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를 생각한다: 군인은 어떻게 군인이 되는가?"
Critique 2014. 3. 25. 13:32<군대를 생각한다: 군인은 어떻게 군인이 되는가?>
“한국은 군대사회다”—누군가에겐 진부하고 누군가에겐 전혀 낯선 주장에서 시작해보자. 군대에서 다쳤고, 총을 쐈고, 내무반(생활관)의 갈굼과 부조리를 겪었고, 축구를 했고, 애인과 헤어졌고 등등, 한국인들은 심지어 군대를 갈 필요가 없는 사람조차도 항상 군대 이야기에 포위되어 있다. 한국사회를 이야기할 때 얼마든지 남용해도 괜찮은 “군대식 문화” 같은 표현을 포함해, 우리의 의식은 언제나-이미 군대에 ‘점령된’ 상태이지 않은가? 그러나 우리는 정작 그 군대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고백하건대 불과 2년 전까지 나는 군대에 관해 아무 것도 몰랐다. 얼마나 몰랐냐면, 가지 않았지만 이미 다 알고 있다고 멍청하게 생각했을 정도였다. 입대 후 3개월이 지나기 전에 나는 군대에 관해 완전히 다른 입장을 갖게 됐다. 나는 지금껏 그냥 지나쳐왔던 한국사회의 곳곳에서 군대의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단언컨대 군대는 인간의 내면을 기존의 질서에 맞게 만들어내는 교육기관이라는 점에서 그 어떤 학교보다 우월한 학교 중의 학교이며, 한국사회를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유지시키는 중추다.
겨우 이 정도의 글로 군대를 충분히 다룰 수는 없겠지만, 여기서는 보통 군대를 다루는 대중매체에서 잘 다루지 않으나 주제를 짧게나마 얘기하려 한다. 군인은 도대체 어떻게 군인이 되는가? 우리가 군대식 문화, 질서, 사고라고 부르는 것들이 어떻게 군인들의 영혼 속으로 스며들어 마침내 군 바깥의 전혀 상관없는 곳까지 퍼져나가는가? TV나 웹툰, 군필자들의 술자리 대화를 보면 군 생활은 훈련소부터 시작한다. 실제로 훈련소는 “민간인 군인화(化)”라는 무시무시한 표어가 걸려 있기도 하고, 사회생활과 완전히 다른—그러나 근본적으로 유사한—규칙 아래에서 갑자기 몇 주를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는 곳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문화충격’으로서의 훈련소와 같은 특별한 경험보다는 더 오래 머물러야 하는 자신의 부대(“자대”)에서 겪는 일상적인 경험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낡은 비유지만, 갑자기 끓는 물에 던져진 개구리가 튀어 오르듯, 훈련소에서 강압적으로 가르치는 내용을 아무 반감 없이 순순히 받아들이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나 자대에서 이등병부터 병장까지 1년 반 좀 넘게 살아가면서 그들은 어느덧 주어진 삶과 논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천천히 온도가 올라가는 물의 개구리가 조용히 죽어가듯이. 1
훈련기간이 끝난 병사들은 보통은 중대장이 이끄는 중대에 배치된다. 중대쯤 되면 최소 수십 명, 많으면 백 명을 넘어가기도 하므로 중대장이 일일이 병사들을 관리하는 건 어렵다. 그래서 전체 인원을 각 소대로 나누어서 직접적인 관리권한을 소대장들에게 준다. 그 소대장들도 혼자서 20대 초반의 산만한 남자 수십 명을 신경 쓸 능력은 없기 때문에 각 분대로 쪼갠 뒤 병사들의 일차적인 관리임무를 분대장에게 맡긴다. 부대에 따라 직업군인들이 분대장을 맡는 경우도 있지만, 아직 육군은 대체적으로 병사들이 분대장을 맡고 있다. 보통 한 중대 안에서 먼저 입대 순으로 위아래가 정해지는데, 이것이 가장 엄격하게 적용되는 게 분대다. 그래서 분대에서 제일 일찍 입대한 사람이 분대장을 맡고, 그 밑에 입대 순서대로 위계질서가 생긴다. 훈련소를 마치고 새로이 소속된 자대로 온 사람들은 대개 분대장이 통제하는 몇 명으로 이루어진 그룹, 즉 분대의 최하급 병사로 들어가게 된다.
당연한 말이지만 각 부대는 주어진 역할에 따라 서로 다른 일을 한다. 따라서 훈련소를 갓 마치고 분대에 들어온 사람은 그 분대에서 실제로 어떤 일을 주로 하는지 전혀 알 수 없다. 새로운 사람, 즉 신병을 받은 분대에서 제일 처음으로 하는 역할은 그 사람을 가르치는 일이다. 무엇을 가르칠까? 여러 가지 규칙들, 그리고 그가 해야 하는 일들을 가르친다. 보통 신병들을 가르치는 역할은 직전까지 가장 막내였던 사람, 그러니까 새로 사람이 들어오기 전까지 막내였던 사람이 맡는다(“맞선임”). 맞선임들을 포함한 병사들 중에서 교사의 자질을 갖고 있거나 교육이 어떤 것인지 생각해본 적이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래서 ‘신병교육’은 대체로 거칠고,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방식으로 행해지기 쉽다. 훈련소 마치고 처음 몇 달 동안 사람들이 정신없이 살게 되는 이유 중 하나는 단기간에 이렇게 많은 것들을 배우고 몸에 익혀야하기 때문이다. 배운 내용을 틀릴 때마다 ‘처벌’을 받기 때문에 그 생활은 힘들어진다(군인들은 자신을 가르친 교사를 모방하고, 교사들은 자신을 가르친 군인을 모방한다).
보통 사람들은 군생활의 핵심을 갖가지 처벌, 쓸데없는 규칙들, 계급에 따라 철저히 명령하는 사람과 복종하는 사람이 나뉘는 사회 등으로 꼽는다(“훈련” “국방의 의무”라고 답하는 사람들은 가장 순진하고 아무 것도 모르는 이들이다). 하지만 나는 군생활의 진정한 핵심은 일, 즉 노동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병사들의 삶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차지하는 것은 보통 “작업”이라고 불리는 노동이며, 대체적으로 병사들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폭력성은 그들에게 주어진 노동량과 비례한다. 한국의 군부대는 정말 전문적인 기술이 필요한 경우 등을 제외하고는 가능한 거의 모든 일을 부대 자체에서 병사들의 노동력을 뽑아내어 해결한다. (백 명 넘게 사는 공간의) 청소나 설거지 같은 일상적인 일부터 산에 계단과 진지를 만들고 중요한 사람이 방문할 때 환경미화작업까지 전부 말이다. 그래서 병사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해서 일한다. 개미 같다고도 부르는데, 개미들이 겨울잠을 자는 동안에도 병사들은 눈을 쓸고 얼음을 깬다. 군대에서 몸을 다치는 경우 중에 상당수는 이런 노동과 관련되어 있다. 보통 군대를 갔다 오면 일을 배워온다는 식으로 말한다. 1년 반 동안 계속 작업을 하니까 당연하다.
물론 자신이 이런 방식으로, 단지 하나의 노동력으로 다뤄지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드물다(단지 질서가 있다는 이유로 좋아하는 사람도 희귀하지만 존재한다). 대략 병사들의 월급이 10만원을 조금 넘는 수준인데, 철저하게 일하는 날에 주어진 시간만큼만 일한다고 해도—당연히 그것보다 더 많이 한다—시급이 천 원이 못 되며 경우에 따라 500원도 되지 않는다. 군대 내 편의점인 PX는 의외로 싸지 않고, 공중전화는 군인특별대우라고 적어놓고 분당 100원 가까운 돈을 뜯어내며, PC방도 1시간에 500원 가량 들어간다. 조금 추운 지방에서 복무하는 병사들은 먼저 떠나는 병사에게 물려받거나 훔치지 않는 이상 따로 돈을 내서 보온용품을 사야한다(부대에서 지급하는 보급품으론 어림도 없다). 어떤 이념도 섞지 않고 정직하게 말하면 병사로 복무하는 사람은 그 기간 내내 자신의 노동력을 착취당한다. 시간과 노동이 헐값에 매겨지는 사실도 맘에 들지 않지만, 군 생활은 여러 가지 면에서 노예의 그것과 같다. 주거의 자유, 표현의 자유, 사고의 자유를 포함한 신체와 영혼의 모든 자유는 일시적으로 정지된다. 자신보다 높은 계급에 있는 사람이 무언가를 시키면 아무리 맘에 들지 않아도 무조건 따라야 하며 그걸 거부하면 처벌 받는다—명령을 거부할 권리는 없다. 한국인들은 “선행학습”에 열심이라서 기업에 착취당하기 위해 먼저 군대에서 착취당하는 법을 배우나 보다.
병사들 중에서 복무경험이 많고 계급이 높은 사람, 그러니까 상대적으로 밑의 병사들에게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할까? 대체로 자신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권력을 휘두르면서 마음의 보상을 받거나, 자신들에게 주어진 노동을 아랫사람들에게 떠넘기고 자신의 여유시간을 확보하는 식으로 행동한다. 앞서 말했듯이 분대 단위에 소대장들이 개입하는 경우는 드물고, 많은 경우 아예 분대장들에게 소대원들의 통솔 자체를 맡기기도 한다. 일처리만 그럭저럭 잘 되고 심각한 사고만 없다면 분대장들이나 선임병사들은 누군가의 제지를 받지 않고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 새로 들어온 사람들을 굉장히 신경 써서, 그러니까 무슨 일을 시켜도 군말 없이 고분고분 잘 따르도록 가르치는 것은 기본적으로 고된 노동을 떠넘기기 위해서가 크다. 직전까지 막내였던 사람은 물론 아직 막내생활이 얼마나 힘든지 잊지 않고 있다. 그걸 알기 때문에 바로 밑에 누군가가 들어오자마자 자신이 짊어지고 있던 짐을 하루라도 빨리 넘겨주고 싶어 한다. 군 생활이 끝나가는 사람들은 주어진 모든 일을 다른 이들에게 떠넘겼기에 더 이상 할 일이 없고, 힘든 일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니까 살이 찐다.
군 생활의 핵심에 노동이 있고, 노동이 떠넘기기 위해 교육이 필요하다면, 이 착취의 구도가 유지되기 위해서 공포와 질서(“상명하복”)가 동원된다. 일종의 중간관리자라고 할 수 있는 분대장은 전체 노동이 성공적으로 끝나도 특별히 얻는 것은 없다. 하지만 결과물이 안 좋을 경우 소대장에게 혼나기 때문에 그게 싫어서 아랫사람을 ‘갈군다’. 그 바로 밑의 사람은 분대장에 대한 공포로 밑의 사람을 갈군다. 이런 식으로 맨 위부터 맨 아래까지 차례대로 갈굼의 연쇄가 이루어진다. 맨 아래에서 모든 짐을 떠맡은 사람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여유롭게 지내는 선임들을 보면서 자신도 언젠가 저렇게 되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시간이 지나면, 분대장은 떠나고 이전의 2인자가 새로운 분대장이 되며 예전의 막내는 새로 온 사람의 맞선임이 된다. 드디어 자신의 짐을 떠넘길 기회가 온 그는 새로 온 사람을 철저하게 ‘교육’시키고자 한다. 선임들은 한편으로는 그 모든 과정이 결과적으로 자신들의 노동량을 줄이는 것이기에, 다른 한편으로는 어느덧 “원래 막내 때는 고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기에 무심하게 지나치며, 만약 교육의 성과가 부실할 경우 해당 맞선임을 불러 가혹하게 책임을 묻기도 한다. 다시 막내생활로 돌아가고 싶지 않으면 제대로 교육시키라고 꾸짖으면서. 2
이 모든 과정은 누가 어떤 역할을 맡는가를 제외하고는 거의 바뀌지 않고 반복된다. 누군가는 항상 더 많은 노동을 하고 더 많은 갈굼을 받으며, 누군가는 항상 비교적 여유 있게 지낸다. 물론 이들 모두가 각자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건 간에 매우 저렴한 임금에 열악한 조건 속에서 자신의 시간과 노동을 강제로 판매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모두가 착취당할 수밖에 없는 여건 안에서, 누군가는 또 다른 누군가를 착취하는 역할을 맡고 있을 뿐이다—마치 작은 벼룩이 큰 벼룩의 피를 빨고, 그 작은 벼룩은 더 작은 벼룩에게 피를 빨리는 것처럼. 가장 많이 착취당하는 위치에서 다른 이들을 착취하는 위치로 점차적으로 올라가는 과정을 거치면서 군인은 비로소 군인이 된다. 이들의 머릿속에는 노예처럼 살아야했던 결코 짧지 않은 시간—노예의 삶은 아무리 짧다 해도 절대로 짧게 느껴질 수 없다—에 대한 강한 보상심리와 피해의식이 뿌리박히며, 사람을 필요에 따라 노동력으로 바꾸어 볼 수 있는 시각이, 그리고 사회 어딘가에서 벌어지고 있을 착취는 대수롭지 않을 뿐만 아니라 꼭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는 마음가짐이 자리 잡는다. 우리는 보통 군대식 문화를 엄격한 위계질서와 명령에 거역할 수 없는 상명하복의 태도로 생각한다. 하지만 군인들이 군대로부터 진짜로 배우는 것, 그리하여 사회의 일반적인 질서로 자리 잡는 것은 인간을 수단으로 보는 시선과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타인을 희생시킬 수 있는 태도이다.
<나다wom> 3호 (2014년 봄) 71-78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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