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스 강의 물방앗간> 발제 [20140423]

Critique 2014.04.24 04:58

* 한글에서 블로그로 옮기면서 이탤릭과 강조가 전부 해제되었다.

** 제목은 가제이며, 마지막 장은 미완성이라고 보는 게 맞다. 오타는 수정되지 않았다.


19세기 영국소설 발제

2014년 4월 23일

지식, 자리 없음, 태도, 현대성: <플로스 강의 물방앗간>


1. 지식과 삶 / 자리 없는 세계


톰 털리버(Tom Tulliver)의 삶으로부터 우리는 <플로스 강의 물방앗간>(The Mill on the Floss, 이하 <물방앗간>)의 세계에서 직업과 지식의 문제가 긴밀하게 얽혀있음을 본다. 소설의 첫 대화의 시작과 함께 털리버 씨(Mr. Tulliver)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내가 원하는 것은 톰에게 좋은 교육을 제공하는 거요; 그 애의 밥벌이가 될 수 있는 교육 말이오”(“what I want is to give Tom a good eddication; an eddication as’ll be a bread to him” 1.2.9). 여기에서 교육(“eddication”)과 직업(“bread”)은 등치관계에 놓인다. 그가 말하는 교육과 직업이 추상적인 의미로 사용되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나는 그 녀석을 그냥 변호사로 만들려는 건 아니오—그 애가 악당이 되는 걸 보고 싶지는 않소—대신 일종의 기술자나, 측량사, 또는 경매인이나 가격 사정관으로 만들고 싶은거지...”(“I wouldn’t make a downright lawyer o’the lad—I should be sorry for him to be a raskill—but a sort o’engineer, or a surveyor, or an auctioneer and vallyer...”). 에드워드 털리버는, 비록 자신의 목표에 부합하는 방법을 선택하지는 못하지만, 사람이 어떤 교육을 받고 어떤 지식을 습득하느냐에 따라 다른 직업을 가지며 심지어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잘 안다. 이때 지식 혹은 앎의 문제를 단순히 직업 선택의 문제로 국한시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변호사 존 웨이컴(John Wakem)에 대한 강한 적대감 및 경쟁심을 드러내는 이 대화에서 털리버는 단순히 지식과 직업의 관계만이 아니라 그것이 사회적인 신분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전제한다. 어린 톰이 책 속의 지식을 “하찮은 것”(“stuff” 1.5.40)이라 부르며 경멸하고 대신 밥 제이킨(Bob Jakin)이 “알고 있는”(“Bob knew” 1.6.47) 야생에 대한 갖가지 앎에 이끌리는 데서, 또 책을 빌려주겠다는 매기(Maggie)의 제안에 “내 일에 관한 거 말고 그렇게 많이 알고 살 수는 없다”(“I can’t do wi’ knowin’ so many things besides my work” 1.4.30)고 대답하는 루크(Luke)에서 알 수 있듯 <물방앗간>에서 지식은 인물의 삶 자체와 연관을 맺고 있다.

실제로 톰의 삶이 바뀌면서 그가 습득하는 지식 또한 함께 바뀐다. 수 년 동안 학교에서 교육을 받던 톰은 아버지의 파산으로 인해 공부를 계속할 수 없게 되자, 가족의 빚을 갚고 자신의 생계를 확보하기 위해 삼촌 딘 씨(Mr. Deane)를 찾아가 취직을 요청한다. 그동안 무엇을 배웠냐는 삼촌의 질문에 학교에서 수강한 과목들을 나열하면서 톰은 자신의 지식이 자신이 가야하는 삶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는다. 이제부터는 라틴어, 그리스어, 로마사, 유클리드 기하학, 대수, 산술, 그림그리기, 영시 등 수년 간 적지 않은 비용을 들여 배운 내용들이 아닌 부기(book-keeping)와 회계와 같은 ‘실용적인’ 기술=지식만이 그의 삶에 유의미하다. “저는 라틴어나 그런 것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저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요. 저는 제가 출세할 수 있는 일, 남자다운 일에 뛰어들고 싶습니다”(“Idon’t like Latin and those things....I don’t want to be that sort of person. I should like to enter into some business where I can get on—a manly business....” 3.4.229). 이렇게 대답하는 톰에게 삼촌은 다음과 같이 말해준다. “세상은 펜, 잉크, 종이로 만들어지지 않았기에, 만약 출세하고 싶다면, 젊은이, 세상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알아야만 하네”(“The world isn’t made of pen, ink, and paper, and if you’re to get on in the world, young man, you must know what the world’s made of” 3.4.231, 인용자 강조). 상속재산이 있기에 상류층으로서의 교육을 받은 필립 웨이컴(Philip Wakem)과 달리(“I have been brought up to no profession” 6.8.425), “남자다운 일”을 통해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톰은 “세상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를 배우고 알아야만 하며, 이와 같은 앎의 과정이 그의 성숙(bildung)을 구성한다—만약 톰의 서사를 교양소설(bildungsroman)의 서사로 이해할 수 있다면 말이다.

그러나 매기의 서사에 눈을 돌리는 순간 우리들은 전혀 다른 상황을 마주한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는 톰보다 두 배는 영리하다”(“she’s twice as ’cute as Tom” 1.2.12)고 평하지만, 곧바로 “여자치고 너무 똑똑해서 걱정이야....너무 똑똑한 여자는 꼬리가 긴 양보다 나을 게 없”(“Too ’cute for a woman....an over-’cute woman’s no better nor a long-tailed sheep”)다고 덧붙인다. 라일리 씨(Mr. Riley)에게 매기는 디포(Daniel Defoe)의 책에 대한 감탄할만한 독해를 보여주지만, 상대는 그 능력을 칭찬하기는커녕 “어린 소녀에게 그다지 적절하지 않은 책”(“not quite the right book for a little girl” 1.3.18)이라 평하며—그러나 똑똑한 어린 소녀에게 적합한 책이 과연 이 세계에 존재하는가?—이들의 대화는 다시 여성의 지성이 얼마나 무용한가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가는 것이다. “그녀는 단지 사람들이 그녀를 영리한 소녀로 생각해주길 바랄 뿐이며, 그녀에게서 잘못을 찾아내길 바라지 않았다”(“she only wanted people to think her a clever little girl, and not to find fault with her” 1.7.64). 하지만 “그들[여성]은 빠르고 얄팍하다”(“They’re quck and shallow” 2.1.150)는 목사 스텔링(Rev. Stelling)의 악명 높은 논평에서처럼, <물방앗간>의 세계는 여성의 지성을 아예 인정하지 않거나 (에드워드처럼) 그것의 존재를 인정하는 경우에조차 그것이 설 자리를 만들어놓지 않았다. 매기는 혼자서나마 계속해서 책을 읽고 자신의 앎을 구축했지만, 집안의 파산 이후로 “모든 지식에 대한 갈망”(“thirsty for all knowledge” 3.5.236)은 자신을 위한 자리가 부재한 세계와 대면하면서 “고통스러운 부조화”(“painful collisions”)를 낳을 뿐이다. “책 속에서 사람들은 언제나 마음에 들거나, 친절하고, 누군가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을 기꺼이 하고 싶어 하며, 잘못을 찾아내는 데서 자신의 친절을 과시하지 않았다. 매기가 느끼기에 책 바깥의 세상은 행복한 곳이 아니었다...”(“In books there were people who were always agreeable or tender, and delighted to do things that made one happy, and who did not show their kindness by finding fault. The world outside the books was not a happy one, Maggie felt....”).

가정의 경제적인 책임을 떠맡고 실용적인 삶을 살기로 마음먹은 톰에게 매기의 지식은 무용하며 그녀는 이제부터 ‘가부장’의 의사에 복종해야 한다. “너[매기]는 어머니와 너를 보살피는 일을 나[톰]에게 맡겨야 하며, 주제넘게 나서지 말아야 한다”(“you should leave it to me to take care of my mother and you, and not put youself forward” 3.5.235)는 톰의 말은 가혹할 뿐만 아니라 사실상 지적이고 독립적인 여성주체가 이 세계에 존립할 수 없다는 것을 함축한다는 점에서 일정정도 진실을 품고 있기도 하다. 이 시점에서부터 매기는 자신이 주체적인 모든 행위의 선택지를 박탈당했음을, 혹은 애초부터 그런 것은 주어지지 않았음을 인식하게 된다. 그녀는 가족의 빚을 탕감하는 데 기여하기 위한 노동을 허락받지 못하며(“I’ll[Tom] take care that the debts are paid, without your[Maggie] lowering yourself in that way” 4.3.293), 남성처럼 가정 바깥의 세상에서 무언가를 할 이동성도 부여받지 못했다(“I wish I could make myself a world outside it, as men do” 6.7.413). 이런 상황에서 “네가 어떤 일도 할 수 없다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에게 복종하라”(“if you can do nothing, submit to those that can” 5.5.347)는 톰의 말은 결국 복종 이외의 다른 선택지를 허용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바랐던 바처럼, 네가 좋은 곳에 시집갈 때까지 나는 언제나 너를 보살피려 해왔다”(“I would always have taken care of you, as my father desired, until you were well married” 6.4.392)는 진술은 그녀에게는 누군가의 딸 혹은 아내라는 존재양식만이 허용되어 있다는 사고를 함축한다.1) 낸시 K. 밀러(Nancy K. Miller)가 말하듯 “남성에게는 세계를, 여성에게는 사랑을 주는 분업”(“the division of labor that grants men the world and women love” 127)이 여기에 있다.

돌파구가 않는 억압 하에서 매기가 한편으로 강한 반감을 느끼면서도 자신이 매력을 느끼고 추구해왔던 책과 지식을 포기하고(“Maggie had turned her back on the vain ambition to share the thoughts of the wise” 4.3.293) 단념과 자기 절제를 가르치는 책으로 선회하는 것은 필연으로까지 보인다. 톰에게 있어 지식 및 그와 결부된 이동성(mobility)이 성숙을 가능케 하는 요건이었다면, 매기에게는 지식의 축적과 확장을 통한 성숙이 처음부터 사회적으로 용인된 길이 아니다. 질리언 비어(Gillian Beer)가 말하듯 “매기의 성숙은 자신의 공동체 내부에 자신의 자리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으로 그녀를 인도할 뿐이다”(“Maggie’s bildung takes her only to the point where she knows that there is no place for her in her own community...” 135). 백인-중간계급-남성을 위한 ‘정상적인’ 교양소설의 서사2)가 애초에 불가능한 상황에서, 그녀의 독서는 윤리와 내성, 책임과 같은 방향으로 이동한다. 루크와의 대화에서 드러나듯, 유년기에 그녀의 독서는 외국(“Pug’s Tour of Europe” 1.4.30), 자연(“Animated Nature”)과 같이 세상에 대한 앎의 축적과 확장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이후 스탈 부인(Madame de Staël)의 소설을 읽으면서도 “금발 여성들이 행복을 싹쓸이해가는”(“the blonded-hair women carry away all the happiness” 5.4.332) 상황에, 즉 자신과 같은 이들에게는 행복이 주어지지 않는 상황에 분노를 표현하는 모습은 독서의 초점이 윤리—스스로에 대한 지식과 분리되지 않는—의 문제로 이동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2. 선택지들


앎의, 혹은 사유의 초점이 이동한 이후 매기는 두 차례에 걸쳐 ‘유혹’에 직면한다. 맥도너가 “의무 대 정념”(“duty versus feeling” 52)과 같은 표현을 사용하면서 말하듯 한번은 필립 웨이컴에 의해, 다른 한 번은 스티븐 게스트(Stephen Guest)에 의해 촉발되는 매기의 갈등은 근본적으로 유사한 구조를 띤다. 한쪽에는 가족 및 주변 사람들에 대한 의무가, 다른 한편에는 행복과 감정적인 충만을 약속하는 사랑(romance)이 있다. 필립 웨이컴은 이 갈등구도를 다음과 같이 정식화한다. “타인의 비합리적인 감정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것은 옳지 않아”(“it is not right to sacrifice everything to other people’s unreasonable feelings” 5.1.302). “우리가 아름답고 좋다고 느끼는 것들이 있고, 우리는 반드시 그것들을 열망하게 되어 있어. 그것들 없이, 우리의 감정이 사멸하기 전에는, 우리가 어떻게 만족할 수 있겠어”(“There are certain things we feel to be beautiful and good, and we must hunger after them. How can we ever be satisfied without them until our feelings are deadened?” 303). 얄궂게도 이후 스티븐에 의해 필립 본인이 ‘비합리적인 것에의 의무’로 몰리게 되는 이러한 구도설정은 매기 자신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우리는 현재의 순간에 우리 자신에게 탐닉하는 길과 또는 그것을 억누르고 우리 안의 신성한 목소리에 복종하는 길 중에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We can only choose whether we will indulge ourselves in the present moment, or whether we will renounce that, for the sake of obeying the divine voice within us” 6.14.477). 그러나 필립 웨이컴의 첫 번째 유혹에서는 보다 분명해 보였던 이와 같은 “사랑과 의무”(“Love and Duty” Ashton 53)의 구도는 스티븐과의 관계에서는 조금 더 복잡한 것으로 나타난다.

먼저 매기가 겪는 갈등이 정말로 필립 대 스티븐, 의무와 사랑, 과거와 미래(“the past over future” McDonagh 52)의 구도인지 살펴보자. 스티븐이 직접적으로 “잘못 맺어진 의무”(“these mistaken ties” 5.11.448)라고까지 말하는 것처럼 매기가 필립에 느끼는 애정은 결혼에 기대되는 그것과는 다르다. 실제로 매기는 스티븐의 대립항으로 필립 본인이 아닌 “루시와 필립”(“Lucy and Philip” 6.14.471)에 대한 책무를 떠올린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스티븐의 제안을 거부하는 매기의 선택을 그녀가 읽은 의무에 관한 책들(“the Bible, Thomas à Kempis, and the ‘Christian Year’” 4.3.293)에 따라 자신의 행복을 단념하는 것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 매기의 선택은 오빠 톰과의 비교에 의해 보다 세심하게 접근할 수 있다. 톰이 매기를 힐난하며 “ 또한 극복해야 할 감정들이 있었지만, 나는 그것들을 정복했다. 나는 네가 산 것보다 더 힘든 삶을 살았지만 나의 의무를 수행하는 데서 나의 위안을 찾았다”(“have had feelings to struggle with; but I conquered them. I have had a harder life than you have had: but I have found my comfort in doing my duty” 7.1.485)라고 말할 때, 그는 매기 본인보다도 매기의 책들에 더 근접한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톰 또한 아버지와의 맹세가 적힌 성경(“the large old Bible” 6.4.389)에 따라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톰 역시 매기만큼이나 피해자이며 “[그에게]요구되는 남성다움의 막대한 무게가 톰에게 떨어졌다”(“On Tom falls the full weight of required manliness” 139)는 비어의 진술은 타당하다. 자신의 삶이 가야할 길에 대한 어떠한 반성 없이 자신의 욕구를 단념한 결과로 “그 자신의 본성의 한계에 갇힌”(“imprisoned within the limits of his own nature” 7.3.500) 톰의 운명은 매기의 선택지를 단순히 의무에 따른 욕망의 단념으로 볼 수 없게 한다.3)

따라서 사랑 대 의무, 혹은 둘 사이에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선택지 자체를 의심할 필요가 있다. 조지 레빈(George Levine)의 고전적인 비평이 암시하는 것처럼 어떤 선택을 해도 문제가 생기는 상황에서(15), 근본적으로 두 선택지가 그렇게 차별화되는 것인가? 스티븐이 날카롭게 지적하는 것처럼, 사랑이 의무를 위해 억눌러야 할 자연적인 것이라면, 매기가 대립물로 내세우는 연민, 믿음, 기억 또한 자연적인 것이다(“Love is natural; but surely pity and faithfulness and memory are natural too” 5.11.450)—칸트 윤리학의 언어로 표현한다면, 사랑과 의무 모두 자연스러운 경향성이라는 점에서 진정한 선을 위한 선택지가 될 수 없다. 물의 흐름을 따라 내려가면서 스티븐이 “저주스러운 속박”(“this wretched entanglement” 5.13.465)에서 벗어났다고 말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나름의 진리값을 갖는다. 더불어 필립과 살아가든 스티븐과 결혼하든 매기는 앞서 톰이 제시했던 길, 곧 결혼을 통해 부인이 되는 경로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어느 쪽도 근본적으로 독립적인 주체가 되는 길이 아니다. 최종적으로 매기는 “물길”(“tide”)을 따라 주체적인 의지를 포기하고(“there was an unspeakable charm in being told what to do, and having everything decided for her” 6.13.467) 자연스러운 애정에 따를 것을 요구하는 스티븐의 제안을 거부하지만, 동시에 필립과의 로맨스 또한 무너진다. 만약 이 장면을 매기의 ‘승리’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녀의 승리는 스티븐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사랑과 의무라는 선택지 자체에 대한 승리이기도 하다. 다시 레빈의 표현을 빌면, “스티븐을 거부하는 것은 그녀의 미성숙한 금욕주의를 한 발자국 넘어서는 것이다”(“The renunciation of Stephen moves one step beyond her immature asceticism” 16).

그러나 매기의 선택을 (스티븐이든, 양자택일 자체이든) 단순히 주어진 답을 거부하는 것, 부정성에 머무는 것으로 이해해도 좋을까? 스티븐 대 필립이라는 구도에서 필립이라는 선택지는 이렇게 이해하고 넘어가기에는 조금 수상쩍은 면이 있다. 배 위에서 잠든 매기는 성 오그스(St. Oggs)에 관한 꿈을 꾼다. 꿈속에서 루시가 성처녀로 등장하고, 처음에는 필립으로 보였던 사공은 사실 오빠 톰으로 드러난다(“the boatman was Philip—no, not Philip, but her brother” 6.14.470). 이어 그녀는 “자신이 다시 어린이가 되어 황혼녘의 거실에 있으며 톰은 진짜로 화가 나지는 않은”(“she was a child again in the parlour at evening twilight, and Tom was not really angry”) 상황을 본다. 다분히 소망충족적인 이 꿈의 내용, 즉 필립은 실제로는 오빠 톰의 대체물이라는 사실은 곧바로 스티븐의 유혹에 저항하면서 자신이 의무를 지켜야 할 대상은 “루시와 필립”(6.14.471, 475) 뿐이라는 진술을 보면 더욱 의미심장해진다. 그녀가 실제로 의무감을 느끼고 의식하는 가장 큰 대상은 톰이 아닌가? 톰을 배제한 저 진술이야말로 억압의 결과물로 해석되어야 하지 않을까? 실제로 스티븐을 선택하든 필립을 선택하든 그 어느 쪽이든 톰과의 관계를 악화시킬 것이 분명하다는 점에서 이 선택지는 또 다시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기도 하다. 결국 두 선택을 함께 거부한 뒤에 매기가 곧바로 향하는 곳은 톰이 다시 사들여 살고 있는 돌코트 물방앗간(Dorlcote Mill)이다. 어린 시절부터 두 남매간의, 적어도 매기의 톰에 대한 애착이 있었다는 점과 텍스트 전반에 걸쳐 매기의 의식에 드리워진 톰의 그림자를 감안한다면—그녀가 루시에게 직접적으로 “나는 평생 나 자신과 오빠를 나눌 수 없다”(“I can’t divide myself from my brother for life” 6.9.438)고 말한다는 것을 상기하자—이를 일종의 “억압된 것의 귀환”(“the return of the repressed”)으로 봐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둘이 함께 끌어안고 죽는 결말부를 감안한다면, 이 텍스트에서 “근친상간적인 사랑”(“incestuous love” Beer 137)을 생각하지 않기가 더 어렵다.


3. 홍수


만약 텍스트의 후반부에서 매기가 잘못된 양자택일을 거부하고 톰에게로 가는 ‘올바른’ 선택을 한다고 가정했을 때, 최소한 두 가지 질문과 맞닥트리게 된다. 톰이 그녀를 거부한 뒤에 다시 결합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최초의 거부와 최후의 결합 사이에 존재하는 가장 중요한 사건, 결국에는 두 사람의 죽음으로 이어질 홍수는 어떤 역할을 하는가? 익사를 통해 매기의 욕망과 충족된다는 해석이나(Miller, 124) 홍수를 통한 결말이 사회적인 압력이나 결과들을 배제한 사건들을 가능하게 한다는 해석(Beer, 138)은 나름의 타당성을 지니고 있지만 홍수 그 자체를 통해 무엇이 일어나는지를 충분히 설명하지는 않는다. 이때 홍수의 와중에 벌어지는 남매의 재결합이 “화해이자 복수”(“both reconciliation and revenge” 66)라는 재커버스의 언급을 발전시켜볼 여지가 있다. 다시 말해 매기의 선택은 단순히 톰과의 재결합을, 혹은 톰을 향한 욕망으로만 해석될 수는 없다. 강물과 홍수가 자연적인 광경으로서든 심리적인 상징으로서든 “진실”(“real”)이라는 진술은(Postlethwaite 114), 그것이 가리키는 진실이 무엇인지에 대한 해명을 요구한다.

마치 타락한 마을을 징벌하기라도 하듯 성 오그스의 마을을 덮쳐오는 홍수 앞에서 홀로 깨어있던 매기는 밥 제이킨의 가족을 구한 후 혼자 배를 타고 강물 위에 놓여있게 된다. 이때 그녀의 머릿속을 스치는 것은 가족들이 살고 있는 집에 대한 생각이다. “우리 삶의 모든 인위적인 산물들이 사라졌을 때”(“when all the artificial vesturee of our life is gone”) “오빠와의 화해에 대한 정확히 규정되지 않은 느낌이 있었다”(“there was an undefined sense of reconcilement with her brother” 7.5.518). 그리고 톰이 갇힌 돌코트 물방앗간에 거의 도달했을 때, “그녀는 마침내 두근거리는 기쁨과 함께 그곳에 있었다—모든 피로를 압도하는 환희였다”(“With panting joy that she was there at last—joy that overcame all distress” 519). 매기가 희열을 느끼며 톰을 구할 때, 그녀는 단순히 자신의 오빠와 재결합하는 것만이 아니다. 톰이 지금까지 매기를 용서하지 않고 징벌하며 통제해왔다면, 매기는 어린 시절 “네가 무슨 일을 했던 개의치 않은 채로 널 용서하고 사랑할거야”(“I wouldn’t mind what you did—I’d forgivee you and love you” 1.5.36)라고 말했던 것처럼, 어떠한 원한도 말하지 않고 톰을 구한다. 그리고 그녀와 마주한 “그의 마음속에 방금 일어난 일의 온전한 의미가 몰아쳐 들어왔다”(“that the full meaning of what had happened rushed upon his mind” 7.5.520).

이때 톰과 매기의 관계는 지금까지의 관계를 정확히 역전시키고 있다. 누차 반복되었듯이 어떠한 이동성도, 능동적인 행위의 가능성도 허락되지 못한 쪽이 매기였고, 그녀를 경제적으로 부양하면서 ‘구하는’ 사람이 톰이었다. 홍수, 혹은 카를 슈미트를 빌어 (진리가 드러나는) ‘비상사태’(Ausnahmezustand)라고 할 만한 순간에서 배를 타고 강물 위를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사람은 매기이며 어떠한 이동성도 부여받지 못한 채로 집 안에 ‘갇혀’(imprisoned) 있어야 하는 사람은 톰이다(이때 톰이 “경외와 치욕”awe and humiliation을 느낀다는 사실이 권력관계의 변동을 함축한다) 매기는 그저 톰을 구하고 재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일시적으로나마 지금까지의 억압된 환경, 자신을 위한 자리가 주어지지 않은 세계가 아닌 자신의 역할, 가능성, 이동성이 열려있는 세계에 있는 것이다. 동시에 이 순간은 그녀에게 진실로 자신이 희망해왔던 ‘윤리적인 태도’를 관철시킬 가능성 또한 열어준다. 토마스 아 켐피스의 책이 그녀에게 그저 단념과 금욕적인 것들을 요구했다면(4.3.289-90), 그 텍스트가 말하지 않는 또 다른 덕목, 즉 “불행한 사람들을 가장 많이 돌보는”(“I always care the most about the unhappy people” 5.4.333) 의지, 요컨대 내면으로의 폐쇄적인 침잠이 아닌 타자를 향한 열림이 매기에게 존재했다. <물방앗간>의 세계가 그러한 의지를 갖고 행동할 수 있는 선택지를 그녀에게 제공하지 않았다면, 홍수의 짧은 순간에 그녀는 마침내 타인을 위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의미에서 온전한 삶을, 즉 미덕을 현실화시키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톰을 구한 뒤 그녀는 함께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자고 제안하는 대신 루시와 다른 이들을 구하러 가자고 말한다. 물론 이러한 순간의 가능성은 아주 짧게만 열리며, 곧바로 닫힐 것이다(조금 심술궂게 읽는다면 톰이 노를 잡고 곧 보트가 뒤집힌다). 그러나 매기와 톰의 재결합으로 이야기가 끝난다고 결론짓기 전에 매기의 삶이 정확히 어떤 것이었는지 살피는 과정은 여전히 의미가 있다.


4. 현대성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1978년 진행한 강의 「비판이란 무엇인가」(“Qu'est-ce que la critique?” / “What is Critique?”)에서 근대에 특유한 “덕으로서의 비판적 태도”(“this critical attitude as virtue in general” 43)을 다루면서 그것을 “어떻게 통치당하지 않을 것인가”(“how not to be governed” 44)라는 물음과 연결시킨다. 칸트의 텍스트를 보다 본격적으로 다루는 6년 뒤의 텍스트, 「계몽이란 무엇인가」(“Qu'est-ce que les Lumières?” / “What is Enlightenment?”)에서 그는 비판이라는 태도를 자신의 계보학적 입장과 연결시키면서 보다 구체화한다.4) “이러한 비판은 그것이 우리가 무엇인가에 대한 형식으로부터 우리가 알 수 알고 행할 수 없는 것을 도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계보학적이다. 대신 비판은 우리를 지금처럼 만든 우연성으로부터 지금의 방식으로 존재하고, 행하고, 생각하지 않을 가능성을 끌어낸다”(“And this critique will be genealogical in the sense that it will not deduce from the form of what we are what it is impossible for us to do and to know; but it will separate out, from the contingency that has made us what we are, do, or think” 46).

같은 텍스트에서 푸코는 현대성(modernity)를 “역사상의 특정한 시대가 아닌 하나의 태도”(“rather as an attitude than as a period of history” 39), 즉 “사고하고 느끼는 방식이자, [무엇에] 소속되어 있는지의 관계를 표시하고 동시에 그 자신을 하나의 과업으로 제시하는 행동방식이자 행위방식”(“a way of thinking and feeling; a way, too, of acting and behaving that at one and the same time marks a relation of belonging and presents itself as a task”)으로서의 “에토스”(“ethos”)로 정의한다. 그는 보들레르를 언급하면서 태도로서의 현재성이란 “덧없는 것, 순간적인 것, 우연한 것”(“the ephemeral, the fleeting, the contingent”)을 그대로 승인하는 게 아니라 “현재의 순간을 넘어서거나 현재의 배후에 있는 대신 그 안에 있는 영원한 무언가를 다시 붙잡는”(“recapturing something eternal that is not beyond the present instant, nor behind it, but within it”) 것, “현재를 ‘영웅화’하려는 의지”(“the will to ‘heroize’ the present” 40)라고 말한다. 푸코는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현대성의 태도에서, 현재의 높은 가치는 현재를 상상하고, 현재를 지금과 다른 것으로 상상하고, 그것을 파괴시키는 게 아니라 현재 그대로를 붙잡으면서 변형시키려는 필사적인 열망과 분리될 수 없다”(“For the attitude of the present is indissociable from a desperate eagerness to imagine it, to imagine it otherwise than it is, and to tranform it not by destroying it but by grasping it in what it is” 41).

<플로스 강의 물방앗간>의, 혹은 매기의 태도를 곧바로 푸코가 정의하는 (명확하게 역사적 구체성을 가진 것은 아닌) 현대성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순전히 주어진 것으로서의 지금을 그대로 살아가지 않는다는 점에서, 또는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계속해서 고투한다는 점에서 매기의 삶은 “자기 자신을 생산하는 과업”(“the task of producing [one]self” Foucault, 42)을 어느 정도 담아낸다는 것, 그리하여 태도로서의 현재성을 상기시키는 면이 있다는 점 또한 부인하기 힘들다.


5. 참고문헌


사토 요시유키. <권력과 저항: 푸코, 들뢰즈, 데리다, 알튀세르>. 김상운 역. 난장, 2012.

Ashton, Rosemary. The Mill on the Floss: A Natural History. Boston: Twayne, 1990.

Beer, Gillian. “‘The Dark Woman Triumphs’ : Passion in The Mill on the Floss.” 1986. Bloom 123-41.

Bloom, Harold. ed. George Eliot’s The Mill on the Floss. NY: Chelsea House, 1988.

Davidoff, Leonere and Catherine Hall. Family Fortunes: Men and Women of the English Middle Class, 1780-1850. Chicago: Chicago UP, 1987.

Foucault, Michel. “What is Critique?” The Politics of Truth. Ed. by Sylvère Lotringer. Trans. by Lysa Hochroth and Catherine Porter. LA: Semiotext(e) 2007.

---. “What is Enlightenment?” Trans. by Catherine Porter. The Foucault Reader. Ed. by Paul Rabinow. NY: Pantheon, 1984.

Jacobus, Mary. “The Question of Language: Men of Maxims and The Mill on the Floss.” 1981. Bloom 61-76.

Levine, George. “Intelligence as Deception: The Mill on the Floss.” 1965. Bloom 9-21.

---, ed. The Cambridge Companion to George Eliot. Cambridge: Cambridge UP 2001.

McDonagh, Josephine. “The Early Novels.” Levine 57-75.

Miller, Nancy K. “Emphasis Added: Plots and Plausibilities in Women’s Fiction.” 1981. Narrative Dynamics. Ed. by Brian Richardson. Ohio: The Ohio State UP, 2002. 110-29.

Postlethwaite, Diana. “George Eliot and Science.” Levine 98-118.


1) 당대 여성이 결혼을 통해서 “온전한 성인으로서의 위치”(“their full adult status”)를 획득할 수 있었으며 결혼을 강요받는 분위기였다는 다비도프와 홀(Davidoff and Hall)의 설명을 참조(322-29).

2) 프랑코 모레티(Franco Moretti)가 <세상의 이치>(The Way of the World)에서 지적하듯 근대유럽의 교양소설의 주인공으로 백인-중간계급-남성이 절대다수인 것과 교양소설의 근본적인 전제조건이 이동성이라는 사실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3) 아 켐피스의 텍스트가 매기에게 부권적인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아닌 새로운 함의를 갖고 읽힐 수 있다는 메리 재커버스(Mary Jacobus)의 설명을 참조(72-73).

4) 푸코의 두 텍스트를 연결시키는 해석으로 사토 요시유키의 빼어난 분석을 참조(13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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