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토에의 맹목 [131103]

Critique 2014. 3. 18. 13:10

*2013년 11월 3일 페이스북


나는 최근의 '멘토'라는 단어에 내포된 지적, 정신적 자율성을 기꺼이 포기하는 태도를 경계한다. 그 어떤 멘토도 그와 마주한 누군가의 비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지점에 있을 정도로 완전무결할 수는 없다. 오늘날 멘토라는 단어는 두 가지 용도로 사용된다. 첫째, 특정한 분야에 정통해있고 해당 분야의 지적/인적 자원을 보다 많이 보유한 인간을 가리킬 경우. 이 경우에 멘토는 사실 '멘티'의 사회적 자본의 일부로 간주된다. 다시 말해 이 용법으로부터 우리는 이미 너무나 흔한 것이 되었으나 여전히 경멸스러운 태도, 인간을 철저히 수단=자본으로 간주하는 태도를 마주한다.

보다 중요한 함의를 갖는 두 번째 정의는 내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전적인 의존의 대상으로서 자신보다 우월한 사회적 위치에 있는 이를 가리킬 때 사용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세 가지 함의를 끌어낼 수 있는데, 먼저 전적으로 의존할만한 인간은, 적어도 그럴 수 있을 정도로 완벽에 가까운 인간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순진함이 있다. 이 순진함은 한편으로 어떤 오만함을 전제한다; 즉 아무 것도 모르기에 멘토를 필요로 하는 자기 자신이 자신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는 기준을 지녔다는 오만함이다(그렇기에 많은 경우 이러한 기준은 가령 "성공한 사람"과 같이 사회적인 통념을 그대로 수용하는 경우에 그친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생각하는 것보다 사회적인 통념의 침투에 매우 취약하다). 두 번째 함의는 멘토로 간주되는 인물의 언어와 가르침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지적 자율성을 기꺼이 포기하는 태도가 꽤나 일상적인 것으로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마지막이자 동시에 가장 중요한 함의는, 우리의 사회가 이제 물신화된 형태로서의 특정 개인을 무비판적으로 숭앙하는 것 외에는 어떠한 당위도, 삶의 바람직한 형태도 정의하기 힘든 곳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분명히 말하자. 이미 삶의 규범이 확립되어 있고 또 특정한 가치관이 사람들의 미래/목적을 규정하는 사회에서는 일개 인간 따위에게 그에게 주어져야 할 것 이상의 권위를 부여하는 일이 불가능하다. 바꿔 말하자면 멘토라는 단어가 일상적으로 성행하고 있는 우리의 사회는 사실상 바람직한 삶이, 또 바람직한 삶을 살기 위한 방법을 즉각적인 경험 이전의 사회적 규범으로부터 도출하는 게 불가능한 곳이 되었다. 멘토는 어떤 면에서 극단적으로 경험주의적인 태도를 반영한다. 그는 성공했다, 그러므로 그는 성공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논리 말이다. 이처럼 불확실, 생존의 불안정성, 그리고 결정적으로 '단순한 생존' 이외의 삶을 선택할 자유가 봉쇄된 시공간에서 개인에 대한 물신적 숭배, 성공=생존에 대한 물신적 숭배가 일반화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경험자료가 본래 우발적이듯 멘토의 성공 또한 우연적인 것에 기초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연적인 것과 원리적인 것을 가려낼 수 없는 순진하고 오만한, 자기 판단을 포기한 주체의 생존 또한 마찬가지로 우연의 골짜기 아래로 굴러떨어질 수밖에 없다. 멘토가 일상적인 개념으로 등장한 ("우리 시대의 멘토" 따위의 역겨운 표현을 상기하라; 그리고 대체로 그 수식어가 붙는 인물들 중 진정으로 경의를 표할만할 가치를 지닌 인물은 거의 없다는 사실도 함께 기억하라) 우리의 시대는 지적 퇴행의 시대, 눈 감은 자들의 시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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