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권적 통치의 변증법: 홉스, 슈미트, 아감벤, 푸코>

Critique 2014. 8. 20. 04:31


[BeGray] 인디세미나 기말.hwp



* 아래의 글은 2014년 1학기 인디세미나 과목의 기말페이퍼로 작성되었다. 본래 담당교수의 코멘트를 받은 뒤 부분적으로 개고해서 올리려고 했으나, 여러 가지 사정 상 가까운 시일 내에 가능할 것 같지 않아 6월 하순에 작성한 상태에서 거의 바꾸지 않고 올린다. 두 달 뒤에 스치듯이 읽어도 미숙한 부분이 많지만 이런 종류의 작업/사고를 거의 처음으로 글로 옮겨본 것이니만큼 스스로에게 너무 높은 기준치를 부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 겹낫표 및 각주의 글씨체는 는 표기문제로 인해 수정하였다. 원 제목은 <주권적 통치의 변증법: 주권적 판단의 여백과 리바이어던의 귀환>이었다. 다만 (특히 이론 및 사상에 관심있는 독자를 위한) 검색의 편의성 등을 고려하여 제목을 고쳤다. 본문 각주에 인용되면서도 참고문헌에서 누락된 도서들이 있다. 마감을 앞둔 게으름의 소산인데, 굳이 수정하지는 않았다. 워드프로세서 한글 기준으로 글자크기 10, 줄간격 180에 참고문헌을 제외하고 14장에 달하는, 블로그 글 치고는 긴 분량이다. 혹시라도 한글 파일을 활용하실 분이라면 올려두었으니 참고바란다.


***본래의 구상대로라면 맨 마지막 부분에 국제적 정치경제의 맥락 하에서 주권이 받는 영향력을 서술해야 나름의 완결성을 지닐 수 있다. 그 논리를 위해서 가라타니 고진의 후기 작업 및 20세기 후반의 장기불황에 대한 로버트 브레너의 논의 등을 참고할 예정이었으나--분명히 말해 나는 경제적인 것에 대한 고찰 없이 '정치철학'을 완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믿는다--능력, 기일 등등의 제약으로 다음으로 미루었다. 다만 그러한 시야를 염두에 두고 쓰였다는 것만 밝혀둔다.


****언제나 그렇듯이, 부족한 점은 기탄없는 지적을 부탁드린다.





주권적 통치의 변증법: 홉스, 슈미트, 아감벤, 푸코


1.


카를 슈미트(Carl Schmitt)는 1938년에 출간된 <토머스 홉스 국가이론에서의 리바이어던>(The Leviathan in the State Theory of Thomas Hobbes)에서 홉스를 강력한 절대왕정의 옹호자로, 심지어 “전체주의 국가”(“totalitarian state” 71)의 선구자로 보는 통념에 맞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다. 슈미트는 (명백히 베버적인 관점에 입각하여) 먼저 근대를 합리화과정, 그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자유주의 국가의 “기술화된 중성화”(“the technologizing neutralization” 68) 과정으로 규정한 뒤, 홉스로부터 그러한 과정을 가능하게 만든 모멘트를 읽어낸다. 슈미트의 논지를 간추려본다면 다음과 같다. 홉스는 <리바이어던>을 통해 특히 가톨릭교회 및 장로교회를 비롯해 사회구성원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당파(faction)들을 제압하는 논리를 제출하고자 했다. 홉스의 논리는 주권자가 규정한 법규에 준수하느냐의 여부만을 실질적인 쟁점으로 간주하며, 종교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신앙을 개개인 “내면의 믿음”(“inner faith” 56)의 문제로, 다시 말해 사실상 무의미한 요소로 격하시키면서 교권을 중립적인 권력기구로서의 정치적 주권에 복속시킨다. 그러나 이 논리는 홉스가 예상치 못한 귀결에 도달한다. 즉 정치적/법적 행위를 관할하는 외적인 영역과 개인의 신앙, 양심 및 의견이 속한 내적 영역을 나눈 뒤 전자를 주권자=입법자에 할당한 순간, 역으로 후자가 전자의 통제를 벗어난 ‘자율성’을 획득한다. 오로지 외적인 행위에만 영향을 미치는 국가 권력은 점차 형식화되며 최초에 국가에 제압당한 각종 당파들, 보편적인 책임을 결여한 “사적 영역”(“private sphere” 73)이 실질적인 당위규범을 장악한다. 결과적으로 “간접 권력”(“indirect powers”)은 공적인 국가에 대한 자율성과 우위를 확립하면서 “사회적 다원주의”(“a social pluralism”), 노골적으로 말해 각종 당파들이 난립하는 사태가 다시 돌아온다. 즉 공적 권력=형식(form)과 사적 의견=내용(content)의 분할이 최초에 전자의 지배를 의도했다면, 사태의 진행과 함께 후자가 다시 우월한 위치에 놓이는 진실로 변증법적인 전개를 슈미트는 그려낸다.

슈미트의 홉스 독해는 실로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 자체가 아니라 슈미트가 홉스로부터 자신의 독해에 포섭될 수 없는 무언가를 계속해서 소환하려 한다는 사실이야말로 슈미트의 텍스트에서 진실로 기묘한 점이다. 텍스트의 기둥을 이루는 3장에서 6장에 이르는 부분이 홉스로부터 ‘기계적인’ 모멘트를 지적하고 그 모멘트의 운동과정을 그려낸다면, 즉 1장, 2장, 7장에서 슈미트는 기계적인 논리에 묶일 수 없는 리바이어던의 이미지를 집요할 정도로 다시 꺼내든다. “이러한 상징[리바이어던]을 사용하면서 그는 고대의 정체를 알 수 없는 신화적 생명의 보이지 않는 힘들을 소환한다. 리바이어던의 그림자가 그의 작업에 드리워져 있으며, 홉스의 명석한 지적 구조물과 주장 전부는 그 자신이 일깨워 불러낸 상징으로부터 초래된 소용돌이에 압도당한다. 어떠한 명징한 사유의 연쇄도 근원적이고 신화적인 이미지들의 힘을 버티어 낼 수 없다”(“...in using this symbol he was conjuring up the invisible forces of an old, ambiguous myth. His work was overshadowed by the leviathan, and all his clear intellectual constructions and arguments were overcome in the vortex created by the symbol he conjured up. No clear chain of thought can stand up against the force of genuine, mythical images” 81). 여기서 슈미트 자신이야말로 홉스의 텍스트로부터 기계적인 모멘트에 포섭될 수 없는 초자연적인 괴물의 이미지를 환기하는 자, 일찍이 괴물을 제압하고 봉인했던 근대 자유주의 사회의 지배자들에 대항해 다시금 포효할 신화적인 주권자를 일깨워 불러내는 ‘주술사’(conjurer)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가 자신의 시대가 다시금 회복하길 바라는 “생기”(“vitality” 70)야말로 리바이어던=주권자의 심장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나치의 법학자”의 욕망을 읽어내는 대신, 실제로 그가 충분하게 명징하게 표현하지 못했던 상이한 힘들이 홉스의 텍스트에 위치하는지를 살피는 게 생산적이지 않을까? 그러한 힘들이 하나의 체계 안에서 충돌할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바라보고 그것이 우리 자신의 시대에 어떻게 흔적을 남기는지 주시하는 게 낫지 않을까?



2.


<리바이어던>에서 주권자가 거의 초월적일 정도의 권한을 부여받는다는 점은 명백해 보인다. 홉스는 기존에는 자연 상태에 있던 모두에게 안전하고 평화로우며 행복한 삶을 보장하기 위해서 “공통권력”(“a Common Power”)이 필요하고, 공통권력의 담지자가 곧 주권자이다.

 “그와 같은 공통권력을 정립하기 위해서, 구성원들을 외국인의 침임으로부터 지켜내고 서로 간의 침해를 막아 그들의 안전을 확보하고 그들 자신의 근면과 대지의 열매를 통해 그들이 스스로 풍요롭고 만족스럽게 살도록 하기 위해서, 그들의 모든 권력과 힘을 한 사람 또는 하나의 합의체에 양도하여 그들 각자의 의지와 다양한 목소리를 하나의 의지로 모아야 하는데, 이는 곧 한 사람 혹은 합의체를 임명하여 구성원들의 법적 인격을 담지하게 하는 것으로, 모든 구성원들은 그들을 대표하는 인격이 공공의 평화와 안녕을 위해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게 명령하든 그들 자신이 그것의 법적 행위자임을 인정하고, 그들 모두의 의지를 그의 의지로, 그들 모두의 판단을 그의 판단으로 종속시켜야 한다.”

“The only way to erect such a Common Power, as may be able to defend them from the invasion of Forraigners, and the injuries of one another, and thereby to secure them in such sort, as that by their owne industrie, and by the fruites of the Earth, they may nourish themselves and live contentedly: is, to conferre all their power and strength upon one Man, or upon one Assembly of men, to beare their Person; and every one to owne, and acknowledge himselfe to be Author of whatsoever he that so beareth their Person, shall Act, or cause to be Acted, in those things which concerne the Common Peace and Safetie; and therein to submit their Wills, every one to his Will, and their Judgements, to his Judgment.” 2.17.120.

이 기나긴 문장에서 나타나는 사회계약의 요점은 1) 모두의 안전과 풍요로운 삶이 가능한 환경을 위해 공통 권력을 만들고 2) 한 명 또는 합의체가 공통권력의 법인격을 대리하며 3) 구성원들은 법인격을 맡은 이의 의지와 판단에 따르되 법적 책임은 각 구성원들에게 자리한다는 것이다. 홉스는 아직 충분히 투명하지 않은 진술을 실로 법학자적인 태도로 구체화한다. 몇 가지 핵심적인 추가규정에서 그가 무엇을 의도하는지 보다 명확해진다. 계약의 당사자들은 “신민”(“Subject”)들이며 주권자는 단지 이루어진 계약에 따라 창출된 법인격을 담지할 권리만을 부여받았을 뿐이라는 대목은 계약으로부터 파생되는 책임으로부터 주권자가 자유로움을 의미한다(“That he which is made Soveraigne maketh no Covenant with his Subjects before-hand, is manifest” 2.18.122). “그[주권자]가 무엇을 하든 이는 그의 신민 중 누구에게도 권리침해가 되지 않으며 그들 중 누구로부터도 불의하다 비난받아서는 안 된다. 타인으로부터 권리를 받은 사람이 무엇을 하든 이는 그에게 권리를 양도한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that whatsoever he doth, it can be no injury to any of his Subjects; nor ought he to be by any of them accused of Injustice. For he that doth any thing by authority from another, doth therein no injury to him by whose authority he acteth” 2.18.124)와 같은 대목은 법적인 논리 자체에 따라 주권자는 무엇을 행하든 합법적일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2부 18장을 통틀어 홉스는 주권자에게 법적인 판단능력, 사상을 검열하고 유포의 허가를 결정하는 능력, 소유권에 자유로이 개입할 수 있는 능력, 징세권, 사법권, 외교권, 임면권, 처벌권, 군권을 모두 부여할 뿐만 아니라 권력은 오로지 독점되어야 한다고 덧붙인다. 한 마디로 주권은 법을 집행하고 제정하는 권력이 통합되어 있다는 점에서 법=권력 그 자체다. “무제한적인 권력은 절대적 주권이다”(“Power Unlimited, is absolute Soveraignty” 2.22.155).

그러나 일견 홉스는 주권에 대항하는 계기들을 남겨놓은 것처럼 보인다. 그가 “주권자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불의하지 않게 거부할 수 있는 사안들인 신민의 진정한 자유”(“the true Liberty of a Subject; that is to say, what are the things, which though commanded by the Soveraign, he may neverthelesse, without Injustice, refuse to do” 2.21.150)로 제시하는 사례를 보자.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홉스가 인정하는 “그[신민]가 전부터 지녔던 자연적 자유”(“his own former naturall Liberty” 1.21.151) 자체가 실질적으로 무의미함을 알 수 있다. 곧 스스로의 신체를 해치거나 자신의 죄를 자백하지 않아도 될 자유, 주권을 설립한 목적에 위반되는 행위를 거부할 자유, 정해진 법에 따라 주권자에게 소송할 자유(151-153)는 얼마든지 우회가능하다. 기본적으로 ‘무엇이 코먼웰스를 위한 것인가’의 판단능력이 주권자에게만 온전히 귀속되어 있는 한 신민이 특정한 행위가 주권을 설립한 목적에 위반되는지의 여부를 판정할 수 없으며, 마찬가지 이유에서 자결 혹은 자백을 거부한 신민에 대해 주권자는 얼마든지 ‘정당하게’ 다른 신민들 혹은 자신의 지휘를 따르는 무력을 통해서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그리고 국가가 독점하는 폭력의 크기가 커지는 후대로 갈수록 이에 저항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소송 또한 홉스 본인이 기술하듯 주권자의 권력에 따라 행해진 행위에 대해서는 제기할 수 없다. 따라서 주권의 토대 자체가 붕괴되는 일, 곧 반란에 의해서든 전쟁에 의해서든 주권자에게 귀속된 폭력 자체가 무력화되기 전에 법적 정당성의 차원에서 주권자에 대항하는 계기가 현실화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어떤 면에서 홉스가 “신민의 자유”(“The Liberty of Subjects”)라는 명목 하에 기술하는 사례들은 기만에 가깝다.

그렇다면 홉스가 구성한 주권은 오로지 비상사태에 의해서만 무너질 수 있는 거의 완전무결한 권력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슈미트가 읽은 홉스는, 거세당하는 리바이어던의 이미지는 텍스트를 주관적인 역사적 맥락에 자의적으로 끼워 맞춘 결과물일 따름일 뿐인가? 이와 같은 성급한 결론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먼저 홉스가 선심 쓰듯 제공한 기만적인 ‘정당한 저항’의 사례들을 다시 검토해 보자. 앞서 분명히 말한 바와 같이 주권이 행사하는 무력 또는 폭력이 정당성을 갖고 신민들의 복종을 이끌어내려면 그 목적이 그들 모두가 속한 코먼웰스 자체의 안녕과 결부되어 있어야만 한다. 여기서 핵심은 특정한 행위가 ‘코먼웰스 자체의 안녕’과 결부되어 있는가를 판정하는 권한 자체가 주권자에게 독점적으로 귀속된다는 것이다. 설령 누군가 주권자의 판단에 내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에게는 행위의 전제가 되는 판단을 내릴 권한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에 주권자의 권력은 실질적으로 여전히 주권자 본인의 판단에만 따른다. 일차적으로 주권자의 존재가 폭력의 독점과 연결될 수 있다면, 폭력의 독점적 행사뿐만 아니라 나아가 전 신민의 복종을 가능하게 하는 연결고리는 법과 권리에 관한 판단 자체가 주권자에게 홀로 귀속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홉스가 제출한 권력이론의 토대가 과연 어떠한 약점도 지니지 않는가를 질문하기 위해서 우리는 (사실상 혁명적인 상황에서나 유의미한 선택지로 등장하는) 명시적인 저항권이 아니라 주권자의 판단 자체가 어떠한 여백도 남겨두지 않는가를 먼저 확인해야 한다.

<리바이어던>에서 주권자의 판단이 여백으로 남겨놓는 공간을 발견하는 것 자체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 글에서는 그 중 세 가지 사례로 먼저 슈미트가 직접 지적한 바 있는 신앙-양심의 영역, 두 번째로 정당방위의 영역, 마지막으로 상인들의 이윤추구의 영역을 검토하고자 한다. 언뜻 보기에 주권에 특별한 위해를 가할 가능성이 없는 듯 보이는 세 가지 영역은 각각의 영역이 함축하는 가능성을 개방할 때, 혹은 슈미트가 보여준 것처럼 각각의 모멘트가 변증법적 전개를 거쳐 어떤 귀결에 도달할 수 있는가를 밝힐 때 비로소 주권의 행사에 심각한 난점을 가져올 수 있음이 드러난다.

신앙과 양심의 영역에서 “사적인 이성 또는 양심”(“our own private Reason, or Conscience” 3.37.306) 대 “공적 이성”(“Publique Reason”)의 갈등구도가 명확한 언어로 드러나는 최초의 대목은 기적(miracle)을 다루는 부분이다. 기적의 참과 거짓을 판정하는 일, 곧 각자의 신앙에 따라 판단하는 일이 일치를 이룰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 홉스는 이성의 분할을 다음과 같이 해소하려고 한다. “사적 인간은 기적으로 제시된 행위를 마음속에서 믿거나 믿지 않거나를 결정할 자유를 갖는다(생각은 자유롭기 때문이다)....그러나 그러한 믿음의 [외적인] 고백에 있어서 사적 이성은 반드시 공적 [이성]에 복종해야만 한다”(“A private man has alwaies the liberty, (because thought is free,) to beleeve, or not beleeve in his heart, those acts that have been given out for Miracles....But when it comes to confession of that faith, the Private Reason must submit to the Publique....”). 홉스의 해법은 신앙고백의 문제에서 더욱 극단적으로 표명된다. “혀로 하는 고백은 외적인 행위에 불과하며, 우리의 복종을 의미하는 다른 여러 몸짓들과 다를 바 없다”(“Profession with the tongue is but an externall thing, and no more then any other gesture whereby we signifie our obedience” 3.42.343). 이 두 가지 예시 모두 근본적으로 주권자의 의향과 이질적인 ‘판단’의 공간이 지워질 수 없음을 함축한다. 그중 기적의 판정에서 홉스의 진술이 단순히 상이한 이성들 사이에서 공적인 행위의 판정기준을 어디에 둘 것인가를 정하는 정도였다면, 신앙고백의 문제에 관해 말할 때는 조금 더 충격적이다. 즉 그는 외적인 행위나 복종보다 내적인 신앙 혹은 양심이 더 참되고 (효력과 무관하게) “가치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 내면의 문제에 비해 외면의 행위는 그저 단순한 몸짓에 불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적 이성과 공적 이성의 분할, 또는 외면과 (때때로 외면보다 더 중요하기도 한) 내면의 분할은 주권자의 공적인 판단 자체를 거스를 수 없다는 점에서 홉스가 믿었듯 아무런 상관이 없는 무의미한 영역일 뿐이지 않은가?

슈미트가 정확히 예를 들고 있는 것처럼(57), 스피노자(Benedict de Spinoza)는 <신학정치론>(Tractatus Theologico-Politicus)에서 홉스의 주권론을 수용하면서도 미세한 수정을 가해 완전히 다른 귀결에 도달한다.1) 스피노자의 텍스트는 주권과 정치적 판단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거의 모든 지점에서 홉스를 충실히 따르는 것처럼 보인다. “무엇이 합법이며 무엇이 불법인가를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최고 권력인 주권자에게 부여”할 필요를 옹호하는 대목이라든가(18.350), “주권적 세속적 통치자야말로 신적 권리의 적절한 해석자라는 결론”을 내릴 때(19.359), 나아가 “일반 시민은 주권자의 명령에 의해서만 국가에게 무엇이 좋은가를 알 수 있다”(19.360)고까지 진술하는 부분은 홉스의 견해를 좀 더 분명하게 되풀이하는 듯 보일 정도다. 그러나 <신학정치론>의 마지막 장에서 스피노자는 의미심장한 전환을 꾀한다. 20장이 “누구라도 어떤 문제에서든 자유롭게 판단하고 자기 자신의 견해를 가질 수 있는 자연권이나 능력을 다른 사람에게 양도할 수 없”(20.370)다는 것을 강조하며 시작할 때, 이 대목 자체는 앞서 공적 판단과 사적 판단이 상충될 때 전자가 후자를 소거시킬 수는 없다는 홉스의 논지와 배치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스피노자가 “생각하고 무언가를 판단하고 말하는 경우, 자신의 견해를 표명하거나 전달하기만 하고...이성적 확신에 의해서만 그것을 옹호한다면 그것은 주권자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다”(20.373-74)고 말할 때 홉스의 도식은 완전히 다른 것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이 대목에서 스피노자가 도입하는 계기는 실로 감탄스러울 정도로 교묘하다—홉스가 사적 개인의 내면과 공적이고 외면적인 행위의 영역으로 이성적 판단이 행해지는 공간을 구획했다면, 스피노자는 두 영역 사이에 “견해를 표명하거나 전달”하는 지점, 곧 공적 규범 및 행위는 아니지만 동시에 여러 개인들이 의사소통을 통해 서로의 견해를 형성하고 변경한다는 점에서 단순히 개인적=사적이지만은 않은 공간, 곧 여론의 영역을 창출하고 삽입한다.2) “분명히 미덕이며 억압될 수 없”으며 “과학과 인문학의 발전을 위해 필수적”인 “판단의 자유”(20.376-77)를 담지하기에 여론은 주권 이성에 부여되었던 가장 나은 판단력 또는 공적인 성격 자체를 은밀하게 탈취한다. 그리고 스피노자가 “자연상태에 가장 근접한 정부형태”로 간주하는 민주정에서는 여론이 기존의 법령보다 “더 나은 대안을 알게 되는 경우에는 법을 폐지할 수 있는 권위를 보유”하기까지 하는 것이다(20.380).3) 즉 스피노자는 홉스의 모델로부터 주권자의 판단이 개인의 신앙과 양심의 영역에 여백을 허락할 때 정치적 권력의 행사에까지 주도권을 허락하는 전도를 이끌어낸다.

다음으로 폭력, 처벌 그리고 정당방위에 관해서 주권자의 판단이 어떠한 여백을 허락하는지, 또 그로 인해 어떠한 결과가 귀결될 수 있는지를 검토한다. 앞에서 확인한 바와 같이 홉스의 모델에서 주권자는 법과 처벌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주권자가 기존에 자신이 만든 법과 충돌하는 무언가를 지시할 경우, 해당 사실에 관한 한 지시는 해당 법을 폐기시킨다”(“when the Soveraign commandeth any thing to be done against his own former Law, the Command, as to that particular fact, is an abrogation of the Law” 2.27.209)는 설명은 사실상 주권자를 단순히 법을 제정하고 집행하는 정도를 뛰어넘어 법으로부터 초월적인 지점으로까지 상승시킨다. 주권자가 이 정도로 강력하다는 사실에 안심이라도 한 듯 홉스는 신민들의 위법한 행위가 면죄될 수 있는 사소한 사례들을 제시한다. 그중 가장 유심히 지켜봐야 할 대목은 바로 두려움, 특히 “신체적 상해에 대한 두려움”(“the fear onely of corporeall hurt” 2.27.206)에 의한 위법행위를 다룬 부분이다. 이 대목은 다른 무엇보다도 신민들의 생명조차도 건드릴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즉 자신의 목숨이 위험에 처한 사람은 스스로를 구하기 위해 자신을 위협하는 상대방의 생명까지 앗아갈 수 있다—이는 바꿔 말하면 상대방의 신체에 대한 거의 모든 폭력의 행사가 허용됨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특정한 상황 하에서는 주권자의 허락이 없이도 한 신민이 다른 신민의 생사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코먼웰스가 성립했다고 해도, 법의 조력이 적시에 도착하지 않는 곳에 있는 어느 누구도 자신의 생명 및 사지의 보호를 포기한다고 간주되지는 않기 때문이다”(“because no man is supposed at the making of a Common-wealth, to have abandoned the defence of his life, or limbes, where the Law cannot arrive time enough to his assistance” 2.27.206). 본래 자연권은 인간이 스스로의 보존을 위해 (타인의 생명에 간여하는 일을 포함한) 어떠한 일이라도 할 수 있는 권한을 의미하며, 따라서 자연권이 무제약적으로 행사되는 전쟁상태에서는 “만인이 모든 것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every man has a Right to every thing” 1.14.91). 사회계약의 체결은 주권자를 제외한 모두가 자신의 자연권을 포기하고 주권자에게 양도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바로 이 “신체적 공포”(“Bodily Fear” 2.27.206)의 순간 파괴적인 권리로서의 자연권의 행사가 다시 용인되는 것이다.

일견 상식적인 진술처럼 보이는 이 대목은 자연권 혹은 폭력 행사의 정당성을 판별하는 기준이 각각의 개인이 상해를 입었을 때가 아니라 상해에 대한 ‘공포를 느낄 때’ 주어진다는 점을 주목할 때 의미심장해진다. 보다 직접적으로 진술한다면, 폭력 행사의 정당성을 판정하는 장소가 주권자가 아닌 각자의 사적인 의식이라는 사실이 문제의 핵심이다. 홉스는 이 사적 의식의 판단, 혹은 상황의 난점을 강조하자면 공포라는 감정에 따른 판단이 자의적으로 활용되지 않도록 제약하려 시도하지만 성공하지 못한다. 그는 신체적 공포에 따른 정당방위를 설명하는 문단에서 모욕에 따른 복수라든가 꿈과 망상에 의한 판단은 정당성을 가질 수 없다는 점을 장황하게 설명한다. 그러나 정당방위의 사유를 다루는 부분을 통틀어 가장 길게 서술되는 이 문단이 옳고 그름의 경계선을 확정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사례로만 채워져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역설적으로 이 사안이 주권적 판단의 범위 바깥에 있음을 드러내지 않는가? 엄밀히 말해 정당방위의 문제는 홉스 자신이 진술한 바와 같이 “법의 조력이 적시에 도착하지 않는 곳”이 있다는 것, 다시 말해 코먼웰스 내에서도 주권의 힘이 완전히 미치지 못하는 지점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기초한다. 정당방위의 판정은 실제로 주권이 닿지 못하는 시공간에서 폭력이 출현했을 때 이 폭력을 법적인 영역 안쪽으로 다시 포함시켜 주권의 여백을 덮고 꿰매려는 의지의 산물이며, 정당방위란 무엇인가를 선험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무능력함은 본래 정당방위의 핵심을 이루는 폭력이 주권=법의 여백에서 출현한다는 사실에서 이해될 수 있다. 문제는 심지어 국가 혹은 코먼웰스 내부에서조차 이러한 지점이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는 데 있다. 즉 본래 주권과 국가의 목적이 신민의 안녕을 보전하는 것이라면, 그 안에서 언제든지 신민의 생명을 위협하는 폭력 자체와 함께 폭력을 허락하고 정당성을 주장하는 사적인 판단이 출현가능하다. 그리고 주권적 이성은 사적인 폭력과 판단을 봉쇄하기는커녕 사전에 그것을 허락할 수밖에 없다.

이 글에서 홉스의 체계에 던지는 세 번째 질문의 주제는 앞의 두 사례와 비교해서조차도 사소해 보일만한 상인과 무역이다. 통상적으로 노동가치론의 선구적 주창자로 여겨지는 로크(John Locke)에 비할 때 홉스의 텍스트가 자본과 상업의 문제에 관해 중요한 진술을 남겼다고는 평가되지 않으며, 실제로 <리바이어던>에서 해당 주제를 다루는 내용의 비중은 미미하다. 홉스는 “교역을 담당하는 정치체”(“Bodies Politique for ordering of Trade” 2.22.160)로 상인들의 조합(corporation) 혹은 집단(society)을 거론하면서 국내외 교역품의 독점판매가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짧게 설명한 뒤 이들의 의사결정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와 같은 상인단체들의 목적은 단체 구성원 모두의 공통된 이익이 아니라...각 투자자의 개별적 이윤에 있으므로 각자는 자신의 투자액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알고 있으며, 따라서 모든 이는 각자 합의체의 일원으로서 투자액의 활용에 대한 권한을 갖는다”(“The end then of these Bodies of Merchants, being not a Common benefit to the whole Body,...but the particular gaine of every adventurer, it is reason that every one be acquainted with the employment of his own; that is, that every one be of the Assembly, that shall have the power to order the same....” 2.22.161). 그리고 상인들의 행위에 대해서 국제 무역의 경우를 제외하고는(2.24.173-74) 주권자가 부과하는 추가적인 제약은 없다. 여기서 홉스는 상인자본의 움직임에 대한 판정을 자기 자신의 이익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는 상인들 각자에게 맡겨도 무방하다 생각한 것처럼 보인다. 애초에 주권자가 만들어진 이유 자체가 “그들 자신의 근면과 대지의 열매를 통해 그들이 스스로 풍요롭고 만족스럽게 살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상인들이 각자의 이익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야말로 주권자의 여백이 아닌 주권자의 목표가 아닌가?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상인들에게 자율적인 판단이 부여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홉스의 진술이 상식적이라고 생각하고 넘겨버리기 전에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해보자. 국가와 주권은 자본의 유통과 교역을 수반한 일정량의 생산 없이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가? 상인들의 판단과 행동은 한편으로 주권이 제공하는 안정 위에서 기능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주권자에게 국가를 지키기 위한 무제약적인 징세권을 부여한 홉스 또한 부인할 수 없듯이) 상인들의 행위에 따른 결과 위에서 주권이 기능하지 않는가? 만약 상인자본이 진실로 철저하게 ‘자신의 이윤을 좇아 자유롭게’ 움직였을 때 그 귀결이 리바이어던의 ‘영양상태’(nutrition)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는가?4) 이와 같은 질문들에 답변하기 위해서는 홉스의 이론적 체계 안에 머무르는 대신 그것이 간과했던 계기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전개되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푸코(Michel Foucault)는 <안전, 영토, 인구>(Sécurité, territoire, population)에서 이러한 쟁점이 첨예하게 나타나는 대표적인 사례로 식량난을 제시한다. 어느 지역에서 기후 상의 문제 등으로 인해 곡물생산이 급감하여 현 인구의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소출도 불가능하게 되었다고 가정하자. 그러한 상황에서 특정한 상인들이 자신의 이윤을 좇아 곡물의 매점매석을 수행한다면 이러한 ‘자유로운 판단’이 “인구 쪽에서 보면 재앙이고, 정부 쪽에서 보면 파국”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57). 17-18세기의 중상주의는 식량난을 예방하기 위해 홉스의 견해와 달리 “가격 제한, 그리고 특히 [곡물 등을] 비축할 수 있는 권리의 제한”을 실행하며 “상인들에게도 가격이 상승하기 전에 매각하도록 강제”했다(59-60). 그러나 사태의 진전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경제학 및 자유주의적 통치의 등장과 함께 18세기부터 “무역과 곡물 순환의 자유가 경제적 통치의 근본 원칙으로 세워지기 시작”한다(61). 이때 경제주체들에게 다시 ‘자유’가 주어진 까닭은 결코 (홉스가 다소 순진하게 생각했듯) 이들의 행위로부터 초래되는 결과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경제적 체계, 혹은 교역과 상업이 끼치는 영향은 여전히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지만, 이 시점부터 경제활동은 일종의 “자연적인 현상”(68)으로서 국가의 판단력이 개입할 수 없는, 혹은 단순히 미세한 조정만을 수행할 수 있을 뿐인 ‘과학적인’ 영역으로 여겨지기 시작한다.5) 다시 말해 최초에 홉스에게서 단지 미약한 중요성만을 가졌기 때문에 주권적 판단이 개입하지 않고 남겨두었던 (혹은 단순히 그때그때의 필요에 따라 약탈할 뿐이었던) 경제활동 및 시장의 영역은 국가-사회의 유지와 발전에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지면서도 주권자의 판단이 쉽사리 뚫고 들어가지 못하는 ‘여백’으로 재등장한다.



3.


지금까지 <리바이어던>으로부터 주권적 판단의 여백이 어떠한 귀결로 이어지는지, 최초의 사소한 모티프들이 어떻게 리바이어던으로서의 주권자의 역할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데까지 이르는지를 살펴보았다. 1) 개인의 신앙과 양심의 분할은 여론(public opinion)의 등장으로 이어져 주권자의 공적인(public) 권력을 위협하며, 2) 신체적 공포에 의한 정당방위의 문제는 주권자의 존재이유인 신민의 안전보장에서 주권자가 근본적으로 무력한 지점을 드러내고, 3) 상인의 자율적 이윤추구는 리바이어던의 ‘영양공급’ 자체를 불투명한 자연적 순환에 맡기도록 강요한다.6) 홉스의 텍스트가 결과적으로 주권자의 무능력함으로 이어진다는 성급한 결론에 도달하기 전에 이 글의 서두에 제시한 슈미트의 논리를 되돌아보자. 분명 슈미트는, 지금까지 이 글에서 수행한 검토 작업과 유사한 맥락에서, <리바이어던> 내의 자유주의적 계기를 드러내면서 어떻게 리바이어던이 거세당하는지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가 홉스의 텍스트로부터 자유주의적 계기만을 읽어내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전술한 바와 같이 슈미트의 텍스트는 자유주의적 계기에 포섭될 수 없는 신화적인 이미지를 때로 전체의 맥락이 흐트러져 보일 정도로 계속해서 환기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슈미트가 홉스의 텍스트로부터 읽어내는 두 개의 이질적인 경향을 서로에게 직면시켰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질까? 슈미트가 단지 어렴풋한 이율배반으로만 남겨놓은 둘을 실제로 대립시켰을 때 그것들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

주권자는 결코 자신의 무능력 혹은 취약지점과 대면한 순간에 완전히 스러지지 않는다. 슈미트는 리바이어던을 하나의 신화적인 이미지로 바라볼 뿐이지만, 실제로 홉스의 텍스트에서 리바이어던은 단순한 이미지가 아닌 실체이며 그 실체를 지탱하는 힘이 사라지기 전에는 리바이어던은 사라지지 않는다—리바이어던이 “가멸적인 신”(“Mortall God” 2.17.120)이라면, 괴물의 죽음은 단순히 개념적인 모순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그 실질적인 생명력의 상실로부터 비롯한다. 홉스가 반복적으로 말하듯 계약의 체결과 함께 리바이어던, 주권자, 그리고 국가가 탄생할 때 그 기초에는 다른 모든 신민들의 저항이나 일탈을 제압할 수 있는 압도적 폭력이 존재한다. 여기서 핵심은 그와 같은 힘이 건재한 한 리바이어던은 앞서 언급한 자신의 취약지점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능동적인 성격을 가진 주체로서 자신의 취약점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리라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주권의 존재에는 폭력이 수반한다는 홉스의 주장은 주권이 모순 없는 체계 위에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러한 모순들을 억누르고 처리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통찰을 함축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주권자는 주권의 안녕을 위협하는 계기들을 ‘해결’하기 위해 어떠한 일을 수행하며, 또 그 실천의 결과가 무엇을 낳는가? 질문에 곧바로 답변하기 전에 여기에서 제시된 사례들의 독특한 성격을 먼저 짚어보자. 이 사례들은 모두 주권이 법적인 형식을 통해 곧바로 개입할 수 없으면서도 동시에 주권이 온전하게 그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외면하거나 방치할 수 없는 영역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주권 성립의 제일 목표가 신민들의 안전과 풍요를 보장하는 것이라면, 개개인의 사적인 판단에 의해 자연권이 해방되어 신민의 생명이 언제든 위협받을 수 있는 두 번째 문제를 주권자는 방치할 수 없으며 계속해서 점증적인 개입을 요청받는다.7) 첫 번째와 세 번째 문제 모두 조금만 고찰해보면 근본적으로 동일한 함의를 품고 있음이 드러난다. 스피노자와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 믿었듯 여론과 시장의 자유가 각각 자연스럽게 선하고 유익한 결과로만 이어진다면 주권자는 크고 튼튼한 여객선에 탄 승객처럼 모든 염려를 거두고 자신의 관심사에만 집중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배의 상태와 승무원의 책임감 모두 신뢰할 수 없는 수준이라면 어떻게 되는가? 각종 당파들이 형성하는 여론이 불협화음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국가를 잘못된 길로 이끈다면(슈미트야말로 이러한 관점에서 자유주의와 현대 의회주의의 위기를 진단한 인물이 아닌가?), 그리고 맑스주의자들이 지적했듯 시장 내의 무정부상태가 필연적으로 불황 및 공황 국면을 초래한다면? 보다 직접적으로 말해 주권자의 온전한 권력행사를 위해 작동해야 할 영역들이 그 자체에 불안정성을 함축한다면 이러한 사태에 직면한 주권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신민의 안녕과 자기 자신의 보존을 좌시할 수 없는 주권자는 바로 이 순간에 지금까지 스스로가 무력했던 영역, 자신이 개입할 수 없으면서도 개입하지 않을 수 없는 영역에 뛰어든다. 곧 주권적 통치가 변증법적으로 전개되면서 이전까지 통치의 한계선 혹은 무능력함을 구획 지었던 영역은 이제 새로운 형태의 통치행위를 요청하고 허락하는 공간으로 등장하게 된다.8)

<호모 사케르: 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Homo sacer: il potere sovrano e la nuda vita)에서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이 다루는 문제는 바로 이러한 맥락과 무관하지 않다. 아감벤은 푸코를 원용하여 생명관리정치(biopolitics), 즉 비오스(bíos)로서의 인간=시민이 아닌 조에(zōḗ)로서의 인간=생물학적 존재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통치행위가 근대국가의 새로운 정치행위양식으로 등장했다고 설명한다. 이때 생명관리정치는 “원래 법질서의 주변부에 위치해 있던 벌거벗은 생명의 공간이 서서히 정치 공간과 일치하기 시작하며, 이런 식으로 배제와 포함, 외부와 내부, 비오스와 조에, 법과 사실이 무엇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비식별역”(46)을 자신의 활동영역으로 삼는다—근대국가의 새로움은 양자가 출현하고 또 결합했다는 데 있다. 아감벤은 이와 같은 새로운 통치의 원형을 탐색하기 위해 고대 로마법의 ‘신성한 인간’, 즉 호모 사케르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어디까지나 핵심은 주권의 예외적인 위치 그 자체에 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주권적 예외란 (자연과 법 사이의 비식별역으로서) 법 적용의 정지라는 형태로 법이 적용되기 위한 전제 조건을 이룬다. (예컨대 살인을 금하는 규범에서처럼) 뭔가를 명령하거나 금지하는 모든 규칙 속에는 일반적인 경우라면 그러한 규칙 자체의 위반에 해당하지만 그럼에도 결백하여 처벌할 수 없는 형태들이 이미 전제된 예외로서 기입되어 있다(앞의 예를 다시 들자면 사람을 죽이는 것이 자연 폭력이 아니라 예외 상태에서의 주권적 폭력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65, 강조는 원문). 주권적 예외로부터 아감벤은 불법적인 혹은 초법적인 행위가 ‘합법적으로’ 행사될 수 있는 상황을 읽어내며, 생명관리정치는 이러한 권력행사의 수단으로 활용된다.

아감벤의 매력적이지만 다소 모호하게 이해될 수 있는 설명을 구체화하기 위해 법과 주권, 그리고 폭력의 관계를 (필요하다면 아감벤의 도식을 다소 수정해서라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통상적으로 폭력에 의한 통치가 주권의 성립이라는 절차를 거쳐 법적인 통치로 변한다고 이해하며, 따라서 많은 경우 주권적 통치와 법은 동일시된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은 두 가지 사항을 간과하는데, 법은 단순히 주권적 통치의 도구는 아니며 부분적으로나마 주권적 통치를 제약하는 기능을 수행한다는 점과 폭력은 주권의 성립과 함께 사라지는 대신 (전쟁 및 내전과 같은) 예외상태에서 드러나듯 여전히 주권의 주요한 도구로 남는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전자는 슈미트가 홉스의 텍스트로부터 주권의 중립적이고 기계적인 면모라는 이름으로 읽어내는 것과 상통한다. 즉 보편적인 규범으로서의 법은 자신이 추구하는 보편성 때문에 형식적인 면모를 띨 수밖에 없으며, 홉스의 텍스트에 내재한 죄형 법정주의 혹은 더 나아가 법 실증주의적 계기는 주권적 통치의 수단이자 한계선으로 작용한다. 푸코는 이와 같은 문제, 곧 법에 의해 주권적 통치가 제약받는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국가이성의 이론가들이 (바로 홉스에게서 발견할 수 있듯) 주권의 법에 대한 초월적 위치를 강조했을 뿐만 아니라 쿠데타, 즉 주권이 법을 정지시키고 순수한 통치행위로서의 폭력을 드러내는 순간을 “국가이성의 긍정”, “국가의 자기현시”로 보았다고 설명한다(<안전, 영토, 인구> 357-64). 다시 말해 아감벤이 설명하는 예외상태란 엄밀히 말해 주권적 권력이 스스로를 제약하는 족쇄=법을 정지시키고 폭력 또는 법적이지 않은 권력을 제한 없이 사용할 수 있는 상황을 가리키며, 현대국가는 점차 “통치 패러다임으로서의 예외상태”를 하나의 통치수단으로서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예외상태> 13).9)

앞서 홉스의 텍스트로부터 끌어내어 도출한 내용, 곧 “이전까지 통치의 한계선 혹은 무능력함을 구획 지었던 영역”이 “이제 새로운 형태의 통치행위를 요청하고 허락하는 공간으로 등장”하는 사태는 예외상태 혹은 비식별역의 개념과 연결시킬 때 보다 명료해진다. 곧 홉스의 텍스트에 내포된 세 개의 문제적인 계기들이 전부 법적인 통치 자체의 한계선을 드러내는 것이었다면, 주권자는 이제 자신의 개입을 요청하는 해당 영역들에 무력한 상태로 남아있는 대신 보다 적은 제약을 받거나 혹은 근본적으로 제약될 수 없는 수단을 통해 개입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핵심은 주권자가 실제로 문제들을 해결하느냐의 여부가 아니라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한다는 명분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계속해서 증폭시키고 확대시킬 기회를 얻는다는 데 있다—슈미트가 갈구했던 리바이어던의 ‘신화적 이미지’가 현실에서의 권력의 형태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주권자에게 자신의 통치 영역 안쪽에서 보다 다양하고 강력한 수단을 활용할 자유가 주어진다는 것이 새로운 통치패러다임의 핵심이며, 아감벤이 목도한 주권과 생명관리정치의 결합이 일상화되는 풍경은 통치패러다임의 전환을 구성하는 여러 계기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예컨대 <호모 사케르>와 <예외상태>의 논지를 구성하는 핵심적인 사례들인 계엄령 및 비상사태의 선포와 그에 따른 수용소, 인종청소, “모든 외국인을 ‘구류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그래서 기존의 어떠한 권리도 보장받지 못하는 “수감자”를 만들어내는) ‘미국 애국법’(<예외상태> 17)의 등장은 앞서 언급한 신체적 공포의 사례와 근본적인 논리를 공유한다. 즉 신민의 생명을 보호하지 못하는 무능력이 역설적으로 그러한 무능력을 해결하기 위해 주권자의 자연권=폭력을 무제약적으로 개방하는 사태로 이어진다. 외국인과 전쟁포로를 사실상 무한정으로 감금하고 고문하는 일, 자국인들로부터 (유태인 및 집시처럼) 제거해야 할 대상을 지정하고 학살 혹은 추방하는 행위, 전 세계적인 도·감청 등이 전부 국민들의 안녕을 보장하기 위한 특별한 조치라는 명분하에 실행되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두 사안의 연결지점은 분명하다.

홉스로부터 도출된 문제들 중 아감벤이 다루지 않는 두 개의 사례, 곧 여론과 시장경제의 영역에서도 새로운 통치패러다임이 등장함을 발견할 수 있다. 시장경제의 영역에서 주권적 권력이 작동하는 양상의 변모에 대한 푸코의 설명은 참고할 만하다. <생명관리정치의 탄생>(Naissance de la biopolitique)에 따르면, 통상적인 자유주의 및 (자유주의 통치성의 핵심인) 자유주의 경제학은 본래 시장을 독자적인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자연적인’ 영역으로 간주하여 이 영역에 개입할 위험을 지닌 국가적 통치의 “간소성”(55)을 요구했다.10) 푸코는 그러나 (푸코의 동시대에 점차 등장하기 시작한)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의 원형인 독일 질서자유주의를 이론적으로 분석하면서 신자유주의가 자유주의의 단순한 반복이 아니며 근본적으로 새로운 원리에 기초한 통치임을 보여준다. 곧 이전의 자유주의가 “시장경제가 그 자체로서 국가를 제한하기 위한 원리”가 되기를 주장했다면, 신자유주의는 시장경제가 “국가의 존재와 그 행동을 처음부터 끝까지 내적으로 조정하기 위한 원리가 되도록 요구”한다(181). 이는 시장이 더 이상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실현되어야 할 목표로 주어졌음을 의미한다. “시장, 혹은 차라리 시장의 본질인 순수한 경쟁은 그것이 적극적인 통치성에 의해 생산되는 경우에 비로소 출현할 수 있”으며, 이제 주권자 혹은 행정부는 “시장을 위해 통치해야 한다”(188). 그리고 이전까지 주권자가 시장의 파괴적인 영향으로부터 어떻게 사회를 보호할 것인가가 문제였다면, 신자유주의적 통치패러다임 하에서 정부는 “사회에 대한 조절자로서의 보편적 시장의 구성”을 목표로 “사회 자체에 개입”, 곧 “경제적 통치가 아니라 사회의 통치”를 행하게 된다(219). 푸코의 설명을 참고할 때 신자유주의적 통치패러다임은 주권자의 권력이 확대될 수 있는 이중적인 계기를 제공한다. 신자유주의적 통치패러다임 하에서 주권자는 시장이라는 좁은 영역 제약하는 역할 아닌 사회 자체를 재조정하는 역할을 맡는다. 곧 주권권력은 사토 요시유키의 설명에 따르면 일차적으로 “우연적인 사건이 전개되는 장으로서의 환경에 개입하며, 그 게임의 규칙을 설계함으로써 그런 우연성을 길들이며, 통치 가능한 것으로 바꾸”는 “환경 개입 권력”의 성격을 띤다(73). 지금까지의 맥락과 연결시킨다면, 최초에 자신의 무능력을 표시하는 영역이었던 시장으로부터 주권자는 훨씬 더 많은 권력을 부여하는 정당성을 끌어내는 ‘역전’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사토 요시유키는 여기에 덧붙여 신자유주의적 통치에 따른 소요와 불만을 억누르기 위해 주권권력이 스스로를 강화하며11) (아감벤을 원용하여) “예외상태의 규칙화”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고 설명한다(87).

대의민주제 국가에서 주권자의 권력을 유지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여론·언론의 영역에서 주권자=행정부는 여론의 영역을 법적인 규제 등을 통해 명시적으로 억압하는 대신 그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전술을 취한다. 2001년 9월 11일 세계무역센터 테러사건부터 이라크 전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적지 않은 대중적 언론이 행정부의 이해관계에 맞춰 행동한 사실은 이미 잘 알려진 사례가 되었다.12) 한국의 신자유주의적 정부(들) 또한 유사한 통치패러다임을 드러내는데, 노무현 행정부의 한미FTA 비준을 앞둔 대국민 홍보나 이명박 행정부의 4대강 사업에 대한 전국적인 홍보와 같은 “정책홍보”는 이미 일상적인 사례가 되었으며, 18대 대통령 선거에서 국가정보기관이 온라인을 통해 조직적인 여론조작을 시도한 바와 같이 언론을 통하지 않은 탈법적인 수단을 취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흥미롭게도, 이와 같은 사례들은 주권자의 개입이 단순히 여론이라는 영역 자체만의 통치를 의도한 것이 아니라 각각 비(非) 국민에 대한 폭력의 무제약적인 행사와 시장경제를 위한 사회의 재구축과 같은 주권자의 통치를 정당화하고 강화하는 용도로도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대의민주제에서 여론의 지지를 획득하는 일이 필수적이라는 사실과 함께 서로 다른 분야에서 실행된 주권권력의 확대가 교차하면서 상보적인 관계를 맺기도 한다는 점을 확인시켜준다.



4.


지금까지 <리바이어던>에 함축된 모티프들이 주권적 통치의 변증법적인 전개과정에서 어떤 기능을 수행하는지 검토해 보았다. 홉스의 텍스트는 통상적으로 절대왕정의 주권권력을 강조한 텍스트로 읽히지만, 슈미트가 옳게 지적했듯 그 안에 결과적으로 스스로의 발목을 붙잡을 계기들을 포함한다. 이 글은 그중에서도 세 가지, 곧 여론의 등장으로 발전할 신앙과 양심의 자유, 주권자가 신민의 안녕을 완전히 보장할 수 없음을 내포하는 정당방위의 사례, 마지막으로 상인들의 이윤추구를 제어하지 못하는 데서 나타나는 경제영역에서의 무능력을 핵심적인 계기들로 설명한다. 이러한 영역들은 주권의 정상적인 작동과 근본적인 연관관계를 맺고 있으면서도 법률을 통한 주권자의 개입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데서 주권의 약점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약점들로부터 주권자의 무능력함 혹은 절대주의적 국가가 자유주의적 국가로 변모하는 과정만을 읽어내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슈미트가 단지 신화적인 이미지로만 묘사했던 리바이어던의 핵심은 주권을 기초하는 폭력 또는 무제약적인 권력 자체에 있다. 법적인 수단을 통해 개입할 수 없는 영역들에 어떤 형태로든 개입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도래했을 때 리바이어던은 주권의 법적인 행사 아래 드러나지 않던 무제약적인 힘을 개방하며, 지금까지 주권의 한계로서 나타나던 계기들은 역으로 주권의 무한정한 권력을 허락하는 계기로 변모한다. 근대국가에서 주권의 역설과 예외상태를 읽어낸 아감벤의 텍스트는 그 자체가 주권 권력이 무제약적 권력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설명하면서 동시에 홉스의 텍스트에 나타난 정당방위의 계기가 전개되었을 때의 사례를 보여준다. 시장영역에서 주권권력의 해방은 신자유주의적 통치에 대한 푸코의 논의를 통해 드러나며, 여론영역에서의 변화 역시 어렵지 않게 그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근대국가, 특히 신자유주의적 통치의 시대에 주권권력은 사회 각 영역에서 증대할 뿐만 아니라 상호간의 교차를 통해 자신의 지배력을 더욱 확대한다.

이와 같은 설명에 우리는 한 가지 사항을 보충하고자 한다. 먼저 아우슈비츠를 포함한 각종 수용소들의 사례가 보여주듯 주권권력이 자신의 한계선을 넘어 스스로를 확대하는 것은 처음이 아니다. 히틀러가 집권한 독일에서 나치는 시장, 여론, 군사적 폭력 모두에서 초월적인 통제자로 나타났으며, 이러한 유형은 군부 쿠데타 이후의 일본만이 아니라 심지어 (보다 ‘민주적인’ 형태이기는 했지만) 미국과 같은 연합국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13) 그렇다면 2차 대전 후 60년가량 지난 오늘날 다시금 주권적 폭력의 문제가 두드러지는 상황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우리가 단순히 근대국가에서 주권권력의 행사가 증대되는 경향이 있다는 스케치—아감벤의 논의는 확실히 이러한 지점에서 더 나아가지 않고 있으며 이는 그의 논의를 역사화하는 데 결정적인 장애물로 남아있다—에 만족하지 않고 보다 ‘역사적인’ 인식에 도달하고자 한다면 단순히 리바이어던의 귀환을 기술하는 데 그치는 대신 무엇이 괴물을 다시 일깨우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양차 대전을 앞둔 시점의 세계체제와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이 지배하는 오늘날의 조건 사이에 존재하는 구조적인 유사성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 그와 같은 인식에 기초해서만 오늘날 다시 날뛰기 시작한 괴물의 힘을 어떻게 다시 가라앉히고 제어할 수 있을지 논의할 수 있을 것이다.

5. 인용문헌


미셸 푸코.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콜레주드프랑스 강의 1978~79년>. 오트르망 역. 난장, 2012. Trans. of Naissance de la biopolitique: 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78-1979 by Michel Foucault, eds. by François Ewald, Alessandro Fontana, and Michel Senellart, Paris: Seuil/Gallimard, 2004.

---. <안전, 영토, 인구: 콜레주드프랑스 강의 1977~78년>. 오트르망 역. 난장, 2011. Trans. of Sécurité, territoire, population: 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77-1978 by Michel Foucault, eds. by François Ewald, Alessandro Fontana, and Michel Senellart, Paris: Seuil/Gallimard, 2004.

베네딕트 데 스피노자. <신학정치론 / 정치학논고>. 최형익 역. 비르투, 2011.

사토 요시유키. <신자유주의와 권력: 자기-경영적 주체의 탄생과 소수자-되기>. 김상운 역. 후마니타스, 2014.

조르조 아감벤. <예외상태>. 김항 역. 새물결, 2009.

---. <호모 사케르: 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 박진우 역. 새물결, 2008.

Hobbes, Thomas. Leviathan. Rev. student ed. Ed. by Richard Tuck. Cambridge: Cambridge UP, 2011.

Schmitt, Carl. The Leviathan in the State Theory of Thomas Hobbes: Meaning and Failure of a Political Symbol. Trans. by George Schwab and Erna Hilfstein. Westport: Greenwood, 1996.


1) 스피노자는 <에티카>(Ethica) 4부에서도 홉스의 이론에 훨씬 더 섬세한 수정을 가한다.

2) 우리는 이 대목에서 스피노자의 텍스트가 하버마스(Jürgen Habermas)가 <공론장의 구조변동> (Strukturwandel der Öffentlichkeit)에서 다루는 대상, 곧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매개로서 ‘공론장’의 개념적 토대를 거의 선취한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3) 동시에 우리는 군주의 정치적 결정에 영향을 행사했던 계몽주의자들로부터 여론이 반드시 민주정에서만 정치적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칸트(Immanuel Kant)의 <속설에 대하여>(Über den Gemeinspruch)는 여론 혹은 자유로운 이성과 정치적 권력의 관계에 관해 스피노자와 유사한 골격의 논지를 제시한다.

4) 실제로 홉스 이전의 시점부터 진행되어 오던 영국농업의 상업화 및 그와 결부된 영국적 정치체제의 유지는 동유럽을 포함한 해외곡물의 원활한 수업을 통해서 가능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브레너 논쟁>(The Brenner Debate: Agrarian Class Structure and Economic Development in Pre-industrial Europe), 특히 로버트 브레너(Robert Brenner)의 「유럽 자본주의의 농업적 뿌리」(“The Agrarian Roots of European Capitalism”)를 참고.

5) 이 시점 이후의 맑스주의를 포함한 (정치)경제학사의 주요 논쟁은 바로 독자적인 자연처럼 여겨지는 경제적 영역에 국가가 어디까지 조정 및 개입을 수행할 수 있는지를 둘러싸고 벌어진다.

6) 흥미로운 사실로, (스피노자의 표현을 빌리면) ‘억압할 수 없는 자연권’의 발로로서의 여론, 인간으로서 어쩔 수 없는 신체적 공포에 따른 자연권=폭력의 재출현, 자연적 법칙에 따라 고유의 리듬을 갖는 경제영역 모두 자연적인 것을 그 자체로 (거역 불가능한) 당위로 간주하는 논리와 연결되어 있다.

7) 푸코가 18세기 이후 “안전메커니즘, 즉 소위 경제적 절차나 인구에 내재하는 과정인 자연적 현상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을 본질적 기능으로 하는” 근대국가의 통치성을 말하면서 그 실천 중 하나로 드는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경찰제도”(478-79)는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8) (홉스를 이론적인 모태로 삼는) 중상주의-절대왕권의 통치성인 “국가이성”(raison d’etat)에 대항해 시장경제와 시민사회가 출현하며(473-74), 이와 같이 변화된 조건에 대응하여 “조절”과 “안전”(478)을 기조로 삼는 새로운 통치성이 등장한다는 푸코의 설명, 특히 <안전, 영토, 인구> 13강을 참조.

9) 아감벤 역시 근대의 새로운 통치방식이 단순히 법적인 용어로 파악될 수 없음을 알아차린 것처럼 보인다. <호모 사케르>가 법률적 논리의 모순지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면, 그 후속작인 <예외상태>는 “예외 조치”를 “법률적·헌법적 토대 자체가 아니라 정치 영역에서 파악되어야” 한다는 전제에서부터 시작한다(14)

10) 물론 푸코는 이것이 곧 통치 자체를 약화시키는 대신 “국가이성을...내적으로 세련화”하는 결과로 이어졌다고 설명한다(<생명관리정치의 탄생> 54).

11) 신자유주의 국가에서 경제적 하층민의 증대에 따른 소요를 더 강력한 처벌로 억누르는 경향을 연구한 로익 바캉(Loïc Wacquant)의 <가난을 엄벌하다>(Les prisons de la misère)를 참조.

12) 여론 및 언론장악의 문제와 관련하여 미국의 신보수주의적 행정부가 취한 전술에 관한 상세한 설명으로 셸던 월린(Sheldon S. Wolin)의 <이것을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까?>(Democracy Incorporated : Managed Democracy and the Specter of Inverted Totalitarianism)를 참조.

13) 예컨대 양차대전 중 미국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강제수용소에 억류당했음을 상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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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플로리스 2014.08.22 01:24 Modify/Delete Reply

    BeGray님 안녕하세요. 블로그를 몇번 보고 이렇게 선뜻 글을 남겨도 되나 싶지만,
    BeGray님 블로그의 다양한 글들을 보고 큰 도움들을 얻고 있어 감히 몇 자 남겨봅니다.
    저는 학부에서 영화이론과 문화이론을 공부하고, 현재는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고 있는
    처지인데, BeGray님의 다양한 글들과 코멘트들이 큰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제 자신에 대한 반성도 많이 하게 되구요. 아직은 공부가 너무 짧아 이런 말을 해도 될 지 모르겠지만, 정치철학적인 사유와 통치성 분석에 큰 관심을 두고 있는 학생으로서, 그와 관련된 BeGray님의 글에서 여러모로 도움을 얻었습니다. 학부 때 존경하던 은사님께서 어떤 이론을 공부하든 비판적으로 리뷰하는 시도들을 구성하면서 자신의 견지를 구축하는 게 중요하다는 식의 말씀을 하시곤 했는데, BeGray님의 블로그를 통해 그걸 다시 한번 각인하게 됩니다. 또 인문학적인 공부와 글쓰기에 대해 남기신 밀도있는 코멘트들도 참 인상깊습니다. 인문학을 공부한다는 것에 대해 늘 고민하고 있는 저로써 되새겨볼만한 지점들이 참 많네요. 모쪼록 BeGray님의 사유의 장에서 많은 배움들을 얻고 갑니다.

    • 플로리스 2014.08.22 01:29 Modify/Delete

      제가 글을 비밀로 남겨서 BeGray님도 비밀로 코멘트해주신 것 같은데, 제가 티스토리 계정이 없어서인지 제 글에 대한 답글인데도 읽을 수가 없네요 ㅠ 혹시 답글을 공개로 설정해주실 수 있으신지요?
      (답글을 읽지 못하다니 아쉽습니다 ㅠ)

    • BeGray 2014.08.22 01:56 신고 Modify/Delete

      리플 보고 다시 공개...로 씁니다^^;

      안녕하세요, 먼저 제 글들이 조금이라도 의미있게 읽혔다는 것에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네요. 원래 이 블로그 자체가 단순히 제 사고를 기록하는 것만이 아니라 다른 분들과 공유하고 서로의 사고를 비판적으로 진작시킬 기회를 얻기 위해 만든 것이기에, 플로리스 님의 코멘트를 보면서 본래의 목적에 어느 정도 부합하는 결과를 낳기도 하는구나 싶어 기쁩니다.^^ 저 자신도 정치철학적 사유/이데올로기 비판 및 그를 위한 방법론의 구축을 주요한 목표로 삼고 있는 입장으로서 유사한 길을 걷는 분들을 발견할 때마다 힘이 됩니다. 한국의(한국 대학원을 준비하시는 거라면-) 여러 여건 상 이 길이 절대로 쉬운 길은 아니지만, 힘든 만큼 알찬 결실 맺으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혹시라도 이후에 공부 및 기타 사유로 연락이 필요하시면 메일로 연락주세요. 저는 (꼭 지리적인 의미에 국한되지 않고) 한국이라는 맥락 위에서 사고하고 공부하는 사람들끼리의 교류와 협력이 매우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이라, 언제고 사소하게나마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더 기쁠 겁니다^^ (원래는 메일 주소를 적었는데, 공개용으로 전환하니까 이런 문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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