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후반기 회고: 혼트 서평, 『지성사란 무엇인가』 4쇄 등
Comment 2026. 1. 30. 16:302025년 후반기 회고.
바빴다. 아주 바빴다. 처음부터 큰 이벤트 두 개가--신규교원 임용과 대학원 석사과정 개시--예정되어 있음을 알고 학과장 임기를 시작하긴 했으나, 예상 이상으로 일이 많았다. 예정된 사안에서 돌발적인 변수가 발생한 경우도 있고, 아예 새로운 사건이 튀어나오기도 한다. 시간과 노력을 잡아먹고 고속노화를 촉진하는 것은 같다. 나는 일을 꽤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매번 변수와 마주치고 싶지는 않다. 아직 임기 절반도 채우지도 못했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납득하지만... 가슴으로는 억울하다(?).
물론 장점도 있다. 학과 안팎의 사람들을, 제도의 작동을 좀 더 잘 이해하게 된다. 보직자들 사이에는 별 일이 아닐지라도 이상한 우애의식(!)이 싹트게 된다(다른 회의에서 본 사람을 이 회의에서 또 만날 때의 씁쓸한 유쾌함: '야 너두?'). 1월 시작하자마자 나흘 연속 서로 다른 회의에 들어가 귀동냥을 하는 식의 삶을 살다보면 쪼렙교수라 해도 학교의 사안에 관해 윤곽이나마 그려보게 된다. 학교도 학과도 큰 변화를 맞이하는 국면이다보니 뭐라도 알아야 포르투나의 앞머리까지는 아니라도 구레나룻 정도는 붙잡을 수 있는 것 같다.
학과장을 시작하면서 정한 모토는 '무사안일주의'다--작은 구멍은 얼마든지 생길 수 있다, 크고 중요한 일에만 치명적인 실수가 없으면 된다. 지금까지는 다행히 대체로 그 범위 내에서 일이 전개되었다(물론 수면 아래에는 여러 사람의 다급한 노력이 있다). 앞으로도 그렇기를 희망한다.
아래는 개인적인 것들.
1.
작년 하반기는 지적인 생산이 매우 제약되었다. 성균관대에서의 젠더사 수업을 제외하면--나도 학생들도 충분히 쥐어짜지는 못했다--지적으로 유의미한 수준의 활동이라 할 수 있는 것은 다음의 서평 하나밖에 없다:
이우창, 「자본주의 정신에서 상업사회의 자기이해로: 베버, 허시먼, 혼트—이슈트반 혼트, 『상업사회의 정치사상: 루소와 스미스로 읽는 18세기 지성사』」, 『서양사연구』 73호 (2025): 285-306. (https://www.riss.kr/link?id=A110070293 / 원고를 읽으실 분은 https://t.ly/8b46z 참조)
원래 『상업사회의 정치사상』으로 당장 무언가를 더 쓸 계획은 없었다. 하반기에 너무 바빴고, 무엇보다 한국어판 출간에 적지 않게 개입한 입장에서 서평까지 쓰는 것은 조금 그림이 이상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처음 『서양사연구』 측의 요청을 받았을 때도 고사의 뜻을 밝혔지만, 그런 것에 구애받지 말고 재미있게, 자유롭게 써주면 된다는 말씀에 마음을 달리 먹었다. 당초 계획은 A4 3쪽 이내의 평범한 서평을 쓰는 것이었지만 언제나처럼 쓰다보니 길어져서 A4 10쪽에 달하는 분량이 되었다(쓰는 와중에 계속 글감을 받은 걸 후회했다ㅠㅠ).
『상업사회의 정치사상』 한국어판 서문은, 읽어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독자가 혼트 작업의 맥락을 파악할 수 있도록 케임브리지 학파 내부의 학술사적 맥락을 상세하게 재구성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따라서 이번 서평은 의식적으로 반대 방향을 추구했다. 지성사 외부의 독자가 읽어도 흥미를 느낄 수 있게, 지성사 연구를 고립된 별종으로 보는 게 아니라 역사학 혹은 자본주의 연구라는 좀 더 큰 맥락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것이 이 글의 목표였다. 막스 베버, 앨버트 허시먼, 그리고 혼트라는,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아직 아무도 선택하지 않은 순서를 세운 것도 그 때문이다. 자본주의 연구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베버를 모를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서평 자체에 대해 말을 더 얹지는 않도록 하자. 서평을 준비하면서 언젠가 베버의 작업들을 좀 더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만 기록해둔다.
2.
2026년 1월부로 『지성사란 무엇인가?』 4쇄가 나왔다! 부수로는 이제 3500부째이므로 그렇게 많은 양은 아니지만, 요즘 같은 출판불황기에 이 결코 쉽지만은 않은 책이 4쇄를 찍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매우 놀랍고 기쁜 일이다--편집자와 1쇄(2천부)를 터는 데는 1년, 2쇄(5백부)는 2년, 3쇄(5백부)는 데 3년이 걸렸으니 4쇄는 2030년쯤에 다 나가지 않겠냐는 농담을 주고 받았다.
4쇄에서는 본문 자체의 수정사항은 미세한 수준이다. 책날개의 저자·역자 소개를 업데이트했고--3쇄까지는 박사과정생으로 나와 있다--2023년에 타계한 포콕의 몰년을 추가하고, 그 사이에 출간된 이런저런 저작에 관련된 언급을 부록에 덧붙였다. 가장 큰 변화는 이 책 이후 지성사에 관해 좀 더 읽어보고자 하는 독자를 위해 한 쪽 짜리 추천도서 목록을 추가한 것이다(기존 역자 해제를 한 쪽씩 앞으로 당기고 301쪽에 한국어 추천도서 소개 페이지를 추가했다). 아무 것도 고치지 않아도 큰 상관은 없지만, 지금이라도 책을 새로 구해서 읽는 독자를 위해 서비스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하자!는 마음으로 이해해주시면 좋겠다.
추천 도서 목록은 다음과 같다:
지성사 연구 관련 한국어 추천도서
<서구 지성사 연구 개관>
이우창 외, 『서구지성사입문』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문화원, 2025)
김민철, 『누가 민주주의를 두려워하는가: 지성사로 보는 민주주의 혐오의 역사』 (창비, 2023)
<상업사회와 자본주의, 근대정치의 관계>
이슈트반 혼트, 『상업사회의 정치사상: 루소와 스미스로 읽는 18세기 지성사』 (김민철 역, 오월의봄, 2025)
마이클 소넨셔, 『우리가 몰랐던 자본주의: 상업사회와 분업의 지성사』 (김민철 역, 오월의봄, 근간)
<근대 서구 자유주의에 관한 최근의 연구성과>
헬레나 로젠블랫, 『자유주의의 잃어버린 역사: 공동체의 도덕, 개인의 윤리가 되다』 (김승진 역, 니케북스, 2023)
카트리나 포레스터, 『정의의 그늘 아래에서: 전후 자유주의와 정치철학의 재탄생』 (공민우, 박광훈, 오석주 역, 후마니타스, 2025)
<애덤 스미스와 카를 마르크스에 관한 지성사적 전기>
니콜라스 필립슨, 『애덤 스미스: 경제학의 아버지, 신화가 된 사상가』 (배지혜 역, 한국경제신문, 2023)
개러스 스테드먼 존스, 『카를 마르크스: 위대함과 환상 사이』 (홍기빈 역, 아르테, 2018)
3.
지난 2학기에 제작한 방송대 문화교양학과 과목 <인물로 본 근대>가 2025년 방송대 DMC 우수콘텐츠상을 받았다(우수상). 상장에는 내 이름이 적혀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뛰어난 필자들로부터 충실하고 풍부한 원고를 받았고, 결정적으로는 좋은 제작진의 역량이 유감없이 발휘된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글을 만들어내는 데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지만, 스스로가 좋은 영상자료의 제작에 손을 보탤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한 적은 없다. 열심히 하다보니 인생에서 이런 일도 있구나, 정도의 즐거운 기분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인물로 본 근대>는 교재도 강의도 정말 잘 만들었다고 자신할 수 있다. <서구지성사입문>보다 관심을 덜 받고 있지만--솔직히 컨텐츠로서의 퀄리티는 <인물로 본 근대> 쪽이 위라고 생각한다--초급자부터 전공자까지도 재미있게 볼 수 있는 내용이 많은만큼 방송대에 특별히 적을 두지 않은 분들께서도 관심을 가져주시면 좋겠다.
4.
이제 포콕과 모밀리아노 논문 작업으로 들어서고 있다. 첫 챕터에 A4 6쪽이 넘게 써버려서 최종 원고 분량이 어느 정도 될지 감이 오지 않는다. 학과 및 가정 일정으로 인해 작업 일정이 밀렸는데, 뒤에 이어지는 번역 작업도 있어 2월 상순까지는 끝내고자 한다.
짧게나마 진지한 지적인 활동에 진력할 수 있는 시간을 할당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순수하게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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