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년만의 청구서" (교수신문) / 하버마스를 기억하기

Comment 2026. 3. 28. 16:48

[페이스북에 2026년 3월 3일에 쓴 글]

 

『교수신문』창간 34주년 및 재창간을 기념하여 "교수신문에 바란다"라는 주제로 짧은 글을 썼다. 무슨 이야기가 좋을지 조금 고민하다가, 문득 『교수신문』의 출발점, 즉 창간호에 어떤 글이 실렸을지 궁금해졌다(다행히 김봉억 편집국장님께서 곧바로 촬영해서 보내주셨다). 1992년 4월 15일에 나온 창간호 첫 쪽의 좌상단에는 "우리 이제는"이라는 제목의, 87이 지난 뒤 90년대 초의 지식인들이 품었을 법한 정념과 지향을 잘 드러내는 창간사가 실려 있다. 아래의 기고는 한편으로 그 순간의 마음을 다시 불러오면서, 다른 한편으로 그로부터 너무나 멀리 와버린 2026년의 정념을, 그리고 26년에 필요한 지향을 담으면서 쓴 것이다. 34년 전 어느 익명의 필자가 희망과 고난이 뒤엉킨 속에서 조심스러우면서도 때로는 대범하게 갈 길을 이야기했다면, 나는 정신적인 것이 잿빛으로 식어가는 세계에서 다시 무언가를 시작하기 위한 동력을, 그 토대에 있는 어떤 의무감을 다시 꺼내고자 했다.

오늘날 글은 대체로 너무나 쉽게 잊혀진다. 하지만 글에 담긴 마음은 아주 드물게나마 세계에 좀 더 깊은 흔적을 남기기도 한다. 그런 글이 꼭 내 글일 필요는 없겠지만, 내 마음과 같은 마음은 조금은 그런 쓰임을 다할 수 있기를 바란다. 더하여 재창간한 교수신문 역시도 그런 쓰임의 기회를 얻기를 희망한다.

https://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59022

*아래는 내가 발송한 원고를 옮겼다.

"1992년 4월 15일 『교수신문』 창간호 첫 꼭지에는 「우리 이제는」이라는 제목의 창간사가 실려 있다. 스스로의 지향이 1960년의 4월 항쟁과 1987년의 6월 항쟁의 정신을 계승하는 데 있음을 밝힌 뒤, 익명의 필자는 다음의 세 가지 원칙에 따라 “모든 대학문제를 분석하고 비판하여 교수사회의 요구를 수렴”하는 것이 신문의 목적이라 말한다. 그 원칙이란 “인간의 존엄성이나 가능성, 주체성”을 실현하려는 “인본주의”, “인간 이성의 계발을 통하여 인간성과 사회의 온전함을 도모할 수 있다는” 믿음, 즉 “진보주의”, 그리고 현상 분석에 있어 편견을 배격하는 “철저한 합리주의”를 가리킨다. 글을 끝맺는 욥기 8장 7절은—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이전의 질곡을 넘어 새로운 시대를 만들고자 하는 희망과 다짐을 담고 있다.

오늘날 한국인들에게 이 모든 것은 낯선 세계의 이야기처럼 들린다. 사회의 주도권을 움켜쥔 대신 도덕적 정당성의 상당 부분을 상실한 민주화 세력을 계승하겠다는 이들은 아무도 남아있지 않다. 근대 문명의 발전이 초래한 기후 위기, 무엇보다 지적인 노동으로부터 인간의 자리를 빠르게 무너트리고 있는 AI의 충격은 진보의 결과에 대한 기대를 빠르게 퇴색시켰다. 스마트폰의 보급과 함께 드디어 모든 시민이 서로를 날 것으로 마주하게 된 오늘날의 공론장은 합리성의 천착이 얼마나 희소한 미덕인지 똑똑히 가르쳐주었다. 생존이 곧 규범이 된 세계에서 보편적 인본주의의 이상에 깃든 순박함은 경멸을 넘어 증오와 추방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지난 34년 동안 한국이 이룩한 물질적·문화적 번영의 광채 아래에는 누구도 이상과 신념, 희망을 진지하게 이야기할 수 없게 된 현실이 바닥없는 늪으로 깔려 있다.

대학문제는 이러한 상황을 잘 드러내는 하나의 사례라 할 수 있다. 대학의 무엇이 문제인가? 언론과 정책결정권자들은 학령인구수 감소, 재정 위기, 국제경쟁력 부족, 취업을 보장하지 못하는 학위 등등을 나열하곤 한다. 물론 이는 모두 무시할 수 없는 사안이지만, 이게 우리 사회가 대학을 바라보는 시선의 거의 전부라는 사실은 그 자체로 시사하는 바가 있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우리가 우리의 사회와 정신을 진단하는 도구를 여전히 해외의 저명한 교수들로부터 수입하는 데 만족하고 있으며, 우리의 대학이 ‘바람직한 삶’에 관해 점점 더 적은 것들을 가르치고 있고, 무엇보다 이러한 과업을 담당할 후속세대의 재생산에 계속해서 실패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제 대학 구성원들조차 입에 올리지 않는 빈약한 소곤거림으로만 남아있다. 그조차 잦아들어 잠시 적막이 찾아올 때, 우리는 대학문제의 빈곤함이야말로 대학의 진정한 문제임을 뒤늦게 깨닫는다.

재창간을 기념하는 『교수신문』에게 나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 34년 전의 청구서를 다시 끄집어내어 내밀고자 한다. 그것은 “모든 대학문제를 분석하고 비판”하겠다는 창간사의 다짐이다(“교수사회의 요구”는 이제 너무 좁다는 느낌이다). 나 자신이 기획위원으로 참여한 ‘천하제일연구자대회’ 코너나, 그로부터 파생된 대담집 『한국에서 박사하기』를 비롯해 『교수신문』이 있었기에 비로소 가능했던 시도가 있었으나, ‘대학문제의 빈곤’ 위에 켜켜이 쌓인 먼지더미를 털어낼 만큼 충분히 집요하지는 않았다. 한국의 지성과 학술이, 그런 게 잔존해 있다는 전제 하에, 어느 지경에 왔는지, 왜 거기까지 내몰렸는지, 어떻게 다시 제 몫을 할 수 있을지 이제 진지하게 묻기—그것이 최초의 『교수신문』이 약속한 스스로의 사명이었다. 이제 약속을 지킬 때다."

 


 

[페이스북에 2026년 3월 28일에 쓴 글]

 

바쁜 일정 속에 위르겐 하버마스의 타계 소식도 또 하나의 뉴스처럼 흘려보내다가, 2주가 지나고 주말 오후에 생긴 찰나의 여유에 전달받은 글 하나를 읽었다. 이제야 시대의 뒤틀린 흐름에 의해 아마도 그 자신이 의도했을 바 이상으로 모순으로 가득차게 된 그의 사상적 경로를 다시금 생각한다. 『신좌파평론』에 기고한 추모글에서 토머스 미니Thomas Meaney는 하버마스의 궤적을 하나씩 짚어보다가 마지막 두 문단에서 '이만하면 참을만큼 참았다'는 마음으로 이스라엘의 초-민족주의, 즉 시오니즘에 대한 하버마스의 기이할 정도의 맹목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https://newleftreview.org/sidecar/posts/normcore ).

하버마스의 사망 시점이 3년만 일렀어도 그는 좀 더 큰 경의 속에서 조금은 편안하게 눈을 감을 수 있었을 것이다. 호르무즈해협 봉쇄와 함께 '대이스라엘'에 대한 파괴적일 정도의 국민적 탐욕이 조금씩 알려지면서 심지어 가장 친미적인 한국의 청년-남성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도 반이스라엘주의, 반유대주의 감정이 공공연하게 치솟아 오르고 있는 2026년 3월에야 하버마스가 긴 수명을 다했다는 것, 그리하여 그와 그의 사상을 말하고자 하는 모든 이가 이른바 '시오니즘 문제'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게 되었다는 것, 이는 제 아무리 보편을 추구하는 철학자일지라도 클리오의 노리개 신세에서 벗어날 수 없는 시간 속의 필멸자임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씁쓸한 사례다. 하버마스보다 카를 슈미트를 인용하는 것이 더 안전하고 간편한 세상이라니, 우리의 세계는 얼마나 기괴한 경로로 나아가고 있단 말인가?

한편으로는 하버마스를 그 자신의 시대에 살아간 역사적인 인물로 공정하게 다루는 것(일단 슈테판 뮐러 돔Stefan Müller-Doohm의 전기부터 번역되면 좋겠다), 다른 한편으로 그가 남긴 방대한 글뭉치 중 살아있는 자들에게 여전히 긴요한 사유 덩어리들을 붙들어 찾아내는 것(확실히 한국인들은 하버마스에 너무나 빠르게 강렬하게 열망했고 또 그만큼이나 쉽게 그를 팽개쳤다는 느낌이 있다)--그것이 지금 그를, 또 그가 살아갔으며 우리의 그것과 긴밀하게 붙어 있는 '장기 20세기'를 바라볼 수 있는 두 가지 기본적인 접근법이 아닐까 싶다.

철학적으로 훈련받지 않은 (나와 같은) 일반적인 독자가 처음 하버마스에 다가가고자 할 때 추천할 수 있는 한국어로 된 읽을거리로는 두 가지가 떠오른다. 하버마스 사상에 대한 입문용 개괄로 추천하고 싶은 것은 내가 대표필자를 맡은 『인물로 본 근대』(한국방송통신대학교 출판문화원, 2025;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67970762 ) 마지막 챕터인 제15장 "위르겐 하버마스, 근대를 비판하면서 지켜 내기"로, 『하버마스 스캔들』의 저자로 잘 알려진 이시윤 선생님이 써주셨다. 이것도 어렵다면, 동명의 방송대 문화교양학과 강의 제15강 영상을 시청하면 조금 더 쉬울 것이다.

하버마스의 삶과 행적에 관해 내가 읽은 것 중 가장 좋은 책은 필리프 펠슈가 쓴 『하버마스와 우리』(정창호 역, 세창출판사, 2025;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67640299 ; 원저는 Der Philosoph: Habermas und Wir, 2024)다. 알라딘 판매지수는 놀라울 정도로 낮긴 하지만, 이 책은 지금까지 한국어로 소개된 하버마스 관련 저작이 거의 다루지 않는 면모, 즉 '서독의 지식인'으로서 하버마스의 지적/정치적 궤적을 생생하게 매만져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통로다(유감스럽게도 역자의 말은 마케팅 감각의 부재 때문인지(?) 이런 면모를 그다지 잘 부각하고 있지 않다... 그냥 깔끔하게 번역된 본문을 곧바로 읽기를 추천한다). 책 자체는 전혀 어렵지 않은 평이한 에세이 스타일이지만, 개인적으로는 하버마스 생전에 나온 여러 철학적 입문서보다 이 책이 하버마스와 그가 속해 있던 세계에 대한 감각을 느끼는데 더 크게 도움이 되었다.

조만간 한국인 필자가 하버마스에 관해 쓴 좋은 글을 읽고 소개할 기회가 오기를 기원한다. 나는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에 대한 하버마스의 편협한 시각을--편협했던 것은 사실이다--비웃는 태도가 일반적이었던 지적 환경에서 공부했지만, 그럼에도 『공론장의 구조변동』을 읽으면서 그의 비판자 대부분이 그의 사유 안쪽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한 견해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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