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자크 루소: 한국어 번역 및 루소의 정념에 관하여
Critique 2014. 5. 15. 02:21* 전에 올렸던 18-19세기 칸트/영국지성사 글과 마찬가지로 페이스북에서 나눈 대화. 엄밀하게 말하자면 대화라기보다는 내가 질문한 내용에 대해 답변받은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역시나 약간의 수정이 있다. 마지막에 Q로 끝나는 것은 오타가 아니다. / 150511: 검색의 편의성 및 내용의 효용을 고려해 critique로 재분류.
Q: 방학 때쯤 도서관에 터를 잡고(...) 루소 국역본들을 몰아보려고 하는데, 전반적으로 수준들이 어떤가요? <인간불평등기원론> <언어의 기원에 대한 시론> <사회계약론>은 이미 읽었고 책도 갖고 있는데(큰 불만은 없었고-), <고백록> <에밀> <신 엘로이즈>의 물량 3부작^^;이랑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장 자끄, 루소를 심판하다>는 국역상태가 어떤지 모르겠네요. 혹시 이것들 말고도 루소에서 중요한 책들이 있고 국역으로 읽을 수 있다면, 가르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A: 제가 번역본들을 대조해본 적이 없고 최근에 새로 번역된 것들이 많아서 뭐라고 단정지을 수 없어요.
62년 <에밀> 출간이 일으킨 스캔들 후 시작되는 <고백>, <대화. 장-자크, 루소를 심판하다>,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은, 고백-대화-몽상으로 이어지는 형식적 변천만으로도 하나의 흐름을 형성한다는 걸 알 수 있죠. 다행히 최근 책세상 전집으로 <대화>가 처음 번역되어서 이 자서전 3부작(루소의 의도된 기획은 아닙니다)을 온전하게 따라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백>은 나남에서 나온 이용철 선생님 번역을 추천하고 싶은데 사실 제가 이 번역본만 안 봤다는 게 에러; <대화>는 이번에 나온 번역 1종밖에 없으니... <몽상>은 번역이 여럿 있지만 역시 제가 일일이 확인해보지 않았네요. 하지만 최근에 책세상에서 나온 전집에는 이 자서전 기획의 구상단계에서 중요한 글인 <말제르브에게 보내는 편지>가 최초로 함께 번역되어 있습니다. <편지>, <고백>, <대화>, <몽상> 순서로 읽으면 되겠네요.
<에밀>은 루소의 가장 중요한 책입니다. 루소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죠. 62년까지 철학자로서 루소의 모든 사유를 집약한 책입니다. 한국어 번역도 참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이용철, 문경자 공역판과 김중현 판, 그리고 지금은 절판되었지만 서울대 도서관에 있는 박은수 판을 들 수 있어요. 각각 장단점이 있습니다. 오래 전 번역된 박은수 판이 가장 유려하고 잘 읽힙니다. 나머지 두 번역은 조금 딱딱하지만 현대적이고 큰 무리는 없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번역이 아니라 주석 혹은 연구서가 문제인 것 같아요. <에밀>에 담긴 이야기들은 단순한 교육론으로도 볼 수 있지만 당시 경험주의적, 계몽주의적, 기독교적 인간이해를 종합, 비판, 수정하는 철학적 기획으로 봐야 하는데, 이런 맥락은 충실한 주석이나 연구논문이 덧붙여지지 않는다면 글 자체의 특성상 현대독자들에게 잘 와닿지 않는 것 같습니다.
<신엘로이즈>는 김중현 판을 추천하고 싶지만 역시 최근 번역이라 제가 읽어보질 못했어요. 한번 보시고 감상을 알려주시길. 루소의 소위 순수문학으로는 역시 <신엘로이즈>가 대표적이긴 하지만, <마을의 점쟁이>, <나르시스, 그 자신의 연인>, <피그말리온> 등의 오페라, 희곡 작품들도 많이 연구됩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아직 번역은 되지 않았어요. 출간 중인 책세상 전집에 수록될 예정이라고 하니 조금 더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이 중 <신엘로이즈>의 서문과 <나르시스>의 서문은 루소 자신의 문학적 입장이나 18세기 프랑스의 미학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중요한 글입니다. 여기에 덧붙이자면 연극비판서인 <달랑베르에게 보내는 연극에 대한 편지>가 있습니다. 디드로, 달랑베르의 <백과전서>의 '제네바' 항목에서, 달랑베르가 제네바에 극장을 설치할 것을 제안하는데요, 루소가 발끈해서 쓴 반박문입니다. 이 글은 18세기 연극미학의 측면에서도 중요하고, 또한 루소의 인격과 사상에 있어 제네바라는 공화국의 위치와 파리와의 관계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글이기도 합니다. 루소 이해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바로 18세기 파리-제네바의 지정학적 관계(왕정국가, 학문과 예술, 상업과 사치, 도시화, 카톨릭 vs. 공화제도시국가, 학문과 예술의 엄격한 통제, 농업과 검소, 전원, 칼뱅신교)입니다. 루소는 오로지 자신에게 '제네바 시민'이라는 호칭만을 부여했습니다. 아쉽게도 <달랑베르에게 보내는 연극에 대한 편지>는 아직 번역이 없는 것 같네요. 하지만 <고백>과 다른 저작들에도 이 문제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혹은 <산에서 쓴 편지>는 루소 후기 정치적, 이론적 입장과 관련해서 제네바에 대한 루소의 태도를 추적할 수 있는 글입니다.
스타로뱅스키는 <언어기원론>을 루소와 라모 사이의 프랑스 음악에 대한 논쟁 맥락에 정확하게 위치시키는 것에서 비평을 시작합니다. 루소 미학의 가장 밑바탕에는 음악에 대한 열정과 취미가 깔려 있어요. 루소가 쓴 <음악사전>은 이런 맥락에서 또 다른 중요한 요소이지만, 역시 번역은 없습니다.
데뷔작인 <학문예술론>, 루소 사상의 토대를 명확히 한 <불평등기원론>은 이미 있는 번역도 괜찮지만, 책세상 전집에는 이 두 논문의 발표 후 루소가 논쟁자들과 주고 받은 편지들이 함께 수록된다고 합니다. 이 편지들이 소개되면 두 논문의 시대적 이해도 훨씬 용이해지리라 생각해요. <사회계약론>은 정치체의 기본원리를 밝힌 것으로 이미 유명하지만, 최근에는 <폴란드 정부에 대한 고찰>이나 <코르시카 설립 계획>와 같은 현실의 정치체에 대해 루소가 쓴 글들도 주목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번역은 없습니다.
번역에 대한 정보를 준다면서 그냥 루소 이런 저런 글들 제목만 나열했네요. 그냥 어떤 글들이 있고, 대충 어떤 내용이겠구나, 하고 추측하는 용도로 봐주시면 되겠습니다.
이왕 루소 중요한 글들을 소개하는 김에 하나만 덧붙일게요. <에밀> 출간 후 파리 주교인 크리스토프 드 보몽이 루소와 그의 책을 비판하는 교서를 내리자 루소가 그에게 보낸 반박문 <크리스토프 드 보몽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여기에서 루소는 기독교와 전통사회에 대한 자신의 비판이 정확히 무엇이고, 자신의 인간이론의 기본토대는 무엇인지 밝히고 있어요. 제가 예전에 어디에서 이 글을 조금 소개한 적이 있는데, 그때 발표용으로 번역한 이 글의 한 대목을 덧붙이겠습니다. 이 글이 책세상 전집에 수록될 것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심심풀이로 읽으셔도 그만 안 보셔도 그만.
나의 모든 글에서 내가 추론의 근거로 삼았으며 지난 글에서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명확하게 전개했던 모든 도덕의 기본 원리는, 인간은 자연적으로 좋은naturellement bon 존재여서 정의와 질서를 사랑한다는 것 그리고 인간의 마음에는 본래적인 도착성이 결코 있지 않으며 자연의 첫 운동들은 항상 곧다는 것이다. 나는, 인간과 함께 태어나는 유일한 정념인 자기애amour de soi는 그 자체로는 선bien, 악mal과 무관한 정념이며, 우연한 사고에 의해 그리고 그것이 전개되는 상황들에 의하지 않고서는 좋거나bon 나쁘게mauvais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였다. 나는 우리가 인간 마음의 탓으로 돌리는 모든 악덕이 결코 자연적이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였고, 악덕이 생겨나는 방식에 대해 말했다. 나는 말하자면 악덕의 계보를 추적하였고, 본래적 좋음bonté originelle의 연속적인 변질에 의해 어떻게 인간이 결국 지금의 자기 자신이 되는가를 보여주었다.
또한 나는 선과 악에 무관함으로부터 추론되지 않는 듯하고, 자기애에 대해 자연적이지도 않은 것 같은 이 본래적 좋음이라는 것이 무슨 뜻인지 설명했다. 인간은 단순한 존재가 아니고, 두 개의 실체로 구성된다. 모든 사람이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해도, 당신과 나,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고 있는데, 나는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증명하려고 애썼다. 이것을 증명하자, 자기애는 더 이상 단순한 정념이 아니게 된다. 그것은 두 개의 원리, 즉 지성적 존재와 감각적 존재를 가지고 있어서, 그것의 안녕이 같은 것이 아니다. 감각기능의 욕구는 신체의 안녕을 향하고, 질서에 대한 사랑은 영혼의 안녕을 향한다. 질서에 대한 사랑이 전개되고 능동적이 되면 양심이라는 이름을 갖는다. 하지만 양심은 오로지 인간의 앎lumières과 함께 전개되고 활동한다. 인간은 앎을 통해서만 질서를 인식하게 되며, 질서를 인식할 때라야 인간은 양심을 통해 질서를 사랑하게 된다. 그러므로 양심은, 아무 것도 비교하지 않아서 그가 속한 관계들을 알아본 적이 없는 인간 안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다. 이 상태에서 인간은 자신만을 인식하기에, 자신의 안녕이 다른 누구의 안녕과 대립되거나 호응하거나 하는 것을 보지 못한다. 그는 아무 것도 증오하지도 사랑하지도 않는다. 오직 물리적 본능에만 한정되어 있어서, 그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 짐승이다. 이것이 내가 불평등에 대한 나의 논설에서 보여주었던 것이다.
내가 진행과정을 보여준 어떤 전개에 의해 인간이 동류들에게 눈을 돌리기 시작하자 인간은 또한 인간들의 관계와 사물들의 관계를 보게 되었고, 적합, 정의, 질서의 관념들을 가지기 시작한다. 도덕적 미가 인간들에게 감각되기 시작하고 양심이 움직인다. 그때 인간들은 미덕을 가지게 된다. 그런데 그들이 악덕 또한 가지게 되는 것은 그들의 앎이 확장됨에 따라 이해관계가 교차하고 야심이 깨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해의 대립이 앎의 협력보다 덜한 동안 인간은 본질적으로 좋다essentiellement bon. 이것이 두 번째 상태이다.
결국 모든 개별 이해가 움직여 충돌하고, 자기애가 발효하여 자기편애amour propre가 되며, 의견은 인간 각자에게 우주 전체가 필요하게끔 만들고 인간들을 서로에 대한 타고난 적이 되게 하며 누구도 타인의 악에서가 아니면 자신의 선을 찾지 않게 하면, 그때 양심은 흥분된 정념들보다 약해져 그 정념들에 의해 질식하게 되고 인간들의 입에는 서로를 속이기 위해 만들어진 말만이 남는다. 그러면 각자는 공공의 이해를 위해 자신의 이해를 희생하려는 척하며, 모두 거짓말을 한다. 누구도 공공의 선이 자신의 선과 일치하지 않으면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 이런 일치가 또한 인민들을 행복하고 좋게bons 만들려고 애쓰는 진정한 정치학의 대상이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나는 낯설고, 당신에게만큼이나 독자들에게도 거의 알려지지 않은 어떤 언어를 말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세 번째이자 마지막 항으로, 그 이상으로는 해야 할 일이란 남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좋은bon 인간이 악하게 méchant 되는가 하는 것이다. 나는 인간이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찾는 일에 나의 책을 바쳤다. 나는 현재 질서에서 그러한 일이 절대적으로 가능하다고 단언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내가 제안한 방법들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나는 분명히 단언하였고, 다시 한번 단언한다.
- 크리스토프 드 보몽에게 보내는 편지, OC IV, 935-937
Q: 친절한 답변 감사합니다! 리플달아주신 내용을 따로 간추려서 올려도 될까요? / 책세상에서 전집을 기획 중이었군요. 불문학의 역사를 감안하면 이제야 전집이 만들어진다는 것에 여러 복잡한 기분이 들긴 합니다만(하긴 영문학계도 뭐 잘난 것은 없군요...)... 주목하고 있겠습니다. 말씀해주신 사항을 참고해서 죽 읽어볼게요. 보몽에 대한 답변에는 확실히 17-18세기의 맥락을 감안할 때 흥미로운 표현들이 많습니다. <에밀>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참, 최근 방문했던 학회 발표에서 루소의 <언어기원론>에 대한 언급이 나온 김에 질문 드려봅니다. 제가 지금 <언어기원론>을 곁에 두고 있지 않아 바로 확인이 불가능한데, 영어로 루소의 텍스트를 부분적으로 인용한 해당 발표문을 보면 인간의 원초적인 동력으로 정념passion을, 그리고 처음으로 인간들이 서로를 마주하면서 느끼는 감정을 공포fright (그래서 서로를 '거인'이라고 인식하는)라 부릅니다. 이 대목을 참고한다면 17세기 사상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홉스를 떠올릴 것입니다. 저도 어딘가에서 루소가 홉스를 비판적으로 전유한다는 대목을 읽은 적이 있고요. 만약 그렇다면, 홉스의 체계 안에서 정념은 사실 이성과 대칭되는 개념이 아니라 거의 감각sense과 혼용되어 쓰이는 개념어입니다만, 루소 역시도 정념을 활용할 때 그것을 이성 혹은 다른 합리적인 질서와 대립각을 세우지 않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나요? 해당 발표는 다소 정념과 사실 혹은 어떤 합리성을 대립시키고 있는 것처럼--통상적인 낭만주의관에서 그러하듯이--읽혔거든요. 루소가 홉스식의 중립적인 지각으로서 정념을 다루는지, 아니면 자신의, 이후 낭만주의에 수용될 구도를 뉘앙스로나마 덧붙이고 있는지 궁금해서 여쭤봅니다,
A: 2012년이 루소 탄생 300주년이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에서도 루소 전집 두 종이 새로 편집됐고, 한국에서도 이에 맞추어 책세상에서 전집을 기획한 것으로 압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진행속도가 느리네요. 아직 나온 게 몇 권 없어요.
질문하신 루소의 '정념'을 제대로 설명하는 일은, 루소 전체의 체계를 설명하는 일이 될지도 모르는 큰 일입니다. 제기한 대목에 대해서만 간단하게 말해보겠습니다.
1. 홉스 비판
루소의 홉스 비판은 <불평등기원론>에 가장 명확하게 등장합니다. 결론만 말하자면, 루소가 보기에 홉스는 사회상태의 여러 속성을 자연인에 투사하여, 사실은 더 야만적인 사회인일 뿐인 자연인의 형상을 추론하는 오류를 저질렀습니다. 루소의 자연인은, 사회상태를 조건으로만 생겨날 수 있는 모든 도덕적, 심리적 요소를 우리에게서 추상하고 남는 어떤 개념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사회적 관계를 맺지 않고, 사회적 관념도 알지 못한 채 홀로 살아가는 자연인은, 인식이나 정념을 거의 가지지 않습니다. 공포나 증오 또한 없습니다. 자연인의 삶의 조건은 너무 단순해서 일시적 놀람이나 충격이 미지의 대상에 대한 공포라는 심리적 기제로 고착되지 않으며, 증오라는 것은 지속적 관계를 맺는 사회적 대상들에게나 가능한 정념입니다. 홉스는 자연인에 우리가 가진 사회적 속성을 투사한 후, 다시 거기에서 우리 자신을 연역해내는 순환논리에 갇혀 있습니다.
2. <언어기원론>의 위치
<언어기원론>이 다루고 있는 초기 상태의 인간은 <불평등기원론>의 순수한 자연인과 구별해야 합니다. 말 그대로, <언어기원론>의 상태는 언어가 생겨나는 시기와 그 이후의 변이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인간은 어느 정도의 기초적 사회관계를 형성하고 있어요. <언어기원론>에서 루소는 언어탄생의 목적이 욕구나 필요의 전달이 아니라 정념의 교환이라는 주장을 하죠. 여기에서 정념은 몸짓 같은 시각언어가 아닌 음성언어의 탄생을 추동하는 힘이 됩니다(2절). 인간들이 서로 공포를 느낀다는 것은, 이미 그들이 여러 사회적 정념과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언어기원론>에서 이 '공포'는 언어가 형상적인 것이 먼저 생기고 고유한 것은 나중에 생겼다는 주장에 대한 근거입니다(3절). 이 공포로 인해 잘 모르는 사람에 대해 겁을 내고 그로 인해 '어떤 사람이 나타났다'고 말하지 않고 '어떤 거인이 나타났다'고 말하게 된다는 거죠. '거인'은 발화자의 주관적 정념이 투사된 단어인데, '사람'은 이 정념이 추상화되고 반성되어 뒤늦게 나타나게 됩니다.
3. 정념과 이성
제가 지금까지 말한 것에서 대충 감지를 하셨겠지만, 루소의 자연상태는 정념과 이성 모두의 이전 상태를 지칭합니다. 자연상태의 인간은 아주 기초적인 정념(배고픔, 놀람 따위)과 아주 기초적인 인식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념과 이성의 차원에서 자연인은 동물과 별 다를 바 없습니다. 동물들이 서로를 증오하거나 특정 대상에 대한 지속적인 공포와 싸움을 보이나요? 루소는 아니라고 합니다. 정념과 이성은 사회상태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전개되기 시작해요.
여기에서 정념은 감각과 구별됩니다. 자연인은 정념은 거의 가지고 있지 않지만 감각기능은 이미 매우 발달해 있어요. 춥고 따뜻한 건 느끼지만, 거기에 어떤 관념을 부여할 조건은 갖추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외부환경의 우연적 변화에 의해 감각이 정념으로 변할 여지는 가지고 있고, 사회상태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입니다.
감각과 정념 모두와 구별되는 자연의 '원리', 혹은 '감정 sentiments'이 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애'와 '연민'입니다. 루소의 이 두 가지 원리는 루소 철학의 핵심개념이면서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특히 <불평등기원론>에서 묘사되는 자연상태의 순수한 자기애와 연민과 <언어기원론> 혹은 <에밀> 4권에서 설명되는 연민의 원리는 마치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특히 연민이 문제인데요, 자연상태에서 그것은 아무런 이성의 개입 없이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동물도 연민을 합니다), <언어기원론>이나 <에밀>에서 연민의 원리는 매우 지성적이고 상상력이 필요한 활동으로 재규정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에 얘기할 기회가 있으면 좋겠네요.
4. 정념론
사회상태의 결과물인 정념과 이성은, 잘 통제되지 않으면 서로가 서로의 규범적 활동을 방해합니다. 철학자라는 사람들은 창밖에서 사람이 죽어가도 집안에서 인류의 고통에 대한 책을 읽고, 이기심과 질투에 빠진 연인은 자신과 애인 모두에게 지극히 불합리한 처방을 내놓습니다. 그러므로 정념과 이성은 서로가 서로를 도와야 합니다. 착한 일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착한 일인지 아는 것(이성)만으로는 부족하고, 정의를 사랑(정념)해야 합니다.
총 5권으로 구성된 <에밀>은 3권까지 우선 감각에 대한 교육을 하고, 4, 5권에서 정념에 대한 교육을 하면서 이성을 함께 끌어들입니다. 앞의 교육은 잘 진행된다면 뒤의 교육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 될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뒤의 교육을 필연적으로 불러옵니다.
<신엘로이즈>는 앞부분에서 사랑이라는 정념에 빠진 연인을 보여줍니다. 그 정념은 순수하고 아름답지만 둘의 미덕과 사회적 조건으로 인해 불행을 가져옵니다. 소설의 뒷부분은 이들을 불행에서 구해내기 위해 사랑이라는 정념을 우정으로 변환시키는 과정을 다룹니다. (소설의 결말이 성공을 말하는 것인지 실패를 말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해석이 분분합니다.) 정념론의 관점에서 <신엘로이즈>의 새로운 점은, 정념을 단지 없애고 통제하는 기술이 아니라, 하나의 정념을 다른 정념으로 변환하는 기술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발리바르 같은 사람은 여기에서 정치철학의 가능성도 보고 있습니다.
정념과 이성 이전의 자연상태 혹은 유년기 혹은 감각의 시기에서, 사회상태로 그리고 성년으로 그리고 도덕과 윤리의 세계로. 여기에서 루소 정념론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사회상태에서 자연상태의 행복을 재구성 혹은 재현하는 것입니다. <사회계약>은 정념이 어떻게 정당한 사회계약의 한 조건이 되는지 말하고, <에밀>은 잘 교육된 정념이 행복과 정의의 조건이 되며, <몽상>은 결국 루소 개인이 어떻게 정념의 세계를 떠나 인생의 마지막 시기에 자연인의 감수성을 회복하는지 말합니다.
감각, 원리로서의 감정, 정념, 이성은 루소에게 분명히 구별되고 서로 대립합니다. 이 분리와 대립의 역사가 인류의, 그리고 우리 각자의 마음의 발생론입니다. 이것들의 이 순서만 놓고 보면, 자연스럽게 경험주의의 도식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루소는 이것들이 대립하지 않는 영혼의 상태를 구성할 수 있다고 보고 그 가능성들을 탐구합니다. 여기에서 루소는 경험주의를 벗어나, 이후 세대들이 어떤 식으로든 전유할 수 있는 여러 문제들을 제기하는 것 같아요.
5. 급하게 떠오르는 대로 써서 허술하고 빠진 얘기들이 많을 거예요. 감안하고 보세요
Q: 사실 홉스의 경우만 하더라도 시간축, 그러니까 자연상태->사회상태->더 나은 사회상태...등의 선형적 시간관이 거의 드러나지 않습니다만, 사회의 진전(반드시 더 나은 상태를 의미하지는 않지만)이라는 시간적 개념이 들어간 루소의 경우에는 동일한 정념론이 꽤나 다른 의미를 갖고 쓰이는군요. 상세한 내용들은 말씀하신 주요 저작들을 읽어보면서 쫓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A: 루소의 자연상태와 사회상태의 큰 함축 중 하나. 자연상태는 의식의 시간도 변화도 없고, 자연상태에서 사회상태로 넘어오면서 비로소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다는, 어떻게 보면 현상학적인 명제입니다. 사회상태로의 이행은 시간의 탄생입니다. 그러므로 자연상태에서 사회상태로의 이행과, 사회상태에서 다른 사회상태로의 이행은 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시간이 없는 상태에서 시간이 있는 상태로 오느냐? 과연 그 이행을 시간에 갇혀 있는 인간의 의식이 파악할 수 있을 것인가?
Q: 영국의 경우에도 18세기부터 사회철학에 시간-역사의 개념이 도입됩니다. 대표적으로 (루소보다 10년 정도 늦게 태어난, 그러니까 사실상 동시대인인) 스미스도 <국부론>을 읽어보면 최초의 사회에서부터 미래의 사회로까지 어떻게 사회가 발전되는지 서술하고 있죠. (루소보다 1년 먼저 태어난) 흄도 오늘날의 인상과 달리 사실 가장 많이 팔리고 인기있던 책은 <영국사>였고요... 그들의 출생보다 대략 20여년 전에 나온 로크의 <통치론>만 하더라도 자연상태와 사회상태의 구별이 있기는 하되 사회상태 내에서의 발전은 그렇게 도드라지지 않습니다만, 불과 수십여년 사이에 선배님께서 말씀하신 주제가 어떻게, 왜 등장하게 되는지 따져보는 것도 굉장히 흥미있는 연구과제일듯 싶네요.
이것만이 정답이 아니겠지만, 경제사를 보면 영국이 17세기에 그때까지 유럽을 붙들고 있던 맬서스 트랩(생산량 증가->인구 증가->생산량 부족->인구 감소...)을 거의 최초로 깨트리고 농업자본주의를 발전시킵니다(프랑스는 18세기까지는 계속 정체상태지만요...). 홉스의 텍스트에서도 언급되지만, 그리고 로크도 식민지에 직접 투자도 했을 정도지만, 17세기가 식민지 개척이 본격적인 사업이 되기도 하는 때고요... 잘 아시겠지만 몽테스키외가 쓴 <페르시아인의 편지>처럼 '현명한 외국인/원시인'의 모티프가 등장하는 것도 이 시대죠. 여튼 홉스의 논지에서는 거의 맹아적이던 '자연상태'와 '사회상태' 양자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 등장한다는 것, 여기에 여러 가지 설명을 덧붙여볼 수 있겠지만 어쨌든 계속해서 신경써볼 만한 주제임은 틀림없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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