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박사하기』: 『서울리뷰오브북스』의 서평에 대한 답변
Critique 2023. 3. 22. 21:29이 글은 『한국에서 박사하기』에 대한 김두얼 선생님의 서평 「한국이라는 울타리를 넘어설 수 있기를」 (『서울리뷰오브북스』 9호, 2023년 3월, pp. 118-29)에 대한 답변이다.
『한국에서 박사하기』 링크(알라딘)
『서울리뷰오브북스 9호』 링크(알라딘)
1.
『서울리뷰오브북스』 서평 예고(?)를 받았을 때 기대와 긴장을 동시에 느꼈다는 고백으로부터 시작하자. 이는 다른 무엇보다도 김두얼 선생님께서 서평을 맡아주시기로 하셨다는 데서 기인했다. 직접 뵐 기회는 없었으나, 나는 선생님께서 왕성하게 생산해온 작업물을 매우 제한적으로나마 틈틈이 읽어왔다(지금도 내 방 책장에는 『한국 경제사의 재해석』과 『보이는 손』이 꽂혀있다). 특히 학술서평이라는 장르 자체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서, 선생님의 서평은 언제나 찾아읽게 되는 글 중 하나였다. 따라서 그 날카로운 필치가 나 자신이 상당히 깊게 참여한, 그렇기에 결코 완전하지 않음을 잘 알고 있는--혹은 애초에 완전함을 의도한 것이 아닌--작업물을 향한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느낀 감정의 복잡함은 다들 이해하실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오전 실제로 서평을 접한 뒤, 그런 복잡함은 다소 다른 이유로 유지되고 있다. 한편에는 서평에서 드러나는 정중함과 배려, 그리고 『서울리뷰오브북스』와 같은 전문서평지에서 이 작은 책에 귀중한 지면을 할애해주었다는 사실에 감사한 마음이 있다. 다른 한편에는 서평의 문제제기에 과연 어떻게 응답하는 게 적절할지에 대한 고민이 있다. 그런 고민 속에서 선생님 본인의 "교수와 학생 또는 선배와 후배라는 암묵적인 상하 관계를 머리에서 지워 버리고, 저자와 서평자라는 대등한 관계로 저자를 대하고자"(120) 한다는 선언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다면 나 역시 마음을 정돈하고 한 명의 저자로서 서평에 응답함이 적절할 것이다.
아래는 그 답변이다.
2.
책 내용 소개를 제외하면, 「한국이라는 울타리를 넘어설 수 있기를」에서 서평자가 비판적으로 제기하는 물음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학문 공동체의 결성을 위한 한 가지 수단으로 제시된 세미나 활성화의 제안은 "1980-1990년대의 대학원과 학계를 지나치게 미화하거나 이상향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 같다"는 점에서 동의하기 어렵다(122). 서평자는 그 연장선에서 "지도교수에 의존하지 않는 교육 커리큘럼" 등 저자들이 제안한 여러 아이디어가 "설익은 것이거나 현실성이 없다"고 지적한다(124).
둘째, 저자들의 학문관은 "기본적으로 대한민국이라는 일국적 한계에 갇혀 있는", "시대의 흐름을 앞서 나가기는커녕 그것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125). 이 비판은 사실상 서평의 중핵과 같기 때문에 조금 자세히 따라가는 게 좋겠다. 서평자는 한국 박사과정에 대한 저자들의 논의가 "세계적인 슈퍼스타 학자가 되는 더 좋은 길"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지 않다는 데 아쉬움을 표현하면서 다음과 같이 길게 쓴다: "반도체, 핸드폰, 자동차 등 많은 영역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제품을 생산하고, 김연아와 손흥민이 세계를 석권하고, 한국 영화와 한국 대중가요가 전 세계를 휩쓸며, 국내외를 가릴 것 없이 한국의 많은 학자들이 세계적인 명성을 얻으면서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는 이런 상황에서, 왜 한국 대학에서 박사를 하는 대학원생들은 그런 꿈을 꾸지 않는 것일까"(125).
서평자에 따르면 "세계적인 슈퍼스타 학자가 되는 가장 전통적인 방법은 좋은 학술지에 좋은 논문을 내는 것"인데, 저자들은 "국내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좋은 연구 성과를 내서 세계 유수 대학에 자리를 잡고 강의와 연구를 하는 방안"을 고려하지 않는다(126). 요컨대, 아마도 "지도교수와 학계의 문제" 때문이겠지만, 이들은 "세계를 향해 박사하기"라는 "담대한 꿈"을 꾸지 못하며 여전히 한국 학계를 지배하는 패배주의를 넘어서지 못한다(126).
3.
서평자의 응원과 대화의 의지, 그리고 그 자신의 문제의식에는 물론 공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답변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첫째, 비판 중 일부는 저자들의 의도에 대한 정확한 논평이라기보다는 서평자 본인의 "1980-1990년대" 학술운동문화에 대한 거부감을 더 잘 보여주는 것 같다. 예컨대 세미나 문화 활성화와 같은 경우, 공교롭게도 바로 내가 해당 부분의 발화자인데, 요지는 1980년대의 문화를 되돌리자는 것이 아니다. 그 부분의 초점은 전공 간 격벽을 포함해 대학원생 및 신진연구자들의 지적인 네트워크 형성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자발적인 연결'의 계기를 다시 만들 것인가에 있다. 세미나가 불충분한 해법일 수도(그러나 모든 "세미나"가 1980년대 스타일의 "세미나"만을 의미하는가?), 혹은 나의 서술이 충분히 구체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1980년대 스타일의 학술문화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드러낸다는 지적은 해당 대목의 서술과는 다르다(예컨대 『한국에서 박사하기』 169-74쪽은 내 입장을 상당히 명확하게 서술하고 있다). 고백하자면 오히려 나는 책을 내면서 80년대 학술문화에서 유통되던 '담대한 꿈', 즉 학술을 통해 사회변혁운동을 추구한다는 목표와 결별한 게 아니냐는 비난을 받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지도교수에 의존하지 않는 교육 커리큘럼"(『한국에서 박사하기』 106) 또한, 그러한 제안의 적정성을 떠나, 서평자가 요약한 바와는 다소 다른 의도를 담고 있다. 해당 주장을 제안한 전준하의 직전 발언을 보면(『한국에서 박사하기』 76-80), 그는 대학원 내에서 제대로 지도가 이뤄지지 않는 상황을 지적하면서 그 원인 중 하나로 교수에게 다양한 유형의 의무가 부과될 수밖에 없는, 그래서 대학원생 지도가 최우선 과제가 되지 못하는 한국 대학의 구조를 지목한다. 전준하는 이때 교수 개개인을 비판하기보다는 "대학원생을 비롯한 대학원 전체가 교수라는 직군에 과하게 의존하고 있는 현 제도"(『한국에서 박사하기』 80)를 문제삼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런 전후 맥락을 고려하면, "지도교수에 의존하지 않는 교육 커리큘럼"은 80년대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게 아니라 한편으로는 지도교수에게 전적인 책임이 부여되는, 동시에 지도교수가 학생지도에 중점을 쏟을 수 없는 모순적인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지에 관한 나름의 아이디어라고 보는 게 맞아보인다. 물론 이렇게 각 발언자들의 진술을 따라가며 맥락을 재구성해야 하는 좌담회 형식이 오독을 유발하는 면도 있겠지만 말이다.
둘째, 『한국에서 박사하기』 저자들의 '일국적' 학문관에 관한 서평자의 비판은 적절한 과녁을 겨냥하고 있는가? 저자들의 지향에 대한 서평자의 아쉬움을 떠나, 애초에 책의 초점은 한국 학술장을 구성하는 제도, 장치, 거버넌스, 문화와 같은 요소들을 신진연구자·대학원생의 관점에서 다루는 것이었다. 만약 서평자의 의도가 "한국 학술장을 어떻게 세계화할 것인가", "한국 신진 연구자들의 세계 학술장에의 진출을 어떻게 지원할 것인가"와 같은 주제가 다뤄졌어야 한다는 데 있다면 그건 충분히 제기할 수 있는 문제지만, 개인의 성공전략이나 야심, 목표가 제시되지 않는 게 문제라고 한다면 이는 애초에 이 책의 성격과는 다른 이야기다. 이 책의 저자들 중 인문사회 학술장을 휘감은 '패배주의'를 극복하자는 과제에 공감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그 패배주의의 원인은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나는 역으로 다음과 같은 물음을 제기하고 싶다. 서평자가 이야기한 바와 같이, 서구 학술장과의 교류가 가속화된 1990년대 이래 "한국의 많은 학자들이 세계적인 명성을 얻으면서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는" 사례가 점차 낯설지 않게 되었다. 문제는 그런 변화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한국 인문사회학술장이, 대학원이 심각한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서평자가 속한 경제학계를 포함한 일부 분과들은 상황이 다를 수 있겠다). 나는 좋은 국제학술지에 좋은 논문을 내는 연구자들이, 혹은 세계 유수의 대학에 자리를 잡은 한국인 연구자들이 늘어나는 것 자체는 물론 매우 바람직한 일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지난 수십 년 간 한국의 학계와 대학원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 일부 한국인 연구자가 세계학술장에서 활약하는 것이 곧 한국 인문사회학술장 자체의 생존·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대안으로 작동하지는 않았다. 둘은, 전자가 부분적으로 후자를 촉진하고 또 후자가 잘 준비되어 있을 때 전자가 한층 수월해지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독립된 과제다. 따라서 한국 인문사회학술장의 문제를 논의하고 싶다면 한국 인문사회학술장이 무슨 문제를 겪고 있는지부터 질문해야 한다. 그것이 『한국에서 박사하기』가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내딛은 방향이다.
4.
「한국이라는 울타리를 넘어설 수 있기를」의 독서에서 반드시 언급해야 하는 쟁점 중 하나는 서평자가 암암리에 긋고 있는 시간적 구획이다. 도식적으로 요약하면, 먼저 1980-1990년대 한국 인문사회 대학원·학계의 중요한 동력 중 하나였던 진보 '학술운동'이 있다. 진보 대학원생/신진 연구자가 주도한 자발적인 "세미나 문화"가 왕성했으나, 이 시기는 어디까지나 한국 대학원 제도가 완비되지 않은 '예외적인' 상태였으며, 한국 학자들의 시야도 일국적인 것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이후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 서평자 본인이 긍정하는 또 다른 흐름, 즉 세계학계와 교류하고 또 그에 진출하는 학자들이 늘어나는 변화가 있다. 서평자는 이러한 변화의 연장선에서 후속세대가 "세계적인 슈퍼스타"가 되는 웅대한 목표를 가지면 좋겠다는 희망을 비춘다. 여기서 일국적인 것과 국제적인 것, 운동과 학술이 미분화된 상태와 국제적이고 선진적인 기준에 다가선 상태 등 1980-90년대 학번 연구자들 사이의 논쟁적인 구도를 읽어내기는 어렵지 않다.
나는 그 구도 자체, 혹은 1990년대 이후 우리 학술장이 겪은 변화의 상당 부분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었다는 데 반대할 생각은 없다. 내가 동의하지 않는 것은 『한국에서 박사하기』 저자들의 입장을 1980년대로의 복귀로 위치지우는 사고다. 저자들은 대체로 2010년대에 대학원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그들이 경험하고 성찰하는 시공간은 1990년대 이래 한국 학술장의 국제화-선진화가 상당 부분 전개된 이후, 즉 80년대와 90년대의 투쟁이 어느 정도 일단락 된 *이후의* 대학원/학술장이다. 서평자의 또래 연구자들에게 그것이 한국 학술장이 도달해야 할, 그리고 실제로 어느 정도 도달한 한 가지 지향이었다면, 2000년대 이후의 학번들에게 그것은 그 자체로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적한 '문제' 혹은 출발점이다(이것이야말로 역사적 진보의 전형적인 역설이라고 하면 과도한 표현인가?). 서평자에게 1980년대적인 것이 그와 비슷한 냄새가 느껴진다면 심지어 2010-20년대의 것에도 경계를 표해야 할 극복의 대상이라면, 2000-10년대 학번들에게 1980년대적인 것은 그것이 선택지가 된다는 생각조차 좀처럼 들지 않는 너무나 오랜 과거다. 1980년대의 물음에 사로잡힌 이들이 있다면, 그게 누구건 간에 저자들은 아니다.
이런 시간 인식의 차이는 서평자가 언급한 세계화의 '담대한 꿈'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저자들이 이를 공유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건 이 세대의 많은 연구자들에게 더 이상 충분히 담대한 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다. 단지 그러한 목표는 연구자 개개인의 선택지이며, 우리는 우리가 그러한 목표의 추구만으로 많은 중요한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는 세계에 살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한 문제 중 하나가 바로 대학원생/신진연구자들이 직접적으로 속한, 또 앞으로 상당 기간 자신들이 속해야 할 장소로 생각하는 한국 인문사회 대학원/학술장의 문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2010년대 이후에 출발한 신진 연구자들은 운동의 대의도, 세계화-선진화의 목표도 한국 학술장의 충분한 혁신을 이끌어내지 못했다는 진단으로부터 출발했다. 그것이 (꼭 『한국에서 박사하기』의 저자들에 국한되지 않는) 새로운 연구자들이 학술장을 제도이자 환경, 생태계로 인식하고, 이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따져 묻고 혁신해야 한다는 요구를 내건 이유다. 설령 그 시도가 많은 면에서 부족하다고 해도 말이다.
5.
서평자를 포함해 학계에 책임감을 느끼는, 그리고 이제 한국 대학원·학술장의 중추를 차지하는 80년대 중후반-90년대 전반 학번 학자들에게 보내는 전언으로 답변을 마치고 싶다. 8090년대의 투쟁은 끝난지 오래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2020년대 한국의 문제를 2020년대 한국의 시점에서 바라보고 풀어가려는 노력이다('로컬'의 문제는 '글로벌'로 해결될 수 없다; 글로벌은 그 자체로 무수한 로컬들의 집합이기도 하다). 2020년대는 우리들의 시간인만큼이나 당신들의 시간이기도 하며, 이 시간의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는 우리 못지 않게 당신들의 책임과 노력 또한 필요하다. 이제는 바로 당신들이 80년대 혹은 90년대의 주박으로부터 벗어나 우리가 내민 손을 잡고 지금 여기로 올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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