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고 자연스러운 한국어 학술 글쓰기의 모범"과 역사
Critique 2014. 5. 21. 20:15* 이 글은 지인들과의 대화와 스스로의 '역사적 감각'에 의거하여 그려진 일종의 개인적인 스케치다. 솔직히 말해 아래에서 다루는 주제는 내가 제대로 다루도록 훈련받은 분야가 아니다. 필연적으로 제기될 실증적 연구의 부족과 논리의 비약은 이 주제를 다루는 나의 능력이 아직 미성숙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여기에서 제기하는 문제와 질문이 전적으로 무가치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더불어 완전히 새로운 문제제기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나는 이 글에서 상당히 많은 부분이 상식적인 진술일 거라 생각한다). 나의 글이 명백히 틀린 사실관계를 이야기하거나 잘못된 해석 혹은 연결관계를 제시하기 때문에 비판받을 때, 그 비판을 통해서 이 주제에 대한 우리들의 고민이 진일보할 수 있다면 매우 기쁠 것이다. 확신하는 지점이 있다면 비평적 실천과 (이미 우리에게 자명한 환경이 되어버린 '새로운 조건' 하에서의) 한국어 쓰기의 연관성을 묻는 일, 곧 이 글에서 미숙하게나마 실천하고자 했던 작업은 오늘날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다름 아닌 나와 같은 사람들의 역할을 위해서도 그러하다.
1.
나는 "아름답고 자연스러운 한국어 학술 글쓰기의 모범"과 '역사'가 상호적대적이라는 도발적인 주장으로 글을 시작하고 싶다. 한국에서 외국문학/사상/역사를 공부하고 또 한국어 저자에 의해 집필된 책보다 번역된 책들을 더 많이 읽는 입장에서 나는 누차 나의 (한국어) 글쓰기가 무언가 이상하고 자연스럽지 않다는 지적을 받아왔고 스스로도 자신의 글쓰기에 검열을 가해 왔다. 이러한 지적의 근본적인 전제, 즉 학술-한국어에 어떤 자명한 규범이 존재한다는 믿음에 의혹을 품게된 것은 문장부호의 사용을 진지하게 고민하면서부터였다. 초보적인 수준에서라도 영어 글쓰기를 교육받은 사람은 한국어에 마치 없는 것처럼 간주되어 왔던 다양한 구두점들의 용법에 의아하고 당혹해하게 된다. 이런 사람들 중 보다 사변적인 이들에게 도움이 될 아도르노의 『문학론』(Noten zur Literatur / 영역본 Notes to Literature, trans. by Shierry Weber Nicholsen, 2 Vols., NY: Columbia UP 1991) 1권에 실린 소품「구두점」("Satzzeichen" / "Punctuation Marks")을 보면 문장부호/구두점들을 하나하나 언급하면서 그것이 글쓰기에서 어떻게 활용될 수 있는지를 악보의 기호들과 비교하면서 실로 그다운 방식으로 논한다. 통합과 분절을 동시에 지각하도록 요구하는 대시("-")에 대한 해설이라든가(영역 93), 세미콜론(";")을 하나는 목소리를 낮추고 종결시키는 ".", 다른 하나는 그 목소리를 지속시키는 ","로 나누어 둘이 결합한 "변증법적 이미지"로 이야기하는 대목(영역 92) 등은 독자들에게 사유-쓰기의 가능성이 지금까지 믿어져왔다는 것보다 넓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한다. 곧 특정한 문장부호의 사용을 통해 그것을 사용하지 않았을 때와 꽤나 다른 호흡으로 사유를 전개시킬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한 영역에서 배우고 익힌 내용을 다른 영역에서 사용하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기에, 그리고 근본적으로 영어로 쓰인 글들, 서유럽어권 문화권에서 번역된 책들을 읽으면서 나의 사유-언어를 형성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내 문장에 "-", "--", ";", ":" 등을 쓰는데 어떠한 불편을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나 자신이 다양한 구두점들과 각각의 가능성들을 충분하게 활용하지 못한다는 점이 불만스러웠다. 나만이 열어볼 수 있는 자물쇠가 달린 일기장에 이런 스타일의 글을 썼다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겠지만, 어쨌든 반쯤 공개된 장소에서는 독자들의 반응이 따라오는 게 당연하다. 한국어에서는 그런 표기를 쓰지 않는다, 한국어에서는 특히 세미콜론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야기들을 드물게나마 들었고, 사적인 글쓰기에서는 괜찮지만 학술적인 글쓰기에서는 그럴 수 없다는 조언(?)도 들었다.
나는 스스로의 개성을 실현시키지 못하면 무언가 거추장스러움을 강하게 의식하는 사람이라서 그런 코멘트를 들으면 수긍하기보다는 반문을 하게 된다. 왜 한국어 글쓰기에서 그와 같은 구두점을 사용하면 안 되는가? 왜 그런 방식으로 사고하면, 구두점을 통한 뉘앙스를 부가하면 안 되는가? 나의 사고는 한국어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인가? 이런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히 현재 한국어 쓰기에서 사용되는 갖가지 문장부호들 또한 수입되었음을 상식적으로 알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국어국문학 자료사전의 "구두점" 항목(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695056&cid=432&categoryId=2263)을 보면 한국어 쓰기의 규칙들이 적어도 문장부호/구두점의 층위에서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알 수 있다. 애초에 따옴표도, 쉼표도, 물음표도 한국어에 존재하지 않았다. 해당 항목을 따른다면 적어도 문장부호에 관해서 어느 정도 합의된 규칙들이 현재에 근접하게 정해진 시점은 갓 7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거기에 ";"은 "머무름표"라는 이름으로 등재되어 있기까지 하다!). 몇 가지 논리적 단계를 건너뛰어 곧바로 결론으로 향한다면, 역사적 시점에서 볼 때 지금 우리가 자명하고 자연스러운 규칙으로 인식하는 한국어 쓰기 규범의 상당수는 비교적 최근의 창조물/합의물이다. 우리가 그것들을 활용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다면, 그 이유는 적어도 '자연스러움'에 근거할 수는 없다. 모든 규칙들이 그렇듯 우리의 글쓰기 규칙들도 역사적 조건의 생성물이며 특히나 한국과 같이 압축적으로 (글쓰기 규범의 생성을 포함한) 근대화가 진행된 곳에서 그 규칙들의 당위가 관습이나 자연에 의존하기는 어렵다; 역사적인 관점을 갖고 바라볼 때 한국어 글쓰기의 규범들은 정말로 역사적이다.
2.
첫번째 항목의 서두에서 제기한 주장 혹은 (본래의 의도를 좀 더 정확히 밝힌다면) 물음을 나는 보다 최근의 쓰기(ecriture)에 제기하고 싶다. 나와 같은 세대의 연구자들, 혹은 학적인 사유/쓰기에 관심을 갖고 있는 독자들은 조금씩 이러한 감각을 공유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현 시점에서 학술적인 한국어 쓰기의 규범이 거의 부재함을 느낀다. 어휘, 문장구성과 같은 기술적인 수준에서가 아니라 스타일의 수준에서, 좀 더 근본적으로는 하나의 글/논변을 구성하기 위해 필요한 구성력과 논리의 수준에서 말이다. 상대적으로 어느 정도나마 합의가 된 자연과학적 글쓰기와 달리 인문 사회 필드, 특히나 사회, 문화, 이론, 이데올로기 등을 다루는 비평적인 글쓰기에서 특히 그러하다. 우리는 주제문장을 서두에 두고 근거들이 결속된 각 단락들이 서론-본론-결론으로 이어지는 '투명한' 글쓰기, (청교도 설교자들로부터 기원하는) 미국식 글쓰기로 논문을 쓸 수는 있다. 그러나 한국어 글쓰기에서, 비평적인 글쓰기의 저자로 나서고 싶으 사람이 참고할 만한 모범은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밟고 올라가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나는 이 글에서 '비평'을 다소 느슨하고 복잡한 의미로 사용한다. 완전히 전문적인 영역, 연구자들만이 이해하는 영역에 속해있는 것이 아니면서도 나름의 논리와 엄밀함을 갖춘, 사회-문화에 대한 비판적 연구 정도면 대략의 감은 잡힐지 모르겠다)
이야기를 조금 덜 추상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다소나마 비약의 위험을 무릅쓴다면, 나는 우리 세대의 비평/평론적 글쓰기에서 모범적인 사례로 꼽히는 선배 혹은 인물이 존재하지 않음을 지적하고 싶다. 이것이 뭐가 특별한 일인지 잘 납득이 가지 않는 분들은, 대체로 비평의 시선 자체가 존재하는 사회에서는 어떤 형태로든 그 시대에 전범처럼 간주되는 인물과 쓰기가 마찬가지로 존재해왔다는 사실을 떠올려주었으면 좋겠다. 당장 90년대 이전에도 (좋든 싫든, 그리고 오늘날 그 논의가 아무리 조야한 수준이라고 지탄받든) 그러한 사람들은 있었고, 백낙청이나 김우창처럼 아직까지 적어도 이름만은 유지하고 있는 이들이 그 사례이지 않은가. 그러나 90년대의 어느 시점에서부터 더 이상 동시대인들, 후속세대들에게 그 정도의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의 계보가 끊겼다(확실히 나와 내 주변의 사람들은 그런 '선배' 없이 자랐다...우리의 선배는 오로지 번역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었다). 이를 보통은 한국 사회에 지성인이 사라졌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며 갖가지 추측성 분석이 따라붙는다. 내 문제제기 역시 추측성인 것은 다를 게 없으나, 조금 다른 '물질적인' 층위에서 생각해보고 싶다. 바로 쓰기의 층위에서 말이다.
글쓰기 스타일의 문제 자체를 생각하는 계기를 마련해준 한 선배에 따르면, 현재 한국의 비평적 쓰기는 90년대 등장한 『키노』(1995~2003)와 같은 영화잡지들에서 그 단초를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만약 그 주장이 타당성을 갖는다면, 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키노』와 같은 잡지에서 비평의 새로운 스타일이 맹아적인 형태로나마 등장할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특정한 조건의 산물이지 않을까?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1980년대부터 추진되어 오고 90년대를 거치면서 확고해진 국한문혼용에서 한글전용으로 한국 사회의 지배적인 쓰기 혹은 그 조건이 변한 것이 전적으로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하나의 중요한 이유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대략 1990년 초중반을 경계로 해서 한국사회의 문자사용이 변한다는 사실은 우리가 어느 정도 합의할 수 있을 것이다(지금 내 책상에는 이정우가 1992년에 역자 서문을 단 푸코의 『지식의 고고학』국역본이 꽂혀 있는데--민음사에서 이 텍스트의 1판 1쇄가 출간된 건 2000년이다--, 이 텍스트는 어디를 펴더라도 주요 개념어들이 한문으로 표기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90년대 어느 시점부터 가장 보수적인 신문들을 포함하여 일간지들이 사실상 국한문혼용을 포기했다. 90년대 초반부터 10년 가까운 세월동안 PC통신, 그러니까 한문을 배제한 한글과 영어로 소통이 이루어진 온라인 커뮤니티 서비스가 당대 청년들의 문자사용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고, 이미 2000년대 고속인터넷 환경이 가능해진 시점부터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한자 표기를 하는 경우 자체가 줄어들었다(대중사회, 혹은 적어도 언어의 차원에서 계급차가 표피적인 수준에서나마 무너지는 것은 이와 같이 문자언어의 사용환경 자체가 바뀐 것도 무관할 수 없다). 법령 혹은 제도와 별개의 층위에서, 다시 말해 사회-문화의 층위에서 정확한 연도를 식별하기는 어렵겠으나 90년대가 쓰기의 분기점이 된다는 것은 어느 정도 사실로 합의할 수 있겠다.
3.
90년대를 거치면서 국한문혼용에서 국어전용으로 쓰기, 에크리튀르의 물질적 조건 자체가 변화했다는 설명에 동의한다면, 그러한 조건의 변화가 새로운 쓰기 스타일의 창조를 요구한다는 것 또한 납득할 수 있다. 단적으로 개념어의 사용에서 한문의 소거, 혹은 한문으로 표기된 기존 개념을 한글이 "덮어쓰는" 일은 근본적인 차이를 초래한다. 이 부분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려우나 나와 같은 세대에게 90년대 이전에 출간된 학술서들을 볼 때 곧바로 엄청난 차이를 느낀다는 것을, 어떤 이들은 종이와 무관하게 그 쓰기의 스타일에서 일종의 "낡았다"는 느낌까지 받는다는 사실을 이야기해도 특별히 이상한 일로 여겨지지는 않으리라. 단순히 감성의 차이 운운하려는 게 아니라, 실제로 무언가 개념적인 것을 엄밀하게 사고하려면, 대상을 섬세하게 포착하려면 필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언어와 고투해야만 한다(나는 지금 읽기보다 쓰기의 차원에 좀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일정 이상의 숙달도를 가진 저술가들은 자신들만의 논리적 기술technique을 갖고 있는데--적절한 비유가 될지 모르지만, 주짓수 숙련자들이 암바면 암바, 조르기면 조르기 식으로 자신의 장기를 숙달하게 되듯--그러한 기술의 사용은 자신을 포함한 공중의 언어라는 조건 위에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자신이 처해져 있던 물질적 조건으로서의 국한문혼용을 한글전용이 대체하게 되었을 때 쓰기 자체가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것은 사실 유별날 게 없는 설명이다.
그러나 단지 쓰기의 물질적인 조건이 변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정도로 충분할까? 이는 하나의 요인을 제시할 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새로운 쓰기의 탄생을 역추적하는 과정에서 충분하지는 않다. 다른 무엇보다도 국어전용의 흐름이 단순한 한글표기나 순한글말 운동만이 아니라 유럽-미국의 학적 언어가 본격적으로 수입 수용되는 흐름과 시기적으로 맞물린다는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 어떤 면에서, 한문 표기의 소거는 유럽어권의 개념어들을 상대적으로 원활하게 표기할 수 있는 한글의 특성과 무관하지 않다. 조금 더 강하게 말한다면 한글 전용은 한문에 의거한 개념어들을 구미권의 개념어들로 '대체'하는 과정에서 물질적인=표기를 위한 매개를 제공하는 과정이기도 한 것이다--그 수행자들이 의식하지 못했다고 해도 말이다. 손쉬운 사례를 든다면 2000년대 중반까지도 탈식민주의/후식민주의 등등 번역에 난점을 야기했던 post-colonialism을 대략 10년이 지난 오늘 "포스트콜로니얼리즘"으로 표기하는 데 어떠한 지장이 없다. 이제 더 이상 어떠한 해석이 필요없는 "포스트모던"도 마찬가지다.
물론 천정환&권보드래의『1960년을 묻다』와 같은 최근의 (대중)문화연구에서 드러나듯 한국의 대중적 언어가 구미의 영향을 받는 일 자체는 새로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로 넘어오면서 (그것을 광의의 포스트모던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새로운 언어-사고체계의 유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주지하다시피 80-90년대를 거치면서 한국에서 '인정받기'=교수임용이 되기 위한 중요한 요건 중 하나로 구미 대학에서의 유학경험이 중요해진다. 이들을 통해 새로운 지적 경향과 언어가 도입되는데, 비평적 쓰기의 관점에서 본다면 "현대 프랑스철학" 혹은 "포스트 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등등이라고 불리는 사유들이 본격적으로 수입된다. 인문사회 영역에서 대표적인 사례를 말해본다면, 허경이 밝히고 있듯 19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반 동구권의 붕괴와 함께 미셸 푸코의 텍스트들이 본격적으로 번역수용된다(「'해방'에서 '담론'으로: 대한민국 푸코 '수용 초기' 지식인 담론의 한 변화」). 실제적인 이해와 활용이 어찌되었든 인문사회 영역에서 푸코의 영향력이 엄청났음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첨언한다면 나는 푸코와 맑스주의 사이의 기묘한 대립관계(혹은 전자의 영향력이 후자의 영향력을 잠식한 것)에도 글쓰기 스타일의 문제가 부분적으로 잠재한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언어의 문제에 민감한 사람이라면 국내 맑스주의자들의 언어 자체가 고유의 독특한 전통을 갖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으며 오늘날 새롭게 공부를 시작하는 이들에게 맑스주의자들의 언어보다 푸코의 언어가 (실제로 후자가 더 난해한 경우에도) 보다 친숙하다는 사실은 이와 아주 무관하지는 않다.
4.
한글 표기 전용의 확장과 구미의 대중문화/사상사조의 도입이 시기적으로 겹칠 뿐만 아니라 부분적으로 전자가 후자가 보다 원활하게 실행될 수 있는 '장치'(dispositif)로 기능하기도 했다면, 그리하여 기존의 비평적 쓰기를 지워버리고 새로운 쓰기의 '발명'을 요구하게 되었다면, 나는 이와 같은 흐름과 연계될 수 있는 두 가지 경향성을 덧붙이고 싶다. 하나는 학계에서부터 대중문화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실시된 원어 발음표기의 강조이며, 다른 하나는 비평적 쓰기가 속해있는 '지식인 사회'에서 엄밀한 번역 및 원 텍스트 이해의 강조가 거의 물신적인 수준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전자의 경우 특히나 고유명사에서 원문 혹은 원어의 발음을 가능한 충실하게 옮겨야 한다는 사고방식이다. 아주 대중적인 사례를 하나 들어보면, 1994년 미국 월드컵 때 브라질의 대표적인 공격수였던 Romário de Souza Faria, 통칭 Romario는 국내에 "로마리오"로 소개되었다가 수년 뒤 "호마리오"로 바뀌고 마침내 오늘날에 굳어진 "호마리우"가 되는 개명(?)과정을 거쳤다. 이것이 당시 한국의 지배적인 외국어였던 영어와 일본어식 표기에 반발해 추진된 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비판적인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일종의 "음성중심주의"(phono-centrism)적 사고방식과, 조금 더 신랄하게 말한다면 외국어에 대한 물신적인 숭배와 완전히 무관하다고 할 수 있을까? 더불어 비평의 장에서 논의의 초점이 "원전"(이 단어 자체에 흠뻑 배어있는 기원에 대한 향수를 보라!)의 번역과 그 이해에 집중되는 상황이 대중문화에서의 경향과 완전히 별개일까?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말하자면, 나는 절대로 번역이 중요하지 않거나 중요한 텍스트를 꼼꼼히 읽고 이해하는 과정이 무가치하다는 것이 아니다(오히려 나는 좋은 번역이 그 자체로 중요한 연구성과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제도적인--그러니까 사회적인 분위기와는 다소 다른--관습에 굉장한 불만을 갖고 있다). 그러나 번역 및 원전 이해에 대한 논의에 비해 실제로 어떠한 비판적 사유를 한국의 맥락 안쪽에서 어떻게 얼마나 잘 활용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완전히 대체한다면 학문과 연구자들의 역할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할 때 더 최악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한 사회의 학문은 그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도구로서 기능해야하는 면이 분명히 있다. 조금 샛길로 빠지는 주제이지만, 오늘날 '인문학의 위기'는 그 학문이 사회의 문제를 진단하고 해결하기 위한 도구로서 제대로 기능함을 입증/설득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 뿐이다. 어쨌거나, 특히 다른 분야보다도 도구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띨 수밖에 없는 이론 영역에서, 90년대부터 지금까지 한국의 비평적 저자군들은 이론적 무기를 도구로서 어떻게 활용할 수밖에 없을 것인가, 조금 더 나아간다면 그러한 활용을 위한 새로운 쓰기를 어떻게 창출할 것인가와 같은 문제를 사고하고 일반화하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푸코-들뢰즈/데리다-지젝-버틀러/아감벤/바디우 등등으로 이어지는 한국의 비판적 이론 수용사는 새로운 유행이 기존의 유행이 자리잡고 있던 영역을 단지 백사장을 반복적으로 집어삼키는 파도처럼 재침식했을 뿐이며 새로운 형태의 사회비판/연구로 이어지지 못했음을 보여준다(굳이 말한다면 문화=대중예술비평이나 문화연구 정도가 그 질을 떠나서 예외적인 사례일 것이다- 사회과학의 영역에서는 우석훈과 같은 대중적인 경제비평을 제외하고 '비평적인' 사례가 무엇이 있는지 나는 잘 알지 못한다). 그 사이에 우리는 (그것도 별로 많지 않은) 뛰어난 번역자들 몇을 얻었을 뿐, 번역된 이론을 활용하여 '이론적 실천'을 수행하는 비평가들은 거의 얻지 못했다. 이 영역의 새로운 독자들 및 비평가 지망생들은 공부를 열심히 할수록 자신이 스스로조차도 어떻게 활용해야할지 모르는 지식을 맹목적으로 축적하게 됨을 깨닫게 된다. 마치 맑스가 묘사한 단지 화폐를 쌓아놓고 숭배할 뿐 자본의 운동에 투입하지 못하는 수전노처럼 말이다.
그리고 나는 이와 같은 이론 활용의, 비평의 실패가 단순히 문제의식의 부재만이 아니라 동시대의 비평적 쓰기를 위한 에크리튀르의 부재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비평적 실천은 아직까지도 "바다 건너"를 지향하는 쓰기, 그 자체로는 텅 빈 기표에 불과한 쓰기에 붙들려 있다. 한글전용의 확대가 사실상 이전 세대와 새로운 세대 사이의 단절을 초래했다면, 그래서 후자에게 전자의 '비평적 전통'은 낯선 것이 되었다면(나는 지금 여기서 90년대 이전까지는 나름대로 대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회비판적 '지식인'이 존재했다는 믿음을 존중하고 있다...이를 위해서는 정말 각종 평론지에 대한 실증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그것이 전통의 재해석/재발명이 되든 새로운 조건에 기반한 발명이 되든 새롭게 만들어질 필요가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1990년부터 대략 25년이 지난 만족할만한 성취는 없었던 것 같다; 아마 노정태가 일종의 역사적 맥락을 부여하려 한 논객의 전통이 그와 같은 가능성을 부분적으로나마 보여주었을텐데, 지금 온/오프라인 공간에서 "읽을만한 글이 없다"는 이야기가 계속해서 나오는 것은 이제 그러한 전통조차도 쇠락해가고 있다는 염려를 하게 한다. 물론 쓰기 자체가 개념적 고안물이며 결국 이는 탁월한 비평가와 비평적 실천이라는 구체적인 '물질'들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러한 실천들이 왜 우리 곁에 제대로 나타나지 못했는지는 어느 정도 추상의 수준에서 질문될 필요가 있다. 비평적 실천이 가장 쇠퇴한 오늘날, 역으로 그러한 실천들이 다시 절박하게 요청되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제 우리가 기대고 수입해야 할 구미의 사회비판적 진술들이 예전과 같은 폭발력을 보여주지 못하는 시점에서 나는 지금이야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새로운 쓰기가, 비판적 사고방식이 발명되어야 할 때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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