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던 피터슨의 인기에 대한 개인적인 견해 넷

Comment 2018. 11. 10. 03:40
다시 조던 피터슨 저작으로 페이스북 타임라인이 시끌시끌하다. 나는 며칠 전 피터슨이 과거에 쓴 '보다 학문적인' 저작이 어떠한 사고방식이 드러나는지에 대해 이미 다루었고(http://begray.tistory.com/478), 당분간 그에 대해 더 관심을 가질 생각은 없다. 다음 한 달 간은 영국 18세기 사상사랑 문학에 파묻히는 걸로도 시간이 부족하다. 대신 몇 가지 문항에 대해 내 입장을 정리해볼 수 있겠다. 질문은 네 가지다.
1. <12가지 인생의 법칙>을 읽지 말아야 하는가?
2. 조던 피터슨은 신뢰할 수 있는 뛰어난 지식인인가?
3. 피터슨은 우파고, 피터슨의 독자가 늘어나는 것은 우파의 확산인가?
4. 피터슨의 인기는 미국 리버럴·진보의 정체성 정치가 실패했음을 보여주는가?

1. <12가지 인생의 법칙>을 읽지 말아야 하는가?

: 아주 넓은 의미의 자기계발, 즉 사람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다스리고 어떤 자아를 만들어가야 하는지에 대해 가르치는 전통은 내게 보다 익숙한 서구에서만 따져봐도 거의 언제나 존재했다. 위대한 철학사가 피에르 아도를 따르자면 고대의 철학은 가장 추상적인 수준부터 매우 구체적인 실천에 이르기까지 자아를 다스리는 기술의 집합체였다(물론 상대적으로 덜 철학적으로 읽히는 크세노폰의 <가정경영론> 같은 저술도 있다). <주체의 해석학> 및 <성의 역사> 2, 3권과 같은 푸코의 1980년대 저작들은, 유감스럽게도 젠더연구자들의 다수는 여전히 <성의 역사> 1권에만 집중하고 있지만, 아도의 테제를 바탕으로 고대의 성적 실천을 연구한 거라 해도 크게 틀리지 않다. 후기 고대부터 중세까지의 기독교 교부들도 이 문제에 있어 결코 덜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아니었다(피터 브라운의 <신체와 사회>The Body and Society가 아직 번역되지 않고 있는 게 무척 유감스럽다). 르네상스기에 발타자르 카스틸리오네의 <궁정인의 서>는 전 유럽적 베스트셀러였고, 한국 독자들도 대충 이름은 들어본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아예 "군주를 위한 거울"이란 이름의 통치자용 자기계발서 장르에 속하는 책이다.

초기 근대 영국으로 들어오면 종교전쟁 이후 17-18세기는 각종 품행서(conduct book)의 시대였다. 특히 18세기엔 여성들을 위한 품행서들이 계속해서 쏟아져나왔고 18세기 통틀어 전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소설 중 하나인 새뮤얼 리처드슨의 <패멀라> 2권의 뼈대는 사실상 품행서를 가져온 거나 다름이 없다. 오늘날 한국에서까지 스테디셀러로 남아있는 체스터필드 백작의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Chesterfield's Letters to His Son, 1774, 한국어 번역제는 <내 아들어 너는 인생을 이렇게 살아라>)도 이 시기에 나왔다. 19세기는 말할 필요없이 현대 자기계발서의 원조격인 새뮤얼 스마일즈의 <자조론>(Self-Help, 1859)이 출간되었다. 20세기에 들어와서는, <거대한 사기극> 같은 책에서 잘 정리해놓았지만, 복음주의를 비롯한 여러 종교적 사유뿐만 아니라 경영학·교육심리·투자조언 같은 장르들이 섞이면서 여전히 해마다 새로운 자기계발서들이 쏟아지고 있다. 사상·담론·수사학을 다루는 인문학 연구자의 입장에서야 이것들이 인생의 지침서라기보다는 연구대상에 가깝지만 어쨌든 많은 사람들은 이런 책을, 또 이런 책에서 가르치는 내용을 필요로 하고 여기서 도움도 받는다. 지금은 사람들이 쳐다보지도 않는 <아프니까 청춘이다>나 <시크릿>, 인문학 전공자가 읽으면 거의 페이지마다 경멸을 감출 수 없는 <리딩으로 리드하라> 같은 책에서도 무언가를 얻는 독자들은 있다.

조던 피터슨의 <12가지 인생의 법칙>도 마찬가지다. 나는 그 책 자체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고 책에서 말하는 내용이 내 인생에 직접적인 도움을 줄 가능성은 매우 낮겠지만(사상사와 문학을 공부하는 연구자라면 피터슨이 이야기하는 내용 상당수를 이미 어딘가에서 한번쯤 지나쳤을 확률이 높다), 거기에서 뭔가 의미있는 고찰을 찾아낼 독자들은 분명 있을 거다. 시중에 팔리는 투자 초보를 위한 안내서가 투자 전문가나 경제경영 전공자들에겐 거의 필요 없는 이야기겠지만 나같은 문외한이 거기서 뭔가 도움이 되는 내용을 찾아낼 수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읽고 싶으면 읽고 얻고 싶은 거 얻으면 된다.

2. 조던 피터슨은 신뢰할 수 있는 뛰어난 지식인인가?

: 종교와 신화학에 기초에 세계와 인간을 이해하는 데 흥미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딱 잘라서 No 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이유는 그의 좀 더 '학술적인' 저작을 보면 바로 알 수 있는데, 대략의 요약은 위에 링크해놓은 포스팅에서 정리해놨다. 이게 1번과 모순되는 게 아니냐는 반문이 있을 수 있다. 신뢰할 수 있는 저자라고 꼭 도움이 되는 책을 쓰는 것은 아니며 그 역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자기계발서는, 독서행위를 메타레벨에서 살펴보면 알 수 있지만, 독자들마다 자기에게 필요한 내용을 뽑아서 받아들이는 주관적 수용의 측면이 무척 큰 장르라고 생각한다. 다만 내가 말하고 싶은 바는 피터슨의 책에서 어떤 도움을 받았든 간에 진지한 학문적·사회적·정치적 주장을 할 때 피터슨의 책을 마치 신뢰할 전문가의 책인 것처럼 인용하면 무척 곤란하다는 것이다.

3. 피터슨은 우파고, 피터슨의 독자가 늘어나는 것은 우파의 확산인가?

: 첫 번째 질문은, 물론 요즘 같은 시대에 좌우파의 척도를 설정하는 건 무척 피곤한 일이지만, 거의 확실하게 Yes라고 생각한다. 한국에선 적어도 지난 수십 년 간 이런 사람들이 잘 보이지 않거나 주목을 받지 못해서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 있는데, 세속화·자유주의를 비판하면서 신화·종교·남성다운 삶 등으로 돌아가는 패턴 자체가 서구에서는 적어도 18세기 말부터 상당히 흔한 보수주의의 루트다(물론 저런 흐름에서 갑자기 하이퍼 좌파가 튀어나오기도 한다). 피터슨의 포스트모던·(신)좌파에 대한 혐오와 비판, 안티페미니즘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물론 포스트모던이나 맑스주의에 대한 비판은 꼭 '반동적' 우파만의 태도는 아니지만, 그가 추천하는 레퍼런스나 그가 사상의 계보를 설정하는 방식을 보면 냉전기 전투적 개신교도들로까지 올라가는 우파적 내러티브를 적지 않게 공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애초에 현재 북미에서 반(反) 세속화가 수십 년 간 커져오면서 이런 이야기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일 젊은 청중도 많아졌고.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선 솔직히 지금은 알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어떤 책이 많이 읽히는 건 무척 다양한 이유로 설명될 수 있고 특히 자기계발서 류는 더욱 그렇다. 북미엔 북미의 담론적 컨텍스트가 있고 현재 한국에는 이걸 제대로 설명해줄 수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그러니까 좀 사상사 전공도 만들고 사상·담론 연구센터도 만들어졌으면 좋겠다...미국에는 지금도 자기들 현대 분석하는 다양한 연구들이 쏟아지고 있는데 한국에 그걸 커버하는 전공자가 없으니까 따라가기가 너무 힘들다ㅠㅠ 한국 보수는 말로만 사상이니 뭐니 떠들지 말고 연구자들 지원이나 해라!ㅠㅠ). 아마존 베스트셀러+북미 버프를 받는 한국에서의 높은 판매고는 더욱 설명이 힘들다. (사상의 측면에선 피터슨 따위와 비교도 안 되게 중요한) 마이클 샌델의 학부수업을 정리한 <정의란 무엇인가>가 대박을 쳤다고 해서 그게 한국사회가 특별히 도덕철학·정치철학에 관심을 갖거나 공동체주의에 이끌리는 거라고 보기 힘든 것처럼 말이다.

다만 피터슨이 번역되기 전 한국에 처음 피터슨을 소개하고 가져온 사람들 중에 안티페미니스트들이나 안티페미니스트들의 안내를 받은 경우가 적지 않았고, 또 보수언론 쪽이 피터슨을 아마 위기의 한국 보수를 지탱해줄 새로운 백인 사상가로 점찍고 홍보성 기사를 내보낸 건 사실이다. 피터슨 인기가 곧 우파의 대두라고 하기는 좀 곤란하지만, 거기에 새로운 우파들이 적지 않게 기여했다고 추측해도 틀린 이야기는 아닐 것 같다. 피터슨의 새로운 독자들 중에 피터슨의 세계관을 따라가는 사람들이 분명 나오겠지만, 한국은 기독교 세계가 기본 베이스인 북미가 아닌데다가 진짜 기독교인이라면 그노시스주의나 드래곤 나오는 거 볼 때 기겁할 거라 생각하긴 하는데... 개신교 우파의 세계는 종종 이상한 길로 튀어가기 때문에 솔직히 예측 못하겠다.

4. 피터슨의 인기는 미국 리버럴·진보의 정체성 정치가 실패했음을 보여주는가?

: 3번에서 말했지만 이런 건 현재로선 억측이라고 생각한다. 애초에 특정한 사회경제적 현상과 어떤 사상·담론의 대두 사이에 직접적인 인과관계를 설정하긴 매우 힘들다(그게 20세기 후반 지성사의 가장 기본적인 교훈이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 중에서 실제 미국의 담론전쟁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제대로 따라가본 연구자가 있는 것 같지도 않고. 차라리 반 세속화와 남성성의 회복을 열망하는 경향을 들여다보는 게 훨씬 설득력 있는 설명이 되지 않을까? 미국 리버럴이 만들어낸 자기 서사를 그대로 믿는 것도 곤란하지만 '이게 다 정체성 정치·PC 때문이다~'라는 식의 이야기도 사고가 빈곤한 건 매한가지다.

전체적으로 요약하면, 피터슨 책에서 필요한 걸 읽는 사람들을 나무랄 이유는 없고, 하지만 피터슨이 현대 학문의 관점에서 전혀 신뢰할만한 사상가·전문가가 아닌 것도 그가 우파적 전통에 있는 것도 분명. 피터슨 인기에 안티페미니즘과 젊은 우파, 反세속주의가 기여하는 바가 있겠지만 그게 가장 핵심인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음. 피터슨 인기가 새로운 우파담론을 만들어낼 가능성도 있지만 (개인적으론 우파에게도 삽질이라고 본다) 한국은 북미랑 또 달라서 예측은 안 됨.

P. S. 한국에 이제 진보든 중도든 보수든 미국 사상·담론 연구자 육성하는 기구와 연구펀딩, 일자리 제대로 생겼으면 좋겠고, 한국 보수들은 오오 피터슨 오오 이렇게 때울 생각 말고 리버티 펀드 반의 반이라도 본받아라 좀. 보수들이 오죽 사상·담론 연구쪽에 투자를 안 했으면 북미 맥락 대충이라도 정리해서 피터슨의 위치가 어디쯤인지 설명해주는 사람도 없냐. 자기들도 똥인지 된장인지 알고 받아들여야 하는 거 아니냐-_-; 서양 쪽 연구자 입장에서 매번 느끼는 거지만, 한국의 영미에 대한 이해도는 한국사람들이 믿는 것보다 그렇게 높지 않고 특히 사상 쪽은 심각하게 구멍이 많다. 근데 그게 친미를 소리높여 외치는 우파들에게서 더 그렇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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