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던 피터슨, <의미의 지도>에 대한 코멘트: <12가지 인생의 법칙> 한국어판 출간에 부쳐

Comment 2018. 11. 3. 15:17
조던 피터슨(Jordan B. Peterson)의 베스트셀러 자기계발서 <12가지 인생의 법칙: 혼돈의 해독제>(_12 Rules for Life: An Antidote to Chaos_, 2018)가 원서 출간 후 10개월만에 국역출판되었다. 한국에선 이전부터 피터슨이 북미의 대표적인 안티페미니즘 셀럽으로 수용되어 왔으며--그의 영상 및 스크린샷을 통한 번역소개는 이미 꽤 널리 퍼져있다--그에 따라 안티페미니즘·남성성·북미지식인(?)에 목말라 있던 일부 독자층과 보수언론에서는 적지 않은 기대를 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11/03/2018110300106.html 및 https://www.aladin.co.kr/m/mproduct.aspx?ItemId=172152642). 오세라비가 보여주었듯 안티페미니즘 계열 저자들에 대한 출판시장의 수요는 이미 일정 부분 있는데다가 한국의 많은 독자들은 "아마존 베스트셀러"라면 일단 믿고 사보기 때문에, 비록 한국에서 이러한 '정신 똑바로 차려라!'식의 자기계발서 유행은 몇 년 전에 사그러들긴 했지만, 번역출판사가 손해를 볼 일은 별로 없으리라 생각된다.

나의 의문은 다음과 같다. 광고문구에서 '세계적인 지식인'·'우리 시대의 사상가'처럼 소개되는 조던 피터슨은 실제로 얼마나 진지하게 읽을만한 저자일까? 안티페미니스트의 대표로 불리지만 실제로 읽어보면 매우 괜찮고 지적으로 존중할만한 저자도 있을 수 있고, 페미니스트 독서시장에서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지만 막상 실제로 보면 별 내용이 없는 저자도 있을 수 있다. 북미의 대중독자라고 해서 딱히 한국의 대중독자보다 더 신뢰할만한 감식안을 가진다는 증거 따위는 없으며, 어떠한 저자가 한국 시장에서 소개·수용되는 방식과 그 저자가 속한 보다 전문적이고 진지한 지적 세계에서의 실제 위상·평가가 결코 동일하지 않다는 걸 특히 나와 같은 외국문학 전공자들은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다. 신뢰할 수 있는 수준높은 리뷰문화가 부재한 환경에서, 출판사 광고문구야 말할 것도 없고, 그다지 지적이지 않은 언론리뷰 몇 건, 그보다 결코 더 낫지않은 한국의 이른바 사회지도층·명사들의 평가·추천사를 통해 해외 저자의 사유를 이해하고 평가하기란 무척 어렵다. 특히 피터슨처럼 관련 분야에서 신뢰할만한 전문가를 찾기 힘든 경우라면 따라서 어쩔 수 없이 한국에 소개되지 않은 책을 직접 읽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조던 피터슨이 1999년에 출간한 좀 더 진지한 저작, 출판사 소개문구에 따르면 "종교심리학의 새로운 지평을 연 명저"로서 "이제는 고전이 된 책"이라는 <의미의 지도: 믿음의 고고학>(_Maps of Meaning: The Architecture of Belief_)을 간략히 훑어보기로 했다. 조금 두꺼운 이 책의 서언(Preface)의 말미에서 피터슨은 친절하게도 자신이 각 챕터의 앞부분마다 요점을 정리해놓았으니 그것만 읽어도 전체적인 책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고 써놓았고 나는 그를 신뢰하기로 했다. 다음은 서언, 챕터별 요약, 결론, 주석(*주석과 참고문헌을 훑어보는 건 시간이 없을 때 연구서의 성격을 빠르게 파악하는 방법 중 하나다)을 읽고 몇 가지 특징을 주관적으로 정리한 내용이다.

1. 조던 피터슨은 절대로 우리가 생각하는 통상적인 의미의, 그러니까 경험적 과학에 기초해서 연구하는 그런 심리학자가 아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영향력을 준 저자는 다름아닌 칼 구스타프 융(C. G. Jung)으로, 집단무의식과 신화학적 관점이 <의미의 지도> 전체 사고를 형성하고 있다. 실제로 텍스트 전체에서 가장 일관되게 인용되는 사람들은 융(및 노이만 같은 그의 제자들), 니체, 미르체아 엘리아데, (20세기 중반 영문학연구에서 신화 비평으로 유명한) 노스롭 프라이 등이다. 나는 심리학 전공자가 아니라서 이런 책이 심리학계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짐작하기 힘든데, 내게 익숙한 사상·문학 쪽에서 보자면 피터슨의 1999년 저작은 20세기 초반에서 1960-70년대 정도까지 통용되었을 관점으로 집필되어 있다.

2. Preface를 읽어보면, 청교도/개신교 문헌에 대한 최소한의 감각이 있으면 바로 알아차릴 수 있지만, 딱 개신교의 회심(Conversion)·거듭남, 변화(transformation) 내러티브에 입각해 있다. 서언과 결론(Conclusion)에서 저자 스스로 밝히는 내용을 정리해보면, 1962년 생인 저자는 어릴 적부터 핵전쟁에 대한 종말론적 두려움을 가진 사람이었고(특정 시기에는 멸망에 대한 악몽을 계속 꿀 정도였다), 보수적 개신교 가정에서 자라다가 교회를 버렸다. 청소년기에는 나름 대학에서 정치학 전공하면서 캐나다 신민주당(NDP)을 지지하는 좌파적 운동도 해보지만 조지 오웰을 읽고 하면서 다시 또 그만둔다. 이후 대학원에서는 심리학을 전공으로 죄수들을 관찰하거나 등을 하면서 인간의 파괴적 본성(?)이야말로 세계의 현실(real)이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는데, 정신적 방황 중에 융의 책을 읽으면서 일종의 개안(!)을 한다. 결론에서 이야기하듯 이후 (다소 자기식으로 해석한) 예수와 복음은 그의 정신적 토대 중 하나가 되었다. 불신·무의미·좌파적인 삶에서 종교와 신화, 복음으로 되돌아오는 전형적인 개신교 내러티브라고 이해하면 되겠다.

*별개로 남성다운 삶과 그에 부합하는 상징을 계속해서 제시하고 또 강한 남자가 되기를 요구하는 저자가 정작 Preface 등에서 자신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자신의 취약한 남성성과 육체--마르고, 체구도 작고, 힘도 없는--에 대한 열등감을 곳곳에서 토로하는 건 무척 재미있는 지점이다.

3. 책에서 그가 설명하는 전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세계의 근본에는 '혼돈'(Chaos;=nature, unexplored=the Great Mother) 대 '질서'(Order; =culture, explored=the Great Father)의 긴장어린 공존관계가 있다. 이 두 가지 항과 함께 중요한 제3항이 양자를 오가며 매개하는(mediate) 존재인 원형적 개인(the archetypal individual, =the Divine Son, Jesus)이다. 즉 위대한 아버지=(질서와 확실성을 상징하는)문명과 위대한 어머니=(파괴적이고 창조적이며 불확실한)자연과 양자 사이에 있는 인간 개인의 세 항으로 이루어진 상징적 체계가 곧 세계 원리의 표현으로 제시된다. 피터슨은 여기서 인간·세계이 완전히 혼돈에 장악되어도 망하고, 반대로 질서에 너무 길들여져서 혼돈을 제대로 대면할 수 없게 되어도 망한다는 논리를 전개한다. 파시즘과 전체주의, 데카당스는 혼돈을 대면할 수 없는 인간이 질서에 강박적이 되어 다른 걸 용납하지 못한다거나 만사를 포기하거나 할 때 나타나는 유형으로 제시된다. 이런 세계에서 인간이 선택해야 하는 올바른 길은 세계의 도덕적 질서를 존중하되 자신이 알 수 없는 혼란들이 계속 침투한다는 걸 인정하고 대신 개인적인 이해(Personal·Individual Interest; 단 interest가 정확히 어떤 함의까지 담고 있는지는 다소 불분명하다)에 집중해서 사는 길이다. <12가지 인생의 법칙>도 그 부제 "혼돈의 해독제"에서 볼 수 있듯 이러한 관점의 연장선에 있는듯 보인다.

2) 위의 3항 구도에서 바로 알아차릴 수 있듯 조던 피터슨의 세계관은 기본적으로 기독교 변종과 신화학의 기묘한 조합이다(저자는 기독교 철학의 근본적인 뿌리가 그노시스주의에 기초한다고 주장한다). 책 후반부에 가면 연금술(...) 이야기가 한참 나오는 부분도 있고, 세계를 파괴하면서도 창조시키는 혼돈의 용("dragon of chaos", 이런 신화학에서 그렇듯 종종 여성, 어머니랑 동일시되는)에 대한 언급도 엄청나게 자주 나온다. 사회의 혼돈과 무질서는 이런 용이 돌아와서 준동을 부리는 걸로 묘사되고, 용을 막아내는 게 인간문명과 도덕적 질서를 지키는 일이다--이때 인간은 자연스럽게 "기사"(Knight)로 표상된다. 피터슨은 이런 상징적 설명틀이 여러 사회적 변화를 설명할 수 있는 기본적인 논리라고 믿는다. 물론 (도스토예프스키가 종종 인용되는 데서 알아차릴 수 있듯) 인간은 예수와 복음을 따라 올바른 개인의 삶을 살아야 한다.

3) 이런 책에서 흔히 그러하듯 문명의 역사가 중요한데, 피터슨에게 역사는 당연히 신화학적·유사기독교적 구도를 토대로 하는 걸로 설명된다. <의미의 지도>는 종종 전체주의나 각종 학살의 이유를 탐구하여 제시했다는 식으로 소개되곤 한다. 그러한 소개문구에서는 더 설명하지 않는 사실을 지적하자면, 피터슨이 그런 세계의 재앙·학살·사상을 설명할 때 그가 채택하는 논리는 바로 위에서 든 바와 같이 혼돈과 질서의 신화적인 대결인 것이다(...). 피터슨은 생물학적·신경심리학 연구가 바로 그러한 신화적인 역사를 '과학적으로' 뒷받침하는(!) 근거라고 주장한다--인간의 생물학적 결정론이 인간과 세계의 운명이 신화적인 틀에 따라서 움직인다는 예측을 정당화한다는 것이다(!!)--이건 내가 멋대로 요약한 게 아니라 결론 장에서 저자 본인이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라는 형식으로 자신의 기본 전제를 적어놓은 걸 옮긴 내용에 불과하다. 간단히 말해, 피터슨에게 인간의 역사는 (기독교와 연금술, 각종 신비주의, 전통신화 등이 뒤섞인) 신화고 생물학·심리학은 그걸 보여주는 학문이다!

4) 상당히 자기식대로 변형된, 또 신화학적으로 해석한 버전이긴 하지만 기독교는 피터슨에게 엄청 중요하다. 그는 기본적으로 20세기 후반부터 극우파로 급진화한 미국 복음주의자들·보수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세속화(교회의 쇠퇴)에 거부감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아마 그것이 그의 주장이 현대적 학문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무척 괴상한 시대착오적인 내용에 기초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북미의 다양한 우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이유일 수도 있다.물론 이 사람이 주장하는 것들은 기독교 정통파에서 볼 때 거의 신비주의·이단 급이지만, 어쨌든 반종교 세속주의·리버럴의 융성에 대한 적대감은 공유할 수 있으니까.


4. 요약하자. 조던 피터슨이 20년 전 출간한 <의미의 지도>에서 보여주는 세계관·인간관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과학적' 심리학과는 상당히 다른, 신화와 종교적 사유에 기초한 거의 신비주의적 상징질서에 기초해 있다. 사상의 역사에서 보자면, 피터슨 식의 상징질서는 20세기 초중반에 주로 유행한 반공산주의 계열 정치신학과 19세기 말-20세기 초반의 신화학적 감성이 섞여 만들어진 무척 흥미로운 변종이라고 할 수 있다--21세기에 등장했다는 거대한 시대착오만 아니었다면, 그러니까 대략 한 세기 혹은 반 세기 정도 일찍 나왔다면 피터슨의 책은 해당 분야에서 몇십 년 정도는 읽혔을 가능성이 있다. 바꿔 말하면 나는 <의미의 지도>를 들면서 피터슨이 진지한 의미에서의 사상가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책을 안 읽었거나 현대 학문·지식의 역사를 통채로 부정하는, 지적 분별력이 없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피터슨의 신화적·신비적인 세계관을 고려하면, 남성을 순종적(?)으로 만드는 교육제도, PC나 여성주의를 비난하는 피터슨의 논리가 어디에서부터 나오는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나는 한국에 광신적인 극우들이 자리잡는 상황보다는 합리적이고 건전한 보수주의가 주를 점하는 편이 모두에게 더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피터슨이 (꼭 신념어린 우파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여러 독자들에게 진지하고 신뢰할만한 사상가이자 보수의 새로운 지성처럼 받아들여질 가능성을 복잡한 마음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다. 한국의 진보·민주당 지지자들은 이런 비합리적이고 거의 신비주의에 가까운 저자가 젊은 보수의 새로운 우상이 되는 걸 무척 기뻐할 것이다--자신들의 잠재적인 적이 반지성주의의 오물덩어리 속으로 굴러떨어지는 게 어찌 기쁘지 않겠나? 그러나 나는 광신과 비합리성이 사회에서 목소리를 얻는 게 단순히 보수의 파멸이 지속되는 결과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의 위험을 초래하는 일이라고 전망하기에, 그리고 미국에서 극우 복음주의의 성장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우리가 똑똑히 볼 수 있기에 그보다는 좀 더 진지하게 피터슨의 독자·수용자들이 걱정된다. 이미 <12가지 인생의 법칙>을 구매한 독자라면, 어쨌든 자기계발서에서 뭐든 건질 말이 없진 않을테니까, 적절히 걸러서 읽는 수밖에 없다. 그게 아니라면, 설령 피터슨의 안티페미니즘적 언어가 유혹적으로 느껴진다고 하더라도, 그게 한국의 페미니즘 비판자·우파를 미신과 광신, 비합리성으로 이끄는 독이 든 사과라는 점일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피터슨을 사상가이자 지식인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건 조금 세련된 버전의 종말론과 신비주의라는 돼지의 발목에 진주를 채워주는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그런 태도는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 자신의 사상과 지성에 대한 심각한 훼손까지도 불러온다는 점에서 정말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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