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철. <시간의 향기> 읽고 코멘트. [130526]

Critique 2014. 3. 18. 13:54

*2013년 5월 26일 페이스북


한병철의 <시간의 향기>는 역자 서문에서도 밝히고 있듯 베스트셀러 <피로사회>의 전작이다(대략 두 책 사이에는 1-2년의 작은 시차가 있다). 후자가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과도한 노동을 짊어진 주체들이 빠지는 곤경을 '피로'라는 개념으로 풀어내려 했다면 전자는 근대사회에서 (마찬가지로 주체의 인식구조의 일부분인) '시간' 개념이 원자화되면서 삶의 의미가 상실되는 사태를 묘사하고 있다. 권력론과 같은 보다 전문적인 기획을 읽어보지 않아 섣불리 판단하긴 어렵지만, <피로사회>와 <시간의 향기>에서 한병철은 철학적 개념들을 통해 아주 약간 더 현재 주체들이 겪는 문제를 사유하는 에세이스트에 가깝다. 엄밀히 말해 그는 근대의 문제를 성찰한다기보다는 근대 주체들이 겪는 곤경의 양태들을 스케치한다(두 저술 어디에서도 그는 문제의 원인으로 올라가지 않는다). 그것이 김태환 교수의 유려한 번역으로 이루어진 그의 문장들을 예쁘고 잘 읽히게 만드는 동시에 그의 텍스트들로부터 지적인 성찰을 기대한 독자들에게 거짓된 포만감을 가져다준다.

다만 그가 언급하는 시간의 원자화와 (쪼개진 시간들을 종합하는) 이야기의 쇠퇴는 우리가 주의깊게 지켜보아야 하는 일임은 맞다(그러나 나는 한병철이 여기에서 독자적인 스케치를 그려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가 보드리야르 등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차별화하는 지점은 사실 그렇게 큰 의미는 없는 부분이다). 동시대의 문화적인, 정신적인 진행을 조금만 살펴본 사람이라면 대중예술의 양식들과 사람들이 예술을 느끼는 방식에서 어떤 종합하는 능력, 내가 서사능력 혹은 총체화능력이라고 부르는 힘이 이전의 시대에 비교해볼 때 분명히 덜 두드러진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도르노나 벤야민과 같이 그러한 지각구조의 변화를 먼저 논의했던 이들과 달리 한병철은 우리가 시간을 원자화된 형태로, 무의미한 파편들로 이해하게 된 변화과정의 원인을 역사적으로 규명하려고 하지 않는다(그의 서문에서 가장 실망스러운 부분은 그가 자신의 작업을 "역사적이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수행한다고 말하는 대목이다; 내 생각에는 그가 하이데거를 좇아 몇 가지 어원적인 설명을 덧붙이는 것과 이전 문헌의 인용하는 대목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부분에서도 이 텍스트는 역사적인 분석과는 거리가 멀다). <피로사회> 역시 마찬가지의 비판에 취약하고, 그런 점에서 <시간의 향기>는 전자와 진실로 형제관계에 있는 책이다.

조금 더 철학사적 진술을 덧붙이자. <시간의 향기>의 장점은 <피로사회>와 대비할 때 전자가 한병철에게 드리워진 하이데거의 그림자를 훨씬 뚜렷하게 보여준다는 데 있다. 양자 모두 만만한 보드리야르와 아렌트를 별 영양가 없이 비판하면서 자신의 입지를 주장하는데, <시간의 향기>는 그런 쓸데없는 장식이 덜하고 한병철 본인이 참조하는 두 명의 반-근대론 철학자인 니체와 하이데거의 인용이 솔직하게 나와 있다. 한병철이 박사를 썼다는 데리다의 영향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가 석사논문을 쓴 하이데거의 영향은 고찰의 방법론--단적으로 어원학적인 분석--을 비롯해서 그의 사유 전반에 선명하다. 조금 더 직설적으로 말해서 하이데거적인 퇴행, 곧 주어진 것에 굴복하고 주체를 수동적인 존재로 하락시키고자 하는 반근대적인 지향이 한병철에게도 뚜렷하다(그가 두 텍스트 모두에서 아렌트의 vita activa에 대립시켜 내세우는 사색하는 삶vita contemplativa은 구체적인 내용을 결여했을 뿐만 아니라 주체의 능동적인 성격도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 '반동적인' 결론이다). <시간의 향기>에서 한병철은 주체의 과잉된 능동성, 아도르노 식으로 얘기한다면 도구적 이성의 과도한 진행에 따라 역으로 주체가 더 무력화되는 곤경을 삶의 의미가 상실되는 것, 곧 삶의 의미를 형성할 수 있는 기본단위인 '시간'의 파편화로 설명한다(물론 그에겐 아도르노와 같이 합리화가 비합리적 결과로 이어지는 흐름을 설명할 세련된 변증법적 틀이 존재하지 않지만). 여기까지는 전문가/기술자들에 대한 하이데거의 근대비판과 마찬가지로 수긍할 지점이 있지만, 한병철은 근대의 어떠한 성격이 문제를 초래하는지를 세부적으로 논의하지 못하며 그것이 결국에는 근대의 특정한 삶의 양식--헤겔의 노동과 아렌트의 활동적인 삶을 포함한 주체적인 삶 자체'--에 대한 반발로 나타난다. 한 줄로 말한다면 잘못이 주체화에 있으니 다른 형태의 주체화, 곧 수동적인 삶으로 이행하자는 것이다(선거를 앞두고 나치스와 총통에 대한, 곧 절대적인 명령권자에 대한 복종을 설파한 하이데거가 떠오르지 않는다면 이상하다). 그에게는 현재 주체화의 형태를 결정짓는 소여(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것)=구조에 대한 비판이 없고, 이점에서 그는 자신이 끌어오는 니체(<도덕의 계보학>을 떠올리자)보다 지적으로 순진하다. 그리고 그가 제시하는 삶의 형태에 내재한 위험은, 그것이 문제를 넘어설 방안 자체를 무력화시키기 때문에, 그의 예쁘고 정갈한 문장들만큼이나 치명적이다. 아도르노가 하이데거에 대해 제기한 문제들 거의 모두는 한병철에게도 똑같이 유효해 보인다.

나는 한병철의 묘사가 무의미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분석을, 특히 결론을 삶의 중요한 지표로 참고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것은 충분히 지적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가 안고 있는 가장 중요한 정신적인 문제라고도 할 수 있는 주체의 무기력함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증상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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