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과 비평가의 태도 / 스피노자. <지성교정론> / 포칵-푸코-스피노자("역량의 주체")

Critique 2014.06.01 20:57

1.


 스피노자의 <지성교정론>(_Tractatus de intellectus emendatione_ / _Treatise on the Emendation of the Intellect_ / 황태연 선생의 영역을 기초로 한 국역본)까지는 읽었다. 스티븐 내들러 책 두 권+ 마트롱이랑 <에티카>만 보면 (<데카르트 철학의 원리>가 남았지만 어차피 부분번역이니까) 그럭저럭 국역된 스피노자는 정리가 될 것 같다. 스피노자 전문가가 될 필요도 없고 어차피 배경지식 수준에서만 읽어두면 되니까, 이럴 때 어디가서 반틈만 걸치면 되는 문학전공자의 위치가 조금 편하기는 하다^^. 들뢰즈, 마슈레 등의 기타 2차 문헌이 있지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 일이고, 당장은 더 읽을 생각이 없다. 어차피 나의 주목적은 그가 17세기의 맥락에서 어떻게 전형적이고/고유한지를 대략적으로 살피고, 필요하다면 내 식대로 활용하는 것이니까. <에티카>의 난해함에 대해서는 워낙 겁 주는 이야기가 많은데 설마 헤겔만 할까(<정신현상학> 최대의 장점은 이후에 제 아무리 이해하기 힘든 지랄같은 책을 읽어도 그러려니 하면서 넘기는 인품을 길러준다는데 있지 않을까?). 알아먹든 알아먹지 못하든 무언가 생각을 하면서 페이지를 넘기다보면 어느새 책은 끝나기 마련이고, 그때까지 자기가 건진 생각이 하나라도 있거나 하다못해 남들이 다 이야기하는 유명한 구절이 무슨 맥락에서 나온 건지만 알게 되면 사실 책 전체를 이해하지 못해도 크게 상관은 없다--나는 모 선배의 표현을 따라 그걸 "눈에 책 바르기"라고 말하곤 한다. 따지고 보면 어차피 대부분의 2차 문헌 중에서 헤겔이나 아도르노(특히 <부정변증법>과 <미학 이론>)를 일정 수준 이상까지만이라도 이해하고 활용하는 저자들은 드물다. 어쨌든 원 텍스트를 한 번이라도 끝까지 읽으면 그런 인용들을 볼 때 이 (때로 본인이 유명한 저자인) 인용자들도 사실 자기가 인용하는 텍스트의 진면목을 잘 모르고 유명한 이야기나 통념을 반복하는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는 걸 알 수 있고, 사실 그것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나름의 배움이 생긴거다.


 인용자의 연구를 연구자와 동등한 시선에서 볼 수 있다는 것, 인용자를 올려다보는 대신 동일한 지평에서 볼 수 있다는 것, 그가 어떻게 사고를 전개하고 있는지 풀어낼 수 있다는 것, 다시 말해 인용자와 자신이 인용된 텍스트를 함께 읽는다는 것만으로도 꽤나 중요한 변화가 생긴다. 특히나 일정 이상의 전문성을 요구하는 읽기에서 나의 태도/위치가 어디에 있는지는 해석에 꽤나 중요한 차이를 미친다. 나는 머리도 나쁘지 않고 공부도 제법 했고 영어도 잘하는 한 친구가 자신이 잘 모르는 유명한 이론가의 평범한 문장조차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던 순간을 기억한다. 권위 앞에 위축되면 문자 그대로 기초적인 사고조차도 얼어붙는다. 연구자에게 1차 문헌 독서량의 축적이 갖는 장점 중 하나는 다른 이의 연구를 물신화하지 않을 수 있게 해준다는 데 있다. 외경심에 얼어붙을 필요도 없고, 막연한 혐오감과 거리감에 도망갈 필요도 없다. 그냥 나와 같은 또 다른 해석자 앞에서 그의 이야기가 얼마나 타당한지 아닌지를 따지고 배울 게 있으면 배우고 비판할 게 있으면 비판하며 활용할 게 있으면 활용한다는 태도를 견지하면 된다. 이런 점에서 유명한 1차 문헌들, 고전들은 단지 다른 해석자들의 사유를 이해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사실 1차 문헌, 별로 좋아하지 않는 표현이지만 "원전"이라고 불리는 텍스트들의 저자들도 어떤 면에서 나와 마찬가지의 해석자일 뿐이다. 나는 가토 노리히로의 비평관을 종종 떠올린다. "비평이 학문과 달리 책을 백 권 읽은 사람과 한 권도 읽지 않은 사람이 [동일한] 문제를 앞에 두고 본인들의 사유의 힘에 의지해서만 공평하게 승부를 보는 일" [ http://barde.tistory.com/34 참고, 문장 가다듬음]이라면, 나는 이른바 원전 읽기에 비평가적인 태도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보다 사려깊게 그들을 이해하고 동등한 입장에서 말하면 무엇이 문제가 될 것인가? 비평가는 제 아무리 뛰어난 텍스트라고 해도 숭배할 필요가 없다. 단지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말하지 않는지, 그로부터 무엇을 말할 수 있었는지("가능성의 중심"), 그가 무엇에 맹목적인지, 그가 무엇 때문에 탁월하고 그렇지 않은지를 담담하게 볼 수 있다면 비평가로서의 첫 발걸음을 떼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2.


 다시 스피노자와 <지성교정론>으로 돌아온다면, 역시나 눈에 띄는 대목은 데카르트와의 비교에 있다. 내가 철학사가는 아니기 때문에 전문적으로 정리할 능력은 없고 다만 말년의 푸코가 지적한 대목이 흥미롭다. <주체의 해석학>에서 푸코는 주체의 사물 및 자기 '인식'에 특권적인 위치를 부여하는 데카르트적 태도(<성찰>이나 <방법서설>을 읽은 사람은 바로 알 수 있지 않은가)와 대비하여 고대 그리스로부터 주체 자기 자신을 바꾸어가는 자기 변형/형성의 모티프를 "영성"spirituality라고 부르면서, 근대 철학에서도 영성의 계기가 드러나는 대표적인 사례로 헤겔의 <정신현상학>과 스피노자의 <지성교정론>(<주체의 해석학> 국역본에는 "<오성의 개혁>"으로 번역되어 있다), 즉 바로 이 텍스트를 꼽는다(<주체의 해석학> 1982년 1월 6일 강의, 66); 헤겔을 둘러싼 철학사 개설서 한 두권만 본 사람이라면 그의 시대가 스피노자의 논의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았음을 기억할 것이다. 실제로 이 텍스트는 단순히 끈질긴 자기성찰을 요구하는 데카르트적 방법과 달리 진리를, 실재를 이해하기 위해 인간의 지성/오성에 규칙을 부과하여 그것을 향상시키고 보다 완전한 상태로 끌어올리는 방법을 주된 목표로 한다(안타깝게도 스피노자는 이 텍스트를 일부만 써놓고 집필을 중단했지만-). "...인간은 자기의 것보다 훨씬 강력하고 더욱 영구적인 인간의 본성을 생각하며, 동시에 자신이 그러한 본성을 획득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알게 되므로, 그는 자신을 그러한 완전성에 인도해 줄 수단을 구하도록 고무된다"(<지성교정론> 13절, 13쪽). "[방법은] 다른 지각들과 참된 관념을 구별함으로써 참된 관념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이며, 참된 관념의 본성을 탐구함으로써 우리가 우리의 이해능력을 알 수 있도록 하고, 정신이 이해해야 할 모든 것을 그 규범에 따라 이해할 수 있도록 정신을 제어하는 것이며, 또한 정신이 무익한 일로 지치지 않도록 보조수단으로서 일정한 규칙을 만드는 것이다"(37절, 22쪽). 다시 말해 이미 주어진 고정된 주체/대상의 인식에 머무는 대신 주체 자체를 어떻게 바꾸고 형성할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는 전통이 있으며, 푸코는 이와 같은 '영성'의 계기들을 둘러싸고 근대 철학사를 재구성할 짧지만 중요한 단초를 제공한다. 여담이지만, 푸코가 '인식을 특권화하는' 모델로 간주하는 데카르트도 이런 계기가 아주 없지는 않다; <정신지도를 위한 규칙들>은 그 디테일은 다를지언정 근본적인 목표에서 스피노자의 프로젝트와 상당한 공통점을 드러낸다(두 텍스트 모두 "기억력"에 관해 코멘트하고 어떻게 기억을 보다 수월하게 할 수 있는가를 언급한다는 점은 흥미롭지 않은가?).


 나는 푸코가 '영성'이라고 부르는 계기를 조금 더 역사화된 언어, 다시 말해 J. G. A. 포칵의 "미덕/덕성"(virtue)과 연결시키고 싶다. 포칵은 근대의 정신을 해석함에 있어 근본적인 사고전환을 추동하는 걸작 <마키아벨리언 모멘트>에서 마키아벨리로 대표되는 르네상스의 정치철학으로부터 (공동체적인 삶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 미덕/덕성(<-> 부패, 타락, 무능)의 언어가 어떻게 출현하고 또 이후 근대 초기, 적어도 18세기 중반까지 서구세계의 정치적 논쟁에 중요한 인식적 틀로 작동하는지를 보여준다. 즉 근대적 자기이해의 근원처럼 간주되는 로크적 계기와 다른 마키아벨리적 계기, 다시 말해 덕성/미덕의 관념을 중심으로 하는 관념틀이 존재하였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근대의 일정시점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중요성을 갖고 작동해왔다는 것이다. 포칵의 질과 양 모두에서 엄청난 논의를 여기서 압축해서 설명할 수는 없고, 나는 단지 앞서 푸코가 말한 영성적 계기라고 하는 것, 주체가 선과 진리에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도록 스스로를 가다듬을 수 있다는 사고 방식, 에토스ethos의 모티프가 포칵이 말하는 미덕/덕성의 모티프와 상당한 유사점을 갖고 있는 것처럼 읽힌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르네상스적 미덕/덕성이라고만 하면 곧바로 와닿지 않을테니 두 가지 보충설명을 덧붙이겠다. 먼저 덕성/미덕은 한국어로 역량으로 번역되곤 하는 virtu와 인접관계에 속해있다. 예를 들어 포칵이 설명하는 마키아벨리의 대안은 시민들이 스스로 무장하고 도시를 지키고 확장하는 시민군이 될 때 그들의 (정치적) 시민으로서의 역량virtu 또한 증대된다는 논리, 즉 공동체적 삶과 개인의 덕성/역량을 연결시키는 논리에 기초한다. 마키아벨리는 그와 같은 주장을 (푸코가 자기배려의 개념을 재발굴하는)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 리비우스의 <로마사>를 독해하면서 끌어낸다. 이것이 주체의 자기형성/완성 가능성에 초점을 두는 푸코의 주체관과 근본적인 지점에서 유사점을 갖는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특히나 푸코가 헬레니즘-로마적 자기 배려의 실천이 결코 자폐적이지 않으며 타인, 공동체, 세계와 연결되어 있음을 반복적으로 강조한다는 사실은 (그 시도의 성공 여부와 무관하게) 이들의 공통점, 곧 공동체적 삶과 연결된 주체의 덕성/역량의 강조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두 번째로, 주체에 대한 이와 같은 관점들은 푸코/포칵이 각각 자신의 관점에 대립시키는 데카르트/로크적 '계기'와 대비시킬 때 그 유사성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물론 포칵은 이 텍스트에서 로크적 계기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설명하지 않았고, 로크를 다룬 이후의 저작은 내가 아직 읽지 못했다) 로크/데카르트가 근본적으로 근대적 주체, 다시 말해 인식론(및 로크의 경우 법-계약-자본소유자로서의 주체)에 특권적인 위치를 부여하는 인간관의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데카르트의 경우엔 부연하지 않겠으며, 로크의 경우 <인간오성론>_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_에서 인식하는 주체를, <통치론>_Two Treatises of Government_에서는 법-계약-소유의 주체를 정립시킨 것으로 설명된다. 로크는 보통 영국 경험론의 가장 중요한 철학자로 평가받지만, 이때 '경험'은 어디까지나 인식으로서의 앎에 국한되어 있으며 인간의 덕성 및 역량을 증진시키는 앎으로 생각되지는 않는다--다시 말해 데카르트와 로크는 주체의 자기 개선/형성과 같은 목표가 이제 논의의 초점에서 벗어난다는 의미에서 "근대적 주체"의 이론적 정립자인 것이다(물론 데카르트에게 <정신 지도를 위한 규칙들>이 있었듯 로크 또한 교육을 위한 저술을 남겼다고 말하는 게 공평하). 이들로부터 형성된 "근대적 주체"와 대비해볼 때 직접적으로 근대적 주체화를 재검토하려 했던 푸코와 오늘날 우리에게 지배적인 된 관념 이전의 틀을 발굴한 포칵의 논의가 유사점을 갖는다는 사실은 쉽게 부정하기 어려울 것 같다; 여기에 양자 모두 맑스주의/사회주의에서 각각 "영성"과 "덕성"의 계기를 공통적으로 읽어낸다는 사실을 덧붙이겠다.


 여기에서 일종의 연결고리로서 스피노자가 갖는 위치는 주목할만 하다. 앞서 푸코가 스피노자를 '영성'의 한 사례로 든다고 이야기했다. 포칵의 논의를 배경으로 두고 읽는다면, 우리는 실제로 스피노자의 텍스트에서 "덕성"/역량과 같은 개념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는 사실을 쉽게 깨달을 수 있다. <신학정치론>에서 스피노자는 주권자로서의 모세에게 다른 모든 사람을 능가하는 덕성이 있었다고 지적하며(<신학정치론/정치학논고>, 최형익 역, 비르투, 2011; <신학정치론> 5장 109쪽), 주권자에게 "공포를 통한 강제뿐만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일을 하도록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하다고 말한다(17장 311). 애초에 그가 정의하는 자연권 자체가 개별 주체가 지닌 역량("힘")과 비례한다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16장 291). 17장에서 그가 유대국가의 강점을 이야기하면서 시민군의 자유로부터 그러한 힘이 비롯된다고 설명할 때--자유, 특히나 미신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이성의 자유가 사회구성원들의 성장을 촉진시킨다는 논리는 스피노자의 핵심논리이기도 하다--이는 포칵이 설명한 마키아벨리의 논리를 거의 수용하고 있는 셈이다. 정부체제에 대한 마키아벨리적 틀이 매우 분명하게 드러나는 <정치학논고>에서는 직접적으로 "자유란 덕 또는 탁월성"이라고 서술한다(2장 7절 397). "욕망을 억제하면 할수록 자유가 증대"(2장 20절 403)한다는 설명, 곧 푸코가 고대 그리스의 자기배려적 실천으로부터 주요하게 짚어내는 모티프와 겹치는 이 설명을 스피노자를 통해 푸코와 포칵의 주요 개념이 맞닿는 단서로 이해한다면 과도한 주장일까(아직 나는 <에티카>를 읽지 못했기에 스피노자의 능동적 역량conatus 개념을 사례로 들지는 않겠다)?


 이해의 편의를 위해 정리한다면, 푸코가 기존의 근대적 주체화, 혹은 기독교적인 주체화 방식과 다른 주체화의 계기('영성')를 아직 품고 있는 사례로 꼽는 스피노자로부터 우리는 포칵이 내놓은 '마키아벨리적 계기'를 분명하게 읽어낼 수 있다. 나는 이때 포칵이 제시하는 덕성/역량과 푸코의 영성 혹은 자기-배려의 모티프가 이른바 (인식론의) "근대적 주체"와 대비되는 역량의 주체로 연결되는 공통적인 무언가와 이어져 있다는 가설을 제시한다. 단지 푸코는 근대적/기독교적 주체화와 다른 주체화의 가능성을 찾으려는 목적으로 고대로 거슬러 올라갔고 포칵은 르네상스 이탈리아, 특히 피렌체의 정치사상으로부터 배태된 언어 및 관념적 구도가 곧바로 사라지는 대신 이후에도 유효한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증명하려 했다는 점이 그들의 공통점을 곧바로 인식하기 어렵도록 하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이들로부터 주체를 단순히 인식자료가 지나가는 변하지 않는 평면적인 형식으로 이해하지 않는다는 점, 주어진 사회적 조건에 맞서 자신의 역량을 키우고 결국에는 사회체제 자체에 무언가 긍정적인 영향을 가져다줄 가능성을 지닌 (물론 보다 조심스러웠던 푸코는 이와 같은 의도를 매우 모호하게 암시하고 지나갈 뿐이지만) '역량의 주체'를 끌어낼 수 있다는 주장이 아주 틀린 이야기는 아닐 듯하다. 푸코와 포칵을 맞닥트리도록 할 때, 나는 푸코의 논의를 근대 시기 안쪽에 자리매김하고 역사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그리고 포칵의 설명을 근대에 비판적인 주체화/사회개혁의 이론(실제로 <마키아벨리언 모멘트>의 2판 후기를 보면 포칵이 자신의 논의를 비록 프랑스 현대철학의 언어는 아니지만 사회개혁을 위한 주체라는 주제와 연결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과 연결시켜 18세기 이후의 맥락으로 이어지도록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본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스피노자는 두 사람의 논의를 연결시켜 이해할 수 있는 맥락을 제시할 뿐만 아니라 17세기 후반부에 역량의 주체를 위한 가능성이 남아있는 사례로서, 그리고 스피노자로부터의 영향을 제할 수 없는 헤겔로의 연결이라는 점에서 이후의 탐구를 위한 단서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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