재의 성매매는 명백히 성적 지배와 결합해 있죠. 자유로운 개인들 간의 자유로운 교환체계가 안정적으로 성립한 경우는 아직 역사적으로 부재할텐데요. 오히려 성매매/포르노 합법화 문제는 성적 지배가 관철되기 어려운 조건 하에서 우회로를 만들자는 이야기에 가까운데, 이것은 지배의 포기라기보다는 지배의 대리물에 가깝습니다(가장 많이 소비되는 포르노그라피 유형이 철저하게 남성중심적으로 성욕을 해소하는 걸 감안할 수 있겠죠).

      4) 성차의 포기는 자유주의적 논리의 최종귀결이기도 합니다(자유주의 페미니즘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입니다...자유주의에서만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고요). 간단하게 말하자면, 성차가 한 사람의 사회적 정체성 / 권력관계에서의 위상 등을 정의하는 데 어떠한 영향도 끼칠 수 없어야 한다는 거니까요. 개인적으로도 동의하는 방향이기도 하고요. '지배의 포기'를 밀고 나갈 거면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하는 사항이기도 해요.

      아직은 현준 씨의 설명틀이 좀 성긴 듯?ㅎㅎㅎ

    • 개선비 2015.06.11 17:15 신고 Modify/Delete

      ㅋㅋㅋㅋㅋ 제 주관심분야가 아닌지라

      하지만 제가 지적하고 싶은 부분은
      시기심이 성차와 별개로 작동하지 않는 것까지는 동의하지만
      그것이 억압된 상황->분노표출 보다는 조금은 제도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가부장제가 사라지고 있다고 보지는 않지만, 확실한 것은 변형되고 있다는 사실이며, 특히 경제적인 영역에 있어서는 변화가 불가피한 게 현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부장제적 경제구조에 대해 불만이 있는 것은, 그러한 경제구조가 붕괴한 현실의 가혹함 때문이라고 할 수 있죠. 과거에는 "남자답다"고 여겨져 감수했던 불이익마저 아깝게 되자 더이상 (경제적으로) "남자답다"란 틀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념적인 측면의 발전 때문이 아니기 때문에, 진정한 평등이나 지배구조로부터의 해방이랑은 상관없이 흘러가는 거죠.

      실제로 과거 서브컬쳐계의 여성혐오는 "여자는 ~~도 안 하면서 권리만 찾는다"식의 논리가 주를 이뤘습니다. 보슬아치란 단어가 비롯된 경위도 한 장의사진(남자와 여자가 짐을 나르는데, 여자는 작은 상자 하나를 나르고 남자는 큰 상자 여러개를 나르는 사진입니다) 때문이었는데, 주된 논리가 여자들의 무임승차는 꼴보기 싫다는 거였습니다.
      결국 여성혐오가 확대된 이유는 경제적 상황의 악화로 인해 생긴 일종의 평등의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런 현상과 비슷한 예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군대에서도 일이 편해보이는 사람에대한 극심한 혐오가 있는데, 그 안에는 노동을 기피하는 노동 계급 문화가 있지 않습니까? 구조를 보면 비슷하다고 봅니다.

    • BeGray 2015.06.11 18:50 신고 Modify/Delete

      음, 경제구조에서 남성성의 양식이 변화하는 것 자체는 본문에서 설명한 내용과 근본적으로 배치되는 설명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애초에 본문은 왜 고자, 게이와 같은 표상들이 이처럼 강력하게 전파되게 되었는가에서 시작하니까요. 정확히 제 글은 한편으로 남성성의 위기가 표상되는 방식과 여성혐오가 맞물려 있다는 거고, 현준 씨가 설명하려는 내용은 (제가 올바르게 이해한 게 맞다면) 본문의 설명틀로 풀이될 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평등의식"에 대해 코멘트한다면, 그것은 성차 및 성역할과 결부된 욕망이 좌절될 수밖에 없을 때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원한을 가리는 차폐막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경제적 상황이 악화되어서 평등의식이 생기는 게 아니라--경제적 어려움이 그 자체로 평등의식으로 이어진다는 논리는 성립하지 않습니다--경제적 조건의 열악함으로 인해 스스로의 성적 우위를 유지하기 어렵게 되었을 때, 그러한 상황에 대한 원한의식이 (전통적인 담론에 대한 비판으로 출현했던) 성평등담론의 외양을 뒤집어쓰고 "여성들은 권리에 맞는 의무를 수행하지 않는다"는 종류의 진술로 표명되는 것입니다. 줄기차게 말하지만, 진짜로 평등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애초에 성차의 범주를 통해 언어화를 하지 않을 겁니다; 그냥 어떤 무임승차자가 있다는 식으로 표현을 하겠죠. 단지 스스로에게 당위를 부여하기 위해 기존의 정치적 담론에서 외피만 가져온 평등의식과 진정한 평등의식은 분리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현준 씨가 보는 "평등의식"은 그 이면의 욕망의 메커니즘을 보아야 하는 것, 직접적으로 말해 해석의 대상입니다.

      참고로 군대에서의 원한구조와 비교한다면, '꿀 빠는' 사람에 대한 적개심은 실제로 일이 불평등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편한 사람을 보면서 고된 일을 해야만 하는 자기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분노/원한에서 나온다는 걸 봐야죠. 거기서 '평등의식'은 직접적으로 노동을 거부할 수 없는 자신의 상황에 당위적 가치를 부여하기 위한 차폐막에 가까운 거죠.

    • 개선비 2015.06.11 23:14 신고 Modify/Delete

      그 평등의식이 실제적인 평등을 지향하지 않는다는 것은 제가 분명히 표방한 부분입니다.

      사실 형님의 주장과 맥을 같이 하는 부분이 있는데, 비유하자면 외연은 같지만 내연에서 조금 다른 맥을 잡고 싶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차폐막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저는 그 차폐막이 가리고 있는 것이 다른 것이라는 얘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게이 담론을 이런 식으로 포섭하는 것은 분명 흥미로운 일이지만,(인터넷 소스를 좋아하는지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내적 구조에 대해서는 조금 다른 의견이 있습니다.

      근데 제가 워낙 내부자 출신인지라 너무 내부자 시선으로 보는 것일지도 모르겠네요ㅋㅋㅋㅋㅋㅋ

    • BeGray 2015.06.12 00:58 신고 Modify/Delete

      "평등의식이 실제적인 평등을 지향하지 않는다"는 진술에서 끝날 게 아니라 그것이 어떤 내적 구조를 갖고 있는지를 풀어내는 쪽으로 나아가야죠.

      지금까지 현준 씨가 이야기한 내용에서는 그 "내적 구조"가 무엇인지 명확히 설명되지 않고 있습니다: "경제적 상황의 악화로 평등의식 혹은 지배의 포기가 생기고 있다"가 사실상 유의미한 유일한 진술이고, 저는 거기에 "그 평등의식은 성적 지배가 유지될 수 없으면서도 여전히 성적 지배가 하나의 규범으로 자리잡고 있는 상황에서 나오는 원한감정과 결부되어 있다"고 반론을 제기한 거죠. 논의를 진전시키려면 지금 리플처럼 앞의 이야기를 반복할 게 아니라 평등의식이 가리고 있는 "내적 구조"가 무엇인지를 풀어내려는 시도를 해야합니다. 아직까지는 계속 표피적인 현상의 제시에만 머물고 그에 대한 구조적 해명이 없어요;; 글로 치면 본론으로 들어가지 않고 있는 격인데, (약간 TA스타일로 이야기하자면ㅋ) 조금 스트레이트한 진행을 요구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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