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이라는 광학적 기만, 코드 해석의 모델링
Critique 2014. 4. 11. 02:45'경험'이 강요하는 광학적 기만을 깨트리기는 아주 어렵다. 예컨대 나는 본인의 직장경험을 통해 모든 환경운동단체는 돈을 더 뜯어내려는 사기꾼이고 기업경력이 없는 사람이 자본의 문제를 이론의 차원에서조차 다룰 자격이 없다고 확신하게 된 이를 본 적이 있다. 군대 또한 그렇다. "가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라는 강력한 입장은, 사실 그러한 말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 거대하고 복잡한 조직에서 아주 미미한 역할 이상을 겪어보지 못해봤음에도 불구하고--보병연대는 대략 2~3천명으로 구성되며, 독립적인 영역을 가진 행정분과만 6개가 넘는다...나는 대부분의 군필자들이 연대급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로 전역한다고 확신한다--나사부품으로서 작동했던 자신의 과거가 확실하고 통찰력 있는 앎을 보장한다고 믿는다. 조금 더 지적인 사람들조차 경험이 가져다주는 기만에서 자유롭지 않다. 뉴스를 조금 더 읽고 특정분야에 대한 학부수업을 조금 들었다는 것, 약간의 노고를 기울인 (대개 다른 논문들 및 이미 가공된 2차 자료를 참조해서 만들어진) 페이퍼를 써본 것만으로도 자신이 그 주제를 '참되게'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대학생들은 얼마나 많은가. 나는 아주 날카롭고 비판적인 지성을 갖춘 누군가가 자신의 학부시절 졸업논문에 기반해 어떤 작업의 불가능성을 확고한 진리로 받아들인 것을 보면서, 논문작성자 본인이 "과학적인 방법에 따라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여 진지하게 썼"다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깨트리기 힘든 장벽이 되었는가를 새삼 느꼈다. 대학원생과 그 이후의 전문 연구자들은 얼마나 다를까? 바로 그들 자신이 선행연구조사를 통해 학위와 자격을 갖춘 이들이 양산해낸 수많은 논문들을 밟고 섰으면서도, 심지어 매 시대에 드물게 나오는 뛰어난 이들의 작업조차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틈새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는 걸 목도했으면서도, 정확히 그런 풍화작용에 의해 새로운 작업거리를 찾을 수 있다는 걸 매번 스스로의 행위로 증명하고 있으면서도 바로 자기 자신의 작업이 학문적 과정이라는 규정되기 힘든 과정을 거쳤다는 이유만으로도 스스로가 도출해낸 결론에 정당한 범위를 벗어난 신뢰를 부여하는 경우가 없을까?
경험과 전문가적인 과정이 결합했을 때 초래되는 광학적 기만이야말로 가장 지독한 것이다. 내가 속해 있는 필드에, 그러니까 나 자신도 자유로울 수 없는 실수에 관해 말해보자. 문학연구자들이 훈련받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덕목 중 하나는 세목을 놓치지 않는 눈이다. 물론 특수한 세부사항을 포착하는 능력 자체는 어떤 학적 연구에서도 귀중한 덕목이겠지만, 문학연구자들은 특히나 바로 그 작은 것으로부터 출발해 커다란, 보다 올바른 용어로 전체적인 윤곽을 그려내는 훈련을 받는다. 그 점에서 우리들이 속한 전통은, 심지어 가장 강력한 반-맑스주의자들초자도, "특수자로부터 보편자를 구성한다"는 헤겔-맑스주의적 이념에 기초한다. 이때 보편자의 역할로서 제시되는 단위는 보통 하나의 텍스트가 맡는다; 이 한 줄의 구절로부터 이 텍스트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혹은 어떤 방향으로 읽혀야하는지를 어떻게 찾아낼 것인가(텍스트를 작가로 바꾸어도 상황은 크게 바뀌지 않는다)? 전문적인 역사가들처럼 완전히 문학텍스트를 하나의 사료로 취급하는 지점까지 자신의 입장을 밀고가지 않는 한 예술작품으로서의 텍스트가 하나의 보편자를 가상적으로나마 표상한다는 입장에서 탈피하기란 어렵다. 물론 나는 이러한 특수자-보편자의 해석적 틀 자체가 오류라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우리들은 아직까지 하나의 독립적인 단위로서의 텍스트를 읽는 문화적 관습 하에 있으며, 연재물 정도를 제외하고는 서사적 속성을 갖춘 텍스트들은 대체로 그러한 문화적 관습의 안에서 생성된다. 예술작품과 비평은 확실히 특정한 가상=관습을 전제로 하며 동시에 그것을 현실화한다; 텍스트를 "바깥이 없는" "무한히 열린" 것으로 바라보려는 수많은 노력이야말로 텍스트를 하나의 완성물=보편자로 간주하는 관습의 힘을 입증한다.
아마도 문학연구자들이 받게 되는 가장 강력한 유혹 중 하나는 자신의 방법론을 텍스트가 아닌 현실의 인간에 대한 이해와 평가에 직접적으로 적용해도 유용한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갖는 것일 것이다. 마치 소설에서 특정한 행위와 옷차림, 언급이 그 인물의 본질을 암시하는 단서가 되듯이, 우리들은 현실의 인간을 보면서 작은 옷차림, 취향(애초에 취향이 인간의 내적본질을 드러낸다는 믿음이야말로 18세기와 함께 시작된 조류가 아닌가!), 언어습관, 행동거지를 포착하고, 읽고, '해석'하면서 독해의 대상을 자신이 한 손에 움켜쥔 것 같은 광학적 기만에 그대로 노출된다. 다시 말해, 우리는 텍스트와 텍스트 속의 인간을 읽듯이 인간들을 읽는다; 해석에 바깥이 없다면, 우리는 그 바깥없는 공간에 실재의 인간들을, 정확히는 그들의 특정한 편린들을 끌어들인다; 우리는 그들을 텍스트로 만들고, 해석하고, 비평한다. 그러한 몇몇 순간의 축적만으로도 자신의 '인간해석'이 어떤 진리를 담보한다고 믿는 문학전공자가 있다면, 우리는 그를 오만하다기보다는 순진하다고 불러야 한다--10대까지 학교와 가정에 갇혀 살아왔고 20대부터는 대학에 갇힌, 바로 나와 같은 처지의 문학전공자들이라면 더더욱 그런 면에서 '순박하다.' 각 학문은 특히나 전문화되는 과정을 거칠 수록 그 학문이 제공하는 학적인 시점을 하나의 사실을 도출하는 것인양 착각하게 만드는 질병을 유발한다. 갓 군대를 졸업한 예비역 병장이 자신이 수년 간 갇혀있던 어항의 질서를 그대로 어항 밖에 적용할 수 있으며 그러므로 자신이 타인보다 더 현명하다는 믿음을 견지할 때 '병장병'에 걸렸다고 말하듯, 자신이 인간의 독해에 있어 남들보다 예리한 시선을 갖추었다고 근거없이 믿는 연구자들은--바로 자신들이 교수가 되는 순간부터 다른 사회인들이 자신들을 "대학에만 있어서 세상물정을 모르는 어린이들"로 취급할 것임을 아직 깨닫지 못한--'독서병'에 걸렸다고 해도 될 것이다.
조금 더 진지하게 말한다면 '독서병'은 두 가지 잘못된 전제에 기초한다. 상식적인 지적은, 인간은 텍스트처럼 가상적으로나마 완결되지 않은 존재라는 것이다. 책은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끝난다. 인간은 적어도 살아있는 한 끝나지 않은, 열려있는 시공간이다. 텍스트는 표면적으로나마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아주 평범한 삶을 살아온 사람조차도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다 보기란 불가능하다. 특수자-보편자라는 해석적 개념쌍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예술작품의 완결성, 적어도 특정한 측면에서나마 그것을 전부 조망할 수 있는 성격이라고 한다면, 개별자로서의 인간은 자신의 편린들을 제공할 수는 있어도 자신의 전체를 제공할 수는 없다. 사회학에서는 그래서 자신이 대상으로 하는 인간들을 한계짓는 작업들을 선결과제로 요구하지 않던가. 몇 세부터 몇 세, 어느 지방에 사는, 어떤 성별의, 어떤 사람들 등등. 개별자는 차라리 그런 사회학적 연구의 그물망에 걸릴 수는 있어도 문학적 연구가 추구한다고 자인하는 '인간의 본질'(제 아무리 반-인간주의적인 문학연구라 할지라도 이 개념을 뒷문으로 슬쩍 들여오지 않기란 어렵다)을 보여줄 수는 없다.
먼저의 이유가 텍스트와 인간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두 번째 이유는 텍스트 해석 자체의 문제에 따라붙는 것이기도 하다. 신비평의 시대 이후 우리는 방법과 맥락에 따라 텍스트가 완전히 다른 내용을 이야기할 수 있음을 상식적인 진술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물론 모든 방법론이 모든 텍스트에게 완전히 열려있지는 않지만 (그런 텍스트야말로 해석을 계속해서 받아들이면서도 고갈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연구자들을 위한 마법의 맷돌이기도 하다) 적어도 하나의 관점에서 특별히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던 단서들이 다른 관점에서 중요한 힌트가 되기도 한다는 것은,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텍스트가 다층적인 성격을 띠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은 당연하다. 요컨대 맥락들이 텍스트를 분열시킨다. 맥락을 읽어낼 시야가 없는 이에게 텍스트는 닫혀있다. 마찬가지의 관점에서, 우리는 한 사람의 삶이 얼마나 다양한 맥락들로 채워져 있는지를 실제로 안다면 무척이나 놀랄 것이다--그것이 근대를 설명하려는 시도들에서 늘 하는 이야기가 아닌가. 텍스트의 해석과정에서 맥락은 "실제로 그것이 작용했는지의 사실여부를 괄호에 넣고" 적용된다면, 인간의 형성에서 맥락은 그것이 인식되든 그러하지 않든 실제로 작동한다. 텍스트가 맥락들과의 접점에서 다양한 해석들로 분화한다면, 삶은 맥락들의 축적을 통해 형성된다. 후자가 자신의 모든 맥락을 단숨에 보여준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물리적으로도 매우 어려운 일임을 지적할 수밖에 없다. 각각의 맥락들은 자신이 호명되는 순간에 모습을 나타낸다.
수많은 담론들이, 맥락들이, 실천들이 (그리고 드물게지만 그것들에 대한 저항이) 중층적으로 삶과 삶에서의 선택들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첫 번째의 지적을 조금 더 복잡한 수준에서 되풀이할 기회를 얻는다. 요컨대 우리가 붙잡을 수 있다고 무비판적으로 전제했던 '인간의 본질/성격'이란 것이 애초에 가능한 개념인가? 인간은 과연 깊이를, 심층을, 내면으로부터 외적인 것을 결정하는 통합된 '성격'을 갖고 있는가? 단지 여러 수준에서의 맥락들이 서로의 차이를 드러낼 기회를 얻었고 그것이 일관되지 않은 행위패턴으로서 우연히 목도되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를 다른 하나의 표면으로, 다른 하나를 앞서의 본질로 간주하는 "원근법"적 해석으로 이끌리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한 사람을 그 사람이 행위/취향/언술/자기표현을 통해 드러내는 코드로서 분석한다면, 그 분석의 결론은 기껏해야 다면체의 한 면이 특정한 코드로 구성되어 있다는--그나마도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겠지만--것이 아닐까? 정육면체 주사위의 한 면이 다른 면들을 결코 함축하는 본질로 간주될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인간에게서 읽어내는 코드가--나는 코드의 분석 자체가 무용하다는 수준으로까지 나아갈 생각은 없다; 그러기엔 한국인들은 지나치게 코드화되어 있다--다른 코드들을 자신의 대리인으로 삼는다는 믿음을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이러한 중층결정의, 주사위의 비유는 역시 그 자체로는 여전히 검토의 여지가 있다. 원인의 다수성, 코드의 복수성을 천명하는 수준에서 멈추는 것은 원인, 코드, 맥락, 실천들을 상호작용하지 않는 창문없는 단자로 암암리에 간주한다는 점에서 순진한 게 아닐까? 때때로 동일한 인물에게서 완전히 상반된 태도가 발견된다고 해서, 그 인물의 (본질이 아닌) 행위를 촉발하는 요인들이 서로 어떠한 관계도 맺고 있지 않다고 믿어도 될까? 그것들 간의 상호작용을, 때로는 맥락들 간의 (명료하게든 명료하기를 거부하는 방식으로든) 구조적인 모습을 탐색하는 과정이, 그것들의 '힘의 장'forcefield을 탐색하는 방식이 조금 덜 순진한 길이 아닐까? 하나의 코드는 다른 코드와 만나 어떻게 변화하는가? 때로 그것들은 단순히 공존하기도 하며, 아마 그것들의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계기를 만나기 전까지는 서로에게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않고 흘러갈지도 모른다--그러나 이것들을 그렇게 담아낼 수 있는 존재론적인 '공간' 역시 질문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이미 자리잡은 하나의 코드가 다른 코드의 수용/거부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으며 (예컨대 예술장르를 넘나들며 이어지는 취향의 연쇄-) 뒤늦게 도입된 코드가 결과적으로 이전의 코드를 변모시키거나 추방시키기도 한다(취향에 따른 정치적 입장의 변화, 역으로 정치적 입장에 따른 취향의 변화). 계급의식이나 성차에 대한 의식, 민족주의처럼 지속적으로 인간의 모든 코드선택에 개입하려는 강력한 코드도 존재한다. 만약에 우리가 이질적인 코드가 전혀 어떠한 상호작용 없이 분열되어 공존하는 장면을 목도한다면, 우리는 그 안에서 역설적으로 그러한 분할을, 때때로 '위선적인 상류층 부르주아지'의 표식으로 여겨져왔던 특정한 인식틀의 산물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위의 모든 진술은 지나치게 산발적이고, 추상적이다. 나는 그런 점에서, 마치 홉스가 국가들 간의 '자연상태'를 인간적 본성의 한 모델로 삼고자 했던 유혹을 강하게 받았듯이, 한 국가 내부의 권력결정과정에서 드러나는 힘의 구도와 같은 모델을 인간에게 역으로 적용하고픈 유혹을 강하게 받는다.
그러한 모델링 자체가 다채로울 수 있다는 것은 너무 당연한 진술이다. 다만 읽기->본질이라는 단순한 패턴으로부터 그러한 모델링 자체를 구축하는 시점으로의 이동 자체가 중요할 것이다. 개별적 행위로부터 코드들을 탐색하는 것, 코드들의 관계망을 그리는 것, 코드들의 '힘의 장'을 구축하는 것, 아마도 이런 종류의 작업들의 축적이 가져다주는 무언가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해볼 수 있다.
악마가 친구와 함께 산책하고 있었다. 친구의 눈에 문득 지상의 누군가가 진리의 한 조각을 줍는 장면이 들어왔다. 신경쓰지 않고 지나치는 악마를 친구가 의아하게 생각하자 악마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가 방금 얻은 것을 진리의 전부로 여기게 할 생각이네." 우리는 우리가 얻은 조각이 그저 조각에 불과한 것임을 깨닫고 그 뒤에 조각에서부터 무엇을 더 끌어낼 수 있는지를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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