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 서사의 확장과 80년대적인 것: 영화 《벌새》와 역사의 재현

Critique 2021. 1. 31. 13:35

영화 《벌새》는 처음 영화관에서 보았을 때부터 어떤 식으로든 글을 쓰고 싶은 무척 흥미롭고 중요한 작품이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나의 관심을 끈 것은 그것이 여성의 삶과 과거의 역사들이 교차하는 여러 가지 경로를 동시에 보여준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초기 근대 지성사·문학연구자로서 J. G. A. 포콕과 아르날도 모밀리아노와 같은 위대한 역사학자들이 개척해놓은 '역사학/역사서술의 역사적 연구' 기획에 깊은 자극을 받았으며, 그러한 작업이 초기 근대 유럽만이 아니라 우리 시대 한국의 문화와 담론을 보다 명료하고 복잡하게 성찰하는 데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 믿고 있다. 이는 부분적으로 「헬조선 담론의 기원」(2016) 및 「‘서구 근대'의 위기와 한국 동아시아 담론의 기이한 여정」(2017)과 같은 습작논문을 통해 실제로 시도되기도 했다.

 

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2010년대 중반 이래 한국의 새로운 여성주의의 대두와 젠더논쟁, 그리고 그로부터 파생된 여러 문화적 산물을 지켜보면서, 앞서의 문제의식이 젠더연구에 어떻게 활용될 수 있는가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다양한 성별 구분·규범은 어떠한 시간관·역사관을 통해 정당화 혹은 비판되는가? 반대로 특정한 역사관은 사람들의 젠더 인식을 어떻게 유도하는가? 현실의 구체적인 행위자는 자신이 지지하는 성별 인식 및 규범을 옹호하기 위해 어떤 역사서술 전략을 활용하는가? 이와 같은 질문은 성과 젠더의 역사를 둘러싼 일상의 크고 작은 논쟁을 그저 '피해의 역사' 혹은 도식적인 운동사의 프레임에 가두지 않기 위해, 더불어 우리가 직면한 여러 문제를 보다 섬세하게 풀어나가는 전략을 찾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다. 그리고 내 생각에 《벌새》는 바로 그러한 관심사를 통해 더욱 깊이 있게 탐색될 수 있는 텍스트다.

 

아래는 2020년 10월 24일 비판사회학회 주관 비판사회학대회에서 ZOOM으로 발표한 원고를 약간 수정한 글이다. 이미 대략의 개요와 줄거리를 생각해두고서도 미적거리던 내가 실제로 글을 쓸 수 있도록 비판사회학회 발표자리를--그리고 마감 일정을--마련해 주신 김성윤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나는 현대 한국의 문학장과 젠더, 역사인식의 문제를 함께 생각하는 데 있어 다른 누구보다도 오혜진 선생님의 저작에 가장 큰 영감을 받았다. 선생님께서는 토론자로서 많은 논쟁지점을 날카롭게 짚어주셨는데, 이번에는 글의 구조상 충분히 반영할 수 없었던 여러 주제를 앞으로 이어질 대화에서 좀 더 풀어낼 수 있기를 기대한다. 마지막으로 초고를 읽고 솔직한 의견을 제시해준 반주리 씨께도 감사를 전한다.

 

 


 

페미니스트 서사의 확장과 80년대적인 것: 영화 《벌새》와 역사의 재현 

  

 

2019년 한국 여성(주의자) 관객에게 가장 많은 주목을 받은 영화로 《벌새》 (김보라 감독 및 각본, 2018년 제작, 2019년 8월 개봉)를 꼽는 것이 특별히 놀라운 선택은 아니다. 각종 해외 영화제에서 얼마나 많은 상을 받았는지, 그리고 독립영화로서 얼마나 많은 수의 관객을 이끌었는지 등의 관심을 제외하면, 영화를 다루는 기사 또는 평론에서 가장 자주 반복되는 키워드는 바로 “성장”이다. 우리는 다수의 언론으로부터 《벌새》의 이야기를 여성 성장 서사로, 영화의 인기를 여성 성장 서사에 대한 대중의 호응으로 이해하는 예를 쉽게 찾을 수 있다.1) 그러한 해석 자체를 비판하거나 교정하는 것은 이 글의 관심사가 아니다. 다만 한 가지 지적되어야만 하는 사실이 있다면, 심지어 《벌새》가 ‘성장’ 서사/영화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경우에서도, 이때 “성장”, 특히 여성(주의)의 성장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며, 그것이 어떻게 불/가능한지를 좀처럼 묻지 않는다는 점이다(당연하게도 이러한 질문을 거치지 않는다면 《벌새》의 성장 서사에 관한 논의를 정교화하기란 불가능하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원경(遠景)에 둔 채 나는 다음과 같은 순서로 논의를 진행하고자 한다. 먼저 서사적 텍스트로서의 《벌새》를, 특히 은희의 삶을 구성하는 여러 서사를 상세히 살펴본 뒤, 텍스트가 1994년의 역사적 재현을 위해 어떠한 양식들을 동원하는지, 그리고 거기에서 영지의 역할과 의미가 무엇인지를 논의한다. 그러한 고민의 연장선에서, 오늘날 한국 페미니스트 서사의 확장에 《벌새》가 어떻게 기여하는가를 이야기하는 것이 글의 최종적인 목적이다. 

 

 

I. 

 

《벌새》는 고도로 압축된 텍스트다. 영화는 어느 정도 서로 연관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독립적인 복수의 서사를 모두 끌어안되, 각각의 서사를 여러 조각으로 세분하여 교차시킨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보자. 앨리슨 백델이 잠깐 언급했던 “중세의 기사”를 예로 들자면,2) 고전적인 형태의 중세 기사 로맨스는 주인공이 강도를 물리치고(A), 사악한 기사에게 승리하고(B), 귀부인을 구하고(C), 아서왕의 궁정에 가는(D) 식으로 여러 서사를 나열하는 구조를 지닌다(A-B-C-D). 반면 《벌새》와 같은 영화는, 설령 마찬가지로 네 개의 서사 또는 플롯으로 구성되어 있다 해도, 각 서사를 나눈 뒤(A1, A2, A4, A4...) 그것들을 서로 다른 서사의 조각들과 상호교차시키는 배치를 취한다(A1-B1-C1-D1-A2-C2-B2-...C4-D4). 각 서사에 대한 수용자의 집중력과 이해도를 하락시키는 명백한 단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후자의 방식은 제대로 작동할 경우 작품 전체의 다층성과 충만함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강력한 장점을 지닌다(사람들은 어쨌든 2시간 길이의 영화를 보면서 2시간 이상의 경험을 구매하길 원한다). 《벌새》가 2시간 18분이라는 객관적인 시간 길이 이상의 밀도 있는 체험을 제공하는 것은 이 과제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이는 《벌새》의 비평적 독해에 그러한 ‘잘 조립된 복합체’를 다시 세부 구성품으로 분해하여 살펴보는 작업이 요구됨을 뜻한다.

 

신체, 가족, 학교, 친구, 연애, 한문학원, 그리고 1994년의 ‘역사적인’ 한국(월드컵-김일성의 죽음-성수대교의 붕괴). 은희의 삶을 서술하기 위해 《벌새》가 동원하는 요소를 세어보면 적어도 일곱 개에 달한다. 나중에 따로 다룰 영지와 1994년의 한국을 제외하면, 영화는 주로 은희가 가족, 친구, 연애 관계에서 어떠한 일들을 겪는지를 서사화하는 데 집중한다. 세 가지 서사는 유사한 주제의식과 모티프를 공유한다. 잘못 찾아간 집, 그리고 어머니에게 버려졌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섞인 외침이 섞인 첫 장면이 명확히 보여주듯, 은희는 과연 본인이 ‘있어야 할 제 자리’에 있는지 불안해하며(이어 영화의 초반부는 그가 가정과 학교에서 그러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에 대한 반대급부처럼 안정적인 지지대가 되어 줄 수 있는 관계를 기대한다. 이야기는 가족, 친구, 연애 모두에서 은희의 기대가 좌절되는 것을 보여준다. 은희 본인의 표현에 따르면 “콩가루”와 같은 가족은 처음부터 권위 있는 가장이 되고 싶지만 아주 능숙하지는 못한 아버지, 작은 가부장의 역할을 연습하면서 막내 은희를 위계와 폭력으로 대하는 오빠 대훈이 있는 공간이다. 어머니 또한 은희가 기대하는 애정을 제대로 채워줄 여력이 없다(아버지와 오빠의 명백한 가부장적 면모에만 집중하다보면 놓치기 쉽지만, 한문학원에서 쫓겨난 날 은희에게 “성격이 아주 드[럽]”고 “이상”한 아이라고 매도하는 인물은 어머니다). 속마음을 털어놓는 사이였던 친구 지숙은 문구점에서 함께 절도를 하다가 붙잡히자 먼저 은희 가족의 신원을 누설할 뿐만 아니라 사과도 하지 않고 떠나버린다(시간이 지나고 둘은 다시 화해하지만, 그때는 이미 은희의 삶에 무엇보다 영지를 포함한 다른 영역들이 깊게 비집고 들어와 있다). 연인 지완은 가장 중요한 순간마다 은희의 기대를 배반하고, 먼저 다가왔던 후배 유리는 은희가 “이제 나도 너랑 잘해보려고” 결심한 때 “그건 지난 학기”의 이야기라고 말하며 다른 사랑을 향해 떠나간다.

 

물론 세 서사 모두가 단순히 기대의 배반과 좌절의 플롯으로만 구성된 것은 아니다. 《벌새》의 카메라는 그저 은희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만을 보여주기에 은희가 무엇을 깨닫고 어디까지 이해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상상력을 동원할 수밖에 없지만, 어느 정도 자신을 갖고 이야기할 수 있는 지점은 있다. 무엇보다도 은희는 사람들이 나름의 취약성을 가진 복잡한 존재이며, 그들을 쉽게 판단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이 지점이 가장 분명하게 나타나는 영역은 역시 가족이다. 은희가 “큰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통보를 듣고 병원 복도에서 엉엉 우는 아버지, 성수대교 붕괴 직후 누나 수희가 간발의 차로 무사했음을 알게 된 뒤 식탁에서 흐느끼는 대훈의 모습은 가부장의 역할이 이들의 인격을 전부 포괄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중요한 장면 하나를 더 지적해보자. 아버지의 (암시적으로만 표현된) 외도를 두고 폭발한 격렬한 부부싸움은 어머니가 휘두른 전등의 유리조각에 아버지의 팔이 깊게 베이는 것으로 중단된다. 자신의 상처를 깨닫고 굳어버린 아버지의 황망한 표정은 직전까지 연출되고 있던 전형적인 가부장적 가족의 모습, 즉 ‘자식 교육의 책임을 부인에게 돌리고 외도를 지적하는 부인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남편’의 상(像)이 얼마나 쉽게 무너져 내릴 수 있는 것이었는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좀 더 의미심장한 것은 이어지는 장면이다. 언니와 함께 자신들의 가족이 얼마나 문제가 많은지 이야기하다가 잠든 다음 날 아침, 은희는 부모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거실 소파에 앉아 TV를 보며 함께 웃는 광경을 본다. 영화 후반부에 소파 아래에서 깨진 전등조각이 다시 발견되듯, 두 사람의 갈등을 완벽하게 지우기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사람들은 어떻게든 그럭저럭 함께 살아가기도 한다. 그 순간 은희에겐 그것이 너무나도 이상하고 낯설어 보인다. 하지만 이후 은희가 때로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으로 군다고 비난한 뒤, 당황해 굳어버린 그의 팔을 다시 잡아 이끌면서―카메라 바깥으로 나가버리면서―농담을 던지는 지숙의 모습을 상기해보자. 그러한 지숙과 은희의 관계는 과연 덜 복잡한 것일까?

 

가부장제의 억압과 저항이라는 도식으로 만사를 설명하고 싶은 유혹에 저항할 수 있다면, 은희와 아버지의 관계에서 몇 가지 흥미로운 디테일을 찾아볼 수 있다. 나는 최소한 두 군데서 은희가 아버지의 언행을 변주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여성 손님과 다투면서 자신의 가게에서 사용하는 고춧가루가 가장 “좋은 재료”로 만든 거라고 강변했다는 아버지의 이야기는 떡을 맛있게 먹었다는 영지에게 부모님의 방앗간이 “좋은 재료”를 쓴다고 답하는 은희의 언어에서 반복된다. 조금 더 인상적인 반복은 은희가 윤복희의 곡 〈여러분〉을 들으면서 몸부림치는 대목이다. 아버지가 (아마도 외도를 위해) 어설프게나마 자세 잡힌 춤을 연습했다면, 은희는 성수대교 사고 후 연인이었던 지완과 완전히 결별한 후 홀로 집에서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의 표출에 가까운 몸부림을 보여준다―어느 정도는 음악의 리듬을 흐릿하게 따르면서 말이다. 두 대목 모두 아버지의 ‘원본’이 (한국 관객들에게는 익숙한) 가부장의 부정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행동양식이라면, 은희는 그것들을 가져오면서도 매우 다른 맥락에서 위치시켜 변주한다. 아버지를 포함한 가족들이 종종 폭력적으로 행동할지라도 단순한 억압의 주체들이 아닌 것처럼, 그들과 은희의 관계 또한 억압 대 피해/저항이라는 구도만으로 정리될 수 없는 다층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런 점에서 《벌새》는 통속화된 여성서사를 염두에 두면서도 그보다 더 많은 내용을 더 복잡하게 이야기하고자 하는 텍스트다. 만약 영화에서 성숙 혹은 성장의 계기를 찾아내야만 한다면, 이 작품이 은희를, 또 감상자들을 세계와 인간의 복잡성을 인식하도록, 그리고 그러한 복잡한 세계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묻도록 인도한다는 점은 반드시 언급될 필요가 있다. 

 

 

II. 

 

《벌새》는 작품 처음에, 그리고 성수대교 붕괴사고 당일을 묘사하는 대목에서 명시적인 문자언어로 지금 여기가 “1994년”의 한국임을 강조한다. 영화는 적어도 세 가지 방식을 통해 1994년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건물과 복식, 생활양식의 고증을 포함한 시청각적인 장치들은 근래 한국에 유행하는 여러 1990년대 재현물에서와 마찬가지로 감상자들의 직접적인 호기심과 향수를 이끌어내는 ‘문화사적’ 재현에 속한다. 두 번째 방식은 TV뉴스를 통해 1994년 한국사회가 겪었던 거대한 사건들을 하나씩 배열하는, 거시적인 역사의 운행을 서술한다는 의미에서 전통적이라 할 수 있는 ‘역사’의 서술(narration)이다. 문화사적 기술(description)이 예컨대 ‘1990년대’와 같이 특정한 시간의 구획을 설정하고 그 구획 내의 시공간을 마치 반복가능한 균질적인 성격을 지닌 것처럼 그려낸다는 점에서 공간적(spatial) 재현의 방식이라면, 전통적인 ‘역사’ 서술은 명확한 시간적 위치를 가진 사건들의 연대기적(chronological)인 배치를 통해 국가, 사회, 인물의 과거에 시간적인(temporal) 운동의 계기를 부여한다.3) 《벌새》는 미국 월드컵의 개막일(6월 17일), 김일성 사망일(7월 8일), 성수대교 붕괴사고일(10월 21일)을 마치 바둑알을 차례대로 하나씩 놓듯이 제시하는 방식을 통해 영화에서 전개되는 일들이 막연한 1990년대 어딘가에서 반복적으로 벌어질 ‘일상’이 아닌, 1994년의 특정 시점에서 벌어지고 있는, 따라서 1994년 한국사의 변화와 함께 움직이고 있는 반복불가능한 사건들임을 강조한다. 이따금씩 멀리서 들려오는 종소리와 같이 원경(遠景)으로만 기능하는 것 같았던 ‘역사’는 마침내 은희가 살아가는 지금 여기의 일상까지도 짓밟고 지나가는 거인의 발뒤꿈치로 등장한다―성수대교 붕괴사고는 그 발자국의 이름이다.

 

앞서 《벌새》가 세 가지 방식으로 1994년을 역사적으로 재현한다고 말했다. 일상의 문화사와 거대한 사건의 역사 외의 마지막 세 번째 방식은 바로 운동사(movement history)다. 적어도 기독교 종말론과 순교자·성인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 볼 수 있는 운동사는 세계에서 억압·곤경과 그에 대한 저항이라는 두 가지 힘을 찾아내고, 역사를 양자의 투쟁 속에서 해방(그것이 무엇이든 간에)이 점차 실현되어가는 과정으로 그려낸다. 운동사의 관점에서 볼 때 현대 한국은 이승만·박정희 이래의 독재정권이라는 억압, 그에 대항하는 1970-80년대의 민주화운동, 그리고 1990년대 이래의 ‘불완전한’ 민주화의 실현으로 이어지는 역사 속에 있다. 《벌새》는 두 가지 장치를 통해 1994년 은희의 일상과 운동사의 서사를 조우시킨다. 하나는 세 번에 걸쳐 짧게나마 강렬한 이미지로 등장하는 철거촌, 그리고 투쟁문구로 가득한 현수막이며, 다른 하나는 두말할 것도 없이 한문학원의 교사 영지와의 만남이다. 영화의 사실상 유일한 “어른”이라고 할 수 있는 영지는 서울대를 “길게” 휴학 중인, 아마도 80년대 후반 학번의 운동권이다. 노동가 〈잘린 손가락〉을 아이들에게 불러주는 데서, 그리고 병원에 자주 와 봤다는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 노동운동을 했을 가능성이 높고, 잠시 머물 직장이 분명했던 한문학원에도 운동 관련 서적들을 한 칸 가져다 놓은 것에서처럼 지금에도 운동권으로서의 정체성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그는 80년대 학생운동의 도덕적 이념을 간직하면서도 지금 자신이 아주 많은 것이 변해가는 세계에 살고 있음을 알기에 쉽게 언어화되지 않는 복잡한 감정을 지닌 인물로 그려진다. 요컨대 영지는 1994년에도, 언제 스러질지 모르는 희미한 형태로나마, 지속하고 있는 “80년대적인 것”의 대변인이며, 영지와 은희의 만남을 통해 은희가 속해 있는 1994년 강남의 일상에 운동사의 계기가 들어오게 된다.

 

나는 앞서 말한 다른 두 가지 역사서술방식과 비교할 때 운동사가 지닌 두 가지 독특한 면모를 강조하고 싶다. 첫째, 운동사의 중추에 있는 고난·억압과 저항·해방의 서사구조는 상이한 역사적 현상들로부터 공통의 본질을 읽어내고 그것들을 연결한다. 예컨대 한국의 진보가 민주화, 마르크스주의, 탈식민주의, 여성주의, 인종 간 평등, 신분차별, 그리고 여러 형태의 소수자운동 사이의 ‘연대’를 서로 봉합될 수 없는 여러 갈등지점에도 불구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운동사의 관점에서 각각의 의제가 동일한 구조의 도덕정치적 관점을 공유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는 사실과 분리될 수 없다. 둘째, 운동사는 단지 사건·사물을 배치하고 서사화하는 것을 넘어 현상에 강력한 도덕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해준다. 과거를 묘사하고 서사화할 수 있으나 그 자체로는 규범성을 산출해낼 수 없는 문화사 및 사건들의 역사와는 달리, 운동사는 거대한 역사적 변화에서부터 한 개인의 삶이라는 가장 미시적인 층위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층위의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고 나아가 행위자들에게 미래의 지침을 일러준다. 운동사는 과거를 해석하는 금형(金型)이자 과거와 미래, 현실과 규범을 하나로 잇는 언어다.

 

영지는 은희의 세계에 운동사를 도입한다. 저 인상적인 “손가락” 장면이나, 병원 복도에서의 대화를 통해 영지는 은희에게 현실의 고통이 어찌할 수 없는 대상이 아니며, 그에 대해 저항하고 대항하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처음 우롱차를 마실 때 오빠의 폭력 앞에서 “그냥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하고 기다”릴 뿐이라고 말하던 은희는 “아무 것도 못할 것 같은” 순간에도 손가락은 움직일 수 있다는 말, 그리고 “누구라도 널 때리면, 어떻게든 맞서 싸”우라는 영지의 말을 듣고 나서 이후 부모의 폭언과 오빠의 폭력에 어떤 형태로든 저항하는 모습을 보인다. 영지가 은희에게 제공하는 가장 중요한 선물은 현실을 해석하고 자신의 태도를 결정할 수 있게 하는 언어 그 자체다. 《벌새》는 1994년의 한국을, 적어도 은희가 속해 있는 강남이라는 일상적 공간을, 그것을 기술할 언어가 아직 도래하지 않은 시공간으로 그려낸다. 영화는 은희가 문자로 언어화될 수 없는 감정을 거친 신체적인 움직임으로 표출하는 장면을 반복적으로 제시한다―학교의 “날라리 색출작업” 이후 지숙과 트램펄린에서 뛰어놀 때, 지완이가 다른 여자아이에게 추근거리는 광경을 목격하고 락카페에서 춤을 출 때, 한문학원에서 쫓겨난 은희를 “성격이 아주 드”럽고 “이상한” 아이라고 폄하하는 어머니의 말에 격분할 때, 그리고 지완과의 최종적인 결별 이후 〈여러분〉에 맞춰 춤인 것도 춤이 아닌 것도 아닌 몸부림을 칠 때. 1994년 은희의 세계는, 어쩌면 한국은 이 모든 일이 잘못되었다는 느낌은 가질 수 있어도 이를 명확하게 해석하고 표현할 언어가 부재한 공간이다. 은희에겐 입이 없다, 하지만 비명을 질러야 한다―영지의 교육은 은희에게 바로 그 ‘입’을 제공해준다. 《벌새》를 은희의 성장담으로 읽을 수 있다면, 우리는 영지가 성수대교 붕괴로 갑작스럽게 퇴장한다는 사실 못지않게 영지의 목소리가 영화의 마지막을 채운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은희는 그 언어를 통해 앞으로 스스로를 구축해갈 것이기 때문이다. 1994년 이후의 은희는 영지가 함축하던 “80년대적인 것”의 언어를, 본인이 아버지의 언어를 매우 다른 맥락에서 다른 용도로 사용했듯이, 다른 용도로 변용할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여전히 약간의 두려움과 불안을 품고 있으면서도 약간 먼 곳을 응시하는 듯한 은희의 시선처리는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으면서 자기 자신과 대화할 수 있는, 고유한 언어를 갖기 시작한 사람의 그것이다.

 

다시 은희에게서 한 발짝 물러나 바라볼 때, 영지와 그를 통해 전체 이야기에 투입되는 운동사의 결코 덜 중요하지 않은 역할은 서로 다른 층위의 역사를 연결하는 데 있다. 《벌새》는 영지 본인이 겪었을 (암시적으로만 등장하는) 1980년대의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1994년 철거촌의 투쟁, 그리고 1994년 강남의 여중생 은희의 삶을 분리되지 않은 것으로 이해할 여지를 제공한다. 영지는 은희에게 “80년대적인 것”의 정신을 전달할 뿐만 아니라, 철거촌의 투쟁을 다소 간의 존중심을 갖고 대하도록 가르치며, 나아가 감상자들로 하여금 철거촌 투쟁과 은희 본인의 삶 사이에 유비관계를 읽어낼 수 있도록 안내한다(영화는 “1994년 10월 21일”의 명시적인 제시를 통해 철거촌 투쟁의 패배와 성수대교 붕괴, 그리고 후에 밝혀질 영지의 사망을 동일한 시간 위에 놓고 보기를 요구한다). 은희는 또 우리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영지의 삶에서 지워질 수 없었던 그 “80년대적인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90년대의 80년대인(들)”이 마주했을 좌절과 혼란이 과연 어떤 것이었는지 끝까지 알 수 없으며 앞으로도 알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지의 삶에 무언가가 존재했다는 사실 자체는, 그리고 그것이 1994년의―그리고 1994년을 돌아보는 사반세기 후의―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에 서사와 의미를 부여하는 하나의 동력이 되었다는 사실은 은희와 우리 모두에게 쉽게 잊힐 수 없다.

 

물론 이것이 《벌새》가 80년대의 운동사를 반복한다는 주장은 전혀 아니다. 영지는 매력적이고 결코 잊혀지지 않지만 어디까지나 은희의 삶에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인물이며, 1994년의 강남은 80년대의 운동의 흔적이 아주 희미한 형태로만 잔존해 있을 뿐이다. 영화는 실제로 1990년대의 80년대인들, 예컨대 여성운동가들의 경로에 대해서는 상세한 설명을 하지 않기를 선택한다. 어떤 점에서 《벌새》는 답답하고 평범한 세계의 은희가 영지라는 신비한 고고학적 유물(artifact)을 발견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이러한 이야기가 종종 그러하듯, 여기서도 현대인이 유물을 발견한다기보다는 유물이 현대인을 먼저 유혹하는 것에 가깝다). 은희는 영지를 통해 자신의 세계에 아주 희미하게만 남아있는 과거의 흔적을 읽어내는 법을 배우고 그로부터 약간의 힘을 얻지만, 마법의 유물은 결국 사라지고―만약 유물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장르가 바뀌어야 한다―삶은 다시 이 세계의 규칙을 따라 움직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흔적의 기억을 통해 세계를 조금 다르게 서사화할 수 있다. 운동사의 잔존물은 1994년의 문화사적 일상, 그리고 그 일상을 찢고 지나간 거대한 사건의 역사보다 더 길고 지속적인 영향력을 갖는 역사적인 서사가 존재한다는 것을 가르쳐준다(당연히도 이러한 서사의 원형이자 종착점은 종말론과 구원사다). 인간을 반복적인 일상에 종속된 자동인형으로, 재난의 스펙타클에 압도당하는 무기력한 존재로 만들지 않는 것은, 그리고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도록 만드는 것은 바로 운동사의 잔존물과 같은 서사적 자원이다. 

 

 

III. 

 

마지막으로 나는 《벌새》를 가장 먼 거리에서, 즉 한국의 담론장에서 80년대적인 것과 90년대적인 것의 관계, 민중주의와 여성(주의)의 관계를 해석해온 관습의 맥락에 두고 바라보고 싶다.4) 실제로 민중주의는 80년대의 모든 것이 아니며 마찬가지로 90년대가 전적으로 여성적인 것의―‘여성적인’ 것이 무엇이든 간에―세계일 리는 없다. 그러나 주로 남성-진보 지식인의 관점이 깊게 침투해있던 한국의 문화정치담론은 80년대 민중주의의 (보통 ‘남성적인’ 의미에서의) ‘건강함’이 90년대의 내면적이고 사적인, 좀 더 공격적인 표현으로는 ‘여성적’인 문화로 퇴행해왔다는 관습적인 구도를 설정했다. 우리가 ‘남성적’과 ‘여성적’의 표현을 좀 더 조심스럽게 사용하게 된 오늘날에도 이러한 공적이고 참여적인 정신에서 사적이고 도피적인, 때로는 속물적인 태도로의 전환이라는 대립구도 자체는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여성주의 문화정치의 일차적인 대응은 ‘운동’이 지나치게 남성중심적으로 재현되고 있음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노동운동을 포함하여 여성들이 운동에 참여해온 여러 사례를 재발굴하는 작업이나, 2017년 영화 《1987》에서 여성인물의 위치와 역할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지를 두고 벌어진 논쟁은 기본적으로 그러한 문제의식의 발로라 할 수 있다.

 

내 생각에 《벌새》는 이러한 문화정치적 논쟁의 구도에 두 가지 방식으로 개입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영화는 운동사의 모티프를 전유하여 80년대와 90년대를 단절된 시공간으로 설정하는 대신 양자 사이에 가늘고 느슨한 형태로나마 연결고리가 존재함을 제시한다. 1994년의 은희는 80년대적인 것을 품고 있는 영지로부터 자신의 세계를 살아나갈 언어를 습득하며, 반대로 영화는 은희의 삶 곳곳이 억압과 저항의 언어로 서사화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90년대 평범한 ‘여중생’의 삶은 80년대 투쟁의 광장만큼이나 불합리한 폭력이 군림하는 공간일 수 있었으며, 역으로 그처럼 내면적이고 사적인 생활의 영역이 운동의 전통으로부터 중요한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동력을 얻는 것이 가능하다. 더불어 《벌새》는 우리에게 운동의 전통이 광장의 ‘남성적인’ 투쟁으로만 수렴될 수 없는 다양한 요소로 이루어져 있었음을 환기시킨다. 다름 아닌 영지의 존재 자체가 보여주듯, 민중주의적 전통은 단지 대중정치적 언어가 아닌 인간의 상에 대한 특정한 이상을 함축한 윤리적인 언어이기도 했다. 그것은 인간이 다른 인간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고난과 역경 앞에서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덕성(virtue)의 언어였고, 영지는 분명 매우 부분적인 형태로나마 그러한 인간성의 이상을 재현한다(개인적으로 나는 영지와 비슷한 인상을 주었던 몇몇 지인을 떠올릴 수 있다). 지금 우리는 “586 진보”가 더는 도덕적으로 완성된 인간의 이상을 제시하지 못하는 세계에 살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때 그러한 이상과 그것을 체현하려 노력하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지금도 그러한 사람들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결론적으로 나는 《벌새》는 페미니스트 서사가 80년대적인 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또 자신의 자원으로 삼을 수 있는지, 그리고 이를 통해 스스로를 어떻게 확장시킬 수 있는지를 탐색하는 텍스트라고 주장하고 싶다. 2010년대 중반 이래 한국사회는 페미니즘의 급격한 확산을 마주했다. 그러나 과거에 비해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이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부른다는 사실이 곧 페미니즘 자체의 확장인 것은 아니다. 특히나 언어, 사유, 혹은 세계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하나의 방법으로서 페미니즘의 확장은 그것이 인간의 성적인 규정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다양한―종종 비극적인―현상에 대한 관심을 간직하면서 세계를, 또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고 기술하는 방식 자체를 더욱 정교화할 수 있는 새로운 경로를 계속해서 풍성하게 창출할 때 가능하다. 《벌새》는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여성주의의 확장을 시도하고 있는 중요한 사례다. 그것은 현대 한국의 구체적인 시공간을 파고 들어가 여전히 (때로는 여러 여성주의자를 포함해) 많은 사람에게 여성주의와 무관한 것으로 여겨져온 영역을 여성주의적 서사와 조우시키고, 이를 통해 여성주의적 서사 자체의 선택지와 지평을 넓힌다―무엇보다도 역사화의 방식에 대한 흥미로운 질문을 던지면서 말이다. 그리고 과거를 어떠한 역사적 서사로 구성할 것인가가 “성장”의 불/가능성을 논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라는 사실은 여성(주의적) 주체의 성장 가능성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이야기다.

 

 


 

 


 

 

1) 물론 영화를 조금 더 복잡하게 읽기 위해 참고할 수 있는 문헌이 없는 것은 아니다. 김보라, 『벌새: 1994년, 닫히지 않은 기억의 기록』(아르테, 2019)에서 저자와 앨리슨 벡델의 인터뷰 및 남다은의 「영지, 우리가 잃어버린 얼굴」; 오혜진·김다은·서은영, 「<벌새>를 보는 세 가지 시선」, 팟캐스트 <혼밥생활자의 책장> 134~135화, 2019년 9월 29일 <www.podbbang.com/ch/11108?e=23197640> 및 <www.podbbang.com/ch/11108?e=23202304>; 이나라, 「픽션과 다큐멘터리 사이에서 (독립)여성으로 다시 쓰기: 「벌새」와 「공사의 희로애락」」, 『안과 밖』 48(2020): 179-201 등을 참고. 그 외 김보라의 여러 인터뷰도 찾아 읽어볼 가치가 있다.

 

 

2) 김보라, 『벌새: 1994년, 닫히지 않은 기억의 기록』, 아르테, 2019, p. 254.

 

 

3) 나는 여기에서 다음 저작을 느슨한 형태로 참고하고 있다: Arnaldo Momigliano, The Classical Foundations of Modern Historiography,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0; J. G. A. Pocock, Barbarism and Religion, 6 vol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9-2015.

 

4) 여기서 나의 문제의식은 무엇보다도 오혜진의 저작에 빚지고 있다. 특히 이우창, 「문학을 지극히 정치적으로 이야기하는 법: 오혜진, 『지극히 문학적인 취향: 한국문학의 정상성을 묻다』(오월의봄, 2019년 4월)」, 『학산문학』 105(2019년 가을): 298-319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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