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사법과 총장선출과정에 관한 두 편의 기고문
Critique 2019. 1. 16. 12:45이번 포스팅은 지난 연말, 현재 대학가의 두 가지 쟁점에 관해 각각 기고한 글 두 편을 나란히 옮긴 것이다. 첫번째 글은 서울대학교 학내언론 <서울대저널>로부터 요청을 받아 현재의 강사법 논쟁의 주요 쟁점을 간략히 정리한 것이고(물론 앞으로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언급하지 못한 새로운 쟁점들이 계속해서 쏟아져나올 가능성이 높다), 두번째는 포스텍·카이스트·서울대 대학원 공동소식지 <POKAS on>으로부터 요청을 받아 2018년의 서울대학교 총장선출과정 준비에 참여한 사람으로서 특히 학생참여문제를 중점에 두고 간략한 해설과 평가를 시도한 글이다. 두 편 모두 해당 주제가 낯설 가능성이 높은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썼기 때문에 너무 어렵지 않게 읽힐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지금까지 여러 차례 언급해왔듯 한국 고등교육의 여러 문제들은 그 중요성과 시급성에 비해 너무나 낮은 관심만을 받고 있으며, 이는 두 사안 모두에서 잘 드러나듯 주요 문제를 풀어나가야 할 권한과 책임을 가진 행위자들의 매우 비효율적이고 수준낮은 선택으로 귀결되는 상황이다. 오늘날 한국 고등교육이 그에 요구되는 공적 책무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고등교육 자체에 대한 더 충실한 지적 노력이 투여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하면서, 내 글이 그러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아주 약간의 기여를 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각 기고문은 다음 링크에서 볼 수 있으며, 편집에 따라 이 게시물에 수록한 버전과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1) 강사법 재개정안 논쟁의 주요 쟁점 이해하기 / 서울대저널 (웹사이트 게재일 2018년 12월 27일)
http://www.snujn.com/news/41598
2) 서울대학교 총장선출과정에 대한 몇 가지 단상 / POKAS on vol. 24(2018)
http://pokas.gsalab.co.kr/webzine/79138 에서 웹진 바로보기 혹은 다운로드 -> pp. 194-199
강사법 재개정안 논쟁의 주요 쟁점 이해하기
10월 말부터 현재까지 한 달 반 가까이 대학가를 술렁이게 했던 강사법 재개정안(고등교육법 일부개정안) 논쟁은 한편으로 시행일이 한 학기를 지난 2019년 8월 1일로 결정되면서, 다른 한편으로 12월 8일 국회 본회의 의결에서 288억 원의 강사처우개선비가 2019년 교육부 예산으로 책정되면서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게 되었다. 서울대학교의 경우 11월 20일 공개된 학장단의 강사법 재개정안 반대입장문을 제외하면 본부 및 각 학과 내부에서 이뤄진 대책논의내용이 거의 공개되지 않았기에 학부생 독자 다수에겐 조금 먼 이야기로 느껴질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먼저 최근 강사법 재개정안 논쟁을 둘러싼 주요 사건의 전개를, 다음으로 어떤 쟁점들이 문제로 남아있는지를 간략히 훑어보기로 하자.
강사법 재개정안 논쟁은 일차적으로 대학 시간강사를 보호하는 제도적 장치가 부재하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한다. 1980-90년대 대학원(생)의 급격한 팽창은 대학 정규직 교원 자리 증가량이 그에 못 미치는 상황과 맞물리면서 수만 명의 시간강사가 발생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대학은 정규직 교원을 확충하는 대신 매우 낮은 인건비로 다수의 시간강사를 활용하는 ‘경제적인’ 방침을 채택했다. 문제는 이때 강의배정을 결정하고 강사료를 지급하는 주체인 학교·학과·정규교원이 자신의 우월한 지위를 악용할 가능성으로부터 시간강사를 보호하는 최소한의 법적 장치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현 강사법 재개정안 논의의 직접적인 출발점인 2010년 故 서정민 선생(당시 조선대 시간강사) 자살 사건의 유서에는 시간강사가 교수임용·강의배정 결정권을 쥔 교수에게 종속되어 다량의 논문대필을 포함한 부당한 지시에 그대로 노출되는 최악의 사례가 그대로 나타난다. 해당 사건을 계기로 시간강사에게 교원지위를 부여하고 수업배정의 안정성을 확보하려는 두 가지 방향을 골자로 하는 강사법 제정 시도가 시작되는데, 2011년 12월 처음으로 국회를 통과했던 강사법이 현재의 재개정안으로 나타나기까지는 7년 가까운 시간이 소요되었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먼저 시간강사 처우 개선을 위해 대학측의 책임부담을 올릴 때 시간강사가 대량으로 해고되리라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실제로 대학강사제도개선협의회의 지적에 따르면 지난 10년 간 강사법 시행 가능성이 높아질 때마다 대학에 고용되는 시간강사 총인원이 급격히 감소하는 변화가 관찰된다. 다음으로 대학의 강사해고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등을 두고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과 전국대학강사노동조합의 두 시간강사노조 간의 의견차가 좁혀지지 않으면서 교육부와 국회 교육 관련 의원실 모두 제대로 개입하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되었다.
2011년 이후 유예만 네 차례였던 강사법 논의는 2018년 초 두 시간강사노조와 대학·국회·교육부 측 인원이 함께한 대학강사제도개선협의회의 발족과 함께 전기를 맞이한다. 약 5개월에 걸친 논의가 끝난 8월, 협의회는 여러 쟁점을 차후의 과제로 넘기면서 ①강사에게 교원지위 부여(신분보장 등 교원의 법적 권리를 부여) ②강사 기준·기간 등 임용관련 규정(최소 1년 임용 보장, 3년까지 재임용절차 보장) ③공정성 담보·공개임용원칙 등의 임용절차 규정 ④강사와 겸임·초빙교원 수업시수를 매주 6-9시간 이하로 제한하는 시수 규정 ⑤퇴직금 및 방학기간 중 임금 지급 등을 골자로 하는 대학 강사제도 개선안을 제시했다. 처음에는 충분한 관심을 받지 못했던 합의안은 강사법 재개정안의 입법 가능성이 점차 가시화한 10월 하순부터 대학·고등교육관련 인사들의 논쟁을 촉발한다. 주 쟁점은 결국 현재의 대학재정 내에서 대학의 추가부담을 요구하는 강사법 재개정안이 시간강사의 대규모 구조조정을 촉발하게 될 가능성이었다. 아름다운 대화가 이루어졌다고 말하기는 힘든 지난 한 달 반의 비효율성은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 서울대 학장단을 비롯하여 강사법 비판자들 중 일부는 법안내용 및 교육부의 추가방침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사실관계에 반론의 여지가 있는 비판을 섣불리 제기했다. 강사법 지지자들 중 일부는 부분적으로는 강사법을 반드시 통과시켜야 한다는 필사적인 의지에 따라, 또 부분적으로는 지난 7년 간 강사법에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전임교원들이 이제 와서 법안을 비난한다는 (어느 정도는 정당한) 분노에 따라 다소 감정섞인 비난으로 응대했다. 가장 저급한 모습은 강사법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실제로 필요한 범위 이상으로 거대한 대규모 강사구조조정안을 계획하고 교육환경을 대대적으로 악화시킬 것을 천명한 일부 사립대학 운영진에서 나타났다. 가장 적극적으로 교육의 질을 저하시키고자 한 K대학교와 Y대학교는 소위 한국 명문사학의 교육적 책임감이 어느 정도인지 잘 보여주었다. 법안 통과를 주도한 교육부와 국회 교육위원회가 사태에 어느 정도까지 대비했는지, 정책적 시그널을 충분히 효과적으로 제시했는지도 한번쯤 비판적인 시선을 던질만한 지점이다. 정확한 자료가 공유되지 않고 서로에 대한 불신만 높은 상황에서 생산적인 논의가 전개되지 않은 건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 와중에 법안은 11월 15일 국회 교육위원회 전체회의를, 29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고, 12월 8일 예산안 의결까지 마무리되면서 어느 정도 기정사실이 된 듯하다. 그러나 당초 교육부가 요청한 금액의 절반 정도인 288억 원만이 예산에 반영되었음을 감안하면 다음 9개월 혹은 그 이후에도 우려와 논란은 계속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요컨대 강사법 논쟁은 현재진행형이며 논쟁의 결과는 여전히 우리의 교육환경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이다.
다음으로 지적하고 싶은 점은 강사법 논쟁이 지금까지 언론 및 논쟁에서 조명된 것 이상으로 고등교육 상의 다양한 쟁점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는 그중 일부를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가장 쟁점이 되는 대학 재정 문제를 살펴보자. 이 주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등록금 문제부터 짚어야 한다. 2000년부터 2008년까지 대학 등록금(기성회비 포함)은 국공립과 사립을 가리지 않고 연 평균 5-9% 안팎의 범위에서 지속적으로 상승했으나, 이후 이명박 정권 하에서 ‘반값등록금’ 논의가 현실화되면서 지난 10년 간 등록금 인상은 사실상 정체 상태를 지속하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재정의 등록금 의존율이 높은 한국 대학이 재정을 확충할 가장 중요한 수단이 막혔다는 뜻이다. 지금까지 대학들이 이 난관에 대응해온 방식은 크게 세 가지 경향으로 요약할 수 있다.
①산학협력·기부금모금사업·기타 투자 및 수익사업 등 대학이 직접 재정을 획득하는 방법의 경우 충분한 자원을 가진 대학과 아닌 대학의 차이가 크게 나며, 대표적으로 I대 사례처럼 투자 실패로 인한 재정위기의 위험문제가 있다.
②여러 정부재정지원사업으로 재정을 충원하는 방안은 역시나 이미 유리한 위치에 있는 일부 대학이 더 많은 재정지원을 확보하기에 유리하다는 사실을 감안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재정지원의 주체인 정부 혹은 정권의 의도에 따라 대학운영이 좌우되는 위험·불편을 발생시킨다.
③인건비를 비롯해 대학의 지출 자체를 감소시키는 방법은 필연적으로 교육·연구의 질을 하락시키는 결과로 이어진다. 학내에서는 전임교원이 과도한 양의 교육책임을 무리하게 맡으면서 학생들이 수강하는 수업의 질이 하락하고, 직원에 대한 저투자는 비효율적인 교육행정으로 이어지며(H대 등 일부 사립대학 대학원 행정 이야기를 들어보면 충격적이다), 지난 수년 간 서울대가 겪었듯 인건비 감축을 위한 무리한 인사정책으로 학내 분규가 발생할 가능성도 커진다. 학계 전체로 보면 다양한 분야를 연구하고 가르칠 교원 자리 자체가 열리지 않으면서 학위를 마친 연구자들의 일자리가 사라지는 결과를 낳는다.
현 시점에서 강사법 재개정안 통과에 대학들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 중 하나는 대학의 긴축재정운용이 점차 한계에 부닥치고 있는 상황에서 강사법이 앞서 언급한 세 번째 경향과 정면으로 충돌하기 때문이다(사립대학의 재단적립금을 활용하자는 주장은 사립학교법을 개정하지 않는 한 실현가능하지 않으며 모든 사립대학이 충분한 적립금을 축적하고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결론적으로 정부재정지원을 그만큼 추가로 투입하거나 등록금 통제를 해소하지 않는 한 강사구조조정 자체를 완전히 막기란 불가능하다.
대학 재정 문제를 이해하고 나면 왜 강사법 재개정안 논쟁이 교육의 질 하락 논란으로 이어졌는지도 쉽게 알 수 있다. 대학이 인건비 인상압력에 대응하기 가장 쉬운 방식은 강사고용인력 자체를 줄이고 기존의 전임교원을 더 많이 활용하는 것이다. 이는 전임교원이 담당하는 과목 수를 늘리고 강의를 대형화하며 (고려대가 계획했던 것처럼) 학생이 졸업까지 수강해야 하는 과목 수 자체를 줄이는 결단(?)까지도 포함할 수 있다. 학생들의 선택지는 줄어들고, 과목 당 수업의 질도, 졸업생의 평균적인 지적 역량도 하락한다. 한국에서 아직 고등교육의 질이라는 주제가 진지하게 다뤄진 적이 드물다보니 이 문제의 위험성이 잘 인지되지 않고 있지만, 교육의 질 하락은 장기적으로 매우 심각한 악영향을 낳을 수 있다.
상대적으로 적게 언급되었지만 결코 덜 중요하지 않은 쟁점은 임용기간 보장에 따른 강사활용 경직성 문제다. 이 규정의 의도는 시간강사의 고용안정성을 어느 정도 보장하는 것이지만, 세부적인 논란거리가 대략 세 가지 정도가 있다. 하나는 학문·현장의 변화가 워낙 빠른 분야에서 다양한 강사들을 그때그때 초빙해 짧게 수업을 맡겨야 하는 학과에서 이 규정이 장애물로 작용할 가능성이며, 다른 하나는 최대한 여러 명의 강사들에게 조금씩 수업을 배분하여 교육적 수요와 교수자의 경제적 수요를 충당하는 소규모 학과에도 이 규정이 적절할지의 문제다. 세 번째는 임용기간 보장과 강사들 간의 공개적인 경쟁이 (상대적으로 실적이 없는) 학문후속세대, 즉 새로 박사를 마친 젊은 연구자의 기회를 박탈할 수 있다는 우려다. 나는 이것들이 현행 강사법 재개정안 내에서 시행령 등을 통해 기술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고 판단하지만, 적절한 시행령을 도출하기 위한 진지한 논의가 뒤따라야만 한다.
마지막으로 아무도 언급하지 않지만 거시적인 고민이 필요한 부분은 강사법 시행 반년 뒤 2020년이 대학입학생 감소가 본격화하면서 전국적인 대학 구조조정이 가속화될 때라는 것이다. 이때 현재의 강사법규정이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 강사법이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으면서 시간강사·연구자를 효과적으로 보호하려면 어떤 조치들이 추가로 필요한가를 미리 파악해서 대처하지 않으면 우리가 예측하지 못했던 사항들이 발목을 잡을 수 있다. 유감스럽게도 한국 사회는 고등교육의 변화를 분석·예측하고 유효한 정책을 제시할 전문적인 기구만이 아니라 미래의 고등교육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제대로 된 구상을 결여하고 있기에—이는 자대 대학원에 관한 기초적인 자료생산기구조차 보유하지 못한 서울대도 마찬가지다—나는 우리가 학령인구수 감소라는 위기에 얼마나 효율적으로 대처할지에 다소 비관적이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사실 하나가 있다면, 이제 한국 고등교육은 지금까지 얼기설기 만들어온 시스템으로 미래를 무리 없이 헤쳐 나가기 불가능한 시점에 도달했으며 우리 모두 좀 더 진지하게 이 문제를 다루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 글이 소수의 독자들에게나마 그러한 계기를 제공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서울대학교 총장선출과정에 대한 몇 가지 단상
2018년은 약 70여 년 간에 걸친 서울대학교 역사에서 유례없이 기이한 해로 기록될 것입니다. 1학기에 선출된 총장후보가 여러 불미스러운 이유로 사퇴를 선언함에 따라 2학기에 다시 총장선출을 진행하는, 한 해에 총장을 두 번 선출하는 사태가 벌어졌으니까요. 전 총장 임기 말년이 사실상 공공연한 레임덕 시기였음을 감안하면 한 해 동안 한국 최대 규모 대학의 행정이 극심한 기능부전에 빠져 있다고 이야기해도 아주 틀리진 않겠습니다. 바깥에서라면 한심해하거나 비웃고 지나가면 될 일입니다만, 삶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요, 가까이서 겪으면 비극이란 말은 슬프게도 두 차례의 총장선출과정에 휘말려 들어 여러 일들을 처리해야 했던 제게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다음 달 학위논문 프로포절 제출을 앞에 두고 부족한 시간에 허덕이는 저의 사연은 개인적인 것으로 남겨 두기로 하고, 지금은 이 과정에서 보고 느낀 몇 가지 중요한 사항을 짧게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어떻게 서울대 학생들은 총장선출과정에 참여하게 되었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서울대학교 학생사회·총학생회의 정치적 목표설정에 중요한 분기점을 제공한 것은 2011년도의 서울대학교 법인화 강행이었습니다. 반값등록금·교육공공성·학문후속세대의 어려움 등 대학교육환경의 미래를 둘러싼 우려가 전국적으로 높았던 당시의 상황에서 법인화 강행은 학생사회의 담론장에 세 가지 지점에서 커다란 충격을 주었습니다. 첫째, 이후 법인화 추진 당사자들이 직접 인정하기도 했지만, 서울대학교의 운명을 바꿀 거라는 법인화에 대한 논의 및 입법이 지나치게 졸속으로 추진되었습니다. 둘째, 이 과정이 몇몇 사람들로 한정된 소집단에 의해 진행되는 과정에서 학생들의 의문이나 우려, 관심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셋째, 여기에 대해 발언하고 개입할 권한을 가진 교수 대다수는 법인화 추진과 그 결과를 잘 이해하기는커녕 대체로 별다른 관심이 없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요약하면 학생들의 교육·연구환경에 무엇이 필요한지 학교와 교수들이 알아서 잘 파악하고 처리해 줄 터이니 학생들은 학교일에 신경 쓰지 말고 공부만 잘 하면 된다는 믿음이 근본에서부터 심각하게 손상된 것이죠. 기존 학생사회의 입장들, 즉 사회운동을 주장하는 학생운동계열이든, 학교 본부와 협력하여 일상생활의 편의를 확보하자는 학생복지계열이든, 아니면 학교 본부의 학생사회 개입을 거부하는 입장이든 간에 이제는 모두 학교운영에 대한 참여와 견제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고민이 현실적인 의제로 바뀌게 된 계기는 2016년 후반 학생들의 서울대학교 본부점거를 낳은 서울대의 시흥캠퍼스 추진이었습니다. 시흥캠퍼스 추진은 나름 10년 가까운 역사를 지닌 무척 복잡하고 까다로운 사안입니다만 여기서는 우리 이야기에 필요한 몇 가지 사실만 짚어봅시다. 2016년 시흥캠퍼스 추진은 크게 두 가지 점에서 문제였습니다. 학생사회에서 이 문제에 촉각을 곤두세운 가장 큰 까닭은 처음 시흥캠퍼스가 추진될 때 기숙형 대학(Residential College)를 전제로 하여 신입생부터 수천 명을 의무적으로 시흥캠퍼스에 배치한다는 구상이 제시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구상을 일방적으로 통보받은 수많은 학생자치단체들이 당연히 반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죠. 전체 학교 차원에서 볼 때 가장 심각한 문제는 사안이 학생대표기구는 물론이고 교수·직원 단체들을 포함한 다른 구성원들과 거의 제대로 된 논의 없이 총장과 직속 부하 몇몇에 의해 진행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학생대표가 참여하는 전체 협의체를 만들어놓긴 했지만 유의미한 정보를 제공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사실상 기능정지 상태였고 실제 업무가 어떻게 얼마나 처리되었는지 알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던 걸로 보입니다. 8월 서울대학교와 시흥시 간 실시협약이 체결될 때 본부 직원들조차도 뉴스를 보고 그 사실을 알았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해, 2016년 후반부에는 당시 전국적인 이슈였던 최순실-박근혜 게이트와 총장의 일처리가 비교되기까지 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학부생이 2천 명이 넘게 모여 비상총회가 성사됨에 따라 수개월에 걸친 본부점거가 시작됩니다.
기존의 제도가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할 때 새로운 세력이 자리를 파고드는 건 서울대도 예외는 아닙니다. 사실상 학생·교수·직원·비정규직 모두로부터 따돌림을 당하는 상황이 된 총장은—보다 중앙집중적 의사결정구조를 가진 카이스트나 포스텍에서는 이 상황이 낯설 수 있을텐데, 서울대는 비유하자면 각 단과대학을 단위로 하는 봉건영주집단 혹은 호족연합체에 좀 더 가까워서 총장도 다른 영주의 권한을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곳입니다—어쩔 수 없이 타협을 제안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는 그러한 논의의 결과물 중 하나가, 비록 정책평가에서 5% 반영이라는 상징적인 값이긴 하지만, 학생들의 총장선출과정 참여라는 사실만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국정농단 사태의 도화선이 된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본부점거 이후 총장이 교체되면서 학생들이 총장선출에 참여한 예에서처럼 2017년부터 전국 각지의 대학에서 학생들이 총장을 선택하는 흐름이 나타난 사실도 감안해야 합니다. 어쨌든, 법인화가 강행되던 2011년으로부터 7년 만에 학생들이 총장선출과정에 진입한 것이죠.
2. 두 번의 총장선출, 무엇이 문제였나?
역사에서 하나의 큰 변화가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좀처럼 없습니다. 근본적인 난점이 하룻밤 새에 사라지는 일은 드물고, 보통은 그 이후에 새로운 골칫거리들이 사이좋게 옹기종기 모여앉아 사람들을 기다리기 마련입니다. 서울대 총장선출과정의 변화도 짧은 기간 동안 급작스럽게 논의가 진행된 만큼, 그리고 이전에 졸속으로 만들어진 법인화법의 틀 안에서 이루어진 만큼 여러 문제가 그대로 남아있었지요. 여기서는 두 학기 연속으로 진행된 두 차례의 총장선출과정에서 나타난 곤란한 지점 중 크게 두 가지만 짚어보겠습니다.
첫째, 안 그래도 기묘한 서울대 총장선출과정에 조잡한 운영까지 더해졌습니다. 법인화 이후 서울대 총장선출과정은 비직관적이기로 악명이 높은데요, 최대한 간단하게 설명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총장추천위원회가 여러 지원자들 중 다섯 명의 총장예비후보자를 선발한다.
② 다섯 명에 대해 정책평가를 실시한다: 정책평가는 총장추천위원회가 25%, 교직원이 70%, 학생이 5% 정도를 차지한다.
③ 이때 교직원은 정책평가일 당일 랜덤하게 단과대학 별로 평가자들을 지명, 이들 중 연락을 받은(!) 사람을 특정한 건물에 모아 후보들을 평가하도록 하며, 학생들은 사전에 온라인으로 평가단에 등록한 사람에 한해 당일 투표 링크가 첨부된 문자를 받고 모바일로 접속하여 후보별로 점수를 매긴다.
④ 정책평가 점수가 나온 뒤 총장추천위원회가 상위 후보자들 2-3명을 선발하여 이사회에 추천하고 이사회가 최종적으로 총장후보를 선정하면 교육부 제청을 거쳐 대통령이 임명한다.
심지어 교수들조차 잘 이해하기 힘든 절차다보니 다양한 문제들이 나타나는 건 필연적이겠죠. 대표적으로 불거진 것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교직원 20명, 외부인사 10명으로 구성된 총장추천위원회에 과도하게 많은 권한이 부여되었다는 사실이 지적되었죠. 이 30명이 예비후보 다섯 명을 선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정책평가에서까지 25%라는 매우 커다란 비중을 행사하는 상황은 아무리 봐도 견제와 균형의 원리에 부합하지 않는 게 사실입니다. 다음으로 1학기의 총장후보 사퇴에서 현실화되었듯 후보의 각종 비위사실검증을 포함해 전체 선출과정에서 요구되는 여러 상황에 대한 고려가 규정에 제대로 반영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 총장추천위원회가 많은 권한을 갖고 책임은 거의 없는 기구라는 사실을 제외하면 제대로 정해진 게 거의 없는, 다소 급하게 대충 만든 티가 역력한 선출제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둘째, 실제 총장예비후보들의 공약도 상당히 실망스러운 수준인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여기서 일일이 공약을 짚어 비판하지는 않겠습니다만, 학교 재정운영상 감당하기 힘든 대규모 지출이 예상되는 선심성 공약이나, 본인이 총장에 선출되면 획기적인 방식으로 재정을 확충하겠다거나 하는 식의 비현실적인 공약이 무책임하게 남발되는 상황에 여러 구성원들이 한심함을 감추지 못하는 구도가 반복되었습니다. 특히 저는 후보들의 교육과 대학원 관련 공약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았습니다만, 정책평가에서의 낮은 학생비율을 반영이라도 하듯 교육과 학문후속세대 관련해 일정 이상의 이해도를 갖추고 준비했다는 생각은 도저히 들지 않더군요. 전인교육·인성교육·공동체의식을 강화하겠다는 이야기들이 반복되면서 이렇게 낡은 구호를 되풀이하는 사람들이 지금 2030세대의 가능성을 키워준다고 주장하는 게 상당히 부조리해보였습니다.
2학기 후보들의 공약에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지점을 몇 가지 짚어보겠습니다. 1학기 총장선출과정에서 분수령이 된 것은 교직원 정책평가였습니다. 후보들 간의 차이가 비교적 근소했던 학생정책평가와 달리 교직원 정책평가는 흥미롭게도 마치 평가자들이 몰아주기라도 한 것처럼 후보 간 점수차가 상당히 컸고, 이것이 결국 1위 후보자를 정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지요. 그에 따른 학습효과인지, 2학기 총장예비후보들의 공약은 이른바 ‘교직원 포퓰리즘’이라 할만한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다수의 후보들이 교수 임금을 몇 %씩, 혹은 얼마 씩 인상하겠다는 공약을 걸었습니다(1학기에는 총장선출 1위 후보자가 유일하게 교원 임금인상을 구체적으로 언급한 후보였습니다). 더불어 모든 후보가 서울대의 위기를 탄식하면서 본인이 나서야 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현재 서울대의 사회적 신뢰도를 하락시킨 다양한 교원 비위문제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지요. 간단히 말해 ‘교직원들이 싫어할 이야기는 전부 빼고, 좋아할 이야기는 최대한 넣자’가 모두의 모토였습니다. 거기에 1학기 총장선출과정에서 인기를 끌었을 법한 공약들을 2학기 후보들이 성실히 참조(?)하면서 심지어 후보들이 스스로 지적할 만큼 일종의 공약수렴현상이 발생하여 다수의 후보가 비슷비슷하게 되어버리는 상황까지 초래됐습니다. 마치 급우들에게 빵과 피자를 돌리는 초등학교 반장선거의 느낌이었달까요—물론 요즘 초등학생들은 그보다는 더 세련된 것 같지만요. 이 글이 공개될 때쯤엔 다음 서울대 총장이 누구일지 결정되었으리라 예상합니다만, 솔직히 저는 누가 되어도 크게 기대가 되지는 않고요, 이런 생각이 저만의 의견이 아닌 건 분명합니다.
3. 서울대 총장선출과정에서 교훈이 있다면?
한 가지 희망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우리는 나쁜 사례에서 더 배울 게 많습니다. 두 차례에 걸친 서울대 총장선출과정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저는 적어도 다음의 사실 하나는 분명해졌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교직원들만의 의사결정으로 대학이 잘 운영될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두 차례의 총장선출과정에서 (대다수가 60대 남성들이었던) 후보자들은 대체로 본인 세대의 한계 내에서 대학교육을 이해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저를 포함해 공약을 면밀히 검토할 기회가 있었던 학생들은 후보들의 교육관이 좁게는 지금 학생들에게, 크게는 2020년대 한국 고등교육에 필요한 시야와 안목을 결여하고 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좀 더 심각한 문제는 앞서 언급한 ‘교직원 포퓰리즘’입니다. 학교 운영에 학생참여가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교수들의 강력한 전제는 ‘학생들은 자신들의 좁은 이해관계에 휘둘리기 때문에 전체 학교 운영을 결정할 지적 역량이 없다’는 것이죠. 두 차례의 서울대 총장선거는 교직원들도 그런 점에서 딱히 더 낫지 않다고, 적어도 후보들은 그렇게 판단하고 공약을 준비한다는 점을 보여주었습니다. 합리적인 현실인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교수들도 학생 못지않게 제한적인 판단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차라리 학생들의 참여 비율을 일정 정도 이상 높이는 쪽이 전체 대학의 발전을 위해 더 효율적일 수 있겠다 생각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현재 학생들이 총장선출에 참여하는 대학이 점차 늘어나고 있는 추세를 고려할 때 학생 측이 무엇을 준비하는 게 좋을지를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첫째, 물론 참여 자체가 갖는 상징적인 의미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만, 선출과정 전체에서 어느 정도 유의미한 지분을 차지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전체 과정에서 학생들의 비중이 너무 낮다면 총장선출에 참여를 한다고 해도 후보들의 공약에 학생들에 대한 고려가 거의 반영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둘째, 학생의 교육환경이나 전체 대학의 발전에 관한 영역에서 학생들이 중요한 주제들을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음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정치적인 이유에서든 아니면 세대 간 감각의 차이에서든 오늘날 대학에 필요한 의제들을 현재 총장후보자들이 제대로 다루지 못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셋째, 총장선출 절차를 규정하는 단계에서 (발언권을 가질 수 있다면) 세세한 지점까지 미리 준비하고 들어가야 합니다. 현재 서울대 총장선출과정처럼 후보들 간의 진지한 토론은 물론 공약에 대한 공개적인 논의·검증 자체가 불가능하다면 당연히 대학에 필요한 건설적인 논의까지도 막아버리고 허황된 공약만을 남발하게 하는 결과를 낳을 것입니다(물론 각 학교마다 처한 상황이 다른 만큼 필요한 제도적 장치도 다를 것입니다). 올해 서울대학교의 시행착오가 부디 모두에게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기만을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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