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고 자연스러운 한국어 학술 글쓰기의 모범"과 역사

Critique 2014.05.21 20:15

* 이 글은 지인들과의 대화와 스스로의 '역사적 감각'에 의거하여 그려진 일종의 개인적인 스케치다. 솔직히 말해 아래에서 다루는 주제는 내가 제대로 다루도록 훈련받은 분야가 아니다. 필연적으로 제기될 실증적 연구의 부족과 논리의 비약은 이 주제를 다루는 나의 능력이 아직 미성숙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여기에서 제기하는 문제와 질문이 전적으로 무가치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더불어 완전히 새로운 문제제기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나는 이 글에서 상당히 많은 부분이 상식적인 진술일 거라 생각한다). 나의 글이 명백히 틀린 사실관계를 이야기하거나 잘못된 해석 혹은 연결관계를 제시하기 때문에 비판받을 때, 그 비판을 통해서 이 주제에 대한 우리들의 고민이 진일보할 수 있다면 매우 기쁠 것이다. 확신하는 지점이 있다면 비평적 실천과 (이미 우리에게 자명한 환경이 되어버린 '새로운 조건' 하에서의) 한국어 쓰기의 연관성을 묻는 일, 곧 이 글에서 미숙하게나마 실천하고자 했던 작업은 오늘날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다름 아닌 나와 같은 사람들의 역할을 위해서도 그러하다.



1.


나는 "아름답고 자연스러운 한국어 학술 글쓰기의 모범"과 '역사'가 상호적대적이라는 도발적인 주장으로 글을 시작하고 싶다. 한국에서 외국문학/사상/역사를 공부하고 또 한국어 저자에 의해 집필된 책보다 번역된 책들을 더 많이 읽는 입장에서 나는 누차 나의 (한국어) 글쓰기가 무언가 이상하고 자연스럽지 않다는 지적을 받아왔고 스스로도 자신의 글쓰기에 검열을 가해 왔다. 이러한 지적의 근본적인 전제, 즉 학술-한국어에 어떤 자명한 규범이 존재한다는 믿음에 의혹을 품게된 것은 문장부호의 사용을 진지하게 고민하면서부터였다. 초보적인 수준에서라도 영어 글쓰기를 교육받은 사람은 한국어에 마치 없는 것처럼 간주되어 왔던 다양한 구두점들의 용법에 의아하고 당혹해하게 된다. 이런 사람들 중 보다 사변적인 이들에게 도움이 될 아도르노의 『문학론』(Noten zur Literatur / 영역본 Notes to Literature, trans. by Shierry Weber Nicholsen, 2 Vols., NY: Columbia UP 1991) 1권에 실린 소품「구두점」("Satzzeichen" / "Punctuation Marks")을 보면 문장부호/구두점들을 하나하나 언급하면서 그것이 글쓰기에서 어떻게 활용될 수 있는지를 악보의 기호들과 비교하면서 실로 그다운 방식으로 논한다. 통합과 분절을 동시에 지각하도록 요구하는 대시("-")에 대한 해설이라든가(영역 93), 세미콜론(";")을 하나는 목소리를 낮추고 종결시키는 ".", 다른 하나는 그 목소리를 지속시키는 ","로 나누어 둘이 결합한 "변증법적 이미지"로 이야기하는 대목(영역 92) 등은 독자들에게 사유-쓰기의 가능성이 지금까지 믿어져왔다는 것보다 넓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한다. 곧 특정한 문장부호의 사용을 통해 그것을 사용하지 않았을 때와 꽤나 다른 호흡으로 사유를 전개시킬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한 영역에서 배우고 익힌 내용을 다른 영역에서 사용하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기에, 그리고 근본적으로 영어로 쓰인 글들, 서유럽어권 문화권에서 번역된 책들을 읽으면서 나의 사유-언어를 형성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내 문장에 "-", "--", ";", ":" 등을 쓰는데 어떠한 불편을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나 자신이 다양한 구두점들과 각각의 가능성들을 충분하게 활용하지 못한다는 점이 불만스러웠다. 나만이 열어볼 수 있는 자물쇠가 달린 일기장에 이런 스타일의 글을 썼다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겠지만, 어쨌든 반쯤 공개된 장소에서는 독자들의 반응이 따라오는 게 당연하다. 한국어에서는 그런 표기를 쓰지 않는다, 한국어에서는 특히 세미콜론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야기들을 드물게나마 들었고, 사적인 글쓰기에서는 괜찮지만 학술적인 글쓰기에서는 그럴 수 없다는 조언(?)도 들었다.


나는 스스로의 개성을 실현시키지 못하면 무언가 거추장스러움을 강하게 의식하는 사람이라서 그런 코멘트를 들으면 수긍하기보다는 반문을 하게 된다. 왜 한국어 글쓰기에서 그와 같은 구두점을 사용하면 안 되는가? 왜 그런 방식으로 사고하면, 구두점을 통한 뉘앙스를 부가하면 안 되는가? 나의 사고는 한국어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인가? 이런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히 현재 한국어 쓰기에서 사용되는 갖가지 문장부호들 또한 수입되었음을 상식적으로 알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국어국문학 자료사전의 "구두점" 항목(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695056&cid=432&categoryId=2263)을 보면 한국어 쓰기의 규칙들이 적어도 문장부호/구두점의 층위에서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알 수 있다. 애초에 따옴표도, 쉼표도, 물음표도 한국어에 존재하지 않았다. 해당 항목을 따른다면 적어도 문장부호에 관해서 어느 정도 합의된 규칙들이 현재에 근접하게 정해진 시점은 갓 7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거기에 ";"은 "머무름표"라는 이름으로 등재되어 있기까지 하다!). 몇 가지 논리적 단계를 건너뛰어 곧바로 결론으로 향한다면, 역사적 시점에서 볼 때 지금 우리가 자명하고 자연스러운 규칙으로 인식하는 한국어 쓰기 규범의 상당수는 비교적 최근의 창조물/합의물이다. 우리가 그것들을 활용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다면, 그 이유는 적어도 '자연스러움'에 근거할 수는 없다. 모든 규칙들이 그렇듯 우리의 글쓰기 규칙들도 역사적 조건의 생성물이며 특히나 한국과 같이 압축적으로 (글쓰기 규범의 생성을 포함한) 근대화가 진행된 곳에서 그 규칙들의 당위가 관습이나 자연에 의존하기는 어렵다; 역사적인 관점을 갖고 바라볼 때 한국어 글쓰기의 규범들은 정말로 역사적이다.



2.


첫번째 항목의 서두에서 제기한 주장 혹은 (본래의 의도를 좀 더 정확히 밝힌다면) 물음을 나는 보다 최근의 쓰기(ecriture)에 제기하고 싶다. 나와 같은 세대의 연구자들, 혹은 학적인 사유/쓰기에 관심을 갖고 있는 독자들은 조금씩 이러한 감각을 공유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현 시점에서 학술적인 한국어 쓰기의 규범이 거의 부재함을 느낀다. 어휘, 문장구성과 같은 기술적인 수준에서가 아니라 스타일의 수준에서, 좀 더 근본적으로는 하나의 글/논변을 구성하기 위해 필요한 구성력과 논리의 수준에서 말이다. 상대적으로 어느 정도나마 합의가 된 자연과학적 글쓰기와 달리 인문 사회 필드, 특히나 사회, 문화, 이론, 이데올로기 등을 다루는 비평적인 글쓰기에서 특히 그러하다. 우리는 주제문장을 서두에 두고 근거들이 결속된 각 단락들이 서론-본론-결론으로 이어지는 '투명한' 글쓰기, (청교도 설교자들로부터 기원하는) 미국식 글쓰기로 논문을 쓸 수는 있다. 그러나 한국어 글쓰기에서, 비평적인 글쓰기의 저자로 나서고 싶으 사람이 참고할 만한 모범은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밟고 올라가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나는 이 글에서 '비평'을 다소 느슨하고 복잡한 의미로 사용한다. 완전히 전문적인 영역, 연구자들만이 이해하는 영역에 속해있는 것이 아니면서도 나름의 논리와 엄밀함을 갖춘, 사회-문화에 대한 비판적 연구 정도면 대략의 감은 잡힐지 모르겠다)


이야기를 조금 덜 추상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다소나마 비약의 위험을 무릅쓴다면, 나는 우리 세대의 비평/평론적 글쓰기에서 모범적인 사례로 꼽히는 선배 혹은 인물이 존재하지 않음을 지적하고 싶다. 이것이 뭐가 특별한 일인지 잘 납득이 가지 않는 분들은, 대체로 비평의 시선 자체가 존재하는 사회에서는 어떤 형태로든 그 시대에 전범처럼 간주되는 인물과 쓰기가 마찬가지로 존재해왔다는 사실을 떠올려주었으면 좋겠다. 당장 90년대 이전에도 (좋든 싫든, 그리고 오늘날 그 논의가 아무리 조야한 수준이라고 지탄받든) 그러한 사람들은 있었고, 백낙청이나 김우창처럼 아직까지 적어도 이름만은 유지하고 있는 이들이 그 사례이지 않은가. 그러나 90년대의 어느 시점에서부터 더 이상 동시대인들, 후속세대들에게 그 정도의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의 계보가 끊겼다(확실히 나와 내 주변의 사람들은 그런 '선배' 없이 자랐다...우리의 선배는 오로지 번역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었다). 이를 보통은 한국 사회에 지성인이 사라졌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며 갖가지 추측성 분석이 따라붙는다. 내 문제제기 역시 추측성인 것은 다를 게 없으나, 조금 다른 '물질적인' 층위에서 생각해보고 싶다. 바로 쓰기의 층위에서 말이다.


글쓰기 스타일의 문제 자체를 생각하는 계기를 마련해준 한 선배에 따르면, 현재 한국의 비평적 쓰기는 90년대 등장한 『키노』(1995~2003)와 같은 영화잡지들에서 그 단초를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만약 그 주장이 타당성을 갖는다면, 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키노』와 같은 잡지에서 비평의 새로운 스타일이 맹아적인 형태로나마 등장할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특정한 조건의 산물이지 않을까?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1980년대부터 추진되어 오고 90년대를 거치면서 확고해진 국한문혼용에서 한글전용으로 한국 사회의 지배적인 쓰기 혹은 그 조건이 변한 것이 전적으로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하나의 중요한 이유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대략 1990년 초중반을 경계로 해서 한국사회의 문자사용이 변한다는 사실은 우리가 어느 정도 합의할 수 있을 것이다(지금 내 책상에는 이정우가 1992년에 역자 서문을 단 푸코의 『지식의 고고학』국역본이 꽂혀 있는데--민음사에서 이 텍스트의 1판 1쇄가 출간된 건 2000년이다--, 이 텍스트는 어디를 펴더라도 주요 개념어들이 한문으로 표기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90년대 어느 시점부터 가장 보수적인 신문들을 포함하여 일간지들이 사실상 국한문혼용을 포기했다. 90년대 초반부터 10년 가까운 세월동안 PC통신, 그러니까 한문을 배제한 한글과 영어로 소통이 이루어진 온라인 커뮤니티 서비스가 당대 청년들의 문자사용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고, 이미 2000년대 고속인터넷 환경이 가능해진 시점부터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한자 표기를 하는 경우 자체가 줄어들었다(대중사회, 혹은 적어도 언어의 차원에서 계급차가 표피적인 수준에서나마 무너지는 것은 이와 같이 문자언어의 사용환경 자체가 바뀐 것도 무관할 수 없다). 법령 혹은 제도와 별개의 층위에서, 다시 말해 사회-문화의 층위에서 정확한 연도를 식별하기는 어렵겠으나 90년대가 쓰기의 분기점이 된다는 것은 어느 정도 사실로 합의할 수 있겠다.



3.


90년대를 거치면서 국한문혼용에서 국어전용으로 쓰기, 에크리튀르의 물질적 조건 자체가 변화했다는 설명에 동의한다면, 그러한 조건의 변화가 새로운 쓰기 스타일의 창조를 요구한다는 것 또한 납득할 수 있다. 단적으로 개념어의 사용에서 한문의 소거, 혹은 한문으로 표기된 기존 개념을 한글이 "덮어쓰는" 일은 근본적인 차이를 초래한다. 이 부분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려우나 나와 같은 세대에게 90년대 이전에 출간된 학술서들을 볼 때 곧바로 엄청난 차이를 느낀다는 것을, 어떤 이들은 종이와 무관하게 그 쓰기의 스타일에서 일종의 "낡았다"는 느낌까지 받는다는 사실을 이야기해도 특별히 이상한 일로 여겨지지는 않으리라. 단순히 감성의 차이 운운하려는 게 아니라, 실제로 무언가 개념적인 것을 엄밀하게 사고하려면, 대상을 섬세하게 포착하려면 필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언어와 고투해야만 한다(나는 지금 읽기보다 쓰기의 차원에 좀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일정 이상의 숙달도를 가진 저술가들은 자신들만의 논리적 기술technique을 갖고 있는데--적절한 비유가 될지 모르지만, 주짓수 숙련자들이 암바면 암바, 조르기면 조르기 식으로 자신의 장기를 숙달하게 되듯--그러한 기술의 사용은 자신을 포함한 공중의 언어라는 조건 위에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자신이 처해져 있던 물질적 조건으로서의 국한문혼용을 한글전용이 대체하게 되었을 때 쓰기 자체가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것은 사실 유별날 게 없는 설명이다.


그러나 단지 쓰기의 물질적인 조건이 변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정도로 충분할까? 이는 하나의 요인을 제시할 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새로운 쓰기의 탄생을 역추적하는 과정에서 충분하지는 않다. 다른 무엇보다도 국어전용의 흐름이 단순한 한글표기나 순한글말 운동만이 아니라 유럽-미국의 학적 언어가 본격적으로 수입 수용되는 흐름과 시기적으로 맞물린다는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 어떤 면에서, 한문 표기의 소거는 유럽어권의 개념어들을 상대적으로 원활하게 표기할 수 있는 한글의 특성과 무관하지 않다. 조금 더 강하게 말한다면 한글 전용은 한문에 의거한 개념어들을 구미권의 개념어들로 '대체'하는 과정에서 물질적인=표기를 위한 매개를 제공하는 과정이기도 한 것이다--그 수행자들이 의식하지 못했다고 해도 말이다. 손쉬운 사례를 든다면 2000년대 중반까지도 탈식민주의/후식민주의 등등 번역에 난점을 야기했던 post-colonialism을 대략 10년이 지난 오늘 "포스트콜로니얼리즘"으로 표기하는 데 어떠한 지장이 없다. 이제 더 이상 어떠한 해석이 필요없는 "포스트모던"도 마찬가지다.


물론 천정환&권보드래의『1960년을 묻다』와 같은 최근의 (대중)문화연구에서 드러나듯 한국의 대중적 언어가 구미의 영향을 받는 일 자체는 새로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로 넘어오면서 (그것을 광의의 포스트모던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새로운 언어-사고체계의 유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주지하다시피 80-90년대를 거치면서 한국에서 '인정받기'=교수임용이 되기 위한 중요한 요건 중 하나로 구미 대학에서의 유학경험이 중요해진다. 이들을 통해 새로운 지적 경향과 언어가 도입되는데, 비평적 쓰기의 관점에서 본다면 "현대 프랑스철학" 혹은 "포스트 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등등이라고 불리는 사유들이 본격적으로 수입된다. 인문사회 영역에서 대표적인 사례를 말해본다면, 허경이 밝히고 있듯 19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반 동구권의 붕괴와 함께 미셸 푸코의 텍스트들이 본격적으로 번역수용된다(「'해방'에서 '담론'으로: 대한민국 푸코 '수용 초기' 지식인 담론의 한 변화」). 실제적인 이해와 활용이 어찌되었든 인문사회 영역에서 푸코의 영향력이 엄청났음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첨언한다면 나는 푸코와 맑스주의 사이의 기묘한 대립관계(혹은 전자의 영향력이 후자의 영향력을 잠식한 것)에도 글쓰기 스타일의 문제가 부분적으로 잠재한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언어의 문제에 민감한 사람이라면 국내 맑스주의자들의 언어 자체가 고유의 독특한 전통을 갖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으며 오늘날 새롭게 공부를 시작하는 이들에게 맑스주의자들의 언어보다 푸코의 언어가 (실제로 후자가 더 난해한 경우에도) 보다 친숙하다는 사실은 이와 아주 무관하지는 않다.



4.


한글 표기 전용의 확장과 구미의 대중문화/사상사조의 도입이 시기적으로 겹칠 뿐만 아니라 부분적으로 전자가 후자가 보다 원활하게 실행될 수 있는 '장치'(dispositif)로 기능하기도 했다면, 그리하여 기존의 비평적 쓰기를 지워버리고 새로운 쓰기의 '발명'을 요구하게 되었다면, 나는 이와 같은 흐름과 연계될 수 있는 두 가지 경향성을 덧붙이고 싶다. 하나는 학계에서부터 대중문화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실시된 원어 발음표기의 강조이며, 다른 하나는 비평적 쓰기가 속해있는 '지식인 사회'에서 엄밀한 번역 및 원 텍스트 이해의 강조가 거의 물신적인 수준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전자의 경우 특히나 고유명사에서 원문 혹은 원어의 발음을 가능한 충실하게 옮겨야 한다는 사고방식이다. 아주 대중적인 사례를 하나 들어보면, 1994년 미국 월드컵 때 브라질의 대표적인 공격수였던 Romário de Souza Faria, 통칭 Romario는 국내에 "로마리오"로 소개되었다가 수년 뒤 "호마리오"로 바뀌고 마침내 오늘날에 굳어진 "호마리우"가 되는 개명(?)과정을 거쳤다. 이것이 당시 한국의 지배적인 외국어였던 영어와 일본어식 표기에 반발해 추진된 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비판적인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일종의 "음성중심주의"(phono-centrism)적 사고방식과, 조금 더 신랄하게 말한다면 외국어에 대한 물신적인 숭배와 완전히 무관하다고 할 수 있을까? 더불어 비평의 장에서 논의의 초점이 "원전"(이 단어 자체에 흠뻑 배어있는 기원에 대한 향수를 보라!)의 번역과 그 이해에 집중되는 상황이 대중문화에서의 경향과 완전히 별개일까?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말하자면, 나는 절대로 번역이 중요하지 않거나 중요한 텍스트를 꼼꼼히 읽고 이해하는 과정이 무가치하다는 것이 아니다(오히려 나는 좋은 번역이 그 자체로 중요한 연구성과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제도적인--그러니까 사회적인 분위기와는 다소 다른--관습에 굉장한 불만을 갖고 있다). 그러나 번역 및 원전 이해에 대한 논의에 비해 실제로 어떠한 비판적 사유를 한국의 맥락 안쪽에서 어떻게 얼마나 잘 활용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완전히 대체한다면 학문과 연구자들의 역할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할 때 더 최악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한 사회의 학문은 그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도구로서 기능해야하는 면이 분명히 있다. 조금 샛길로 빠지는 주제이지만, 오늘날 '인문학의 위기'는 그 학문이 사회의 문제를 진단하고 해결하기 위한 도구로서 제대로 기능함을 입증/설득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 뿐이다. 어쨌거나, 특히 다른 분야보다도 도구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띨 수밖에 없는 이론 영역에서, 90년대부터 지금까지 한국의 비평적 저자군들은 이론적 무기를 도구로서 어떻게 활용할 수밖에 없을 것인가, 조금 더 나아간다면 그러한 활용을 위한 새로운 쓰기를 어떻게 창출할 것인가와 같은 문제를 사고하고 일반화하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푸코-들뢰즈/데리다-지젝-버틀러/아감벤/바디우 등등으로 이어지는 한국의 비판적 이론 수용사는 새로운 유행이 기존의 유행이 자리잡고 있던 영역을 단지 백사장을 반복적으로 집어삼키는 파도처럼 재침식했을 뿐이며 새로운 형태의 사회비판/연구로 이어지지 못했음을 보여준다(굳이 말한다면 문화=대중예술비평이나 문화연구 정도가 그 질을 떠나서 예외적인 사례일 것이다- 사회과학의 영역에서는 우석훈과 같은 대중적인 경제비평을 제외하고 '비평적인' 사례가 무엇이 있는지 나는 잘 알지 못한다). 그 사이에 우리는 (그것도 별로 많지 않은) 뛰어난 번역자들 몇을 얻었을 뿐, 번역된 이론을 활용하여 '이론적 실천'을 수행하는 비평가들은 거의 얻지 못했다. 이 영역의 새로운 독자들 및 비평가 지망생들은 공부를 열심히 할수록 자신이 스스로조차도 어떻게 활용해야할지 모르는 지식을 맹목적으로 축적하게 됨을 깨닫게 된다. 마치 맑스가 묘사한 단지 화폐를 쌓아놓고 숭배할 뿐 자본의 운동에 투입하지 못하는 수전노처럼 말이다.


그리고 나는 이와 같은 이론 활용의, 비평의 실패가 단순히 문제의식의 부재만이 아니라 동시대의 비평적 쓰기를 위한 에크리튀르의 부재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비평적 실천은 아직까지도 "바다 건너"를 지향하는 쓰기, 그 자체로는 텅 빈 기표에 불과한 쓰기에 붙들려 있다. 한글전용의 확대가 사실상 이전 세대와 새로운 세대 사이의 단절을 초래했다면, 그래서 후자에게 전자의 '비평적 전통'은 낯선 것이 되었다면(나는 지금 여기서 90년대 이전까지는 나름대로 대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회비판적 '지식인'이 존재했다는 믿음을 존중하고 있다...이를 위해서는 정말 각종 평론지에 대한 실증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그것이 전통의 재해석/재발명이 되든 새로운 조건에 기반한 발명이 되든 새롭게 만들어질 필요가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1990년부터 대략 25년이 지난 만족할만한 성취는 없었던 것 같다; 아마 노정태가 일종의 역사적 맥락을 부여하려 한 논객의 전통이 그와 같은 가능성을 부분적으로나마 보여주었을텐데, 지금 온/오프라인 공간에서 "읽을만한 글이 없다"는 이야기가 계속해서 나오는 것은 이제 그러한 전통조차도 쇠락해가고 있다는 염려를 하게 한다.  물론 쓰기 자체가 개념적 고안물이며 결국 이는 탁월한 비평가와 비평적 실천이라는 구체적인 '물질'들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러한 실천들이 왜 우리 곁에 제대로 나타나지 못했는지는 어느 정도 추상의 수준에서 질문될 필요가 있다. 비평적 실천이 가장 쇠퇴한 오늘날, 역으로 그러한 실천들이 다시 절박하게 요청되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제 우리가 기대고 수입해야 할 구미의 사회비판적 진술들이 예전과 같은 폭발력을 보여주지 못하는 시점에서 나는 지금이야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새로운 쓰기가, 비판적 사고방식이 발명되어야 할 때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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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얼음꽃금붕어 2014.06.02 03:22 신고 Modify/Delete Reply

    언젠가 비지님의 "(한국어) 글쓰기가 무언가 이상하고 자연스럽지 않다는 지적을" 했던 1인으로, 한때 한글전용운동의 지지자로, 민족주의가 자본주의보다는 적어도 훨씬더 민주적이라고 믿었던 정치사회적 토양에서 자라났으나 지금은 다문화주의 공부해서 밥먹고 사는 연구자로 몇 자 적어요.

    먼저 비지님의 몇 편 읽으면서, 특히 [가만히 있으라]를 읽으면서, "어? 비지 문체가 좀 편해졌네?" 그런 생각을 잠깐 했어요. 세 가지 이유가 가능하죠. (1) 거의 매일 영어책만 보는 제가 이제는 한국어 번역체에 점점 부담이 없어져서, (2) 그동안 비지님이 그동안 한국어 글쓰기 훈련을 할 수 있을 만한 기회가 있었고, 그 덕분에 본인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한국어 문장이 좋아져서, 아니면, (3) [가만히 있으라]는 생활글이라 비지님의 입말이 자연스럽게 반영이 되어서. 셋 다일 수도 있고, 모두 아닐 수도 있고! ㅎ

    비지님이 제기한 문제, 즉 ‘한국어다운, 혹은 자연스러운 글쓰기가 따로 있는가?’라는 주제는 지금은 거의 논의가 되지 않고 있지만,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는 꽤 재미있는 논쟁 주제였던 것으로 기억해요. 물론 그때는 이 주제보다는 한글전용, 한자 혼용 (예: 나는 學校에 간다.), 한자병용 (예: 나는 학교學校에 간다.) 과 관련된 논의가 가장 압도적이긴 했지만, 이오덕 선생의 우리말바로쓰기 운동이나 공병우 선생의 한국글쓰기 연구회처럼, 민족주의에 경도된 무수히 많은 시민사회가 지지하면서 한글사랑시민운동이 지배적인 사회담론으로 부상했고, 그러면서 한국어로 좋은 글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 하는 점 역시 여러 각도에서 논의가 됐었지요. 지금 비지님 주위에 혹시 누리, 은빛, 한결 등 순 한국말 이름을 쓰는 친구들이 있다면, 그 부모님들이 바로 당시 시민사회주도의 한글 운동에 열렬한 지지자들이고, 혹시 별빛마을, 은빛마을 등 한글 이름으로 된 아파트에 살고 계시다면, 그 역시 1990년대 한글운동이 사회전반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게 되면서 이루어진 현상이지요. (이글 재미있네요. 개그맨 유세윤 어머니가 국문과 출신이셨네요. ㅎㅎ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roqlquf&logNo=30003113544&redirect=Dlog&widgetTypeCall=true )

    한겨레는 물론이고 조선일보나 중앙일보가 1995년 이후 한글전용 신문을 만들기로 결심한 배경에도 그러한 사회적 배경이 있지요. 한글 전용한 중앙일보가 한자혼용한 조선일보를 꺾고 판매부수에서 1등을 점유하게 되자 조선일보 역시 울며 겨자먹기로 한자병용을 선택하고 점점 한글전용으로 옮겨가게 된 것은 철저하게 자본의 논리였지만, 그걸 가능하게 한 것은 시민사회의 힘이었고요.

    1990년대를 가수 조규찬은 대한민국 대항해시대라고 불렀는데, 한국어 사용자 입장에서 역시 한글의 대항해시대였고, 독재에서 벗어나고 권위에 도전하고 싶고, 드디어 친일부역세력에서 조금은 거리를 둘 수 있게 된 대한민국 대중들이 한글사랑 나라사랑에서 한민족의 자부심을 찾고 더이상은 일본이나 중국보다 열등하지 않은 한민족의 우수함을 원없이 이야기하면서 기꺼이 즐거워하고 행복해하던 시간이자 공간이기도 하지요. 그때까지 지식인층만 읽던 신문을, 이제는 누구나 한글전용/한자병용 형식으로 제작된 신문을 읽게 되었으니, 대중들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한자로부터 해방된 공간이 생긴 거예요.

    국어학자들 중 일부는 이러한 사회문화적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새로운 글쓰기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고, 이 역시 어느 정도는 지지를 받아요. 그런데, 사실 대다수의 학자들은 이러한 사회문화 운동에 지독스러울만큼 거부반응을 보이죠.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성향의 학자들은 이를 헤게모니의 전도 문제로 심각하게 받아들였고, 한학자들은 중국 사대주의 싫다더니 미국 사대주의 하자는 거냐고 비판하고 (그 근거로 제기한 것이 비지님도 본문에서 언급하셨듯이, 영어가 한국어로 "자연스럽게" 편입해 들어오는 현상). 복거일씨야 워낙 영어공용화논쟁을 벌이면서 국제어로서의 영어가 대한민국의 모국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니 별도로 치더라 하더라도, 대한민국 칼럼리스트 중에서 가장 미문을 쓴다는 고종석 역시 한국어의 순수성을 주장하는 것은 불편부당하다고 주장하지요. 고종석이 워낙 복거일을 스승으로 모시는 자유주의자라서 가능한 얘기긴 하지만, 어찌 되었든 모든 주장들이 다들 일리가 있고요.

    일련의 논쟁들이 학자들의 자존심, 학문적 권위, 혹은 정치, 문화적 헤게모니 문제와 연결되면서 크게 논란이 되었는데, 제가 보기에 그중에서 가장 큰 문제는 일종의 ‘문맹의 역전’ (제가 그냥 이름 한번 붙여본 거예요.) 문제였어요.

    주류 국어학자들 포함, 일제강점기에 학교를 다녔던 학자들이나 한자병용에 익숙한 학자들, 1990년대 정치사회적 지배층은 한글전용으로 된 문헌을 전혀 읽을 수가 없거든요. 네, 글자그대로 문맹이 된 거예요. 아마도 국제음성기호로만 쓰여진 신문을 읽는 느낌? 이분들한테 한글은 발음기호고, 한자가 없으니 도무지 문맥이 이해가 안 돼요. 이는 심지어 한국어 전공 학자들한테도 마찬가지였는데, 1990년대 국어국문학계에서도 한글문화 운동에 대해 극도로 비판적인 분들이 많았고, 그분들은 지금도 한자병용을 일부러라도 하시죠. 한글문서 작업하면서 일부러 한자변환키를 쓰셔서 복잡한 한자 끼워넣으시고, 이 정도는 읽어야 우리학교 학생자격이 있다, 에헴~하시던 국어과 교수님도 비지님 다니시는(던?) 학교 국어과에 계시죠. ㅎㅎ

    결국, 무엇이 제대로된 “우리말 글쓰기인가”와 관련된 논의는 시민사회에서는 굉장히 각광받던 화두였던 데 반해, 학계에서는 거의 논의가 되지 않게 되고, 그 어정쩡한 상태가 2000년대를 넘기면서 계속 되게 돼요. 그 사이 국립국어원에서 외래어 표기법이나 문장부호 사용법을 포함한 대한민국 맞춤법 규정안을 수정해서 내놓았고, 이후 외래어표기법은 어륀지 정부 출범 이후 이재오가 나서서 한번 손질을 했던 기억하는데, 이러한 표기법들의 개정은 사실 굉장히 표면적인 논의들이고, 앞서 비지님이 제시하신 문제, 바람직한 한국어 글쓰기가 무엇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질문은 누구도 진지하게는 던지지 않았다고 봐요. 그 결과, 비지님처럼 대체 뭐가 자연스러운 것이냐, 라는 질문을 던지는 분들에게는 누구도 정답을 제시해주지 않고, 중간에서 계속 개인적인 싸움을 해나가야 하게 된 거죠.

    그런데, 비지님이 예로 든 문장부호의 경우처럼, (1) 이미 외국에서 통용되는 문장부호고, (2) 대한민국의 문장부호 역시 외국식이고, (3) 외국식 중에서 아직 들여오지 않았거나 다른 방식으로 쓰는 부호가 더 있으니까, 그것을 내가 쓰겠다, 라고 주장할 수 없는 이유는, 이미 비지님도 잘 알고 있는, 언어의 사회적, 문화적 속성 때문이죠. 문법이나 규정은 누군가의 입맛대로 만들어진 것이고, 한시적인 것이고, 정책 결정 과정에서 혹은 언중의 기호에 의해서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성질의 것이긴 한데, 그렇다고 글을 쓰는 입장에서 내 맘대로 다른 국가/사회/문화에서 통용되는 방식으로 바꿔 쓸 수는 없잖아요.

    예를 들어, 영국식과 미국식 문장부호가 약간씩 달라서, 저는 영국저널에 보낼 때와 미국 저널에 보낼 때 다른 방식으로 교정을 보고요, 한국어로 책을 쓸 때도 한국식 문장부호법 때문에 별도로 교정을 봐야 합니다. 전직 국어 선생이었음에도, 이 과정은 매우 성가시고 귀찮은 과정이고요. 그런데, 이제는 미국식 문장부호에 너무도 익숙하면서도 다시 한국식을 염두에 두고 교정을 새로 보는 이유는 명백하죠. 글쓰기의 문화적 차이에 대한 존중. 단순히 문장부호법이나 맞춤법, 혹은 외래어표기법에서 더 나아가, 사실은 문법 역시 문화의 일부죠.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어떻게 세상을 보는가가 문법 구조를 지배하는 경우도 있고, 적어도 비지님이 지속적으로 제기하시는 질문, 즉 “무엇이 자연스러운 문장인가”에 대해서도 사회 구성원이 달라지면 그 대답 역시 달라지겠고요.

    아주 간단한 예로, 영어의 that-절에서, that을 쓰든 안 쓰든 사실 그건 크게 중요하지 않지만, 플로리다에서는 that을 안 쓰고 넘어가면 그 동네 영어선생님들은 그꼴을 못 견디고 빨간펜으로 반드시 삽입을 하고 넘어가시는 반면, 캘리포니아로 넘어가면 대다수의 영어교사들이 that이 군더더기같다고 느끼는 경우가 더 많다고. 이건 영어 전공자인 비지님이 더 잘 알겠지만~, 캘리포니아의 리버럴한 환경과 플로리다의 극보수적 환경이 문법에서의 미세한 문화적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제 짐작이고요.

    다시 한국어로 돌아와, 대한민국에서 수용해서 규범처럼 쓰는 문장부호에 한계가 많고, 어휘목록역시 깔끔하게 정리된 적도 없고, 외래어 표기법은 더욱 엉망이고, 그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올바른 한국어 글쓰기와 관련된 규정도 특별히 논의된 것이 없으니 참으로 딱한 일이긴 하지만, 그 역시 대한민국 사회/문화의 특수성을 그대로 반영한 거라서, ‘무엇이 자연스러운 한국어 문장인가’하는 질문은, 한국어로 학문적인 글쓰기를 해야 먹고 사는 비지님같은 분들에게는 계속 큰 숙제가 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무엇보다 1990년대 사회문화 운동의 일환으로 발명된 “우리글 바로쓰기”가 학문적 글쓰기에까지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흐지부지 끝나게 된 상황에서, 학문적 글쓰기로 밥먹고 사는 학자들은 당연히 볼멘소리를 하거나, 한글문화운동 자체를 비난하거나, 아니면 학문적 언어의 특수성을 한국어의 보편성으로 수용하거나 하는 수밖에 없겠지요. 다양한 언어 사용주체들이 자신들의 언어적 정체성을 들고 격돌하는 전장 대한민국이라는 공간에서, 1990년대 학자들은 일시적으로 글쓰기의 헤게모니를 빼앗기는 경험을 했던 것이고, 지금도 그런 영향에서 크게 자유롭지는 않아요.

    비지님이 언급하신 푸코류냐 막스류냐 하는 글쓰기 양식 혹은 문체 논의에서 (이렇게 나눠놓으니 정말 그 둘이 정말 구별이 잘 되네요^^!) 2000년대 이후에 학계나 비평계에서 푸코류 글쓰기가 압승을 거두게 되는 것 역시 1990년대 이후 대한민국 학계와 비평계에서 의도적으로 발견하고 발전시킨 독특한 학술계 언어문화라고 보아도 좋을 듯 하고, 막스류의 퇴장 역시 주의 깊게 살펴볼 만한 지점이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드네요.

    좀더 살펴볼 문제는 다양한 언어의 복잡한 사회문화적 언어관습적 층위들이 충돌하면서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한국어의 정체성 문제. 즉, 중국어, 일본어, 영어, 한국어, 그리고 이제는 다문화 시대 세계 각국의 언어들이 한반도 안에서 각축을 벌이면서 발생하는 발생하는 언어 문화적 차이를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의 문제. 지금까지는 한자어, 일본어, 한국어, 영어 등 네 가지 언어의 갈등이었지만, 앞으로는 거기에 훨씬더 다양하고 이질적인 언어 문화들이 아주 변화무쌍한 방법으로 서로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글이 쓰여질 텐데, 이를 두고 ‘틀렸다’고 할 것인가, ‘자연스럽지 않다’고 할 것인가, ‘다언어적 상황에대한 감수성이 높아서 오류에 대한 허용범위가 넓다'고 할 것인가가 핵심이란 얘기죠.

    비지님은 제가 아는 선에서는 한국에서 나고 자라 한국에서 교육을 받은 한국인이지만, 글쓰기 토양은 영문학이고, 영어로 된 글을 읽거나, 한국어번역본 저술들을 읽는데 최적화된 언어능력을 갖추고 있겠지요. 실제로 전공 공부때문에 읽는 책들이 대부분 그런 형식일 거라 짐작하고요. 비지님의 글이 혹시 저말고 다른 분들께도 자연스럽지 않게 읽힌 적이 있다면, 아마도 그건 주로는 비지님이 현재 학술적 글쓰기 상황에서 처해 있는, 다언어적 상황 때문일 것이라고 저는 판단하는 거죠.

    문법에는 너무 잘 맞는데 자연스럽지 않은 글과, 문법에도 안 맞고 자연스럽지 않은 글은 분명히 차이가 있어요. 아카데믹한 글쓰기에 익숙한 분들이 문법에도 안 맞고 자연스럽지도 않은 글을 쓰시는 경우가 많은데, 그건 논란의 여지가 전혀 없으니 개인적으로 수습해야 할 문제고요. 문법에는 잘 맞는데 자연스럽지 않은 글의 대표적인 예는, 아마도 비지님 학교 한국어교육과에서 학위 받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외국인 학자들의 석박사 논문을 한두 편 찾아읽으시면 좋을 듯해요. 이분들 글이 문법은 하나도 안 틀렸는데 (그분들도 교정을 봐서 원고를 제출했겠지요?^^) 정말 벙벙하고 도무지 자연스럽지가 않아요. 그건 외국인들이 쓴 글이니까 매우 극단적인 경우긴 한데, 그보다는 훨씬 낫지만 외국어 저서가 한국어로 번역돼서 나오는 책들에서 가끔씩 이러한 특징들을 발견할 수 있고, 한국어로 글을 쓰는 학자들의 글 역시 어정쩡한 한국어로 되어 있는 경우도 종종 보게 돼요.

    그런데 이를 이오덕 선생이 주도하던 ‘우리글 바로쓰기 운동’할 때처럼, 마치 시민들을 가르치듯이 규범을 정하거나 오류용례집 같은 자료를 만들어서 구체적으로 한줄한줄 따져가면서 고쳐주기도 어렵고, 더구나 “학자들이여, 한국어로 글을 쓸 때는 제발 이런 오류를 좀 피해주세요!”하는 게 참 불편한 면이 있고, 그런 활동들이 학자들의 동의나 지지를 얻기도 힘들 거고, 무엇보다 과연 왜 그런 일을 해야 하는가, 하는 반론도 가능하고 그렇지요. 비지님이 윗글에서 언급하신 것처럼, 이미 정해진 규범들을 뒤집어보고 깨트리는 게 최근에 각광받는 포스트모던한 학풍이기도 하고요. 모든 규정은 일시적이고 유동적이다, 규정이란 것은 헤게모니의 주체들이 변할 때마다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학문적 풍토 안에서는, 사실 국립국어원이 통제하는 이상적인 한국어라는 것에 대해 끝없이 의심을 제기할 수밖에 없고, "자연스러운 한국어"라고 하는 근거 없는 관습법 역시 거추장스럽게 되지요. 이런 전차로^^, “학문적인 글을 쓸 때 어떻게 써야 자연스러운가?” 하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도 거의 없고, 그럴 필요도 못 느끼게 되지요.

    더구나, 요새는 민족주의는 이제 한물 흘러가고 바야흐로 다문화 시대. 자연스럽지 않다, 틀렸다, 고 하기보다는 다양한 언어에 노출되면서 이질적인 언어에 대한 감수성이 높고, 언어의 오류에 대한 허용범위가 넓다고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게 앞으로는 대세가 될 거고, 한국어에 대한 영어의 영향력 역시 전례없이 높아질 것이라서, 더구나 요새 아이들이 영어 배우는 수준을 보건대, 아마도 비지님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그 아이가 학교에 다닐 때쯤이 되면, 사람들에게 지적당했다던 비지님의 살~짝 자연스럽지 못한 글이 매우 자연스러운 문장으로 인정받는 날이 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아요. 기대하시라 개봉박두! ㅎㅎ

    그리고, 이런 논의와 별도로, 비지님이 지적한 '호마리우가 되는 개명(?)과정'에 한국어를 신주단지처럼 모시는 민족주의와 함께 물신을 숭배하고 자본주의와 사대주의를 숭앙하는 일련의 풍토가 개입했던 점을 인정하고 또 주목해요. 저는 개인적으로 한글의 발달과 자본주의의 성장이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한글 전용은 민족주의자들과 자본주의자들이 의기투합해서 만들어낸 고도의 장치이고, 당시 밑밥은 민족주의자들이 깔았지만 그 과실을 거둔 쪽은 자본주의자들이라고 생각해요. 진즉부터 이와 관련된 논문을 하나 쓸까도 생각했었는데 게을러서^^. 암튼 좋은 글 재미있게 잘 읽었어요. 감사드려요!

    • BeGray 2014.06.01 16:13 신고 Modify/Delete

      카페에서 먼저 보고 긁어와야 하나 싶었는데 벌써 옮겨주셨군요. 이런 멋진 보충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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