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대 신입생들을 위한 몇 가지 지침들

Critique 2014. 6. 29. 14:51

아래의 내용은 이번 학기 내가 조교를 담당했던 (이제 한 학기가 지났지만) 인문대 신입생들을 위해 정리한 몇 가지 '실용적인' 지침들이다. 개인적인 경험에 의거해서 썼고, 특히 학부에서 이제 막 인문학 전공을 선택할 학생들에게 무엇이 도움이 될 지를 고민하면서 가능한 구체적인 지침들을 생각했기에 다른 맥락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된다고 확언할 수는 없다. 다만 어느 정도 일반적인 의미를 갖는 진술도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기술한 내용 중 무언가 틀렸거나 보충할 내용이 있다면 가감없이 리플을 달아주면 고맙겠다. 굳이 말한다면 아래의 내용은 초안에 가깝고, 시간이 지나면서 보완되어야 한다. 특히나 인문학 전공자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관습적이지 않은) 유의미한 답변이 아직도 제출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가 무엇을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은 좀 더 구체적일 필요가 있다.



한글에서 글자크기 10, 줄간격 160 기준으로 A4 12.5쪽에 달하는, 웹에서 보기에는 제법 긴 글이라 목차를 간단히 적는다.


1. 자신의 무지를 인식하기

2. 스마트폰과 거리 두기

3. 수업과 공부에 관하여

4. 자신과 다른 맥락에 속한 사람들과 함께 하기

5. 다양한 분야의 좋은 책들을 많이, 끝까지 읽기

6. 다양한 분야에서 깊게 경험하기

7. 협동과 조직, 시스템의 힘을 깨닫기

8. 읽기, 생각하기, 쓰기 훈련

 



 

 

1. 자신의 무지를 인식하기

 

: 자신의 무지를 인식/인정하기란 타인에게 무언가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반드시 갖춰야 하는 태도입니다. 제 아무리 뛰어난 교육자라고 해도 무언가를 배우겠다는태도를 견지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제대로 된 앎을 전달할 수 없습니다. 배움을 위한 태도는 당장 자신의 흥미를 끌지 않는 것, 지금의 자신에게 별다른 쓸모가 없어 보이는 것도 집중해서 듣고 그 의미를 탐색하고자 하는 의지를 함축합니다. 뒤집어 말하면 누군가의 가르침을 접하면서 자신에게 도움이 될 지를 재빠르게 판단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태도야말로 배움을 근본적으로 가로막는 장애물입니다. 왜냐하면, 진실로 무지의 상태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지금 배우고 있는 앎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올바르게 판단할 능력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플라톤의 대화편들은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앞에 있는 상대방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 그가 자신이 이야기하는 주제를 실제로는 잘 모른다는 사실을 확인시키는 것으로 시작하곤 합니다. 이는 바로 무지의 인식에 기초할 때만, 즉 스스로가 이 주제를 잘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고 타인을 경청할 때만 올바른 배움이 가능하다는 믿음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방금 이야기한 무지의 인식이 구체적인 가르침(수업, , 대화 등등)을 앞에 두었을 때의 이야기라면, 지금 이야기할 무지의 인식이란 자기 자신이 무엇을 얼마나 모르는지를 대략적으로 판단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한다면, 대학에서 갓 한 두 학기를 마친 사람의 지식은 대부분 고등학교 수능시험 때까지의 학교교육과 가족 및 친구들로부터 자연스레 습득한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때 지금까지 여러분이 세상 및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바탕을 구성하는 지식이 사실 무척이나 적은 양이라는 사실을 빨리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저는 한국의 중등학교 교원들과 학부모들의 지성을 폄하할 생각은 없습니다. 단지 중등교육과정을 실질적으로 개선시키는 움직임에 가장 많은 기여를 해왔던 단체가 같잖은 이유로 단숨에 법외노조가 되어버린다거나, 지식의 생산, 확산과 축적에 전혀 무관심한 이들이 교육정책을 결정하는 작금의 광경이 드러내듯, 한국사회가 중등교육과정을 질적으로 개선시키는 데 아무런 관심이 없는 상황에서 교사 개개인의 역량과 무관하게 중고등학교 과정에서 여러분이 배우는 앎이 무척이나 제한적일 수밖에 없음을 말할 뿐입니다). 개인적인 경험을 말한다면, 학부 첫 학기 때 3년간 고등학교에서 배웠던 내용보다 그 한 학기에 새롭게 배우고 접한 내용이 더 많다는 사실을 깨닫고 상당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지난 한 학기를 돌아보면서 자신이 무엇을 배웠는가를 복기해 보았을 때 그와 같은 충격을 받지 않는다면 무언가 잘못되지 않았는지 의심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대학 및 이후의 과정에서 무엇을 선택하고 배울 것인가에 대해, 지금 여러분의 판단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근거들, 곧 지금까지 중고등학교 과정에서 들어왔던 이야기나 부모님, 또래들의 의견과 같은 요소들로부터 여러분 스스로가 의심하고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하겠습니다. 이유는 단순한데, 대학에서 무엇을 가르치고 배우는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의견이 사실에 부합한다는 보장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의견들을 곧바로 수용하는 대신 여러분이 판단의 주체가 되어 직접 정보를 찾고, 더 많은 걸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문의하는 쪽이 훨씬 합리적입니다. 당연히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가 전부도 아니거니와 틀릴 수도 있음을 늘 염두에 두고서 말입니다. 칸트를 의식하면서 말한다면, 판단과 행위의 주체가 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한계를 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자기 자신의 앎과 그 앎을 형성해온 요소들이 틀릴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앞으로 자신이 도달해야 할 수준에 비해 자신이 지금까지 쌓은 앎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객관적으로 판단하려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더불어 자신의 한계를 안다는 것은 양적이고 기술적인technical 측면에서 자신이 어느 기간 동안 어느 정도의 지식을 축적할 때 그것들을 막연히 머리에 쑤셔 넣는 대신 합당하게 이해할 수 있을지, 더불어 자신의 다른 책임을 포기하지 않고 다할 수 있는지를 판단할 줄 아는 능력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욕심이 과하거나 지나치게 장대한 계획을 세우는 사람은 자신을 잘 모른다는 데서 미성숙하거나 남과 뒷일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데서 무책임합니다.

 

 


2. 스마트폰과 거리 두기

 

: 일반적인 명제로 출발한다면, 사람은 자신이 의식하는 정도보다 자신이 사용하는 도구에 매우 많이 의존합니다. 그리고 저는 여러분이 (수업을 포함한 각종) 배움의 과정으로부터 충분히 영양을 섭취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한시적으로나마 스마트폰이라는 도구와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제가 각종 수업 및 인간관계에서 보아온 다양한 사례들은 차치하고, 여러 선생님들이 공통적으로 말씀하시는 사항만 적겠습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스마트폰은 그 시공간에 자리한 배움/대화의 장면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게 만듭니다. 이 도구의 핵심은 사람을 순간적으로 완전히 다른 정보-맥락에 개인적으로접속시킨다는 데 있습니다. 누군가가 자신이 속한 대화 또는 수업의 맥락과 차단된 자기만의 맥락에 짧게라도 접속될 때 원래의 맥락에 충실히 속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특히나 다른 전공보다도 자신이 접하는 순간의 미묘한 기류와 뉘앙스를 인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인문학 영역에서 이와 같은 상황은 치명적입니다. 동시에 스마트폰은 지루한 순간, 비어있는 순간, 머리 아픈 순간을 견뎌내기보다 회피하는 유혹으로 작동합니다. 실제로 여러분이 (강의자의 직접적인 제재가 적은) 대형 강의에서 주변의 학생들을 관찰해 볼 기회가 있다면 제 말이 무슨 뜻인지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금만 지루하고 재미없어져도 사람들은 곧바로 스마트폰을 꺼내고 수업의 맥락으로부터, 당장의 지루한 순간으로부터 이탈합니다. 항상 자신의 입맛에 맞는 자극과 맞대어 살고픈 유혹에 저항력을 갖추지 못하는 것도 치명적이지만, 그 지루한 순간을 직면하고 자신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을 자연스럽게 갖추지 못하면 일정 수준 이상의 집중력을 요구하는 정신노동을 수행하기가 무척이나 어렵게 됩니다(저는 학문의 영역 이외에도 수준 높은 정신노동을 요구하는 영역이 여럿 있음을 환기하고 싶군요). 특히나 학문의 경우, 베버가 이야기했듯 무척이나 힘들고 외로운 순간이 많습니다. 당장 이해도 되지 않고 무의미해 보이는 자료를 계속, 반복적으로 읽고 자신의 머리로 정리하려 노력해야 합니다. 정신적으로 고된 순간으로부터 쉽사리 벗어나 자신에게 맞춰진 편안한 세계로 후퇴하려는 욕망에 굴복할 때 삶에서 아주 많은 가능성을 포기해야 합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스마트폰으로부터 얼마든지 떨어져 나올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저는, 저 자신의 의지조차 믿지 않는 사람으로서, 그러한 믿음이 오판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저는 여러분들이 스스로가 이 기계에 얼마나 의존하고 있는지를 의식하고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라도 의도적으로 그로부터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3. 수업과 공부에 관하여

 

: 대부분의 신입생들은 수업을 듣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수년 간 스스로를 억눌러 오면서 대학에 왔는데 조금 쉬고 또 보상받고 싶은 기분이 드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요즘은 학점이 무척이나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면서 외려 용감한(?) 사람이 아니면 수업은 형식적으로나마 참여는 하는 것 같습니다. 말하고 싶은 요점은, 특히나 인문대 수업은 책을 읽고 들어와 수업을 경청하지 않으면 실제로 얻는 바가 극히 적다는 것입니다. 적지 않은 학생들이 수업을 제대로 듣지 않거나 텍스트를 읽지 않아도 적당한 학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경제적인태도를 취하면서 인문대 수업이 만만하다고 믿습니다. 착각입니다. 그럭저럭 벼락치기로 해결할 수 있는 시험과 적당히 쓴 리포트에도 점수를 주는 까닭은 진지하게 하면 수강생들 대부분이 따라오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지성에 자존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글쓰기 과제물에 부정적인 코멘트가 달린 것이 아니라 수업에서 학생들의 눈높이에 따라적은 것만을 요구하는 상황에 기분이 상해야 합니다(많은 서울대생들은 자신들이 지적으로 탁월하며 엘리트라고 허황되게 믿고 싶어 합니다만, 적어도 인문학 분야에서는 그런 착각을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진짜로 엘리트들을 대상으로 가르쳤던 곳들의 커리큘럼을 보면 수강생들이 알고 있으리라 전제하는 수준이 다릅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조차도 텍스트를 읽지 않고 수업을 들어오면 정말 난감합니다. 얻을 수 있는 게 극도로 제한되니까요. 이번 학기 수업을 진행하면서 토론 시간이 부족했다는 아쉬움을 토로한 학생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건 수업에서 요구하는 텍스트를 충실히 읽고 자신이 이야기할 내용을 사전에 준비한 학생들이 할 수 있는 말이지, 토론 중간에 텍스트를 참조하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희망할 계제가 아닙니다. 토론수업은, 특히 일정 수준 이상의 지적인 전진을 희망한다면, (특히 한국의 맥락에서) 가장 까다롭고 성공할 가능성이 낮은, 효율성이 떨어지는 방식 중 하나입니다. 수업을 준비하는 사람도 겉보기보다 굉장히 세세한 지점까지 신경 써야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론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기본적인 지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쓸모 있는 결과는 좀처럼 나오지 않습니다. 수업준비를 거의 해오지 않고 들어오는 학생들이 대부분인 이곳에서는 특별한 장치를 설정하지 않는 한 성공적인 토론이 성취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모쪼록 지금이라도 텍스트를 읽고 수업에 경청하는 일의 중요성을 여러분들이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공부에 관해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막연히 주어졌기 때문에 하는 공부보다는 본인에게 흥미 있고 필요한 공부를 하는 쪽이 훨씬 동기부여도 되고 결과도 좋다는 것입니다. 제가 직업으로서의 학문을 택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무엇이 좋아서 공부를 하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지금도 종종 질문 받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질문이 틀렸습니다. 공부가 좋아서 하는 게 아니라, 제게 필요하고 재미있게 할 수 있는 공부를 찾았기 때문에 (낮은 경제적 보상 및 사회적 지위에도 불구하고) 선택한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꼭 대학이 아니라도 좋으니 여러분의 삶에 필요한, 흥미를 느낄 수 있는 공부 영역을 발견하기를 바랍니다. 어떤 분야든 생각을 하고 공부를 지속하는 사람의 지성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지성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때때로 졸업한 뒤 경제적 필요에 의해 직업을 선택한 친구/선배를 만날 때, 제 기억 속에서 무척이나 날카로운 지성을 보여주었던 사람들의 판단력이 하강하는 것을 보면 굉장히 당황스럽습니다. 사람의 머리에는 엄밀히 말해 현상유지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보통은 어지간히 공부해도 머리가 좋아지기는 힘들고, 고작해야 마치 체스판 위의 달리기처럼 제자리에 머물 뿐입니다. 반면 실질적으로 사용하기를 멈추는 순간부터 사고의 유연성과 통찰력, 세심함 모두 급속히 감퇴합니다. 이는 심지어 평생 학문을 해왔다고 자부하는 교수들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라서, 우리는 젊은 시절에 날카로움으로 존경받았던 지성인이 학업을 놓은 뒤 어느새 형식적인 예의만 갖춘 제자들에 의해 무시당하는 광경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요점은 영역이 무엇이든 간에, 그리고 반드시 전문적인 수준이 아니더라도, 지적인 활동을 계속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학업과 거리가 먼 삶을 산다고 해도 머리가 굳으면 곤란한 건 비슷합니다. 가장 쉬운 일을 할 때도 이해력이 떨어지는 사람과는 같이 하기 힘듭니다). 특히나 지금처럼 지식의 왕성한 축적이 중요한 시기에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4. 자신과 다른 맥락에 속한 사람들과 함께 하기

 

: 대학생활을 포함해서 우리의 삶에 작용하는 가장 강력한 욕망 중 하나는 편안한 상태에, 자신에게 익숙한 상태에 머물고자 하는 것입니다. 인간관계의 경우 이러한 욕망은 보통 자기 자신과 비슷한 가치관/정체성(성차, 계급, 지역, 인종, 민족, 학력 등등)을 공유하는 사람과 관계를 형성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나타나죠. 특히나 서울대처럼 계급적(경제적)으로도, 중고등학교 때까지의 삶의 경험도, 이후 희망하는 진로도 유사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상대적으로 보다 균질적인 집단에서는 이러한 동종교배를 학교생활 내내 유지하고 싶은 욕망을 빈번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타대 출신에 대한 저 경악할만한 배타성이 한 예시가 될 수 있겠죠-). 그래서 저는 거꾸로 이러한 자신에게 익숙한 집단으로부터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고 다른 맥락에 속한 사람들과의 접촉면을 늘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많은 논거를 제시할 수 있지만 두 가지만 이야기하겠습니다. 먼저, (학교 동문을 포함한) 여러분이 현재 속해 있는 집단은 세상의 전부가 아니며 세상은 훨씬 다양하고 이질적인 정체성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자신과 근본적으로 이질적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경험은 그런 점에서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음에도 매우 필수적인 배움입니다. 또한 앎이라는 측면에서 말한다면, 쉽게 하는 말로 자신과 이질적인 집단과 접촉하는 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자신이 속해 있는 집단의 믿음과 가치가 얼마나 부분적인 것인지 깨닫게 됩니다. 앞서 이야기한 내용을 끌어온다면, 스스로의 신념과 세계관을 구성하는 집단을 비판적으로 검토할 때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무지한가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이때 핵심은 (대체로 편견만을 낳는) 단순히 일회적인 접촉이 아니라 지속적인 관계형성을 통해 타자를 깊게 이해하려는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설령 역겹고 상대할 가치가 없다고 느껴지는 사람들이라도물론 용서가 되지 않는 인간들도 있습니다만그들이 어떠한 맥락에서 지금과 같은 모습에 도달하게 되었는가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이 없다면 우리는 너무도 쉽게 우리 자신이 지금 갖고 있는 불완전한 잣대에 기초해서 타인을 평가하려는 유혹에 빠지게 됩니다(더불어 그 불완전한 잣대를 수정할 기회도 얻지 못합니다). 역으로 자신과 다른 사람을 보다 사려 깊게 이해하려는 과정은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과정과도, 더 나아가 자기 자신을 지금보다 더 나은 존재로 만드는 과정과도 분리될 수 없습니다. 저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여러분이 자신이 지금 마치 집과 같이 자연스럽고 편하게 느끼는 사람들과도 실제로 다른 사람임을 지각할 수 있는 예민함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나 우리들이 속해 있는 영역에서 작고 세부적인 차이를 무시하지 않는 태도는 정말로 중요합니다.

 

 


5. 다양한 분야의 좋은 책을 많이, 끝까지 읽기

 

:  이 조언은 이미 여러분의 귓가에 못이 박히게 여러 차례 반복되었을 것입니다. 조금 덜 진부한 이야기들을 덧붙여 보겠습니다. 사실 좋은 책은, 도움이 되지 않는 책은 물론 더 많지만, 매우 많고 이것들 중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책을 골라내는 것도 무척이나 쉽지 않은 일입니다(그래서 저는, 늘 똑같은 수준에 머물지 않고 계속해서 수준이 상승한다는 조건 하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새로운 책을 직접 찾을 수 있는 단계에 들어서는지의 여부가 매우 결정적으로 작용한다고 봅니다). 그에 관해 이야기하려면 글이 너무 길어질 테니 잠시 괄호에 넣고 이야기를 계속하는 걸 허용해 주시길.

 

 “많이읽는 건 우리들이 속해 있는 지적인 흐름 상 필수적입니다. 인문학은 기본적으로 고전적인 문헌을 습득하는 문헌학적과정과 분리될 수 없었으며, 지금도 학문의 경계선 상에 있는 분야들을 제외하면 이 사실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쉽게 말하면 더 많이 더 넓게 읽는 사람이 더 뛰어나게 될 뿐만 아니라 더 많은 걸 볼 수 있게 됩니다. 질적 차이, 재능이 중요하다 이런 말들을 하지만 양이 압도적으로 차이가 날 때는 성립이 되지 않죠. 저는 조금 더 극단적으로 지식의 양적인 축적이 전제되지 않는 인문학 전공자는 자신의 특장을 완전히 살릴 수 없다고까지 말하고 싶습니다. 역사학 같은 분야는 말할 것도 없고, 문학도 (물론 읽는 것이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지만) 예외는 아닙니다. 개인적으로는 막연히 다독을 하기 보다는 머릿속에서 일종의 세계에 대한 전체적인 감각혹은 지식들 간의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삼기를 권합니다. 다시 말해 막연히 앎을 축적하는 대신 서로 다른 영역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던 사실들을 연결해서 하나의 커다란 그림을 그릴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아무런 연관성을 찾지 못했던 다양한 분야가 하나의 세계로 연결되는 순간 역으로 개별적인 사실들을 보다 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양적인 축적이 질적인 상승으로 이어진다는 말은 거짓이 아닙니다. 가능하다면 질적인 상승에 도달할 때까지 다양하게 많이 읽기를 권합니다. 이때 많이의 기준은... <공부란 무엇인가?>를 인용한다면 일주일에 두 권 정도입니다.

 

 넓게, 많이도 중요하지만, 오늘날 각종 다이제스트나 요약, 핵심정리가 만연한 시대에 저는 역으로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끈질기게 붙잡는 것이 일반적으로 더 나은 독서라고 생각합니다. 특히나 진정으로 뛰어난 사고력을 갖춘 저자들과 대화하려면 그 정도 노력은 들여야 합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고전들은 어렵고 지루하기에 필요한 부분만 읽거나 요약정리 된 걸 보면 된다고 믿는데, 애초에 (전혀 다른 사회적 맥락에 속한) 뛰어난 지성을 갖춘 누군가가 자신의 사고력을 응축시킨 결과물을 손쉽게 이해할 방법이 있다고 믿는 쪽이 순진합니다. 독서를 통해 단순히 지식을 확장시키는 대신 사고 자체의 수준을 높이고 싶다면 그만한 노력이 당연히 필요합니다(덧붙이자면 지금까지의 인문학은 생업에 구애받지 않고 이러한 노력을 투여하는 걸 전제로 하기 때문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부르주아적인 학문으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 자신의 지적 수준을 지나치게 뛰어넘는 책을 고르는 만용은 자제해야겠지만, 자신의 사고보다 조금 더 뛰어난 저술을 접할 때 지루하고, 어렵고, 고통스럽고, 책을 치워버리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일단 당장의 이해를 넘어서 끝까지 도달할 때 얻을 수 있는 경험이 분명 있습니다이건 저 자신의 경험으로도 보장할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은 경험이 축적되면서 독자는 낯선 논리를 접해도 당황하지 않고 차분히 응대할 수 있게 될 뿐만 아니라 최종적으로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사고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6. 다양한 분야에서 깊게 경험하기

 

:  3번과 이어지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역시 오늘날엔 너무나 흔한 말이 되었습니다. 굳이 뭔가를 덧붙인다면, 단순히 이름만 다른 여러 분야가 아닌 성격이 다른 분야들, 자신이 아직 해보지 않은 분야를 겪어보는 편이 더 효과적이라는 사실과 최소한 한 분야는 일정 이상의 깊이를 갖추는 게 좋다 정도가 있겠네요. 질적으로 다른 경험을 해볼 필요성은 굳이 부연하지 않아도 될 테고, ‘깊이의 문제는 조금 강조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막연히 여러 분야를 겪는 것 보다는 적어도 한 분야가 내적으로 어떻게 움직이는지 원리를 이해한 상태에서 다른 분야를 겪을 때 해당 영역의 성격을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질적인 경험들이 자동적으로 상호치환될 수는 없습니다. 다른 건 다른 것이니까요. 그러나 한 분야에서 일정 수준의 깊이에 이른 사람이라면, 대체로 다른 분야에 대한 이해와 숙달이 상대적으로 빠를뿐더러 자신이 기존에 갖고 있던 앎과 새로운 앎을 연결시켜 단순히 분리된 지식 이상의 논의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앎은 연결될 때 “1 + 1 > 2”니까요. 이미 몇 개의 분야에 전문가적인 위치에 오른 사람은 어느 정도 인접관계가 있는 분야라면 훨씬 빨리 새로운 분야를 습득할뿐더러 자신이 습득한 분야들을 통해 종합적인 그림을 그리기도 쉽습니다. 개별적인 전문가는 흔하지만, 종합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은 어느 시대 어디를 가도 드물고 가치 있는 존재입니다.


 상식적인 말이지만, ‘깊이는 특히 사람을 대하는 데서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막연하게 여러 사람과 교류하는 것보다는 한 사람이라도 깊은 관계를 맺는 쪽이 인간에 대한 이해와 신뢰할 수 있는 관계의 구축 양자에 도움이 됩니다. 본인이 가볍게 맺은 관계는 상대방도 마찬가지로 가볍게 생각하기 때문에 SNS나 손전화의 친구1로 수치적으로 표현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자신의 삶을 풍성하게 해주는 의미는 될 수 없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맺고 있는 관계도, 약간만 시간이 지나 서로의 생활반경이 겹치지 않게 되는 순간부터 급속도로 취약해질 것입니다. 믿을 수 있는 사람,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그러한 침식에 관계가 끊어지지 않게 깊은 관계를 맺고, 역으로 자신도 타인에게 믿을 수 있는 좋은 사람이 되려 노력해야 합니다.


 

 

7. 협동과 조직, 시스템의 힘을 깨닫기

 

: 보통 서울대생들이 가장 취약하다고 알려져 있는 영역입니다. 여러분들이 언젠가 토머스 홉스를 읽어볼 때가 오면 알겠지만, 사람은 혼자서는 매우 약하고 할 수 있는 것도 제한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처럼 미약한 인간이 자신의 신체적/정신적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것은 기억과 협력을 통해서 집단적인 주체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단 세 명이 철저하게 결속했을 때 열 명의 분산된 개인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까지도 할 수 있습니다(보통 아담 스미스는 한국에서 보이지 않는 손으로 기억되지만, <국부론>의 가장 중요한 이미지는 협업과 분업의 엄청난 효율성을 강조한 핀 공장의 모습인 것입니다). 비록 한국에는 소수자의 희생을 강요하는 열악한 조직문화가 편재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개인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을 평범한 인원들이 모인 집단이 거뜬히 해낸다는 사실은 잊어서는 안 됩니다. 바꿔 말하자면, 여러분 중에서 무언가 직접적으로 세상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을 가진 분이 있다면, 조직이 어떻게 운용되는지, 시스템이 어떻게 형성되고 개선될 수 있으며 무엇을 가능하게 하는지, 조직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어떤 덕목을 갖춰야 하는지 등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경험을 반드시 해보길 권합니다. 무언가 업무를 하는 조직화된 동아리가 됐든, 연극과 같은 행사를 준비하는 스태프가 됐든, 단순히 즐기는 동아리가 아니라 을 해보면서 자신이 속한 조직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이해하는 경험은 단순히 책을 읽고 상상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꺼릴 것이 아니라, 아직까지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부터라도 해봐야 하는 경험이라고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결국 여러분이 사회 안쪽에서 수행할 거의 모든 일들은 집단 및 조직과 무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협업의 중요성은 심지어 학문의 영역에서도 예외가 아니에요. 이미 각 영역의 전문화가 진행된 오늘날 고립된 연구자가 독창적인 성취를 이룩할 수 있기란 거의 기적과 같습니다. 실제로 연구자의 길을 내딛는 순간 우리는 자신이 직접적으로 다루는 대상보다 다른 연구자들의 연구를 훨씬 더 많이 읽게 되며, 그러한 협업을 통해서만 자신이 직접적으로 다룰 수 없는 수많은 영역을 간접적으로나마 이해하는 안목을 기를 수 있습니다. 실제로 뛰어난 연구자들은 항상 다른 뛰어난 연구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성장합니다(이것이 심지어 가장 폐쇄적으로 공부하고자 하는 이들에게조차도 세미나와 스터디를 통한 대화가 필수적인 이유입니다. 자신을 고립시키는 연구자는 단순히 유행에서 멀어져서가 아니라 실제로 시야가 좁아지기 때문에 뒤처질 수밖에 없습니다...학업의 길에 관심이 있는 분은 명심하세요). 그 어떤 분야를 선택하든, 결국 자신과 다른 누군가와 같이 일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만 강조해두겠습니다. 오늘날 동아리, 학회, 세미나, 반과 같은 공동체가 고사해 가고 있는 대학에서 사람들이 깨달아야 할 점은 제 아무리 개인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해도 타인과 일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면 실제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건희가 유행시킨 말 중 하나로 “10만 명을 먹여 살리는 한 명이란 표현이 있죠. 여기에서 교묘하게 감춰져 있는 사실은, 그 재능을 활용할 수 있게 해 주는 조직 혹은 시스템을 구축하는 과정이 없다면 10만 명이 아닌 1억 명에 준하는 재능을 가진 천재가 나타나도 무의미하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를 덧붙인다면, 아무리 정교하게 만들어진 조직이라도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기에 내외부적 변수 앞에서 약점을 노출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때 그와 같은 약점을 보완하는 요소 중 하나가 바로 인간의 (시스템에 잡히지 않는) 능력입니다. 예컨대 실수로 누구의 검토대상에도 들어가 있지 않은 연결고리를 본인의 느낌에 따라 한 번 더 직접 점검하는 꼼꼼함 같은 걸 들 수 있겠습니다. 저는 이를 탁월성을 의미하는 덕성virtue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한국은 대체로 조직문화가 열악하고 구성원들의 노동력과 열정을 착취하는 조직으로 악명이 높고, 이런 곳에서는 조직원의 덕성 또한 착취의 대상이기에 합리적인이들 중에는 덕성의 필요 자체를 혐오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덕성을 부당하게 착취하는 것과 집단의 약점을 보완하고 더 높은 효율을 내기 위한 덕성을 갖추는 것은 조금 다른 문제이며, 만약에 (기업이든, 국가조직이든, 시민단체든, 협동조합이든) 무언가 을 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이와 같은 덕성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는 편이 좋습니다.

 

 우리들이 속한 인문학은, 특히 문학은 암묵적으로 개인이라는 틀을 전제하기 때문에, 그 안에서 훈련받은 사람은 집단적인 것, 사회체계의 복잡성과 같은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개인의 내면이라는 문제에만 집중하도록 이끌리는 경향이 있습니다만약 여러분이 사회과학계열 학문에서 훈련받은 사람과 진지한 대화를 나눠볼 기회가 있다면 이 차이를 조금 더 분명하게 느낄 수 있을 겁니다. 물론 개인의 내면이 절대로 사소한 문제는 아니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할 수도 해결할 수도 없는 문제들이 있고 특히 사회라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확실히 다른 종류의 시각이 함께 필요합니다. 보통 학문은 자신이 종합적인 것이라고 자만하지만, 실제로는 현실이야말로 지나치게 종합적이어서 (적어도 현존하는) 단일한 학문으로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이런 복잡한 현실을 이해하고 그 안에서 활동하기 위해 한편으로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은 직접적인 경험도 필요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경험을 앎으로 만들기 위한 이론적인 사고도 중요합니다. 단순히 경험을 축적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추상화하는 작업이 있어야만 합니다(오늘날 추상화라는 단어에는 온갖 악평이 따라붙지만, 추상화하는 능력이야말로 인간 정신이 가장 강력하게 재능을 드러내는 영역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컨대 조직의 작동원리에 불합리한 면이 있다면 왜 그러한 문제가 발생하는지를 진단하고 수정하는 과정에는 반성적인reflexive 추상화 작업이 요구됩니다. 이러한 능력은 조직을 실제로 개선하는 것 못지않게 사회를 총체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데도 필수적이기 때문에, 가급적 평소에 관심을 갖고 생각해두기를 권합니다.

 


 

8. 읽기, 생각하기, 쓰기 훈련

 

:  저는 인문학에 나름의 중요한 기능이 있으며 이 분야를 배우는 과정을 통해 얻는 것이 있다고 확고하게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장점을 막연하게 삶에 깊이가 생긴다거나 (공부한다고 삶이 깊어진다는 건 미신입니다) 인간성이 좋아진다거나 (오히려 이웃의 고통에 무관심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삶이 풍부해진다거나 (전공을 하지 않아도 문화생활은 얼마든지 향유할 수 있습니다) 등에서 찾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각 분과의 전문적인 (물론 학부수준은 전문적인 지식에는 미달하지만) 지식이 가져다주는 장점을 논외로 하고, 저는 인문학 혹은 인문대가 제공하는 교육의 핵심 중 일부가 읽고, 생각하고, 쓰는 방법을 훈련시키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 가지 과정을 통해서 사고의 능력 자체를 증진시키는 것이 인문학이 제공하는 가장 기본적인 교육입니다. 우리의 사고는 언어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사고를 정밀하게 수행하기 위해서 언어를 다루는 훈련을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괜히 고전적인 대학교육과정에 수사학과 논리학이 들어가 있는 게 아닙니다...미국의 대중정치가들이 종종 뛰어난 수사를 보여주는 것은 그와 같은 정치 엘리트들이 받는 교육 중에 수사학이 매우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더불어 사유를 직접적으로 공유할 수 없는 인간의 신체구조상 우리들의 모든 의사소통은 언어를 경유하며 언어를 정교하게 활용하는 것이 사회적 의사결정에 근본적으로 작용한다는 사실도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겠지요. 이와 같은 교육의 효용을 묻는 이들에게 직설적으로 대답한다면, 예컨대 몸이 건강하고 신체능력이 뛰어난 것이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고력의 계발 또한 거의 모든 영역에 활용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만약 전문적인 교육이 특정한 일을 하기 위한 도구라면, 제가 강조하는 부분은 도구를 잘 다루고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듯합니다.


 유감스럽게도 한국은 사회 전반적으로 읽고 쓰는 교육이 심각하게 부족할뿐더러 이를 가르쳐야 한다는 최소한의 자각도 없는 곳입니다최근에 소통의 문제가 곳곳에서 제기되고 있지만, 소통의 수단인 언어 교육에 대해 어떠한 반성도 나오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문제의 심각성을 보여줍니다. 심지어 대학의 교육정책을 결정하는 이들조차도 (기본교양이 부재하다보니) 단순히 조교 비용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글쓰기 수업을 줄여도 된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여러분들이 자신들이 배우는 것이 어떤 중요성을 갖는지, 그리고 그것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숙달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학생들은 글쓰기 과제를 부담스럽게만 생각하며 자신이 이미 충분히 많은 글쓰기 교육을 받고 있으니 추가적인 쓰기 수업을 들을 필요가 없다고 착각합니다. 실제로 그들 중 정치-경제-사회 분야에서 실질적 문맹으로 남아있는 사람들의 비중은 꽤 높으며, 자신의 사고를 명확하게 글로 표현하지 못하는 졸업생도 적지 않습니다(최근에 본 기사에 따르면 한국에서 고도의 문서 해독능력을 가진 사람은 2.4% 정도라고 하던데, 아주 틀린 수치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저는 이런 시점에서야말로 인문학적 사고가 사회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다는 식의 인문학 신비주의가 아니라 우리들의 학문분과에서 실질적으로무엇을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지를 진지하게 검토하고 또 학생들에게 이해시켜야 하는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래는 읽기, 생각하기, 쓰기의 세 영역에서 제가 중요하다고 믿는 몇 가지 요소들입니다. 이를 읽고 여러분이 지금은 답답하고 지루하게 느껴질 훈련을 조금 더 가치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준다면 저는 충분히 성공한 셈이 되겠죠.

 

 


 읽기의 핵심은 타인에 의해 행해진 언어 표현을 단순히 수용할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이해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실질적인 이해란 무엇을 가리키는 걸까요? 저는 명확한 정의보다는 다소 기술적인descriptive 방식을 택하고 싶습니다. 곧 타인의 언어가 의지하고 있는 나름의 논리를 파악하고 그것의 근본적인 전제와 귀결점을 함께 바라볼 수 있는 것. 더불어 언어 표현에 아로새겨진 특정한 태도 및 그 태도를 배태한 삶/사회의 조건들을 가장 미묘한 뉘앙스에 이르기까지 이해하고 공감하거나 거리를 둘 수 있는 것(저는 그런 점에서 단순히 논리학이 아니라 감정적 설득의 기제들에 대한 앎을 포괄하는 수사학이 보다 적합한 용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적으면 여러분은 제가 또다시 일종의 신비주의로 뒷걸음치는 게 아닌가 의심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정말 뛰어난 독서가들은여기서 저는 한국에서는 심지어 인문학 전공자들조차도 읽기의 중요성을 쉽사리 망각한다는 사실을 다시 강조하고 싶은데실제로 이와 같은 작업들을 수행합니다. 그들은 때로 그 언어를 발화한 사람 자신보다도 더 깊이 말한 이들을 이해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물론 순전히 기본적인 교육만으로 읽기의 가장 높은 경지에 도달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만, 적어도 그러한 경지를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지점으로 삼을 수는 있겠죠. 곧 단순히 문자를 이해하는 수준을 넘어서 그와 같은 글을 만들어낸 정신을 이해하는 것이 실질적 이해의 가장 높은 수준이라고 말해도 될 듯합니다(동시에 하나의 언어가 아니라 복수의 언어표현들의 관계를 읽는다면 우리는 그와 같은 정신들이 속한 세계를 이해하는 과정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적어도 이와 같은 읽기를 지향한다면, 세 가지 태도를 염두에 두고 시작할 수 있을 듯합니다. 하나, 개별적인 문장/문단만이 아니라 문장/문단들이 이어져 만들어내는 특정한 주장=흐름을 보기. 부분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를, 나아가 그것이 연결된 전체가 어떠한 형상을 이루고 있는가를 보기. , 자신의 앞에 앉은 정말 소중한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일 때처럼 가장 미세하고 작은 요소들도 놓치지 않기. 말에 명시적으로 표현된 것만이 아닌 표현되지 않은, 표현될 수 없었던 것에도 주의를 기울이기. , 어렵고 복잡한 이야기는 (불필요하게 엉킨 부분을 정리할 때를 제외하고는) 억지로 쉽고 간단한 이야기로 만들지 말고 어렵고 복잡하게 받아들이기. 대상을 자신의 이해능력에 맞추어 조잡한 것으로 만드는 대신 대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의 읽기를 확장하려 애쓰기. 첫 번째가 대상을 고정된, 정지한 사물로 바라보는 대신 하나의 움직임/흐름/동세로 바라보는 방법적인 태도라면, 뒤의 두 항목은 대상/객체를 가능한 손상시키지 않고 온전히 이해하려 한다는 점에서 읽기의 윤리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자신과 이질적인 경험들, 혹은 자신이 이해하지 못했던 복잡한 사고의 건축물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물론 학부과정에서 이러한 수준에 도달하는 사람은 드뭅니다만) 많이, 끈질기게, 또한 겸손하게 읽어야 합니다.

 


 생각하기는 사실 읽기 및 쓰기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읽고 쓰는 순간에 사고과정은 항상 개입해 있으니까요. 그래서 여기서는 조금 인위적으로 사고하기와 다른 행위들 사이의 틈을 조금 벌려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읽기와 쓰기가 다소간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대상과 연결되어 있다면, 지금 말할 사고하기의 원칙들은 대상 또는 대상에 대한 앎을 보다 메타적으로 판단하는 능력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사고하기에서 가장 기초적으로 발휘되어야 할 능력은 자신이 습득한 지식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명백히 당파적인) 언론이나 자신의 이익을 관철시키려는 정부, 기업, 이익단체 등이 제공하는 진술을 접할 때 흔히 그러해야 한다고 알려져 있듯, 우리가 접하는 언어표현들이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지식이나 태도를 제공하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에 항상 언어표현들 및 그것들이 함축하는 논리적 전제 또는 귀결이 얼마나 타당한지, 잘못된 전제 혹은 반성되지 않은 순진한 믿음에 기초하지 않았는가를 질문하고 검토해야 합니다. 한 가지 사례만 들어보겠습니다. 오늘날 보수파로 기능하는 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막강한 영향력을 끼쳤는지는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논리에서 쉽게 드러납니다. 곧 첨예하게 입장이 갈리는 문제에서 자신은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무관하고 중립적인 사람임을 강조하는 일종의 정치적 결벽증이 그것입니다. 예컨대 성소수자 관련 문제에서 나는 동성애자가 아니지만이라고 서두를 뗀다거나 정치적인 논쟁에서 나는 특별히 지지하는 정당이 없지만혹은 이와 유사한 수사로 자신의 입장을 옹호하는 경우를 흔하게 찾아볼 수 있죠. 정확히 이런 태도는 자신이 어떠한 태도나 편견에 오염되어 있지 않은사람, 거리를 둔 사람이 진리에 보다 가까운 위치에 도달해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그 자체가 특정한 입장의 소산입니다. 이와 같은 진술에 대해 즉각적으로 두 가지 방향에서 비판할 수 있습니다. 먼저, 특히 공적인 사안에 대한 논쟁일수록, 우리가 어떤 식으로 연관되어 있지 않은 문제란 존재하지 않을뿐더러(특정한 정책이 법제화되든 아니든 모두 우리와 연관이 있습니다!) 소수자와 관련된 문제일수록 그와 같은 거리두기가 암묵적으로 소수자를 고립시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나는 ... 가 아니지만과 같은 수사는 애초에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두 번째로, 중립 혹은 순수한 상태가 곧 더 오염되지 않은 더 나은 판단을 보장한다는 믿음은 간단한 돈 계산 정도라면 모를까 그 이상의 복잡한 문제에서는 순진한 미신에 불과합니다. 애초에 여러 가지의 정치적 태도들이 결합하는 공적인 사안의 경우 우리들이 특정한 입장이나 전제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위치에 놓여있기는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어떤 사안에 대한 올바른 판단은 충분한 정보를 축적하고 사안을 깊이 성찰할 때 나올 수 있지 무지와 즉흥에서 나오는 게 아니기 때문이죠. 축구 경기에 관한 의문이라면 문어의 변덕을 따라가도 큰 상관이 없겠지만 진지한 문제에서 인간의 언어에 오염되지 않은동물의 판단을 따를 것은 아니듯 말예요. 오히려 계속해서 문제를 회피하는 태도, 자신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식의 (때로 냉소가 곁들여지는) 태도, 중립적인 위치에 남아있으려는 무의식적인 제스처야말로 그 자체가 편견과 이데올로기의 소산인 것입니다.


 언어표현 혹은 특정한 유형의 앎에 대한 비판적 검토와 함께 우리는 자신이 접한 다양한 종류의 지식을 연결시키고 종합하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정확히 말해 사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사실은 막연히 서로 다른 지식을 쌓는다고 해서 종합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며 지식들 사이에 어떠한 관계를 성립시킬 수 있는지를 계속 질문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위키피디아의 하이퍼링크나 사전을 조금 진지하게 이용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알겠지만 지식들끼리 서로를 보완하고 세목을 채워주는 관계가 있는 반면, 명백히 모순된 입장들을 지지하는 듯한 지식들도 있습니다(보통 우리가 변증법이라고 부르는 것은 기본적으로 모순과 차이, 운동을 사고하기 위한 논리적 장치이기도 합니다). 지식들 간에 가장 까다로운 관계 중 하나는 동형적인 혹은 유비적인 관계입니다. 예를 들자면, 여러 비평가들이 지적하듯 회화에서의 원근법의 확립과 근대소설에서 특정한 서술기법의 정립 사이에는 매우 유사한 면모가 발견됩니다. 이때 직접적으로 인과관계를 논증하기 어려운 서로 다른 분야 사이에 동형적인 관계를 놓는 것 자체가 하나의 종합적 판단이기도 합니다. 더불어 자신이 아직 연결고리를 설정하지 못한 분야를 억지로 끼워 맞추지 않고 차후의 보충이 있기 전까지 모르는 분야로 인정하는 태도도 중요합니다. 이처럼 지식들 간에 다양한 성격의 연결고리를 설정하면서 하나의 거대한 네트워크를 산출하는 과정이 인문대가 여러분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사고능력의 하나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사고하기란 지금까지 이야기한 비판과 연결/종합과 같은 과정들을 거치면서 자신의 판단력 자체를 개선하고 상승시키는 행위이기도 합니다(여러분이 언젠가 읽을지 모르겠지만, 저는 헤겔의 텍스트에서 보여주는 정신의 진전과정을 떠올립니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지식을 아무리 많이 습득하고, 검토하고, 종합한다고 해도 사태를 파악하는 자신의 판단능력 자체를 끌어올리지 못한다면 충분한 배움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순전히 앎 자체에만 탐닉하는 사람들, 특정한 분야의 오덕들처럼 지식에 대해 물신숭배(fetish)적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을 보면 앎의 축적이 반드시 인간의 판단력을 끌어올리는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지식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변형시키는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 자신이 삶에서 은밀하게 견지하는 태도들에 순진한 면이나 편견으로부터 비롯된 면이 없는지, 혹은 문제에 대한 초보적인 답변에서 자신도 모르게 멈추고 있는 지점이 없는지 질문하고 필요하다면 온갖 내적인 억압과 저항을 무릅쓰고라도 개선시켜야 합니다(예컨대 중립이나 개인의 취향처럼 일종의 도깨비 방망이로 활용되는 용어들은 반드시 의심해보아야 합니다). 인문학은 그 자체로 누군가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주지 않습니다. 단지 그럴 계기를 제공할 뿐이고, 우리는 그러한 계기를 단순히 자신과 무관한 지식의 세계에 적용하는데 만족하는 대신 우리 자신의 사고를 비판하고 개선시키기 위해 활용하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정확히 자신의 사고체계 자체를 확장하고 개선시키는 노력을 거칠 때만 자신이 마주하는 정보들로부터 보다 깊은 함의를 이끌어내는 길항과정이 작동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쓰기에 대해서 말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쓰기는 (여러분들이 제출했던 과제가 그러하듯) 타인에게 읽힐 언어표현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며, 이러한 맥락에서 가장 중요한 태도는 역시 자신의 글이 누구에게 어떻게 접근하여 어떤 해석/효과를 이끌어낼 수 있는가를 늘 염두에 두는 것입니다. 흔히 지적되는 독자/청자를 고려하지 않았다는 표현은 해당 글쓰기가 단순히 글쓴이의 머릿속에 있는 사고의 덩어리를 제대로 여과하지 않고 드러냈을 때를 위해 존재합니다. 즉 쓰기는 나 혼자가 아닌 이 글을 읽을 모두라는 타자를 위한 행위라는 데 그 핵심이 있습니다. 읽기와 듣기가 타자를 받아들이는 행위라면, 말하기와 쓰기는 타자를 배려하는 태도를 함축해야 한다는 점에서 마찬가지로 윤리적인 것과 무관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보수적인 정치인, 관료, 언론인, 자본가 등이 이른바 공인들이 비상식적인 언어행위를 거리낌 없이 수행할 때, 이들은 단순히 자신의 언어가 가져올 정치적인 귀결을 모른다는 점에서 무지할 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언어와 접촉할 타자에 대한 고려 따위는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윤리적 감각을 결여한 셈입니다. 곧 지식과 논리의 단순한 전달을 넘어 자신의 언어표현이 타인에게 서로 달리 이해될 경우의 수를 끊임없이 고민할 것을 요구한다는 측면에서 쓰기는 사회적인 행위이며, 더 나은 쓰기를 위해서는 사회를 구성하는 다른 이들에 대한 접근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덧붙여 저는 쓰기가 글을 쓰는 이의 사고를 형성하는 과정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많은 경우 우리의 사고는 언어라는 매체를 통해 형성되며 또한 매체의 제약을 쉽게 벗어나지 못합니다. 동시에 자신의 행위에 반성적으로 접근해본 사람은 이해하겠지만, 무언가를 쓸 때 많은 경우 우리는 단순히 머리에 이미 완결된 사고를 그대로 옮겨 적는 대신 어렴풋한 형태로만 존재하던 사고의 맹아를 구체화된 언어표현으로 이행시키는, 다시 말해 이전에 존재하던 것과 질적으로 다른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수행합니다. 막연한 사고가 구체적인 생명을 얻을 뿐만 아니라 그 순간 우리 자신의 태도나 사고도 어느 정도 결정되는 것입니다. 더불어, 여기에 대해서는 가라타니 고진이 날카롭게 말한 적이 있는데, 우리는 막 완성된 문장을 접할 때 (우리 자신의 사고라고 믿지만) 또한 그 문장의 독자가 되어 그로부터 다시금 영향을 받게 됩니다. 실제로 어떤 주제에 대해서 다양한 가능성을 품고 있던 사람이 막상 조잡한 글로 옮긴 후 자신이 이전에 떠올렸던 가능성들을 망각하고 자신이 언어로 표현한/선택한 입장을 자신의 확고한 입장으로 받아들이는 일은 빈번히 일어납니다. 역으로 쓰기가 이렇게 결정하기’crystallize 때문에 갖는 장점도 있습니다. 우리는 대체로 기억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순전히 머릿속의 사고만으로는 복잡한 논리적 사고를 일관성 있게 전개시키기가 불가능합니다. 단 한 번 다른 주제가 끼어드는 것만으로도 사고의 건축물이 무너지고 처음부터 성냥개비를 다시 쌓아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립니다. 사고를 구체화시키는 과정으로서 쓰기는 자신의 언어를, 마치 얼어붙은 산을 올라가면서 얼음계단을 한 칸 씩 만들어내어 밟고 올라가듯이, 낮은 지점에 멈추지 않고 보다 높은 단계로 상승시키기 위해, 사고의 건축물을 만들기 위해 필수적인 과정이 됩니다. 그 과정에서 언어화된 자신의 사고/논리를 끊임없이 낯선 대상으로서검토할 수 있기 때문에 특히 일정 이상의 복잡성을 가진 사고를 전개할 때 글은 말보다 좋은 수단이 됩니다. 글을 쓰는 과정을 통해 자신이 최초에 하지 못했던 사고를 전개해본 적이 한 번이라도 있다면 이 모든 이야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납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컨대 쓰기란 곧 자신의 판단력을 제고시키며 사태에 대해 보다 깊은 이해와 더 굳건한 입장을 세울 수 있게 해줍니다.


 읽기 및 생각하기와 비교할 때 쓰기는 확실히 기술적인 수련을 적잖이 요구합니다(미국의 좋은 대학에서 글쓰기 교육 센터가 그 자체로 상당한 규모의 기관인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단지 한국의 대학교육 당국자들의 눈에 그 사실이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저는 자신의 사고를 끊임없이 문자화하는 습관이 인문학 전공자들에게 상당히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매일의 일상을 정리하는 글도 좋고, 자신이 읽거나 경험한 내용, 자신이 의문을 갖고 있는 주제에 대한 고민도 좋습니다. 아무튼 쓰기의 기회가 매우 빈약한 이곳에서 자기 스스로라도 계속해서 글쓰기의 경험을 축적하는 것은 정말로 중요합니다. 많이 쓰고 생각하지 않으면 글은 결코 늘지 않습니다. 자신이 언어를 다루는 감각을 선천적으로든 환경적으로든 타고난 경우라고 하더라도, 양적 축적이 없다면 기껏해야 몇 가지 재기발랄한 표현을 쓰는데 그칠 뿐 일정 이상의 깊이와 수준을 갖춘 글은 나오지 않습니다. 착상을 보관하기 위해서라거나 커다란 논리적 전개를 위해서 짧게 메모하는 습관도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문학처럼 언어와 밀접하게 연관된 전공자들은 문장과 어휘의 미세한 뉘앙스까지 놓치지 말아야 하기에, 가급적으로 완성된 문장을 계속해서 써보는 쪽이 효과적인 훈련이 됩니다. 특히나 어떻게 읽힐까를 고민하면서 문장을 써본다면 똑같은 내용을 표현할 때도 여러 경우의 수가 있고 어떠한 맥락에 속하는가에 따라 가장 효과적인 선택지도 달라진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쓰기는 이론적인 앎으로만 완성될 수만은 없으며,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에 대한 반복적인 숙달을 통해서, 다시 말해 자신이 활용하는 도구를 손에 길들이는 과정을 거쳐야만 합니다. 달리 말해서 기술을 몸에 익히는 과정과 비슷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특히나 한국에서 활동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한국어 자체의 언어 표현에 지속적으로 익숙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언어권에 맞부딪힌 경험이 있다면 알겠지만, 한 언어의 숙달이 자동적으로 다른 언어의 숙달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가령 2차 대전 때 미국으로 망명한 중부유럽의 지식인들이 완전히 낯선 영어라는 감옥에 갇혀 자신의 사유를 자유자재로 표현할 수 없다는 사실에 깊은 좌절감을 토로했듯이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역설적으로 여러분이 (애초에 영어권에서 활동할 생각이 아니라면) 영어가 아닌 한국어의 숙달에 조금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나 일정 수준 이상의 지적인 작업을 하고픈 야망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국어를 보다 깊은 수준까지 익히려는 노력이 없이도 추상적인 사고과정을 무리 없이 한국어로 옮길 수 있으리라는 착각을 벗어나야 합니다. 앞서 스마트폰에 관해서 말했듯, 사람은 자신이 활용하는 도구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합니다. 스마트폰은 거리를 둘 수 있지만 언어는 우리와 너무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그것을 장악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본인의 모국어라고 불필요한 자신감을 가지면 곤란합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볼 때, 학부 신입생은커녕 졸업생 중에서도 한국어 쓰기를 일정 수준 이상으로 수행하는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심지어 학자들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닙니다). 아직까지 기술적인 숙달이 갖는 힘을 경험해볼 일이 없었던 학생들이 다수일 텐데, 이렇게 길게 강조하는 이유를 이해해 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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