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의 에토스와 해석의 윤리: <플로스 강의 물방앗간> 읽기

Critique 2014.07.09 01:48

* 아래의 글은 2014년 1학기 19세기 영국소설 수업에 기말과제로 제출한 내용을 거의 그대로 옮긴 것이다. 문서파일이 아닌 블로그 속성상 원본의 형식이 약간 누락되어 있으나 내용상의 차이는 없다(오탈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수정하지는 않았다). 원문이 궁금하신 분은 한글로 작성된 첨부파일을 봐주시길 바란다. 


[BeGray] 19세기 영소설 기말.hwp


** 개인적으로 이 페이퍼는 내가 박사과정에서 수행할 작업들 중 한 부분의 시범적 모델에 가깝다. 이번 학기의 최대의 수확 중 하나라면, 미셸 푸코의 말기 작업, 스피노자의 텍스트, J. G. A. 포칵(Pocock)의 공화주의적 수사에 대한 연구를 접하면서 '덕성'(virtue) 및 '덕성의 인간'의 모티프를 떠올리게 된 것이다. 아주 개략적으로 설명해보자. 우리가 서구 근대, 특히 영국에서 17-19세기까지 자유주의의 진행과 함께 (특히 공리주의 및 신고전파 경제학에서 가장 선명한 형태로 나타나는) 경제적 인간Homo economicus 또는 자본주의적-자유주의적 인간형이라는 것의 구축과정을 볼 수 있다면, 나는 동시에 경제적 인간과 근본적으로 이질적인 인간관, 때로는 자본주의적 인간관과 뒤섞이고 때로는 그것에 대항하는 인간관으로서 '덕성/미덕의 인간'이라는 관념이 계속해서 잔존함을 볼 수 있다는 가설을 세우고 있다. 그리고 19세기의 문학텍스트들, 특히 (멜로드라마적 시각이 두드러졌던) 일부 낭만주의 시인들과 19세기 중반의 소설가들--대표적으로 디킨즈--을 그 사례로 보고 이것들의 분석을 통해 덕성의 인간이 어떻게 활용되고 드러나는지를 분석해볼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엘리엇의 텍스트는 그러한 관점을 위한 맹아적인 시도에 가깝다. 솔직히 4절은, 만약 말년의 푸코에 대해 대부분의 독자들이 친숙하지 않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았다면, 훨씬 짧아졌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 이 텍스트에서 푸코나 버틀러가 반드시 등장할 필요는 없다.  나는 단지 내가 <물방앗간>에서 본 ('결과주의'로는 설명할 수 없는) '미덕'을 조금 더 설득력 있게 구체화시키고 싶었고, 덕성의 개념사에 대한 역사적 시선이 부재한 상태에서 이를 설명할 수 있는 이론틀로 푸코-버틀러의 인간관을 끌어온 것 뿐이다. 그런 점에서 나의 텍스트 읽기는 이론틀에 텍스트를 가져갔다기 보다는(내게 가장 자주 부과되는 오해 중 하나다...나는 그 정도로 완전한 이론이 존재한다고 믿지 않는다; 나는 작가들로부터 불완전한 인식의 토대를 보는 만큼이나 사상가들의 한계지점을 들춰내며 읽는다; 동시에 '문학'이 상이한 텍스트들의 집합이듯 '이론' 역시 마찬가지임을 강조해두자), 내 식대로의 텍스트 읽기를 위해 이론틀을 끌어왔다고 보는 편이 좀 더 사실에 가까우리라 생각한다. 어쨌거나 아래의 분석은 나의 강점을 드러낸다기보다는 나의 강점이 아닌 영역을 어떻게 나의 강점과 연결시킬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이어져있다.


*** 이 글을 읽어준 사람들로부터 '억압가설'에 대한 혼동 혹은 비판을 종종 들었다. 확실히 이 글에서 해당 부분에 대한 설명은 불친절하기 때문에 몇 가지 사항을 보충한다. 나는 억압이 부재한다고 믿지 않는다; 결국 <물방앗간>에서 털리버 남매가 죽어야 한다는 것도, 매기가 아무리 미덕을 체현할지언정 그에게는 고난의 길만이 기다린다는 사실도 억압의 현존을 확고하게 보여준다. 내 주장의 요지는, 특히나 주체와 주체화의 문제에서, 1) 주체를 단순히 억압에 기계적으로 반응(저항 or 굴복)하는 형태로 볼 수 없으며 2) (억압에 대항한) 욕망의 충족을 암묵적으로 해방 혹은 주체의 성공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정확히 억압에 대항하는 욕망이라는 구도 자체가 주체를 억압 및 억압에 전제된 특정한 주체화/복종화subjection의 양식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다(그리고 나는 이 텍스트를 읽는 여러 시각들이 암암리에 이러한 입장에서 매기의 '실패'를 기정사실로 놓고 이 좌절'만'을 어떻게 의미있게 해석할지에 골몰하는 게 아닌가하는 의심을 품고 있다). 주어진 주체화를 깨트리기 위해서는 그것이 다른 손으로 슬쩍 내미는 대안조차도 의심하는 것, 그것이 내미는 무언가만이 아니라 그것을 내미는 조금 더 큰 논리 자체를 의심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는 미셸 푸코가 보여준 사물을 '비스듬히' 바라보는 시선이 이를 위한 하나의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매기 털리버의 '미덕' 중 하나는 억압에 대한 단순한 굴복도, 억압으로부터 벗어난 욕망충족에 대한 무반성적인 선택도 아닌 주체화 자체의 자율성을 옹호하고 선택한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그 자체가 거짓된 선택지인 A or B 를 거부한다는 데 있다. 주체의 자율성 자체를, 곧 주어진 선택지를 따라가는 것에 대한 단호한 거부를 통해서 역으로 인간과 사태를 '사려 깊게', 곧 주어진 논리에 사고를 맡기지 않고 그 특이성을 파악하며 인식하는 행위가 가능하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이 텍스트에서 엘리엇이 서술자를 통해 드러내는 미덕이라고 본다. 매기가 비참한 삶을 겪고 결국 죽는다는 큰 구도는 변할 수 없다(그것이 '세계의 논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먼 거리에서 그러한 구도를 바라보는 대신 조금 더 가까이 접근할 때, 그리하여 '세계의 논리'에 부합하지 않는 면모들을 매만지며 확인하는 것이 엘리엇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시선이며, 동시에 매기를 이해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가져야 하는 덕목이다. 곧 결과주의에 입각해서 사고하지 말아야 한다.






주체의 에토스와 해석의 윤리: <플로스 강의 물방앗간> 읽기


1. 


다소 도발적인 질문이 허용된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면서 시작하고 싶다. 과연 <플로스 강의 물방앗간>(The Mill on the Floss, 이하 <물방앗간>)의 결말이 충분히 사려 깊게 다루어진 적이 있었는가? <물방앗간>의 결말부에서 매기 털리버(Maggie Tulliver)는 스티븐 게스트(Stephen Guest)의 치명적일 정도로 매력적인 유혹을 물리친 결과 오빠 톰 털리버(Tom Tulliver)를 포함한 세인트 옥스(St. Oggs)의 사회 전반으로부터 배제된다. 어느 날 밤 (거의 소돔과 고모라에 가까운 톤으로 묘사된) 이 지역을 천벌과 같은 홍수가 덮치고 매기는 톰을 구하지만 떠밀려오는 갖가지 잔해들에 보트가 뒤집혀 두 사람은 서로를 꼭 껴안고 죽음을 맞이한다. 가부장적 관계 하에서 어릴 적부터 온갖 핍박을 받고 결과적으로 자신에게 다가온 ‘행복’의 기회까지도 거부해버린 매기가 이와 같은 최후를 맞이하는 결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텍스트 독해의 한 쟁점이 형성되는 상황 자체는 전혀 이상할 게 없다. <물방앗간>을 교양소설(bildungsroman) 전통에 대한 안티테제로 읽어내는 수잔 프라이만(Susan Fraiman)이 정리하듯 소설의 결말은 “양성적 재결합, 근친상간의 오르가즘, 또는 기나긴 자살, 형제살해, 작가[조지 엘리엇(George Eliot)]의 복수 등의 클라이맥스”(“androgynous reunion, incestuous orgasm, and the climax of a long suicide or perhaps of a sororicide and also authorial revenge” Fraiman 147) 등으로 다양하게 해석되어 왔다. 그러나 이처럼 다양하게 제시된 보기들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일까? 홍수를 통해 사회적 제약이 사라지고 근친상간적 욕망이 충족된다는 질리언 비어(Gillian Beer 137-38)나 익사를 통해서만 여성 인물의 욕망이 충족될 수 있다고 설명하는 낸시 K. 밀러(Nancy K. Miller 124)와 같은 설명은 오히려 특정한 이론적인 모티프로 텍스트를 덮어씌우지 않는가? 미셸 푸코(Michel Foucault)가 <앎의 의지>(Histoire de la sexualité, vol.1: La volonté de Savoir)에서 사용한 표현을 빌린다면, 이와 같은 ‘억압 가설’과 잠시 떨어져 소설을 읽을 때 볼 수 있는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이 글은 위와 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물방앗간>을, 특히 결말부의 홍수 장면에서 실제로 무엇이 드러나는가를 살펴보는 과정에 초점을 두어 다시 읽고자 한다. 미리 말해두자면 대부분의 비평가들이 이끌리는 (여성의) 억압과 해방이라는 구도 자체가 타당성을 결여한 것은 아니다. 실제로 <물방앗간>의 서사 전체에서 매기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억압을 받는다는 사실은 너무나 분명하고, 엘리엇이 이를 비판적인 시선으로 그려내면서 어떠한 답변을 제출하고자 했음은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7권 5장 “마지막 투쟁”(“The Last Conflict)에서 홍수가 마을을 덮치는 장면을 단순히 기존의 질서가 정지된다는 의미에서 해방적인 순간으로만 해석하는 대신 이 상황 자체를 조금 비스듬히 바라볼 필요가 있다. 즉 매기를 해방적인 서사 혹은 억압적인 서사를 위한 하나의 ‘평면적인’ 기능으로 간주하고 그가 맞닥트리는 결과에만 초점을 맞춰 결말을 읽는 대신, 이 재난의 순간에 매기가 어떠한 미덕을 드러내는지, 이 사태를 거치면서 그가 자기 자신이 어떠한 인물임을 입증하고 표현하는지를 보자. 매기가 어떠한 인물인지를 함께 바라본다면 그가 단순히 자신에게 가해진 억압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희생자’가 아니었음이 드러난다. 그는 단순히 주어진 조건에 따른 구성물이 아닌 능동적인 계기와 함께 타자에 대한 책임감을 갖춘 윤리적 주체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독해 과정에서 이 글은 주체성을 자기-형성의 과정으로서의 에토스(ethos)로 바라보는 후기 푸코(Michel Foucault) 및 푸코를 독해하며 주체에 타자에 대한 책임을 연결시키는 버틀러(Judith Butler)의 논의를 참조한다. 더불어 <물방앗간> 전반에 걸쳐있는 독서와 해석의 모티프가 매기의 윤리적 주체로서의 자기 형성 과정을 뒷받침하는 장치(dispositif)로 기능함을 밝힌다. 주체의 에토스와 해석의 윤리라는 주제를 통해 우리는 매기의 삶이 <물방앗간>의 핵심적인 가르침과 연결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2.


<물방앗간>의 결말부를 재고하기 전에 먼저 이 소설의 서사적 중심을 이루는 요소들을 먼저 살펴보자. <물방앗간>은 설령 “반-교양소설”(“anti-bildungsroman,” Flint 173)의 형태로나마 성장(bildung)의 서사들을 포함한다. 예컨대 톰 털리버의 성장과정은 경제적 수입과 이동성, 공동체로서의 인정을 획득해간다는 점에서 일견 전형적인 백인-중간계급-남성의 성장서사를 구현하는 듯 보인다. 매기의 서사는 마치 불가능성의 사례들을 전시해놓은 것처럼 보일 정도로 정확히 톰의 서사의 대척점에 자리한다. “그녀[매기]는 톰보다 두 배는 영리하다”(“she’s twice as ’cute as Tom” 1.2.12)고 평하는 아버지의 코멘트는 곧바로 “여자치고 너무 똑똑해서 걱정이야....너무 똑똑한 여자는 꼬리가 긴 양보다 나을 게 없”(“Too ’cute for a woman....an over-’cute woman’s no better nor a long-tailed sheep”)다는 우려로 이어진다. 책을 읽고 자신의 해석을 이야기하는 매기에게 라일리 씨(Mr. Riley)는 “어린 소녀에게 그다지 적절하지 않은 책”(“not quite the right book for a little girl” 1.3.18)을 본다며 꾸짖고, “그들[여성]은 빠르고 얄팍하다”(“They’re quck and shallow” 2.1.150)는 목사 스텔링(Rev. Stelling)의 발언과 같은 편견은 넘지 말아야 할 울타리처럼 매기의 삶 주위에 둘러쳐져 있다. 풀릿 이모(Aunt Pullet)의 옷장 안을 살피는 장면을 독해하면서 프라이만이 설명하듯, 그녀에게는 사회적 삶의 측면에서든 신체적인 삶의 측면에서든 “점점 더 커지는 정지 상태”(“greater and greater stillness” 142)가 유일하게 허용 가능한 인생의 경로로서 주어진다. “매기의 성장은 자신의 공동체 내부에 자신의 자리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으로 그녀를 인도할 뿐이다”(“Maggie’s bildung takes her only to the point where she knows that there is no place for her in her own community...” Beer 135). 즉 이 세계에는 매기를 위한 성장서사의 가능성이 적어도 ‘표준적인’ 형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프라이만은 남매에게 주어진 서로 다른 성장서사들을 비교분석하면서 매기의 서사에 의해 톰의 “자기중심적인 성장[서사]가 치명적으로 부정된다”(“self-centered Bildung is traumatically abandoned” 147)고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매기의 ‘불가능성’ 자체가 톰의 서사 뒤편에서 후자의 성취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다는 프라이만의 결론은 두 서사의 상호관계를 충분히 살피지 않고 있다. <물방앗간>은 단순히 별개의 두 서사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성장서사가 또 다른 성장서사를 억압하고 부정하는 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자기완성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 에드워드 털리버(Edward Tulliver)가 쓰러진 이후로 톰은 경제적 주권과 가족 내에서의 의사결정권 모두에서 아버지의 자리, 곧 가부장의 자리를 이어받고자 하며 이는 물방앗간을 되찾는 과정과 함께 톰의 성장서사의 귀결점을 이루는 두 가지 요소이다. 문제는 톰의 가부장-되기가 바로 자신의 동생에 대한 가부장적 지배권의 행사, 곧 매기로부터 사회적 삶과 모든 형태에서의 이동성을 박탈하는 과정을 포함한다는 데 있다. 톰은 매기에게 직설적으로 “너[매기]는 어머니와 너를 보살피는 일을 나[톰]에게 맡겨야 하며, 주제넘게 나서지 말아야 한다”(“you should leave it to me to take care of my mother and you, and not put youself forward” 3.5.235)고 명령한다. 집에 갇히는 대신 사회로 나아가 가족의 빚을 탕감하는 데 일조하려는 매기의 열망을 톰은 단호히 불허하며(“I’ll[Tom] take care that the debts are paid, without your[Maggie] lowering yourself in that way” 4.3.293), 필립 웨이컴(Philip Wakem)과의 연애를 질책하면서 덧붙이는 “네가 어떤 일도 할 수 없다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에게 복종하라”(“if you can do nothing, submit to those that can” 5.5.347)는 진술은 사실상 매기에게 복속 이외의 다른 선택지를 남겨두지 않는다. “아버지가 바랐던 바처럼, 네가 좋은 곳에 시집갈 때까지 나는 언제나 너를 보살피려 해왔다”(“I would always have taken care of you, as my father desired, until you were well married” 6.4.392)는 톰의 말은 그의 가부장-되기의 서사 속에서 매기는 오로지 딸 혹은 아내로서밖에 자리할 수 없음을 함축한다.1) 가부장-되기가 톰의 성장서사의 핵을 이룬다면, 톰의 성장은 매기를 억압하고 지배하는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곧 매기의 성장의 불가능성과 톰의 성장은 동전의 앞뒷면처럼 분리될 수 없다.

그러나 <물방앗간>의 혜안은 이처럼 타인에 대한 억압과 지배를 통해 구축된 ‘성장’이 올바른 성장일 수 없음을 보여주는 데 있다. “오빠는 오빠 자신의 품행과 보잘 것 없는 목적들 보다 더 나은 무언가가 있음을 볼 정도로 넓은 마음을 갖추지 못했어”(“you have not a mind large enough to see that there is anything better than your own conduct and your own petty aims” 5.5.346-47)는 매기의 지적처럼, 가부장이 되어 이전의 삶으로 되돌아가겠다는 반성이 결여된 열망은 결국 톰 자신을 일종의 맹목으로 밀어 넣는다. 자신이 추구한 목적에 충실히 도달한 결과로 그는 이중으로 고립되고 갇힌다. 서술자가 직접적으로 논평하듯 “톰은...자신의 본성의 한계에 갇혔다”(“Tom...was imprisoned within the limits of his own nature” 7.3.500). 그는 매기와 스티븐 사이에 있었던 사건을 찬찬히 따져볼 필요조차도 보지 못하며 심지어 다른 어느 가족보다도 엄격한 이모 글레그 부인(Mrs. Glegg)으로부터도 가족을 돌보지 못했다고 비난받는다(7.3.498). 물방앗간으로 대변되는 아버지의 재산을 되찾고 그 가부장으로서의 위치를 승계하고자 하는 톰의 열망은 힘들게 되찾은 물방앗간에서 다른 가족 모두에 떨어져 지낼 뿐만 아니라 홍수의 순간에 동생이 뻗은 구원의 손길이 다가오기까지 바로 그 물방앗간에 ‘갇혀’ 있어야 한다는 아이러니컬한 결과로 이어진다. 프라이만의 도식처럼 이동성의 유무가 톰과 매기의 서사에 결정적인 차이로 다가온다면, 톰은 매기의 이동성을 억압할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자기 자신의 이동성까지 박탈당하는 상황에 도달하는 것이다. <물방앗간>의 교훈 중 하나는 누군가의 성장이 다른 이의 성장과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성취될 수 없다는 것이다.



3.


전술한 바처럼 매기의 삶에 톰이 억압적으로 개입했음을 부정할 수는 없으나, <물방앗간>의 서술자는 독자들로 하여금 두 사람의 대립구도 자체가 아니라 두 사람이 살아가는 세계 자체를 보도록 인도한다. 플로스 강 주변 지역의 사회와 털리버 및 도슨 가로 대표되는 그곳의 사람들은 “어떠한 숭고한 원칙들, 낭만적인 비전들, 능동적이고 자기를 억제하는 믿음 등으로 빛나지 않으며”(“irradiated by no sublime principles, no romantic visions, no active, self-renouncing faith” 4.1.272) “배움과 품위 따위는 없이 전통적으로 내려온 속물적인 규범과 관습”(“conventional worldly notions and habits without instruction and without polish”)을 따른다. 한 마디로 이들은 “개미 같다”(“emmet-like”). 이어 서술자는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나[서술자]는 이러한 억압적인 편협함의 감각을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만약 그러한 감각이 톰과 매기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알고 싶다면, 이 감각을 반드시 느낄 필요가 있다”(“I share wth you this sense of oppressive narrowness; but it is necessary that we should feel it, if we care to understand how it acted on the lives of Tom and Maggie”). “억압적인 편협함”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곳은 스티븐의 유혹을 어렵사리 떨쳐내고 돌아온 매기를 맞이하는 세인트 옥스의 “여론”(“Public opinion” 7.2.490)을 풀어내는 7부 2장 “세인트 옥스가 판결을 내리다”(“St. Ogg’s Passes Judgment”)이다. 서술자는 다음과 같은 말로 주민들의 태도를 풀어낸다. “우리는 타인들을 결과에 따라 판단한다—다른 방법이 있는가?—그 결과가 있기까지의 과정은 알지 못하면서 말이다”(“We judge others according to results; how else?—not knowing the processes by which results are arrived at”). 그리고 매기와 스티븐을 둘러싼 이 사회의 평결은 그 어떠한 세심함도, 사려 깊음도 결여한 채로 그저 자신들에게 주어진 상식과 관습에 따라 작동할 뿐이다. 심지어 이들은 매기가 교회에서 일자리를 구하는 모습도 두고 보지 못하며 하루 빨리 그를 축출하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어떠한 책임감도, 자기반성도 결여한 채로 말이다.

스티븐의 유혹 및 이후의 장면에서 매기의 선택이 갖는 함의를 올바르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이 세계 속 주민들의 윤리적 태도의 결핍 그 자체를 대비시켜 읽을 필요가 있다. 매기에게 “사랑과 의무”(“Love and Duty” Ashton 53) 또는 “의무 대 정념”(“duty versus feeling” 52)의 선택지 자체는 한번은 필립에 의해, 다른 한번은 스티븐에 의해 촉발된다. 두 번 모두 한쪽에는 가족 및 주변 사람들에 대한 의무가, 다른 한편에는 행복과 감정적인 충만을 약속하는 사랑이 있다. 필립 웨이컴은 이 갈등구도를 다음과 같이 정식화한다. “타인의 비합리적인 감정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일은 옳지 않아”(“it is not right to sacrifice everything to other people’s unreasonable feelings” 5.1.302). “우리가 아름답고 좋다고 느끼는 것들이 있고, 우리는 반드시 그것들을 열망하게 되어 있어. 그것들 없이, 우리의 감정이 사멸하기 전에는, 우리가 어떻게 만족할 수 있겠어”(“There are certain things we feel to be beautiful and good, and we must hunger after them. How can we ever be satisfied without them until our feelings are deadened?” 303). 필립은 매기의 망설임을 일종의 자기-억압(self-repression)으로 해석하면서 스스로의 ‘자연스러운’ 감정에 복종하기를 권한다. 이러한 논리는 (얄궂게도 필립을 선택하는 것이야말로 “비합리적인 감정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일”이라 주장하는) 스티븐에게서 마찬가지로 되풀이된다. 그는 매기가 자신의 사랑을 거부하는 것이 “잘못 맺어진 의무”(“these mistaken ties” 6.11.448)에 복종하는 선택일 뿐이며 의무를 지탱하는 연민, 믿음, 기억 또한 사랑과 마찬가지로 한낱 자연적인 것에 불과하기에 자신과 매기 모두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랑을 선택하는 쪽이 보다 합당하다고 매기를 설득한다(“Love is natural; but surely pity and faithfulness and memory are natural too” 6.11.450). 그러나 최초에 필립의 입을, 그 다음에는 스티븐의 입을 빌어 제시되는 논리—자연스러운 본능과 자신의 행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라는—야말로 세인트 옥스의 ‘상식’과 일치한다. 이 사실은 매기가 스티븐의 제안을 받아들였을 때 세인트 옥스의 ‘여론’이 어떠한 거부감도 없이 그 선택을 긍정했으리라는 서술자의 기술(7.2.490-91)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바꾸어 말한다면 매기가 스티븐의 유혹을 거절했을 때 이는 동시에 세인트 옥스의 속물적이고, 보다 약한 타인의 처지에 냉담하고 무관심한 태도를, 자신의 이익과 편의에 기꺼이 복종하는 무반성적인 태도를 거부하는 것이기도 하다.

스티븐 혹은 세인트 옥스 식의 인생관을 거부하면서 매기가 선택하는 것은 무엇인가? 필립과 스티븐이 지적했듯 그는 단지 “잘못 맺어진 의무”에 대한 “비합리적인 감정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어리석음을 범할 뿐인가? 혹은 텍스트를 근친상간적 욕망의 발현으로 읽어내는 독해에서 암암리에 전제하듯 톰과의 결합을 위한 은밀한 욕망을 충족하는 과정의 일환인가? 우선 이러한 해석의 갈래들이 공통적으로 억압 대 욕망충족의 논리 위에서 작동함을 지적하자. 억압 대 욕망충족의 구도는 은밀하게 욕망의 충족을 또 하나의 선으로 가정하면서 욕망에 이의제기하는 목소리들을 전부 억압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것으로 간주해버리기 쉽다. 우리는 이 구도에 진입하는 대신 매기의 선택이 실질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먼저 보아야 한다. 스티븐과 함께 “물길”(“tide”)에 몸을 맡기고 내려가는 일은 곧 주체적인 의지의 포기와 등치된다(“there was an unspeakable charm in being told what to do, and having everything decided for her” 6.13.467). 뒤집어 말한다면 매기가 최종적으로 스티븐의 제약을 거부하고 홀로 세인트 옥스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하는 순간, 그는 스티븐 식의 ‘사랑’도 (보트를 타고 떠내려 온 순간부터 불가능해진) 필립에의 ‘잘못된 의무’도 아닌 자기 자신의 운명을 선택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자유로운 주체-되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조지 레빈(George Levine)의 표현을 빌면, “스티븐을 거부함으로서 그녀는 자신의 미성숙한 금욕주의를 한 발자국 넘어선다”(“The renunciation of Stephen moves one step beyond her immature asceticism” 16). 사태를 파악함에 있어 결과만이 아닌 과정을 함께 고려하라는 <물방앗간> 서술자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매기의 선택은 그것이 어떠한 결과를 낳는가에 따라서만—가령 오빠와의 진실한 결합이라는 욕망충족의 서사 또는 세인트 옥스의 사회로부터 배제되는 자기부정의 서사 등—평가되는 대신 그 자체가 매기의 자유로운 주체로서의 역량 혹은 태도를 드러내고 입증하는 과정임이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4.


이 지점에서 <물방앗간>의 매기 털리버가 체현하는 미덕 혹은 특정한 주체성의 태도를 보다 선명하게 이해하기 위해 주체성에 대한 후기 푸코의 논의를 참고하자. 통상적으로 1975년의 <감시와 처벌>(Surveiller et punir) 이후 그의 작업은 이전의 담론 및 에피스테메(episteme) 연구에서 권력의 이론으로 나아간다고 이해된다.2) 그러나 여기에서 참조하고자 하는 대상은 권력 이론의 기초적인 토대를 형성한 뒤 갑작기 전혀 낯설어 보이는 주제를 탐색하기 시작한 말년의 푸코이다. 1980년대 초부터 때 이른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짧은 기간에 푸코는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주체화의 과정, 주체의 자기형성과 같은 주제를 다루었다. 이러한 선회는 부분적으로는 그 소재의 이질적인 면모 때문에, 또는 푸코가 권력에 대한 저항의 불가능성을 깨닫고 개인의 내적 윤리에 빠져들었다는 명백한 오독 때문에3)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이와 같은 오해에 대항해, 비록 말년의 작업이 아주 온전한 형태로 완성되지는 않았으나, 푸코의 문제의식이 결코 갑작스럽게 바뀌지 않았음을 확인하기란 어렵지 않다. 실제로 한창 권력과 통치(govern)의 문제를 다루던 1978년의 강의 「비판이란 무엇인가」(“Qu'est-ce que la critique?” / “What is Critique?”)에서 그는 “미덕으로서의 비판적 태도”(“this critical attitude as virtue” 43)을 다루면서 그것을 “어떻게 통치당하지 않을 것인가”(“how not to be governed” 44)라는 물음과 연결시킨다. 1984년 죽음을 앞두고 주체화의 문제를 탐구하던 시점 집필된 「계몽이란 무엇인가」(“Qu'est-ce que les Lumières?” / “What is Enlightenment?”)에서 푸코는 앞서 다루었던 태도로서의 비판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이러한 비판은 그것이 우리가 무엇인가에 대한 형식으로부터 우리가 알 수 알고 행할 수 없는 것을 도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계보학적이다. 대신 비판은 우리를 지금처럼 만든 우연성으로부터 지금의 방식으로 존재하고, 행하고, 생각하지 않을 가능성을 끌어낸다”(“And this critique will be genealogical in the sense that it will not deduce from the form of what we are what it is impossible for us to do and to know; but it will separate out, from the contingency that has made us what we are, do, or think” 46). 두 텍스트는 ‘주어진 그대로 지배/통치당하지 않을 동력’을 탐구하는 푸코의 문제의식이 6년간의 시차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단절을 포함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권력 및 통치의 문제와 주체화의 문제는 어떤 관계를 맺는가? 실제로 후자는 전자에 대하여 어떻게 이해될 것인가? 이와 같은 질문들에 간략하게나마 답하기 위해서는 푸코가 주체화에 어떠한 함의를 부여하는지를 이해해야만 한다. 「계몽이란 무엇인가」에서 푸코는 현대성(modernity)을 “역사상의 특정한 시대가 아닌 하나의 태도”(“rather as an attitude than as a period of history” 39), 즉 “사고하고 느끼는 방식이자, [무엇에] 소속되어 있는지의 관계를 표시하고 동시에 그 자신을 하나의 과업으로 제시하는 행동방식이자 행위방식”(“a way of thinking and feeling; a way, too, of acting and behaving that at one and the same time marks a relation of belonging and presents itself as a task”)으로서의 “에토스”(“ethos”)로 정의하며, 이는 “자기 자신을 생산하는 과업”(“the task of producing [one]self” 42)으로서 주체화의 한 가지 양식이기도 하다. 주체화의 양식을 분석하는 것은 어떠한 함의를 갖는가? 여기에서 우리는 비교적 짧고 함축적인 이 텍스트에 머무르는 대신 주체화의 문제, 주체의 자기 형성 과정으로서의 ‘자기 배려’(“souci de soi”)를 가장 본격적으로 다룬 텍스트, 곧 <주체의 해석학>(L’herméneutique du sujet: 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81-1982)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푸코는 “주체성(subjectivité)의 역사 또는 주체성 실천의 역사”(54)를 검토하면서 “자기 포기의 의무라는 기독교의 형식”(57) 또는 (주체의 변형 및 자기 배려가 배제된 채로) “오로지 인식만이 진실의 접근을 허용하는”(61) 데카르트적 주체화와는 다른 형태의 주체화 양식의 가능성을 탐색한다.4) 이를 위해 그는 기독교식 주체화가 지배적인 틀로 자리매김 하기 이전의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 “주체가 자기 자신에게 필요한 변형을 가하는 탐구·실천·경험 전반”으로서의 “영성”(“spiritualité”)의 모티프를 발굴한다(58-61).5) 고대의 주체화 양식 중에서 푸코가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자기 인식의 문제가 특권적으로 다뤄지는 소크라테스-플라톤적 모델 및 기원 후 4-5세기의 (자신의 주체성을 포기하는) 기독교 금욕주의로의 이행기와 구별되는 “기원 후 1-2세기에 위치시킬 수 있는 자기 양성과 자기 배려의 황금기”(69)로서의 헬레니즘적 모델이다.6)

헬레니즘 모델 및 그에 수반하는 다양한 자기 통제 및 절제의 방식들을 검토하면서 푸코는 헬레니즘적인 주체화 양식의 목표는 기독교적 고행 및 개종의 실천과는 달리 스스로에게 능동적인 계기를 부여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푸코는 스스로에게 관심을 돌리는 계기로서의 전향(conversion)을 설명하면서 “개종(기독교 혹은 후기 기독교의 metanoia)이 자기 내에서의 단절과 변동의 형태를 가지며, 결과적으로는 타동-주체화(trans-subjectivation)라고 말할 수 있다면, 기원후 초기 철학에서 전향은 타동-주체화가 아닙니다....전향은 타동-주체화라기보다는 능동-주체화(auto-subjectivation)라 부를 수 있는 길고도 연속적인 절차”라고 말한다(249). 앎, 지식과 주체화의 관계를 설명하는 대목은 ‘능동-주체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푸코에 의해 재구성된 헬레니즘적 전통은 “장식적 지식”에 대항하여 “신들, 인간들, 세계, 세계의 사물”과 “우리와의 관계”를 고찰하는 “관계적 앎”의 우위를 주창한다(268). 관계적 앎은 “획득하자마자 주체의 존재 방식을 변형시키는 그러한 지식”으로, 이는 곧 “행위하는 방식, 즉 주체의 에토스(êthos)에 영향을 미치”는 지식이며 여기서 에토스란 “한 개인의 존재 방식, 실존의 방식을 만들기, 생산하기, 변형시키기를 의미”한다(269-70). 이처럼 상이한 개념들과 실천을 펼치면서 푸코가 구축하고자 의도하는 것은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통치에 맞서 스스로의 자유를 확보하는 주체화, 곧 자기 자신을 통치하는 과정으로서의 주체화 과정의 가능성이다. “기독교 모델과 달리 이 헬레니즘 모델은 자기 주해나 포기 포기를 지향하지 않고 자기를 도달해야 할 목적으로 구축”(289)한다는 설명은 그가 여기에서 주체의 능동적 계기를 보존하고 극대화하는 계기를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앞서 「비판이란 무엇인가」 및 「계몽이란 무엇인가」에서 전개된 논의와 연결시킨다면, 여기에서 푸코가 자신을 지배하는 담론과 실천을 비판하고 자신을 주어진 담론과 다르게 형성할 수 있는 저항지점으로서의 주체를 재구축한다고 말할 수 있다.7)

그러나 푸코가 주체로부터 외부로부터의 통치와 지배를 거부하고 주어진 바와 달리 스스로를 형성해가는 계기를 보았다고 할 때, 이는 그 자체로 자신의 외부에 무관심한 자폐적인 주체를 허용하지 않는가? 이와 같은 비판에 대한 답변으로 주체화에 대한 후기 푸코의 논의와 타자에의 책임 및 사회적 조건의 인식이 불가분하다는 아도르노(Theodor W. Adorno)-베버(Max Weber)의 관점을 연결시키는 주디스 버틀러의 논의를 참고하자. 버틀러는 <윤리적 폭력 비판: 자기 자신을 설명하기>(Giving an Account of Oneself)에서 “현재의 사회적 조건들—모든 윤리가 전유될 때의 조건들이기도 한—을 무시하는 윤리적 에토스는 폭력적이게 된다”(15)고 말한다. 푸코가 기존의 규범들을 비판하는 주체성으로서의 윤리적 에토스를 강조했다면, 버틀러는 여기에 헤겔적인 색채를 덧붙이면서 “자아의 존재가...인정의 장면을 통치하는 규범성의 사회적 차원에도 의존한다”(44-45)고 보충한다. 윤리가 타자의 존재와 그로부터 제기되는 “나는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47)와 같은 질문으로부터 떨어질 수 없다면, ‘나’와 ‘타자’의 관계설정을 위한 규범 및 권력이 필연적으로 출현한다는 의미에서, “윤리적인 국면이 사회적인 것에 근본적으로 의존”(48)한다고 말할 수 있다. 푸코 자신이 주체의 자기형성이 타자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계속해서 말하듯8), 비판적 자기형성으로서의 주체화는 결코 타자 및 세계로부터 초월적인 위치에 놓이지 않으며 이때의 ‘자유’는 자기 자신과 외적 맥락이 배제된 “순수하고 무매개적인 관계”(버틀러 190)를 맺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버틀러를 거칠게 요약한다면) 우리는 서로의 형성과정에서 이탈할 수 없기에 타자에 대한 책임과 윤리를 짊어져야 한다(232-33). 이러한 책임으로부터 “윤리는 사회이론의 과업에 가담해야”(19) 한다는 주장, 곧 윤리적 주체에게 ‘나’와 ‘타자’가 속해 있는 사회적 인과관계에 대한 사려 깊은 앎을 요구하는 입장이 나타난다. 곧 푸코가 재구축하는 자기 형성의 주체, 혹은 에토스의 주체는 자폐적일 수 없으며 타자에 대한 책임을 떠안는다.



5.


푸코 및 버틀러를 통해 논의된 윤리적 주체를 염두에 둘 때 비로소 <물방앗간>에서 매기 털리버를 특정한 이론적 서사의 한 기능으로 국한시키는 대신 그 자체가 어떠한 덕목 혹은 성취를 체현하는지를 바라볼 여지가 생긴다. 삶의 마지막 밤에 매기는 생계를 위한 마지막 수단을 잃고 모두로부터 고립되어 홀로 방 안에서 고민에 잠겨 있다. 아마도 세인트 옥스의 사회에 편입하여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이었을—동시에 유혹인—스티븐의 편지를 불태운 직후 그는 홍수로 인해 플로스 강이 범람하였음을 깨닫는다. 매기는 황급히 밥 제이킨(Bob Jakin)의 일가를 대피시킨 후 홀로 보트를 탄 채로 범람한 플로스 강 위로 나온다. 그때 “옛 집의 잊히지 않을 존재들의 위험과 가능한 구조에 관한 감각과 함께 오빠와의 재결합에 대한 무어라 규정할 수 없는 감각이 떠올랐다”(“Along with the sense of danger and possible rescue for those long-remembered beings at the old home, there was an undefined sense of reconcilement with her brother” 7.5.518). 매기는 안전한 곳으로 탈출하는 대신 가족들을 구하기로 마음먹고 범람한 강을 통해 물방앗간으로 향한다. 그리고 톰이 갇힌 물방앗간에 거의 도달했을 때, “그는 마침내 두근거리는 기쁨과 함께 그곳에 있었다—모든 피로를 압도하는 환희였다”(“With panting joy that she was there at last—joy that overcame all distress” 519). 톰이 지금까지 매기를 징벌하며 통제해왔다면, 매기는 어린 시절 “네가 무슨 일을 했던 개의치 않은 채로 널 용서하고 사랑할거야”(“I wouldn’t mind what you did—I’d forgivee you and love you” 1.5.36)라고 말했던 듯이 어떠한 원한도 말하지 않고 톰을 구하고 남매는 마침내 화해한다. 그리고 매기는 “루시에게로 가자, 톰, 가서 루시가 안전한지를 확인하고 다른 사람들을 돕자”(“We will go to Lucy, Tom: we’ll go and see if she is safe, and then we can help the rest” 7.5.520)고 말하며 안전한 장소로의 이동을 거부하고 다시 강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물방앗간>의 홍수 장면은 순간적으로나마 매기에게 지금까지와 매우 다른 모습을 보여줄 기회를 제공한다. 다른 무엇보다도 두드러지는 면은 이동성의 측면에서 일어나는 역전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매기는 가부장의 의사에 묶인 여성주체로서 사실상 독립적인 이동성을 확보하지 못했으며,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자유에 대한 갈망은 “나도 남자들처럼 바깥 세상에 나가고 싶다”(“I wish I could make myself a world outside it, as men do” 6.7.413)는 항변에서 나타나듯 절박한 것이었다. 강물을 따라 세인트 옥스로부터 벗어나는 순간에도 노를 저은 이는 스티븐 게스트였다는 사실을, 돌아와 톰에게 버림받은 뒤에도 이른바 여론에 의해 사회적인 삶 자체가 불가능했음을 감안한다면, 홍수로 인해 다른 모두가 갇혔거나 발이 묶인 순간에 홀로 보트에 타고 노를 쥔 이 순간은 매기에게 이동의 자유가 상징적인 층위에서나마 온전하게 주어지는 극히 드문 때이다. 이때까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역량과 이동성을 독점하던 톰이 물방앗간에 갇혀 누군가의 구원을 기다리는 처지로 전락했다는 사실은 근본적으로 두 사람의 관계가 완전히 역전되었음을 보여준다—이때 톰이 느끼는 “경외와 치욕”(“awe and humiliation” 7.5.520)이 완전히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사태는 단순히 둘의 관계를 뒤집어놓은 데 멈추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 이동성을 독점한 톰의 ‘정상적인’ 성장서사는 매기의 삶을 억압하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했을 뿐만 아니라 역설적으로 자기 자신의 성장까지도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렸다. 그러나 홍수의 순간에 매기가 톰을 구할 때 두 사람의 삶은 짧은 순간이나마 완전히 다른 국면에 돌입한다. 톰이 보트에 올라 매기와 대면한 순간,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의 완전한 의미가 그의 마음 위로 몰아쳐왔다....그것은 그가 그때까지 날카롭고 명확하게 그려오던 자신의 이해지평을 넘어선 곳에 놓여 있는, 삶 깊숙한 지점에서 그의 영혼에 주어진 계시와 같았다”(“the full meaning of what had happened rushed upon his mind....it was such a new revelation to his spirit, of the depths in life, that had lain beyond his vision which he had fancied so keen and clear”). 톰은 동생의 구조를 통해 단순히 목숨을 구할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자신을 속박해온 영혼의 맹목 역시 넘어선다. 남매가 보트를 몰고 다시 강으로 나아갈 때, 두 사람은 신체와 영혼 모두 자유롭다는 점에서 양자 모두의 성장을 불가능으로 몰고 간 이전의 구도와 완전히 다른 결론에 보여준다. 곧 톰의 서사가 타인의 성장과 자유 없이는 자신의 그것도 없음을 보여주었다면, 매기의 행위는 타인의 구원을 통해 비로소 양자 모두의 성장과 자유에 도달한다는 점에서 완전한 가능성의 영역을 열어준다. 앞서 그가 스티븐이 대변하는 세인트 옥스의 가치관을 거부하고 능동적인 계기를 보존하는 ‘자유로운’ 주체성의 역량을 보여주었다면, 홍수의 순간에 매기는 타자에 대한 책임을 완수함으로써 윤리적 주체로 스스로를 정립함으로써 곧 (타자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운 주체와 (타자에 대한 책임을 지는) 윤리적인 주체가 별개의 것이 아님을 입증한다. 두 사람이 타인들을 구하기 위해 강으로 나서자마자 떠밀려 내려오는 “거대한 파편들”(“Huge fragments” 7.5.521)과 충돌해 곧바로 사라지고 만다는 사실은 이러한 가능성의 영역이 이들이 속한 세계 속에서 온전히 지탱될 수 없으리라는 회의감을 드러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지평이 다른 누구에게도 목격되지 않고 아주 짧은 순간 나타났다가 곧바로 사라졌다고 해서 이들이 도달한 가능성 자체가, 그리고 그와 같은 지평을 열어 준 매기의 역량 또는 에토스가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니다. 정확히 이러한 지점들을 포착하는 사려 깊음이야말로 <물방앗간>의 서술자가 독자에게 요구하는 것이지 않는가.9)



6.


지금까지의 독해에서처럼 <물방앗간>의 결말부를 매기가 가진 주체로서의 역량을 드러내는 과정으로 읽을 수 있다면, 우리는 이어지는 질문, 곧 어떻게 그러한 주체의 형성이 가능한가에 맞닥트리게 된다. 흥미롭게도 <물방앗간>이 매기를 통해 제시하는 주체화의 과정은 독서 및 해석이라는 모티프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소송의 패배로 집안이 기울어지면서 매기의 책들 또한 빼앗겼을 때, 그는 남아있는 몇 권 안 되는 책 중에서 토머스 아 켐피스(Thomas á Kempis)의 책을 발견하고 스스로의 고통을 다스리고 절제할 것을 가르치는 텍스트에 깊은 감명을 받고 스스로의 삶에서 그러한 태도를 실천하고자 한다. 플로스 강이 범람하기 직전, 자신의 삶에 주어진 유혹과 고통에 대항하여 스스로의 윤리적 태도를 유지하고자 하는 매기를 지탱하는 동력이 되는 “낡고 작은 책”(“the little old book” 7.5.515)이 토머스 아 켐피스의 책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매기의 에토스 형성에 아 켐피스의 텍스트가 끼친 영향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진실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아 켐피스의 명시적인 가르침과 매기의 실천이 실제로 드러나는 행위 사이의 미묘한 간극이다.10)

서술자는 아 켐피스의 텍스트의 일부를 독자들에게 직접 제시하는데, 여기에서 가장 주요한 가르침은 스스로의 행복추구를 단념하라는 것이다. “너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세상의 다른 무엇보다도 너를 상처 입힐 것임을 알라.... 네가 자신의 의지와 기쁨을 즐기기 위해 이것 혹은 저것을 찾고 여기 또는 저기를 거닌다면, 너는 평온해지지도, 근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도 못할 것이다. 만물에는 부족한 면이 있으며 모든 곳에서 무언가 네게 시련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Know that the love of thyself doth hurt thee more than anything in the world....If thou seekest this or that, and wouldst be here or there to enjoy thy own will and pleasure, thou shalt never be quiet nor free from care: for in everything somewhat will be wanting, and in every place there will be some what cross thee” 4.3.289). 스스로의 욕망을 포기하고 단념하는 까닭은 그를 통해 보다 참된 평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버리고 포기한다면 크나큰 내면의 평화를 즐길 수 있으리라”(“Forsake thyself, resign thyself, and thou shalt enjoy much inward peace” 4.3.290). 아 켐피스의 가르침은 가장 철저한 의미에서의 자기 포기라기보다는 외부와 연결된 욕망을 억압할 때 나타나는 내면의 행복을 추구한다는 뜻에서 외적인 계기를 소거시키고 내면으로 침잠하는 데 중점을 둔다. “너는 따라서 타인들이 보다 무거운 고통을 겪을수록 너의 작은 불행을 보다 수이 견딜 수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Thou oughtest therefore to call to mind the more heavy sufferings of others, that thou mayest the easier bear thy little adversities” 289)는 언술은 결국 타인의 고통에 직면해서도 그것이 자신에게 어떤 효용을 가질 수 있는지를 먼저 떠올린다는 점에서 자폐적일 뿐만 아니라 그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이기적인’ 태도를 내포한다.

매기가 스스로의 행복추구를 단념하는 순간에, 심지어 토머스 아 켐피스의 가르침을 명시적으로 떠올리는 순간에조차 그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자기 자신의 행복이 아닌 타인들에 대한 책임감에 기인한다. 필립과의 대화에서 스스로 밝히듯 그는 “불행한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신경을 쓰는”(“I always care the most about the unhappy people” 5.4.333) 사람이며, 스티븐과의 도피 이후 사회로부터 고립된 시점에서도 자신의 생존 혹은 행복이 아닌 “일생동안의 기나긴 참회가 다른 고통 받은 이들에게 빚진 몫을 가볍게 하는 모든 가능성”(“the long penance of life, which was all the possibility she had of lightening the load to some other sufferers” 7.5.513)임을 우선적으로 떠올린다. 다른 무엇보다도 앞서 밝혔듯 홍수의 시점에 그가 취하는 모든 행동과 태도가 타인들의 안위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매기가 자신이 감명 깊게 읽은 책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텍스트의 가르침과 실천 사이의 차이를 초래하는 동력은 무엇인가? <물방앗간> 전반부를 통틀어 매기는 단순한 독자가 아닌 독창적인 해석자로 등장한다는 사실이 한 가지 단서가 될 수 있다. 대니얼 디포(Daniel Defoe)의 책을 읽으며 마녀로 몰린 늙은 여성이 결국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을 수밖에 없으며 그 광경을 웃으며 바라보는 이들이야말로 “진짜로 악마”(“He’s the devil really” 1.3.18)라는 해석을 제시하는 대목이나, 스탈 부인(Madame de Staël)의 소설을 읽으면서 “금발 여성들이 행복을 싹쓸이해가는”(“the blonded-hair women carry away all the happiness” 5.4.332) 상황에 분개하는 장면은 매기가 단순히 수동적인 독자가 아닌 적극적인 해석자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해석의 순간에 그를 이끄는 원칙은 “이야기에서 언제나 거부당한 연인의 편을 드는 것”(“I always take the side of the rejected lover in the stories” 5.4.333)이다. 텍스트의 내용에 대한 능동적인 해석이 가능한 것, 그리고 해석의 준칙으로 고통 받고 버림받는 이들에 대한 관심과 염려를 채택하는 것이야말로 토마스 아 켐피스의 텍스트로부터 텍스트의 가르침에 국한되지 않는 자신의 에토스를 형성할 수 있는, 곧 차이화(differentiation)를 가능하게 하는 요인이 된다.11)

이로부터 우리는 엘리엇의 소설에서 주체화를 이루는 장치로서의 독서-해석의 태도가 그 자체로 주체의 에토스이기도 함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매기가 체현하는 에토스로부터 찾아볼 수 있는 미덕, 즉 미약한 것들을 흘려버리지 않고 시야에 담는 사려와 책임감이야말로 엘리엇의 서술자가 <물방앗간>의 서술 내내 견지하는 것이기도 하다. 결론부에서 서술자는 홍수가 지나간 뒤의 광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자연은 자신이 불러일으킨 참화를 복구하지만, 모든 것이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뿌리 뽑힌 나무들은 다시 뿌리내릴 수 없다. 갈라진 언덕들에는 흉터가 남는다. 만약 새로운 생장이라는 게 있다 해도, 나무들은 예전과 같지 않으며 언덕들도 녹빛의 수풀 아래 과거에 찢긴 흔적을 품는다. 과거에 머물렀던 시선들에게 완전한 회복이란 없다”(“Nature repairs her ravages—but not all. The uptorn trees are not rooted again; the parted hills are left scarred; if there is a new growth, the trees are not the same as the old, and the hills underneath their green vesture the marks of the past rending. To the eyes that have dwelt on the past, there is no thorough repair” 7.6.521-22). 비록 사회가, 세계가 마치 작고 연약하고 고통 받은 존재들이 없었던 듯 움직여간다 할지라도 그들이 존재했다는 사실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엘리엇의 서술자가 제시하는 해석의 윤리란 “완전한 회복이란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 곧 사라진 것들이 부재하면서 남기는 미세한 차이를 포착하고 잊어버리지 않는 데 있다. 매기 털리버의 삶이 체현하는 에토스와 그러한 에토스의 형성을 가능하게 하는 그의 해석은 <물방앗간>의 서술 자체에 내재한 윤리가 어떤 것인가를 드러내며, 우리는 정확히 <물방앗간>이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에 따라 그것을 사려 깊게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7. 참고문헌


미셸 푸코. <안전, 영토, 인구: 콜레주드프랑스 강의 1977~78년>. 오트르망 역. 난장, 2011. Trans. of Sécurité, territoire, population: 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77-1978 by Michel Foucault, eds. by François Ewald, Alessandro Fontana, and Michel Senellart, Paris: Seuil/Gallimard,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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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대 여성이 결혼을 통해서 “온전한 성인으로서의 위치”(“their full adult status”)를 획득할 수 있었으며 결혼을 강요받는 분위기였다는 다비도프와 홀(Davidoff and Hall)의 설명을 참조(322-29).

2) 1991년 출간되어 영미권의 푸코 연구에 엄청난 영향을 준 <푸코 효과: 통치성 연구>(The Foucault Effect: Studies in Governmentality)에서 최초로 제기되고 2000년대 중반 <안전, 영토, 인구: 콜레주드프랑스 강의 1977~78년>(Sécurité, territoire, population: 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77-1978) 및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콜레주드프랑스 강의 1978~79년>(Naissance de la biopolitique: 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78-1979)의 출간과 함께 본격화된 통치성(governmentality) 연구도 기본적으로는 이 맥락의 연장선에 있다. 실제로 푸코는 <감시와 처벌> 이후 <앎의 의지>를 거쳐 방금 언급한 두 해의 강의에서 통치성 개념을 중심으로 국가-권력 이론의 토대를 어느 정도 형성하기까지 지속적으로 자신의 방법론과 개념들을 수정한다.

3) 이러한 평가에 대한 프레데릭 그로(Frédéric Gros)의 반론을 참고하라(<주체의 해석학>중 「강의 상황」, 특히 558-67).

4) 푸코는 이전부터 그리스적 실천과 기독교적 통치의 차이점을 강조해왔다. <안전, 영토, 인구>에서 사목적 통치성을 다룬 5-7강 및 복종이라는 범주가 존재하지 않았던 그리스적 실천과 달리 순수한 복종과 (목자에 대한) 전면적인 의존을 강조한 기독교적 통치를 설명하는 부분(246-48) 참고.

5)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푸코는 결코 영성의 계기가 오로지 고대에만 존재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는 17세기부터 19세기의 철학 및 정신분석, 맑스주의와 같은 사상적 운동에서 지속적으로 영성의 계기들이 발견된다고 덧붙인다(<주체의 해석학> 66-69).

6) “플라톤주의적 모델”, “기독교 모델”, 그리고 양자와 대비되는 “제3의 도식”으로서의 “헬레니즘 모델”의 구별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은 <주체의 해석학> 286-90을 참조.

7) 그리고 이러한 가능성의 장소로서 주체를 재구축하는 작업이 푸코에게 개인적인 윤리로의 후퇴가 아닌 정치적 저항을 위한 거점을 마련하는 것이었음은 분명하다. <주체의 해석학>의 한 대목에서 푸코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부분은 길게 인용할 가치가 있다. “...통치성을 권력 관계가 갖는 유동성·변형 가능성·역전 가능성 내에서 권력 관계의 전략적 장으로 이해한다면 통치성 관념에 대한 성찰은 반드시 자기와 자기의 관계에 의해 정의되는 주체의 요소를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거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이는 단지 내가 이전에 여러분에게 제안하려고 시도한 분석의 유형 내에서 권력 관계—통치성—자기와 타자의 통치—자기와 자기의 관계 이 모든 것들이 하나의 사슬과 골조를 구축하며, 또 이 개념들을 중심으로 정치 문제와 윤리 문제를 접목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283-84, 인용자 강조). 통치성 개념이 권력의 미시적 실천과 거시적 흐름을 연결하면서 (특히 국가의) 권력을 초월적인 지평에 두는 대신 그것의 우연적인 실체를 드러내기 위해 고안되었음을 감안한다면, 푸코의 의도는 더욱 명확해진다. 후기 푸코의 작업으로부터 저항의 논리를 이끌어내는 상세한 작업으로 사토 요시유키의 <권력과 저항> 3장(96-143) 참고.

8) 헬레니즘 모델이 타자를 배제하지 않는다는 진술은 <주체의 해석학>에서 거의 필사적으로 보일 정도로 반복된다. 특히 “진실된 담론의 표명”이자 “근본적으로 이타성에 의해 명령”되는 실천인 parrhêsia를 설명하는 3월 10일의 강의(397-437)를 참조.

9) 매기의 죽음이 “나쁜 주체”(“bad subject”)를 훈육하고 그 에너지를 통해 사회 내의 적대적 관계를 해소하려는 경향을 보여준다는 낸시 암스트롱(Nancy Armstrong)의 해석은 두 가지 측면에서 반론가능하다. 그의 독해는 매기가 체현하는 에토스의 독특함에 대한 고려 없이 인물을 이데올로기적 기능의 한 부품으로 간주할 뿐만 아니라, 주체가 개인이라는 범주를 초과하려는 계기를 곧바로 공동체의 이데올로기로 해석함으로써 사실상 그 자신이 비판하려는 개인주의를 역으로 본인이 옹호하는 함정에 빠진다. 암스트롱의 책 중 <물방앗간>을 독해하는 91-98, 특히 96-97 참조.

10) 매기가 내면화한 토머스 아 켐피스의 가르침 단순히 “억압으로 인한 기아의 고통에 대한 마취제”(“an opiate for the hunger pains of oppression”이 아니라 “양심 혹은 차라리 승화된 원칙들의 목소리”(“the voice of conscience or, alternatively, sublimated maxims”)의 측면을 갖는다는 메리 재커버스(Mary Jacobus)의 해석은 부분적으로 진리값을 갖는다(72-73).

11) 책과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매기와 정 반대의 사례를 보여주는 인물은 역시 톰이다. 그는 아버지와의 맹세가 적힌 성경(“the large old Bible” 6.4.389)을 계속해서 지니며 성경에 적힌 아버지의 명령에 어떠한 유연함도 없이 그대로 복종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믿는다. 책을 통해 자신을 형성한 매기가 해당 텍스트라는 실체로부터 자유로운 데 비해 톰은 매기에 의해 구조되어 (성경이 놓여 있을) 방을 떠나는 순간에서야 텍스트의 명령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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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동근 2014.07.09 02:39 Modify/Delete Reply

    역시..대단하십니다!

  2. 얼음꽃금붕어 2014.07.09 11:27 신고 Modify/Delete Reply

    호호,,, 그동안 수업하는 BG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 숙제 제출하는 학생의 신분이기도 했던 것이구만요. ㅎ

    "이 텍스트에서 푸코나 버틀러가 반드시 등장할 필요는 없다."-- 에이, 그랬으면 이 글이 얼마나 심심했겠어요. 저는 덕분에 잼나게 읽었어요. 이 논의에 버틀러의 [Gender Trouble: Feminism and the Subversion of Identity]나 푸코의 [The History of Sexuality, Vol. 1: An Introduction]의 논점들이 살짝 추가되면 어떨까 그런 생각이 잠깐 들었어요. 특히나 타자에 대한 책임, 윤리의식, 혹은 연대를 통한 사회변화의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가 푸코를 거쳐 버틀러에 이르러 좀더 강화된 것은 아닐까, 그리 생각했었거든요. ㅎㅎ

    • BeGray 2014.07.09 22:49 신고 Modify/Delete

      아직은 학생의 성격이 훨씬 강하죠 ㅋㅋ 수업은 사실 몇 번 안 합니다, 아직은요-

      <성의 역사> 1권 같은 경우는 사실 억압가설에 대한 논의가 그 텍스트에서 푸코가 던지는 시점으로부터 기인한 거긴 해요. 그런데 기본적으로 1권은 성장치 및 국가권력에 대한 분석--통치성으로까지 이어지는--이라, "타자에 대한 책임, 윤리의식, 연대를 통한 사회변화의 가능성"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끌어내기 힘들텐데요? <주체의 해석학>부터 <성의 역사> 2,3권에서는 어느 정도 그런 걸 끌어낼 수 있겠지만. / <젠더 트러블>은 아직 안 읽었는데, 버틀러도 조만간 깊게 만나보아야 할 저자라고 생각은 늘 합니다-

    • 얼음꽃금붕어 2014.07.10 04:27 신고 Modify/Delete

      아, 1권에서 부분적으로 감지되던 것들이 2,3 권으로 확장되는 거라고,, 저는 그리 생각하였고요, (진땀 ㅜㅜ;;;) 버틀러가 푸코를 가져다 쓰는 방식도, 제가 읽기에는 그런 방향이었던 것으로 기억해요. 버틀러는, 성정체성 관련 교사 교육 논문을 쓰느라 좀 찾아 읽어 봤었는데 저술이 참 좋드만요. 비지님도 계속 열공하셔서 푸코나 버틀러 못지 않은 좋은 논문을 쓰세요~.ㅎ 그나저나 제 남동생은 경제학과 석사 논문을 영어로 썼던데, 설마 비지님도 박사 논문을 영어로 쓰는 것은 아니죵?ㅎㅎ

    • BeGray 2014.07.10 10:20 신고 Modify/Delete

      1권과 2-3권은 정말 통치성과 주체화의 문제라는 갭 만큼의 차이가 있어서 사실 대부분의 논자들은 별개로 다루는 것 같아요. 물론 저는 연결지점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걸 들춰내서 푸코의 이론을 재구성/완성시키는 게 후학들의 의무라고 믿지만요. / 제가 한국에서 학위를 받고 싶은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논문을 한국어로 쓰고 싶다는 데 있기도 합니다-ㅋ 특히나 비평은 언어를 다루는 문제랑 매우 밀접하게 얽혀있어서요, 솔직히 저는 영어랑 한국어랑 둘 다 고만고만한 것보다는 어느 한 쪽 언어의 숙달도가 깊이 축적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이런 비판적 사유의 영역에서는요.

    • 얼음꽃금붕어 2014.07.11 04:00 신고 Modify/Delete

      BG님은 가리타니 고진 모델로 가면 좋죠. 한국말로 일단 논문을 잘 쓰고, 아주 괜찮은 번역자를 구하고. ㅎ 팟팅하세요~.

    • BeGray 2014.07.12 00:03 신고 Modify/Delete

      가능만하다면야 최상의 길이죠 ㅎㅎㅎ 제가 자질이 많이 부족해서 문제지...^^ 어쨌든 언젠가 올지 말지 모를 그때까지 강가딘 님도 열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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