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학기 종료, 두 달 간의 정리

Comment 2025. 6. 21. 16:25

이틀 전 채점을 마치고 드디어 1학기를 마쳤다(정말 끝일까?). 물론 7월부터 바로 녹화에 돌입하므로 유의미한 마침표는 아니다. 지난 한 달여간 있었던 일들을 정리한다.

 

 

1.

 

<서구지성사입문> 강의 녹화 업로드가 끝났다. 이제 6월 하순 동안 기존 녹화분을 한번 더 훑어보면서 필요한 대목을 찾아 자막을 추가하는 작업까지 마치면 외부에 내놓아도 큰 문제가 없는 수준까지는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녹화 기간 동안 계속 감기로 고생하다보니 발성이 더 좋지 않은 부분들이 있었다).

 

일정 문제로 11강부터는 거의 대담자 없이 나 혼자서 녹화수업을 준비했는데, 개인적으로는 이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물론 애초에 나 스스로가 강의의 전체적인 골격을 짰으며, 교재 제작에서 각 장의 원고를 여러 차례 읽어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이해의 밀도라는 측면에서는 확실히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해 직접 내용을 소화·재구성해야 하는 과제에 직접 부닥치는 것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이를 통해서야 비로소 <서구지성사입문> 교재 후반부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요점만 말하자면 21세기까지, 적어도 현재까지의 서구 정치사상사의 중핵은 자유주의의 분화와 경쟁에 있다고 할 수 있다사회주의 전통의 경우 20세기 중반 이후 적어도 유럽/미국 정치사상에서는 점차 주변부로 밀려났으며, 신좌파적 전통에 문화정치를 제외한 고유의 정치사상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핵심은 단일한 자유주의 전통(ex: ‘자유주의는 진리와 신성성을 부정하는 세속화따위의 클리셰를 포함해)의 지배를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컨대 19세기 자유주의자들의 스펙트럼은 그들이 누구인지 규정하는 것보다 그들의 적이 누구인지 규정하는 게 더 쉬울 정도로 넓었으며, 20세기 초중반의 자유주의자들은 경쟁적으로 19세기 자유주의, 혹은 자신들이 그렇게 명명한 대상을 각각의 방식으로 부정하며 자유주의를 현대화하고자 했다지금까지의 공식적인 서사에 따르면 20세기 후반 뉴딜 자유주의자들과 신자유주의자들의 경쟁은 그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자유주의는 하나의 실체라기보다는 차라리 서로 경쟁하는 여러 입장이 공유하는 이름 혹은 플랫폼에 좀 더 가까워 보인다(아마도 누군가는 사회주의역시 마찬가지의 범주가 아니었냐고 물을텐데, 그런 지적이 맞을지도 모른다). 물론 우리는 이제야 조금씩 그 변동의 큰 흐름을 그려내기 시작한 단계에 도달해 있다. 각각의 시기에 어떤 자유주의이 있었는지, 그것들이 서로 어떤 관계였는지는 여전히 연구의 축적을 기다려야 한다. 짧지 않은 기간 자유주의는 너무나 당연한 세계의 틀이었고, 이는 역설적으로 자유주의들에 대한 진지한 역사적인 검토가 미뤄지는 상황을 초래한 것 같다.

 

<서구지성사입문>의 후반부, 구체적으로 10장에서 15장은 이러한 자유주의들의 변모를 다룬다(고백하자면 처음에 그렇게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만들고 보니 그런 구성이 되어 있었다). 물론 학부 교재라는 특성을 고려하면 아주 디테일한 부분까지 들어가지 않으며, 챕터마다 내용과 방향성의 차이도 분명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한국어로 출간된 책 중 자유주의 정치사상사를 이 정도로 다양하게 포착한 예는 없지 않았을까 싶다. 혹시라도 이 주제에 관심이 있는 분께서는 꼭 교재와 강의를 같이 봐주기를 바란다.

 

 

1-1.

 

자유주의 전통에 관해 한국어로 읽을 수 있는 중요한 연구서 몇 개를 언급하자면,

 

헬레나 로젠블랫, 자유주의의 잃어버린 역사(김승진 역, 니케북스, 2023): 19세기 서구 자유주의에 관해 지금 읽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저작. 여기서 당시 자유주의의 모든 면모가 다뤄진 것은 아니지만, 근래의 연구를 이만큼 폭넓게 소화한 책도 없다.

 

카트리나 포레스터, 정의의 그늘 아래에서(공민우, 박광훈, 오석주 역, 후마니타스, 2025): 20세기 중후반 미국 자유주의 정치철학 지성사 연구. 기존 포스팅에서 언급했으므로 더 자세히 쓰진 않겠다.

 

다니엘 스테드먼 존스, 우주의 거장들: 하이에크, 프리드먼 그리고 신자유주의 정치의 탄생(유승경 역, 미래를소유한사람들, 2019): 유감스럽게도 현재 절판되어 있으나, 20세기 중후반 영미 신자유주의의 주요 행위자들과 사상에 관해 한국어로 읽을 수 있는 것 중에서는 가장 기본적인 연구다(푸코의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이나 이를 이어받은 웬디 브라운의 저작과 비교하면, 역사적 연구로는 스테드먼 존스의 것이 훨씬 탄탄하다).

 

게리 거스틀, 뉴딜과 신자유주의(홍기빈 역, 아르테, 2024)는 기존 신자유주의 연구를 집약하여 필자의 뉴딜 체제에 대한 논의와 연결, 현대 미국 정치경제사를 뉴딜 체제에서 신자유주의 체제로의 전환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야심작이다. 이런 저작에서 흔히 그렇듯 거스틀의 내러티브는 다소 도식적이며, 출간 직후 부정확한 사실관계 등에서 비판을 받은 바 있으나 지금 한국어로 읽을 수 있는 신자유주의 책 중 이만한 책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상업과 결부된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사상사의 경우, 마이클 하워드의 전쟁과 자유주의 양심(안두환 역, 글항아리, 2018)이 나와 있긴 하지만, 아직 더 좋은 연구가 필요하다.

 

+ 지난 10년 간 영어권 신자유주의 지성사 연구에서 가장 주목받은 작업 중 하나인 퀸 슬로보디언의 첫 책(The Globalists)은 현재 한국어판 번역 진행을 기다리고 있다.

 

(‘자유주의와 제국문제, 19세기 후반기의 새 자유주의20세기 초반의 논쟁, 20세기 중반의 냉전 자유주의 등 여러 굵직한 주제들은 아직 확고하게 추천할 저작이 없다; 유럽 19세기는 그렇게 많은 연구자가 뛰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영역이 안개로 덮여 있다)

 

 

2.

 

방송대에 와서 두 번째로 만드는 과목, <인물로 본 근대>2학기 개설을 목표로 하나씩 단계를 밟아가고 있다. 교재는 한창 교정·편집 진행 중이고, 강의 녹화는 7월부터 시작할 예정이다. 성격이 다르기는 하지만, 순수하게 교재 자체의 퀄리티를 놓고 보면 <서구지성사입문>보다 좀 더 고르게 높은 편이라고 생각한다. 책의 성격에 관해서는 교재 서문 초고를 올려둔다:

 

"이 책은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문화교양학과 인물로 본 근대과목을 위한 교재이다. 한발 앞서 근대화를 이룩한 국가들에 의해 식민지로 전락하는 수난을 겪었으며, 오랜 기간 국가와 사회의 근대화가 절대적인 가치로 받아들여졌고, 또 명실상부한 근대국가의 지위에 도달한 지금도 여전히 근대화와 근대성을 둘러싼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한국의 예를 볼 때, 근대 및 그 연관어가 여전히 우리의 역사 이해에서 중요하다는 사실에 별다른 부연이 필요할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왜 하필 인물로 본 근대인가?

 

역사 수업에서 인물이라는 선택지는 적어도 두 가지 이점이 있다. 먼저 인물의 삶과 행적은 과거라는 이국(異國)으로 들어서는 모험에서 비교적 편안하게 드나들 수 있는 통로와 같다. 사람이 자신과 말도, 생각도, 관습도 다른 낯선 세계를 알고 이해하기란 본래 어려운 일이다. 반면 인물을 대하는 것은 사정이 다르다. 예컨대 TV 드라마나 영화, 혹은 소설의 등장인물을 떠올려 보자. 길게는 출생에서 죽음까지의 인생역정을, 짧게는 고작 몇 시간 정도의 고뇌를 지켜보는 체험만으로도 우리의 마음에는 어느덧 그를 향한 친밀한 감정이, 때로는 강렬한 흥미와 공감까지도 자라나고는 한다. 실제 옛사람의 전기(傳記, biography)를 읽는 경험도 비슷하다. 우리와는 상황도, 성품도, 마주친 문제도 전혀 달랐던 인물이라 할지언정, 그의 행적을 접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스스로가 한 명의 인간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고 믿으며, 나아가 그가 살아갔던 세계에 어느 정도 호기심을 품게 된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바라볼 때 본성적으로 떠올리는 공감과 호기심의 마음, 이것이 역사 공부에서 인물에 초점을 맞추는 접근법이 유용한 한 가지 이유라 할 수 있다.

 

인물에 초점을 맞추는 접근법은 역사의 구체적인 면모를 포착할 수 있도록 한다는 데서도 도움이 된다. 특히 거시적인 관점에서 과거의 세계와 그것이 변화하는 과정을 설명하고자 할 때, 심지어 전문적인 역사학자라 할지라도 거대하고 복잡한 세계를 몇 가지 근본적인경향과 원리로 요약하고픈 유혹을 피하기란 어렵다. 인류 문명이 수렵·채집에서 목축, 농경을 거쳐 상업사회로 발전한다는 식의 역사발전단계론이나, 개인의 자유·인권 및 민주주의의 증진이 역사의 발전 방향이라는 신조, 자유로운 시장이 언제나 풍요와 자유를 낳는다는 유사-신학적인 믿음 등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압축적인 서술의 필요성을 인정한다 해도, 그렇게 도출된 요약이 곧 특정한 시대와 사회를 있는 그대로 설명해 준다거나, 혹은 그러한 원리를 모든 경우에 자명하게 적용할 수 있다는 식의 그릇된 믿음에 빠지기가 너무나도 쉽다는 데 있다. 이러한 함정에서 벗어나는 한 가지 방법이 바로 인물의 삶과 행적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는 것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직면했던 서로 다른 상황을 일별할 때 우리는 거시적인 구조’·‘원리의 작용이 실제로는 매우 이질적인 모습을 띠고는 하며, 때로는 그러한 구조나 원리가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영역이 존재함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두 가지 이점은 우리 수업의 핵심 주제인 근대를 이해하는 과제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한편으로 근대화와 이를 둘러싼 논의가 오랜 기간에 걸쳐 지구적으로 전개되어 왔음을 고려할 때, 이를 체험하고 성찰한 인물의 시선은 근대라는 거대한 무언가를 조금 덜 낯선 대상으로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 다른 한편으로 각각 근대와 서로 다른 관계를 맺었던 다양한 인물의 행적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근대·근대화·근대성을 어떤 단일한 실체로 바라보는 대신 서로 다른 상황에서 상이한 모습으로 나타난 복수의 형태, 즉 근대’, 근대화’, 근대성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이 인물과 근대라는 두 가지 항을 연결하는 이유이다.

 

이 책은 인물의 활동 시기를 기준으로 총 열다섯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다시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볼 수 있다. 1장부터 5장까지는 각각 이탈리아 피렌체의 니콜로 마키아벨리(1469-1527), 잉글랜드의 새뮤얼 리처드슨(1689-1761), 제정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1729-1796), 혁명기 프랑스의 피에르-앙투안 앙토넬(1747-1817), 아이티 혁명을 주도한 쥘리앵 레몽(1744-1801)과 투생 루베르튀르(1743-1803)의 삶을 통해 유럽의 근대화를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본다. 6장부터 11장까지는 19세기 전후 동아시아의 박규수(1807-1877),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 유길준(1856-1914), 루쉰(1881-1936), 루정샹(1871~1949), 하니 모토코(1873~1957)와 같은 인물들이 서구라는 외부로부터 몰려오는 근대의 물결에 어떤 식으로 대응했는가를 살펴본다. 역사가 E. H. (1892-1982), 교육자 라라지 보운(1927-2021),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1930-2002), 사회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1929-)를 다루는 12장부터 15장까지는 근대 세계의 질곡과 위기를 성찰하고 나름의 해법을 찾고자 했던 유럽의 지식인들을 돌아본다.

 

이러한 형식의 교재에서 이 사람은 왜 빠졌어?’와 같은 물음을 피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규정에 따라 모든 교재는 6년마다 전면 개편이 가능한 만큼, 앞으로 지속적인 개편을 통해 인물로본근대에 계속해서 새로운 인물을 포함할 것을 약속드린다. 그때까지 이 교재에 수록된 짧지만 탁월한 열 다섯 편의 글이 한국의 교양독자들에게 더 널리, 더 깊이 읽히기를 바란다."

 

 

3.

 

부분적으로는 대선 정국과 맞물려, 2030청년/남성에 관해 조금씩 진지하게 들을만한 새로운 이야기들이 (최근 양승훈 선생님이 쓰신 날카로운 포스팅을 포함하여) 나오고 있다. 나 역시 몇몇 자리에서 2030남성/청년 문제를 주제로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짧게라도 기사화된 것들만 올려보면,

 

https://www.catho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4375

[발표자료는 다음 링크 참조: https://advocacy.jesuit.kr/bbs/board.php?bo_table=archive&wr_id=152 ]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33/0000048950?sid=100

 

https://n.news.naver.com/article/028/0002749942

[발표자료는 다음 링크 참조 ]

 

하나하나 이야기하기엔 그 자체로 별도의 포스팅이 필요할 규모의 주제들이라 여기서 다 풀긴 어렵다(조금 묵히면서 생각하고 싶다). 다만 특히 마지막 자리에서 발표하면서 들었던 생각만 이야기해보면--

 

세대론, 안티페미니즘, 우경화(?), 연금개혁 등 여러 키워드를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2030남성이 민주당, 나아가 586 민주-진보 정치에 대해 갖는 근본적인 불안감은 다음 질문으로 집약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과연 20, 30년 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현재의 위상을 유지할 수 있는가? 오늘날 가장 강력한 의사결정권을 지닌 586세대는 미래의 문제에 대응하기 위한 책임과 역량을 갖추고 있는가?’ 계엄 이후의 혼란을 종식시키고 새롭게 출범한 현재의 정권,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오늘날의 민주당에 대해 청년 세대가 품는 불신의 밑바닥에는 이 주제에 대한 회의적인 전망이 자리하고 있다.

 

이것이 정당한 회의인지, 혹은 여기에 정부여당이 어떻게 풀어나가는 게 좋을지는 지금 당장 이야기할 수 있는 주제는 아니지만, 적어도 대학/고등교육 문제에 있어 나는 현 정권에 그리 큰 기대를 품고 있지는 않다. 이번 국정기획위원회에서 발간한 대한민국 진짜성장을 위한 전략의 실망스러울 정도로 얄팍한 고등교육 파트 서술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나의 회의감에 크게 이견을 제기하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한다.

 

 

4. 그 외에...

 

- 5월 초에 혼트의 상업사회의 정치사상원고 검수를 드디어 마쳤다(처음 시작부터 2년 정도 걸렸다). 이후 역자 김민철 선생님이 한 번 더 검토를 끝냈고, 이제 8월 초까지 내가 해제를 쓰면 끝난다. 혼트의 미출간 원고 및 무역의 질투(Jealousy of Trade) 서문을 읽기 시작했다.

 

- 서평 뉴스레터 책과참치(https://booksnchamchi.stibee.com/ )에 두 번째 서평 원고를 보냈고 (특별한 일이 없다면 7월 상순에 발간될 예정이다) 8월 초까지 다른 책 서평을 하나 더 쓸 예정이다.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남성성을 주제로 기획한 편저에 한 꼭지를 싣게 되었다. 4년 전 시민과 세계에 실은 시론 안티페미니스트가 페미니즘에서 배운 것은 무엇인가?를 선집의 취지에 맞게 수정확장한 글이고, 방금 3교 수정 코멘트를 보냈다. 책 자체는 7월 중에 나올 예정이라고 한다.

 

8월 중순에 오랜만에 18세기 문헌을 가지고 세미나에서 발표할 예정이다. 조금씩 관련 문헌을 읽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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