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자아의 형성, 그리고 그 내용과 형식에 관한 메모

Critique 2014. 8. 12. 05:13

프랑코 모레티의 글 "유치원"("Kindergarten")을 읽다가 초자아에 관하여 든 생각 메모.



정신분석을 활용한 대중적인 담론에서 초자아Über-Ich는 보통 사회의 지배적인 규범이 인간 무의식에 새겨져 자아 혹은 주체를 구성하고 또 항구적인 영향을 끼치는 심급으로 묘사된다(물론 가장 인기있는 요소는 단연코 "자연적 충동의 심급"die naturnahe Triebinstanz--독어 위키피디아 "Über-Ich" 항목 참고--이드Es겠지만). 자신이 활용하는 이론의 엄밀함이나 정교함에 조금이라도 책무감을 느끼는, 또는 한발자국 더 생각하는 습관을 가진 사람이라면 도대체 그와 같은 심급이 어떻게 주체에게 새겨지는지에 대해 한번쯤은 생각해볼 만 하다. 그리고 이런 질문으로부터 우리는 초자아의 형성만이 아니라 초자아 자체에 대한 몇 가지 추가적인 발상들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고전적인 프로이트 이론에서 이를 설명하는 가장 일반적인 도식이 바로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다. 아주 거칠게 정리한다면, (남자아이의 경우--물론 프로이트의 표준은 항상 남자아이다)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존재, 곧 아버지의 존재로 인해 어머니에게로 향하는 리비도를 단념해야 할 뿐 아니라 '거세의 위협'을 느끼면서 유아는 자신의 리비도를 단념할 뿐만 아니라 아버지에게서부터 유래한 엄격하고, 징벌하고, 복종하고 따라야 할 어떤 심급을 주체 내부에 갖게 된다. 이러한 설명이 조금 까다롭다면, 어릴 적에 다리를 쇠사슬에 묶여 이동을 제약당한 코끼리가 성체가 되어서도 자신의 다리를 구속하는 쇠사슬 및 쇠사슬이 고정되어 있는 기둥을 뽑아내고 달아낼 생각을 하지 못한다는 널리 퍼진 이야기를 떠올리면 납득이 될까? 쉽게 말해 좌절의 기억이 내부에 어떤 기제로 남아 실제로 그러한 대상이 사라진 뒤에도 계속해서 주체를 제약하고 형성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설명은 한편으로는 아버지 또는 그 대리인과 같은 매우 구체적이고 '실재하는' 매개항을 설정하기 때문에 설득력을 얻으면서도, 동시에 그러한 개인을 초과하는 규범들, 혹은 아버지 또는 대리인을 통하지 않은 규범들이--요약하자면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경유하지 않은 규범들이--어떻게 인간 주체로 침투하는가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어려움에 직면한다. 적지 않은 대중적 정신분석담론이 라캉의 틀을 참고하는 것도, 라캉의 이론은 '실물로서의' 아버지를 "아버지의 법"으로, 곧 생물학적이고 개인적인 범주에서의 작용을 사회적이고 상징적인 범주에서의 작용으로 대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메모에서 정신분석이론 자체에 대한 소개 혹은 심도깊은 논의를 할 생각이 없으며 그럴 능력도 없다. 단지 나는 초자아의 생성과 변화, 그리고 그것의 형식과 내용에 대해 대중적인 수준에서 몇 가지 질문을 던져보고 사고의 계단을 한 칸이라도 올라가보고 싶은 것 뿐이다. 먼저 나는 초자아가 "단 한 번에", 다시 말해 유아기가 됐든 언제가 됐든 인생의 어느 특권적인 순간에 형성된다는 믿음은--보통 프로이트를 프로이트 본인보다도 교조적으로 학습한 이들이 이런 교의에 매달려 있다; 실제로 프로이트는 이보다 훨씬 유연하게 사고했다--거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부모와 격리되었다는 등의 이유로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형성의 '정상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고 해서 사회적 규범을 익히지 못한다거나 따위의 일은 없다. 물론 아직까지 한국사회는 이른바 "예절교육"의 상당부분을 가정에 위임하는 편이지만, 그래서 "정상가정"이 붕괴하는 상황에 어떻게 대응할지 혼란스러워 하고 있지만, 학교와 군대, 교회, 직장 등의 "장치"는 유아기 이후에도 거의 지속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사회적 규범 혹은 초자아의 심급을 주체에게 각인시킨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 꾸는 수능 꿈, 군대 전역 후에 꾸는 군대 꿈 등이 그러한 외상적traumatic 순간, 초자아가 (장기간에 걸쳐) 각인되는 끔찍한 시간을 증거하지 않는다고 보기 어렵다. 즉 그러한 계기만 있다면, 곧 주체 또는 자아를 압도할 뿐만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공포 혹은 외상과는 달리) 특정한 규범을 따라야 한다고 '설득'시킬 수 있는 힘의 작동이 있다면 초자아는 새롭게 생성/변형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 맞다. 사회화 혹은 사회적 규범은 그런 면에서 이데올로기만큼이나 "비역사적으로" 작동해 왔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더할 수 있다. 즉 우리가 유아기 혹은 A라는 시점에 습득하고 내면화한 초자아와 그 이후의 시기, 청년기가 됐든 성인이 된 후든 새로이 습득한 '초자아' 또는 사회적 규범이 충돌하는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물론 이러한 질문은 헤겔, 특히 <정신현상학>을 읽은 이에겐 전혀 낯설지 않을 것이다. 표준적인 헤겔 식 논리에 따르면 의식은 가족-사회-민족국가와 같이 보다 확장된 영역들과 마주하면서 이전의 상대적으로 열등하고 부족한 신념을 지양하고 더 넓은 시야에 기초한 새로운 이해에 도달한다. 그러나 나는 헤겔이 제시한 정신의 변증법적 전개를 곧바로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대신, 이를 초자아(들)의 형성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여러 가능한 모델들 중 하나로 간주한다. 다시 말해 개인의 내부에서 상이한 초자아들이 침투-형성할 때, 그것들은 여러 가지 형태로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기존의 초자아가 새로운 초자아의 형성을 가로막을 수도 있으며, 둘 혹은 그 이상의 규범들이 기묘하게 서로를 변전시키거나, 아예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타협"을 하기도 한다. 예를 들자면, 학교나 한국사회의 지배적인 규범에 비판적인 입장을 가진 사람이 가정에 들어가는 순간 부모가 자신을 미성숙한 개체로 취급하는 것에 어떠한 이의제기도 하지 않는 "효자/효녀"가 되어버린다거나, 많은 운동권들이 비판받듯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는 순간 어떻게든 강남8학군과 명문대에 자식을 입학시키기 위해 발악하는 "강남부모"가 되어버린다거나 하는 사례들은 초자아 또는 자아 이상이 복수의 (때로 서로 모순되어 보이기까지 하는) 규범들로 이루어져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바꿔말한다면 사회에 작동하는 규범들이 단일하지 않듯이 그 구성원의 초자아를 이루는 세부적인 규칙들 및 원칙들 또한 단일하지 않다. 동시에 그러한 세부적인 구성원리는 특정한 조건 및 개체의 성격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나는 이러한 인식에서 곧바로 전진하기 전에 잠시 멈추고 이 인식 자체를 사고해보고 싶다. 누군가의 초자아, 혹은 초자아들이 복수의 규범들로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그 구성형태 또한 다양할 수 있다는 가능성으로부터 무엇을 볼 수 있는가? 바로 초자아 또한 (반성적 사고에 입각해 본다면) 자신의 '내용'과 '형식'을 갖는다는 것이다. 내가 초자아라는 개념보다 훨씬 비판으로부터 안전하고 내 논지에 안정성을 부과할 수 있는 사회적 규범과 같은 단어를 곧바로 채택하지 않는 이유는 '초자아'라는 (물론 나는 내 용법이 이론 자체에 엄격하기보다는 꽤나 대중화된 쓰임새에 입각해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개념이 특정한 규칙의 내적인 작동 및 주체에 가하는 '기능'으로서의 측면을 보다 잘 드러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아주 디테일한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의 내면에서 작동하는 규범들의 보다 구체적인 부분을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면,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다른 규범들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를 일종의 '형식'으로 간주하는 것이 가능하다. 예컨대 부모와의 관계에서 '자식처럼' 행동하는 게 맞다는 것이나 선생과의 관계에서 '제자처럼' 대해야 한다는 규범이 초자아를 구성하는 세부적인 내용이라면, 이 두 가지 서로 다른 규범이 매끄럽게 연결되거나 대립하여 새로운 심급을 만들거나 특별한 충돌 없이 분리되어 공존하는 것과 같은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서 '형식'이라는 단어를 채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한국의 전통적인 위계질서를 지칭하는 '군사부일체'를 이런 층위에서 풀어보면 상급자/교사/아버지와의 관계를 모두 동일한 태도, 마음가짐으로 임해야 한다는 '형식의 규정'인 셈이다(그리고 이처럼 상이한 층위를 동일한 형식으로 묶으려는 시도는, 마루야마 마사오가 <일본정치사상사연구>에서 보여주었듯, 주군/스승/아버지가 서로 다른 명령을 내릴 때 문제적인 상황에 빠져든다는 점에서 보다 취약하다). 가령 부모에 대한 효도와 자본주의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화폐자본의 추구--이는 초자아와 이드에 대한 전통적인 구별 자체를 재고하기를 요구한다!--는 (모순가능성을 떠올리지 않은 상태에서) 공존할 수도, 어느 한 원칙이 다른 원칙을 압도할 수도--유산을 위해 부모를 금치산자로 규정하고자 하는 시도라든가--있다. 이러한 규칙들의 관계 양태 자체가, 그리고 그것들이 서로와 맺고 있는 관계에 따라서 자아에 어떻게 작동하는지 모두 '형식'으로서 그 자체로 분석을 요구한다.


 중요한 사실은 초자아 또는 내면화된 사회적 규범의 총체를 (앞서 말했듯이 내가 초자아라는 개념을 꽤 느슨하게, 대중적 용법에 따라 사용하는 것을 용서해주길 바란다) 형식과 내용--물론 양자는 서로 결합되어서만 올바르게 작동할 수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으로 분리해서 사고할 때, 우리는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이 문학텍스트 분석의 방법론을 설정하면서 제시한 것처럼 내용으로부터 "내용의 형식"form of content을, 형식으로부터 "형식의 내용"content of form을 끌어내어 사유하는 시도 또한 가능해진다는 것이다(<정치적 무의식>_The Political Unconscious_ 참조). 여기에 대한 상세한 이론적인 진술이나 구체적인 사례의 제시는 지금 이 메모에서는 하지 않겠다. 그러나 이와 같은 수준으로까지 형식과 내용의 문제제기를 끌고 갈 때 내가 의도하고자 하는 바는 초자아의 형성과정 및 (형성된) 초자아의 구조 자체를 '역사적으로', 주체를 둘러싼 특정한 조건들과 연결지어 분석할 수 있는 가능성과 이어져 있다--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의 자유주의-포스트모던 사회의 초자아에 대한 분석은 초자아의 역사적 성격을 드러내는 매우 선구적인 작업으로 꼽힐 수 있을 것이다. 최초에 말했듯 우리는 이미 사회적 규범과 (주체의 내적 심급으로서) 초자아를 연결짓는 사고 자체에는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다. 핵심은 (규범의 내용 및 훈육과정 자체를 포함해) 주체를 둘러싼 장치들의 사회적인 작용과 우리가 내성內省을 통해--또는 우리의 행동을 통해--반성적으로 고찰할 수 있는 초자아 사이의 매개과정을 어떻게 설정하는가이다. 즉 나는 초자아를 내용과 형식으로 분할해서 바라볼 때, 그리고 그 각각의 요소들을 상세히 고찰할 때 우리를 이끄는 내적인 원칙들을 역사적으로 비판할 수 있도록 해주는 추가적인 가교를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최종적으로 나는 이러한 분석작업으로부터 단순히 현상에 대한 앎이 아니라 주체를 순간적으로나마 자유롭게 만드는 반성적 계기가 출현할 수 있음을, 곧 분석으로부터 실천적 용도를 끌어낼 수 있음을 덧붙이고 싶다. 즉 우리가 우리 자신의 초자아들을 역사적으로 분석할 수 있다면, 그것들 사이에 내재한 모순과 갈등의 계기들 또한 도출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마치 문제없이 공존하는 것처럼 보였던 규범들 사이에 근본적인 상충가능성이 존재함을 이끌어냈을 때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를 구속하던 초자아의 시선 자체로부터 절대적인 명령권을 박탈하는 위치에, 곧 진실로 비판적인-반성적인 계기에 설 수 있다. 곧바로 또 다른 규범들 및 현실원칙에 속박되기까지 아주 짧은 순간만이 허용된다고 해도, 그러한 계기를 경험하면서 순간적으로나마 마주하게 되는 주체의 역사성, 자기 자신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한계에 대한 인식이 가능하다; 그리고 헤겔이 말했듯, 한계에 대한 인식은 한계의 초월이다. 실천적인 삶이 자유로부터 출발한다면, 자유는 우리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그것을 벗어나려는 노력으로부터 가능하다. 분석은 단순히 우리를 '정상적인' 삶으로 되돌리는 것 이상을 가능케할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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