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남자" 문제 혹은 반페미니즘 언어 분석을 위한 시론
Critique 2020. 6. 28. 02:15아래는 2020년 1월 출간된 민음사의 인문잡지 『한편』 1호에 실린 나의 글 「"20대 남자" 문제 혹은 반페미니즘 언어 분석을 위한 시론」에 약간의 수정을 덧붙인 글이다.
「"20대 남자" 문제」는 크게 두 가지 목적을 지니고 있다. 첫째는 반페미니즘/안티페미니즘을 바라보는 기존의 관점들을 비판하는 것이다. '기존의 관점'이란 말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태도를 지칭한다; (1) 586진보·민주당지지의 정치적 요구에 순순히 따르지 않는 청년남성들을 비난하고 경멸하는 대중정치적 입장, (2) 반페미니즘이 반反진보적인 것은 맞지만, 그것이 한국의 문제적인 사회경제적 구조의 산물이라는 진보적 사회과학(?)담론의 입장(이는 천관율 기자의 『20대 남자』도 마찬가지다), (3) 반페미니즘을 페미니즘과 여성인권의 강조에 대항하는 (도덕적으로 열등한) '백래시'라는 대중적 페미니즘의 입장이 그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결국에는 반페미니즘적 인식을 가진 청년 남성들을 '나쁜 놈들' 또는 '불쌍한 놈들'로 규정할 수밖에 없으며, 이는 다시 그들을 도덕적으로 비난하거나 혹은 '근본적인 구조'를 고쳐야 한다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결국 어떠한 현실적인 대응책을 내놓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추상론으로--또는 '불쌍한 아이들에게 돈과 기회를 좀 더 줍시다'는 시혜성 정책으로--귀결될 가능성이 높다. 각 진영의 정치적 이해타산과 별개로, 이러한 관점들은 "20대 남자" 문제가 정확히 무엇인지, 20대 남성들이 어떠한 언어로 사고하며 어떻게 세계를 인식하는지, 그 언어전략이 어떠한 전제 위에 기초하여 어떠한 약점을 갖는지를 이해하는 데 거의 도움을 주지 못하며, 필연적으로 청년남성집단의 반페미니즘에 어떠한 전략을 가지고 대응하는 게 가장 효과적인지를 사고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리고 나는 오늘날의 연구와 비판이, 적어도 실천적인 태도를 지향하는 것이라면, 그것보다는 더 유용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글의 두 번째 목표는, 그러한 문제의식에 따라서, 청년 남성세대의 (반)페미니즘 인식이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그것이 어떠한 논리들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조금 더 유용한 방법에 기초해서 보여주는 것이었다--언어맥락주의적 지성사 방법론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이 글은 엄격한 지성사적 방법론에 기초하고 있지 않으며, 대량의 불특정한 인원이 참여하는 커뮤니티에서의 언어행위 및 변화과정이 통상적인 지성사 연구 방법론을 통해서만 철저하게 분석될 수 있다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연구라기보다는 비평에 가까운 이 글은 지성사적 방법론의 통찰을 느슨하게 활용하여 한국 청년남성 반페미니즘 언어의 매우 특정한 사례를 선정하여 그들의 언어 자체를 좀 더 꼼꼼히 읽고 발화자들의 사고를 복원해보는 과정을 통해 그것이 함축하는 인식과 전략을 읽어내고자 했다--주어진 이론이나 기존의 편견에 대상을 끼워맞추는 대신 말이다. 이 글을 놓고 진행된 토론자리에서 여러 분들이 지적해주셨듯, 실제로 반페미니즘적 언어의 다양한 형태와 변천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글에서 다루지 않은 더 많은 사례들을 면밀하게 수집하여 분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다만 나의 요점은, 그러한 분석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다양한 언어실천들이 어떠한 전제 하에서 어떠한 논쟁을 염두에 두고 어떠한 수사와 전략을 채택하는지, 그리고 그것들이 (종종 본래의 의도를 벗어나면서) 어떠한 상황 속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변모해가는지를 읽어내야만 하며, 여기에 언어맥락주의적 지성사 방법론이 (유일한 수단은 아니더라도) 반드시 필요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기존에 이미 주어진 도식을 되풀이하는 여러 '분석'에 비할 때 내 글이 무언가 새롭고 유효한 지점을 지적하고 있다고 느낀 독자가 있다면, 지성사 방법론이라는 도구에도 관심을 가져주시면 좋겠다. 이 글이 출간될 때는 번역 중이었던 리처드 왓모어의 『지성사란 무엇인가?』도 이제는 한국어판으로 손쉽게 접할 수 있다(알라딘 링크: http://aladin.kr/p/kNHPy).
이 글은 약간은 복잡한 과정을 거쳐 쓰여졌다. 『한편』 창간호의 본래 기획에서 나는 필진섭외대상이 아니었으나, 기존에 선정되었던 필자의 사정으로 인해 뒤늦게 급작스레 창간호 필자로 합류하게 되었다. 내가 당초 청탁받은 내용은 천관율·정한울의 『20대 남자: ‘남성 마이너리티’ 자의식의 탄생』에 대한 비판적인 서평을 써달라는 것이었으나, 서평 원고 초고를 본 편집진은 『20대 남자』에 대한 언급을 줄이고 언어맥락주의적 방법론의 장점을 보여줄 수 있는 사례분석을 다시 요청해왔다. 거절하기에는 이미 쓴 분량의 원고료가 아까웠기에 (최초에 배정된 최대 원고지 30매 분량을 본문만 최대 40매로 늘리는 타협을 거쳐) 다시 쓴 제2초고를 여러 조언을 받아 다듬어 낸 것이 출판된 판본이다. 아래 글은 제2초고를 바탕으로 출판본과 대조하여 출판본의 수정사항을 거의 반영하되 원래 제2초고에서는 삭제되었던 내용(대표적으로 미주 3번)을 남겨둔, 나의 원래 의도에 좀 더 가까운 버전이다. 기존의 문제의식을 실제로 육화시킬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준, 그리고 원고의 포스팅을 허락해 준 『한편』 담당편집자께 감사의 뜻을 전한다.
실제로 출간된 텍스트를 읽어보실 분은 아래 첨부한 pdf를 참고하시길 바란다. 서지사항은 다음과 같다: 이우창, 「"20대 남자" 문제 혹은 반페미니즘 언어 분석을 위한 시론」, 『한편』 1(2020년 봄): 69-92.
"20대 남자" 문제 혹은 반페미니즘 언어 분석을 위한 시론
이우창
1. 20대 개새끼론에서 20대 남자론까지
2007년 우석훈·박권일의 『88만원 세대』의 출간 이래 한국의 담론장에서 20대는 언제나 문제적이었다. 무엇이, 왜 문제였는가? 짧게 말해 20대 문제의 핵심은 그들이 한국의 진보·민주화세력이 정해놓은 역사적인 역할을 잘 연기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왜 20대는 신자유주의시대에 사회변혁의 주체가 되지 않을까(우석훈, 김홍중); 왜 20대는 민주당에 투표하지 않는 “개새끼”가 되어버렸나(김용민); 왜 20대는 헬조선에 살면서도 사악한 박근혜 정권을 타도하러 투쟁하지 않는가(박노자)? 그러한 우려는 2008년의 광우병촛불집회나 2016년 말의 탄핵촛불집회, 2017년 대통령선거투표에서처럼 20대가 신의 섭리에 따라 진보·민주화세력 혹은 586세대의 정치적 목표에 동참하는 것처럼 보였을 때 잠시 사그라들고는 했다.1) 그러나 2018년 후반부 이래 20대 남성의 정권지지율이 눈에 띄게 하락하면서 20대 문제는 이제 ‘20대 남자 문제’로 다시금 돌아왔다. 586세대의 일차적인 반응은 왜 20대 남자들이 삐뚤어졌는지를 자신들의 상식 속에서 설명(을 빙자하여 비난)해보려는 것이었다. ‘축구나 게임을 하다가 그 시간에 공부하는 여성들에게 밀려나니까 역차별당한다고 생각한다’(유시민)는 해석이나 ‘이명박·박근혜 시절에 민주주의 교육을 제대로 못 받아서 그렇다’(설훈)는 단언이 대표적이다. 다행히 한국사회에는 고장난 기계처럼 자신의 믿음을 되뇌는 대신 일단 현상을 살피는 게 우선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사람도 존재했다. 천관율·정한울의 『20대 남자: ‘남성 마이너리티’ 자의식의 탄생』(시사IN북, 2019, 이하 『20대 남자』)은 바로 그러한 관찰의 시도라고 할 수 있다.
『20대 남자』의 저자들은 2019년 3월 “20대 남녀 500명, 그 외 연령대의 성인 남녀 500명”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결과로부터 다음과 같은 해석을 끌어낸다(17). 20대 남성들은 취업·승진·결혼·연애 등 삶의 제반 영역에서 단순히 다른 세대에 비해 여성차별 문제가 심각하지 않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 즉 20대 남성들이 차별받고 있다고 믿는 경향이 있으며, 그중 25.9%의 응답자는 페미니즘에 대한 극단적인 거부감을 표명하는 “반페미니즘적 신념형 20대 남자”로 나타난다. 이들은 ‘남성차별’을 조장하는 정부의 양성평등정책에 심각한 문제가 있고, 그 배후에 있는 페미니즘은 전적으로 해로운 운동이라고 믿는다. 요컨대 사악한 페미니즘과 결탁한 정권이 남성이 차별받는 세상을 만들고 있으며, 자신들은 그로 인해 부당한 피해를 받고 있다는 “남성 마이너리티 정체성”의 서사가 20대 남자 문제의 핵심이다(56). 20대 남성집단에 강력한 반페미니즘이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공유되고 있는 현실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20대 남자』는 무엇보다도 민주화·586세대가 20대를 설명해 온 관습적인 해석을 여론조사분석에 기초해 교정할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공정에 민감하고 불공정에 반대하는 태도를 20대 남자가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나머지 세대·성별도 마찬가지”이기에(69), “20대 남자가 정치적으로 보수화되었다거나, 유난히 여성 혐오 성향이 폭넓게 퍼졌다거나, 공정성에 대한 애착이 커서 작은 손해에도 민감하기 때문이라는 등의 설명”은 적어도 이 조사에서는 타당한 것으로 나타나지 않는다(53).
물론, 저자들 스스로 흔쾌히 인정하지만, 『20대 남자』를 통해 현재 (약간 범위를 넓히자면 10-30대 일부를 포함하는) ‘20대 남자’가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책의 핵심인 (반)페미니즘 관련 분석에서 저자들은 “페미니즘은 남녀의 동등한 지위와 기회 부여를 이루려는 운동이다”·“페미니즘은 남녀 평등보다 여성우월주의를 주장한다” 등 총 여섯 개 문항에 대한 답변을 통해 일종의 “페미니즘 찬반 지수”를 설정하고 응답자들을 분류한다(59-67). 문제는 이때 각각의 응답자들이 “페미니즘”을 정확히 어떻게 이해하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여러 SNS·온라인커뮤니티에서 페미니즘을 두고 벌어지는 논쟁을 조금이라도 관찰해보면, 사람들이 “페미니즘”이라는 개념을 평가하고 정의하는 방식이, 비단 페미니즘 옹호자와 비판자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규정하는 집단 내에서조차도 무척이나 다양함을 쉽게 알아차리게 된다. 이를 고려할 때 『20대 남자』는 “페미니즘”을 적대시하는 청년 남성들 다수가 있다는 사실만을 확인할 뿐 그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논리를 따라 사고하는지는 이해하지 않는다. 만약 ‘20대 남자’ 문제를 정말로 이해하고 또 여기에 (정책적인 측면을 포함해서) 실천적으로 대응하고자 한다면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이들이 페미니즘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으며 또 왜, 어떻게 거기에 반대하는가를 이들 자신의 언어와 맥락을 통해 살펴보려는 시도가 바로 그것이다.
나는 세대론이나 (반)페미니즘과 같은 담론적 대상을 분석하고자 할 때,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의 해석학적 입장 및 케임브리지 지성사학파의 언어맥락주의를 따라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 자체를 역사적인 맥락에 따라 구체적으로 분석하는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2) 특히 언어맥락주의 지성사 방법론에 따르면, 구체적인 발화나 담론 등의 언어로 표현된 대상의 역사적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른 무엇보다도 그러한 언어가 어떠한 구체적인 시공간적 맥락 내에 놓여 있는지, 특히 그것이 어떠한 ‘언어적인 맥락’ 속에서 어떤 용법(쓰임새)으로 사용되고 있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오늘날 한국청년세대의 반페미니즘을 분석하고자 할 경우, 우리는 먼저 청년세대가 사용하는 언어 속에서 반페미니즘의 어휘들이 정확히 어떠한 뜻과 의도, 세계관을 담아 사용되는지를, 나아가 그러한 언어의 용법이 어떤 상황 속에서 형성되고 변해 왔는지를 면밀하게 살펴야면 한다. 사람들이 반페미니즘의 언어를 어떤 의미로 또 무슨 의도를 가지고 사용하는지를 설명할 수 없는 한, 우리는 반페미니즘을 분석했다고 말할 수 없다. 반페미니즘에 그저 비난 또는 경멸을 표현하는 것으로 충분하며 그 언어를 정밀하게 분석할 필요는 없다고 믿는 이들의 착각과 달리, 반페미니즘은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매우 많은 수의 사람들이 공유하는 언어가 되었으며 그 영향력은 최소 수십 년 이상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 이 글이 반페미니즘을 직접적으로 비난하거나 조롱하지 않는다는 데 불만을 제기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나는 우리에게는 단순히 도덕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것 이상의 ‘유용한’ 작업이 필요하다고 답하고 싶다.
2. 페미니즘과 반페미니즘의 맥락
청년세대의 반페미니즘을 논할 때 먼저 주의해야 할 지점은 마치 반페미니즘이 하나의 보편적 실체로 존재하는 것처럼 상정하여 서구의 안티페미니즘 모델을 한국에 그대로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전통적인 가정과 성역할을 강조하는 기독교 보수주의적 관점이나, 과거의 ‘남자다운’ 덕성을 페미니즘의 ‘중성화’가 위협한다는 식의 입장은 종교적 열정에도, 전통적인 남성성에도 거부감이 큰 한국 청년세대의 반페미니즘에서 유의미한 지분을 차지하지 않는다.3) 오히려 우리는 현재의 반페미니즘을 극히 최근의, 즉 지난 수년간 한국사회에서 진행되어 온 거대한 변화의 맥락에서 읽을 필요가 있다―너무나 상식적이게도 페미니즘의 대두 바로 그 자체 말이다.
주지하다시피 페미니즘은 적어도 2015년 트위터의 페미니스트 해시태그 운동 및 온라인커뮤니티 메갈리아의 등장 이전까지는 청년남성이 주로 참여하는 온라인커뮤니티, 혹은 한국 자체에서 매우 제한적인 관심만을 받는 주제였다.4) 메갈리아 커뮤니티와 연관 페이스북 페이지의 운영자들은 (공식적인 사회통념에 어긋나는 내용 또한 적지 않게 포함하던) 다양한 게시물 중에서 새로운 페미니즘을 정당화할 수 있는 내용을 선별하여 전파하는 정치적인 감각을 보여주었다.5) 당시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로 상징되는 거대한 극우혐오세력의 출현을 심각하게 경계하던 진보진영 및 언론이 메갈리아를 일베에 대항하는 ‘젊고 적극적인 페미니스트 여성집단의 등장’으로 받아들여 열성적으로 지지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 과정에서 “미러링”·“여혐”(여성혐오)과 같은 개념은 그 의미가 명확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 폭넓게 퍼졌으며, 메갈리아 커뮤니티 자체의 짧은 수명과 무관하게 사회 전반에 페미니즘 논의를 불붙이는 데 성공했다. 기존의 여성운동세력은 (다소간의 환상과 오해를 곁들여) 새로운 “넷페미”의 확산을 자신들이 추구해 온 여성주의정책을 실현하기 위한 동력으로 받아들였고, 이는 2017년 출범한 문재인 정권의 여러 정책적 시도로 이어졌다.6)
청년남성집단의 반페미니즘은 기본적으로는 전술한 흐름이 남성중심 온라인커뮤니티에서 어떻게 이해되고 또 대응되었는가의 맥락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7) 먼저 남초 커뮤니티는 진보진영·언론과 달리 자신들의 여성혐오문화를 대대적으로 공격하는 메갈리아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이들은 메갈리아가 그 모태였던 디시인사이드,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의 ‘미러링’ 대상이었던 일베의 여러 코드를 공유한다는 사실을 빠르게 인지했다―진보진영·언론이 메갈리아를 페이스북 페이지 등에 의해 ‘선별된’ 자료를 통해 이해했다면, 남초 커뮤니티의 메갈리아 비판자들은 “메갈” 커뮤니티가 일베의 여성화 버전으로서 혐오표현이 판치는 곳이라는 (전적으로 거짓이라고는 할 수 없는) 상을 구축했다. 메갈=일베=혐오세력이라는 도식은 이후 메갈리아가 기존의 여성주의단체·언론 등에 의해 새로운 페미니즘으로 인정받으면서, 또 메갈리아와 워마드가 한데 묶여 지칭되면서 자연스럽게 메갈=웜=배타적 여성우월주의=“페미”라는 논리로 확장되어갔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논리가 문재인 정권에서 20대 남성의 반페미니즘 의식으로 발전했다는 사실이다. 주요 쟁점 세 가지를 꼽아보자. 첫째, 2018년 6월 헌법재판소의 대체복무제 도입 판시, 같은 해 11월 대법원의 종교·양심적 병역거부 무죄 판단이 나오면서 병역의무와 닿아있는 20대 남성들의 상대적 박탈감이 극심하게 표출되었다. 둘째, 2018년 9월 대전 곰탕집 성추행 1심 재판의 (명확한 물증이 제시되지 않은 상황에서의) 유죄 판결에 따라 무죄추정의 원칙이 위반되고 있다는 논란이나, 같은 해 12월 여성폭력방지기본법이 (개신교 우파의 논리를 따라 성소수자를 법적 보호의 대상에서 배제하려는 우파정당 의원의 주도 하에) 당초 원안과 달리 ‘생물학적 여성’만을 보호하는 형태로 통과되는 등 성폭력과 관련된 법적인 판단에서 남성의 기본권이 지켜지지 않는다는 불만이 커졌다. 셋째, 각 분야의 여성할당제 도입 추진이나, 2019년 2월 방송통신위원회에서 통신 패킷을 감청하는 방식으로 해외 성인사이트를 차단하는 등 정권의 적극적인 개입조치가 이어졌다. 요컨대 2018년 후반부터 2019년 초반까지 군대·성범죄·포르노·성별할당제 등 다양한 영역에서 청년남성집단의 반발을 초래하는 공적 결정이 이어지면서, ‘정권이 페미니즘과 결탁해 20대 남성을 역차별한다’는 서사가 굳건히 자리를 잡게 된다.
2017년까지 남초 커뮤니티에서 소수나마 찾아볼 수 있었던 메갈·워마드와 ‘정상적인’ 페미니즘을 구별해야 한다는 목소리, 즉 페미니즘 자체는 옹호해야 한다는 입장은 사실상 사라졌다. 이제 각 대학의 학생 온라인커뮤니티에서는 페미니즘이 남성의 기본권을 짓밟고 여성이 우월한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해로운 “정신병”이라는 구호가 광범위하게 울려퍼졌으며, 조던 피터슨이나 크리스티나 호프 소머즈 같은 영어권 안티페미니즘 논자들의 주장이 잘 요약된 형태로 유통되었다.
3. ‘나무위키 성 평등주의(Gender Equalism) 날조 사건’: 반페미니즘의 인식과 전략
그렇다면 한국 청년의 반페미니즘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언어와 전략에 기초하는가? 이를 포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각종 반페미니즘 운동 단체를 비롯하여 온라인 커뮤니티, 유튜브의 반페미니즘 방송 등에 대한 폭넓은 탐구가 요구된다. 이 글에서는 그중 2016년 하반기에 전개된 “나무위키 성 평등주의 날조 사건”을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반페미니즘의 언어 전략을 잘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로서 간략하게나마 짚어본다.8) 2016년 7월 넥슨의 게임 ‘클로저스’에 참여한 김자연 성우가 메갈리아 옹호를 사유로 계약 해지됨에 따라 온라인에서는 넷페미니스트와 비판자 사이의 갈등이 격화되었고, 디시인사이드 등지에서는 성 평등과 페미니즘을 분리시키고자 하는 시도가 나타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같은 해 8월 초 나무위키의 한 사용자는 “페미니즘이 역차별논란이 심해지자, 서구권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주장을 기반으로 하여 생겨”났으며 “페미니즘보다 역차별논란에서 자유”로운 사상이라는 「이퀄리즘」 항목을 개설한다. 해당 문서의 내용은 이후 여러 기여자의 참여를 통해 빠른 속도로 보충되었다. 특히 “최근 많은 과학자들과 페미니스트들이 스스로를 이퀄리스트라 칭하며 그 숫자가 불어나고 있”으며 “주류 페미니스트의 잘못된 방식과 부정적인 사고방식때문에 이들은 페미니즘보다는 이퀄리즘을 추구하는 추세”라는 서술이 잘 보여주듯, 기여자들은 이퀄리즘 혹은 성 평등주의가 페미니즘을 대체하고 있는 서구의 최신 흐름을 보여준다는 서사를 구축했다. 다음 해 1월 말 페미위키의 구성원들이 나무위키의 해당 항목이 사실관계에 부합하지 않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사상적 조류를 ‘날조’한 것이라 지적한 바가 받아들여지기 전까지 이퀄리즘 서사는 나무위키 내부만 아니라 정의당 당원게시판을 포함한 한국사회의 다른 담론장에까지 전파되었다. 그 영향력은 지금도 곳곳에서 지속되고 있다.
「이퀄리즘」 혹은 「성 평등주의」 항목의 기여자들은 페미니즘에 관해 어떠한 인식과 믿음을 지니고 있었을까? 해당 문서가 본격적으로 비판받기 직전까지 어떠한 내용이 작성되었는지 살펴보자.9) 이들은 기본적으로 “페미니즘은 여성이 억압받는 약자이므로 남성을 차별해야 평등해질 수 있다는 주장”이라고 생각하며, 이러한 전제로부터 “[워마드와 같은] 래디컬 페미니스트와 페미니스트를 지칭하는 페미나치가 페미니즘, 페미니스트라는 명분을 가지고 여성우월주의를 주장하고, 남성혐오를 하는 것”이 가능해진다고 본다. 즉 페미니즘이 “기본적으로 여성에 대한 억압이 존재함을 전제하고 여성권리의 향상과 남성권리의 박탈”을 추구한다면, 이퀄리즘은 “여성의 권리나 지위가 낮다고 단정하지 않”으며 “여성의 현재 권리가 어떤지에 관계없이 남녀에게 동등한 기회와 권리 그리고 의무를 부여한다면 성별 대립과 차별, 역차별 그리고 그에 대한 반발을 겪지 않고서도 진정한 성 평등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페미니즘이 (1) 여성이 억압·차별받고 있다는 ‘부당한’ 인식에 기초하여 (2) 남성을 혐오하고, 차별하고, 그들의 권리를 박탈하는 여성우월주의로 나아가는 사조라면, 이퀄리즘은 (1) 오늘날 여성에 대한 유의미한 차별이 존재한다고 보지 않으며 (2) (특정한 성의 권리와 의무를 조정하는 조치가 없다고 해도) 모든 성에게 동일한 기회·권리·의무를 부여하는 것으로도 갈등과 반발 없이 ‘진정한 성 평등’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그 자체로는 폐기된 이퀄리즘의 언어로부터 오늘날 한국의 여러 청년 남성이 공유하는 반페미니즘적 인식으로 이어지는 몇 가지 중요한 논리를 읽어낼 수 있다. 첫째, 페미니즘의 비판자들은 가족·남성성과 같은 전통적인 가치가 아닌 ‘서구 현대’에 귀속되는 성평등·성중립화된 사회라는 지향을 받아들인다. 이들은 스스로를 전자와 구별하며, 오히려 페미니즘이 후자의 지향을 충분히 실현할 수 없기에 폐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10) 둘째, 이들은 ‘포스트페미니즘’적 역사관이라 부를만한 논리에 기초하여 과거 586세대까지는 여성차별이 극심했으나 현재는 그러한 차별이 사실상 소멸한 평등한 사회가 되었기에 페미니즘이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이는 종종 여성차별을 통한 혜택을 만끽한 586진보들이 스스로의 죄책감을 오늘날의 페미니즘에 투사하여 20대 남성을 역차별한다는 주장으로 발전한다. 셋째, 이들에겐 이미 제도적 평등이 실현된 오늘날 한국의 페미니즘은 계속해서 남성의 권리를 박탈하고 여성의 권리만을 과도하게 높이는, 갈등과 분열, 혐오를 조장하는 사회악에 불과하다. 특히 여성할당제 등의 적극적 차별시정조치(affirmative action)는 국가가 페미니즘에 매몰되어 사회의 공정한 질서를 해치는 최악의 정책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사항들은 『20대 남자』가 지적한 “반페미니즘적 신념”이 단순한 “남성 마이너리티 정체성”이 아니라 그 자체로 청년 남성 집단으로 하여금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세계를 해석하고 평가하는 하나의 서사이자 언어 전략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현재 점차 커다란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거부와 증오에서처럼, 반페미니즘의 언어는 지금 이 순간에도 한국 시민 사회의 규범을 재설정하는 투쟁의 전선에서 작동하고 있다. 따라서, 만약에 반페미니즘적 언어의 범람에 비판적으로 개입하고자 하는 이가 있다면, 그러한 현상에 단순히 분노와 반감을 표하는 대신, 그러한 언어가 어떠한 논리 위에서 작용하며 무엇에 취약한지를 철저하게 파고들 필요가 있다.
4. 맺음말
상기한 스케치로부터 “20대 남자 문제”를 이해하고 이에 대응하기 위한 몇 가지 교훈을 끌어내는 것으로 마무리하자. 먼저 20대 남성의 반페미니즘 정서는 과도한 경쟁사회 등의 ‘진보적’ 이론 모델로는 충분히 설명될 수 없다. 청년세대가 과도한 경쟁에 내몰리고 있다는 지적은 반페미니즘의 대두 이전부터 일상적으로 제기되어 왔다는 점에서 “20대 남자 문제”의 직접적인 원인이 될 수 없다. 현재의 정책적 지향에 대한 청년세대의 반감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추상적인 이론적 모델이나 대규모 설문조사가 매우 제한적인 효용만을 가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며, 그와 함께 이들이 어떠한 담론을 통해 세계를 해석하고 있는지를 추적해 분석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우리는 현재의 20대가 586세대 정책결정권자·연구자에게 익숙한 것과는 매우 다른 언어에 의해 사고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586세대와 현재 20대들이 떠올리는 “페미니즘”은 사실상 다른 관념이며, 일부 온라인커뮤니티에서 출발한 (반)페미니즘이 불과 2~3년 만에 해당 세대 전반으로 퍼져나간 데서 알 수 있듯 오늘날의 청년세대는 과거와는 다른 장치, 다른 매체, 다른 동학, 다른 전략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언어와 담론의 언어맥락주의적 분석은 그러한 차이를 인식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도구다. 그러한 언어와 담론을 직접적으로 대면하고 그것들이 어떤 요소들로 이루어졌으며 어떤 지향점과 취약성을 지니고 있는지를 분석하지 않는 한, 20대가 586세대의 기대와 예측을 벗어나는 일은 되풀이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한 반복 속에서 서로를 향한 경멸과 분노의 심정이 회전하는 나사못처럼 더욱 깊어지리라는 것만큼은 분명히 예측할 수 있다.
*본고의 초고를 읽고 유용한 논평을 해준 김선기, 김선해, 김학준, 반주리, 최민경 님께 감사의 뜻을 전한다.
1) 2000년대 중반부터 2010년대 중반의 헬조선 담론에 이르기까지 청년세대론의 정치적 맥락에 관해서는 이우창, 「헬조선 담론의 기원: 발전론적 서사와 역사의 주체 연구, 1987-2016」, 『사회와철학』 32(2016): 107-58 중 특히 4절 및 5절을 참고. 본고의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다른 글로는, 김선기, 「타자를 이해하는 방법」, 『열린정책』 4(2019): 174-79 를 참고. 출간 전 원고를 읽게 해 준 김선기 님께 감사드린다.
2) 전자에 관해서는 찰스 테일러, 『자아의 원천들: 현대적 정체성의 형성』, 권기돈·하주영 역, 새물결, 2015의 1부 및 Naomi Choi, “Defending Anti-Naturalism after the Interpretive Turn: Charles Taylor and the Human Sciences”, History of Political Thought 30.4(2009): 693-718 등을 참고. 후자에 관한 개괄로는 제임스 탈리 편, 『의미와 콘텍스트: 퀜틴 스키너의 정치사상사 방법론과 비판』, 유종선 역, 아르케, 1999에서 특히 제임스 탈리와 퀜틴 스키너의 글 그리고 무엇보다도 리처드 왓모어, 『지성사란 무엇인가?: 역사가가 텍스트를 읽는 방법』, 이우창 역, 오월의봄, 2020 등을 보라.
3) 후자의 예로는 하비 맨스필드, 『남자다움에 관하여: 남자다움은 진정 쓸모없는 것인가?』, 이광종 역, 이후, 2010을 참조. 한국에서 커다란 인기를 얻었던 조던 피터슨은 양자의 성격을 함께 지니고 있으나, 피터슨의 종교관이나 남자다움에 대한 강조가 한국에서 특별히 지지를 얻은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한국의 반페미니즘을 적극적으로 발전시키려는 행위자 중 개신교 극우 정체성을 지닌 이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은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4) 한국언론진흥재단(https://www.kinds.or.kr/) 기사검색 서비스를 참조하면, “페미니즘” 및 “페미니스트”가 언급된 기사의 수는 1990년대 후반부터 2014년까지 별다른 변동을 보이지 않다가 2015년을 기점으로 급격히 증가한다. 한국에서 오늘날과 같은 페미니즘의 대두는 점진적인 발전의 결과물이라기보다는 급작스러운 변화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5) 일반적으로 메갈리아에 대한 논의는 옹호자와 비판자 모두 해당 온라인커뮤니티 자체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으며, 연관 페이스북 페이지의 활동 등은 커뮤니티활동의 일부 정도로 간주되곤 한다. 그러나 당시 메갈리아가 급속히 인지도와 영향력을 획득할 수 있었던 과정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페이스북 페이지의 운영자처럼 커뮤니티 외부에서 메갈리아의 이미지를 형성한 이들을 고유한 행위자로 보고 이들이 실제로 어떤 전략을 선택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6) 메갈리아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디시인사이드 메르스갤러리는 2015년 5월 말에 개설되었고, 메갈리아가 독립된 홈페이지를 가진 온라인커뮤니티로 출범한 것은 같은 해 8월이다. 이후 12월 남성 동성애자 대상 혐오표현(“똥꼬충”)의 용인 여부를 두고 벌어진 논쟁 이후 메갈리아 커뮤니티는 사실상 침체기에 접어들었으며, 그중 게이·트랜스젠더 혐오를 승인하는 집단은 별도의 커뮤니티 ‘워마드’를 구축했다. 양자의 정치적 영향력을 평가하기란 쉽지 않으나, 메갈리아가 이후 여성가족부 장관에 취임하는 민주당 진선미 의원실 후원활동을 포함해 넷페미집단과 민주당 정권이 연결되는 통로를 개시한 데 비해, 2017년 이후 박근혜 지지를 포함해 본격적으로 반문재인 극우로 돌아선 워마드가 (몇 차례의 대중집회를 제외하고) 여성주의의 제도정치 진출에 유의미한 기여를 했는지는 의문이다.
7) 물론 이전에도 “꼴페미”란 말로 집약되는 여성주의자에 대한 조롱과 매우 다양한 형태의 여성혐오는 일상적으로 존재했으며, 그중에서는 여성가족부에 대한 (종종 가짜뉴스에 기초한) 공격처럼 이후의 반페미니즘으로 이어지는 사안도 있으나, 우리는 기본적으로는 페미니즘이 그러하듯 반페미니즘 또한 2015년 이전과 이후를 구별해야 한다.
8) 이하 내용은 주로 나무위키의 「나무위키 성 평등주의 날조 사건」 항목(2019년 11월 28일 접속) 및 내가 『허핑턴포스트』에 작성했던 포스팅 「'나무위키 성 평등주의 날조 사건'에 대하여」(2017년 2월 3일)를 참고했다.
9) 「나무위키 성 평등주의 날조 사건」 r192판(2017년 1월 7일 작성)을 참조.
10) 반페미니즘 발화자들이 지속적으로 ‘오늘날 서구에서도 페미니즘을 포기하고 있다’는 주장을 내세운다는 사실은 이들의 수사적 전략이 반근대주의가 아니라 초(hyper)근대주의의 위상을 차지하는 데 있음을 보여준다. 그와 같은 초근대주의적 가치관에 입각해 ‘덜’ 근대적인 대상을 비판하는 수사적 전략을 채택하는 사례로는 헬조선 담론을 꼽을 수 있다(이우창, 「헬조선 담론의 기원」, 특히 5절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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