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일 일기: 연휴부터의 독서

Comment 2018. 10. 1. 23:51
일주일 내내 바쁘게 지내다가 하루 짬내어 페이스북 잠깐 접속하는 시간이 반복되었다. 읽고 쓰고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닌데, 블로그나 페이스북에 올릴만한 것이 아닌 경우도 많았거니와 (생각해보니 지인의 투고글에 대한 코멘트를 포함해 무언가를 쓰지 않은 주는 없었고, 어제도 밤늦게까지 다른 원고를 썼다) 무언가를 올릴 여유가 좀처럼 나지 않는다. 몇 시간 정도 잡고 포스팅하고 싶은 주제는 차곡차곡 쌓여가지만 그럴만한 시간이 없달까. 이번 주도 내일 수업조교 및 세미나 두 개와 기타 일정을 소화하고 나면 주말까지 비는 때가 별로 없다. 내일 오후 수업을 넘기고, 모레 세미나를 하고(샤프츠베리를 170쪽 더 읽어야한다! 2차 문헌까지 본다면 2-300쪽...다행인 건 "너무 지루해서 못 읽겠다"던 주변의 코멘트와 달리 생각보다 Characteristics가 훨씬 흥미로운 책으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다시 주말에 포콕 B&R 3권 리딩세미나를 한다. 일과 다른 약속을 전부 제외해도 그렇다. 10월에는 다 쳐내고 논문과 세미나에 집중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는데 첫 하루부터 쉽지 않다. ...일이 너무 많을 것 같은 때는 짜증을 누르고 처리할 일들을 하나씩 정리하다보면 마음이 다시 차분해진다.

- 추석에는 Richard Whatmore의 _What is Intellectual History?_(2015)를 읽었다. 기대 이상으로 훌륭한 책이고, (비록 영어가 어렵지는 않지만) 영어를 부담스러워하는 동료 연구자들을 위해서라도 한국어로 옮겨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짧고 친절하면서도 명석한 이 책에서 왓모어는 자신이 통상적인 지성사/정치사상사 개설에서 다루는 수준보다 훨씬 깊은 정도까지 지성사를 둘러싼 여러 쟁점들을 파고들어 고민했음을 보여준다. 그는 현대적인 지성사 연구가 단지 거친 의미에서의 맥락주의가 아닌 언어·언어적 행위의 의미에 대한 깊은 관심사에서 자신만의 영역을 갖는다는 것, 과거와 현대가 쉽게 동일시될 수 없는 고유의 특성을 가진 시공간이라는 전제 안에서 우리가 역사를 사고해야 한다는 것, 상기한 전제 위에서 역사와 실천의 문제를 파고들 때에만 섣부른 시대착오로 빠져들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모두 명료하게 이해하고 있다. 이른바 "케임브리지 학파"의 구성원으로 간주되는 저자의 또 하나의 미덕은 그 학파가 절대로 단순히 "스키너류"(Skinnerian)로 요약될 수 없을 만큼 서로 다른 방향을 파고든 연구자들로 가득하며, 반드시 케임브리지 역사학과 졸업생들이 아니라도 이들의 연구방법론을 활용하여 자신만의 흥미로운 연구를 수행할 수 있음을 폭넓은 시야와 인용을 통해 보여준다는 점이다. 지성사에 흥미가 있는 연구자들 중 영어 텍스트 읽기에 큰 부담이 없다면 천천히 곱씹으면서 읽기를 권하고 싶다.

-다음 책으로는 Keith Thomas의 최신작 _In Pursuit of Civility: Manners and Civilization in Early Modern England_(2018)로, 현재 1/4을 조금 넘게 읽고 잠시 멈춘 상태다. 간단히 말해 노르베르트 엘리아스Norbert Elias의 고전 <문명화 과정>(_The Civilizing Process_)의 테제를 받아들이되, 16-18세기 잉글랜드에서 civility 가 어떻게 증진되었는지에 중점을 두고 엘리아스의 논지를 수정보완하는 문화사적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탈리아·프랑스의 다양한 품행서conduct book가 번역되어 들어오는 데서 본격적으로 출발한 초기 근대 잉글랜드의 예의범절은 17세기 말을 지나면서 18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시민성을 증진시키는 (넓은 의미에서) 거대한 문화운동으로 확장되어 갔다. 노련하고 명망있는 또 한 명의 거물 역사가답게 토마스는 압도적으로 많은 자료를 참고·인용하면서 civility 및 연관개념들이 어떻게 활용되었는지에 대한 풍부한 용례 및 그것들을 이해할 수 있는 커다란 렌즈들을 함께 제공한다. 그러한 렌즈들이 18세기 영국문화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임은 물론이다. 문장이 격조있으면서도 편안하고 또 친절해서, 언어의 맛을 느낄 수 있는 독자라면 반드시 관련 연구자가 아니더라도 다양한 사례에 즐거움을 느끼면서 이 책을 천천히 음미할 수 있을 것이다(그런 점에서 이 책은 자신이 소개하는 18세기의 문화적 이상, 더 부드럽고(softer), 달콤하고(sweeter), 친절한(gentler) 대화와 닮아있다). 나 같은 연구자들은, 물론 토마스의 책이 civility에 대한 모든 것을 다루는 건 아니지만, 당연히 방대한 참고문헌과 인용사례들에서 다음 연구방향을 참조하는 데 도움을 받을테지만 말이다.

... 그래서 나는 politeness 에 대한 2차 문헌들을 뒤져보면서 샤프츠베리(_Characteristicks of Men, Manners, Opinions, Times_)를 읽는 쪽으로 향해가고 있다. 샤프츠베리를 불과 수십 쪽 읽은 시점에서 논문 첫 챕터의 내러티브를 완성시키는 데 필요한 대목들을 찾아낼 수 있어서 무척 기쁘다는 것만 덧붙여 두자. 그는 근대사회의 바람직한 작동원리를 사교성을 갖춘 시민들의 대화와 의견에서 찾아내며, 그에 따라 도덕론의 중요한 역할을 올바른, 사교적이고 친절하며 합리적인 시민-대화자의 형성에 둔다는 점에서 로크의 <인간지성론>과 <교육론>에서 발견할 수 있는 모티프를 훨씬 상세한 형태로 발전시킨다. 특히 열광/광신(Enthusiasm)을 어떻게 처리할 수 있느냐의 문제를 논의할 때 그는 흄과 스미스 이전에 사회가 공식적인 정치권력이 작동하는 영역과 별개의 문화정치적 영역을 가진다는 것을 알아차린 최초의 저자 중 한 명인 것처럼까지 보인다.

-수업 준비 때문에 아렌트Hannah Arendt의 <혁명론>(On Revolution) 중 한 대목, "사회 문제"(The Social Question)를 읽었다. 너무 예전에 아무것도 모를 때 읽은 뒤 아렌트는 사실상 처음이었는데, 다소간 까다롭고 관념적인 그의 문체를 헤쳐나가면서 20세기 초중반 독일인들에서부터 20세기 말의 미국 좌파 정치철학, 특히 월린과 그의 제자들로 이어지는 계보를 구성하는 가운데 항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비록 나는 여러 중요한 지점에서 아렌트에 동의하지 않지만, 내가 정치철학을 가르치거나 세미나를 할 일이 있다면 다음과 같은 커리큘럼을 짜도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실제로 아래의 리스트를 따라가려면 한국어 번역으로 무언가를 하는 게 거의 불가능한 스트라우스와 아렌트를 더 제대로 읽고 준비해야 하는데, 내게 정치철학 강의를 이끌 기회가 주어질 일은 없을테니 공상적인 것에 가깝다:

페인 대 버크 - 맑스 / 20세기 초중반 독일 컨텍스트 (소렐, 마이네케?, 슈미트 등) / 망명자들 (스트라우스, 아렌트) / 후계자들 (월린, 웬디 브라운, 아감벤) / 비판자들 (포콕, 혼트, 던?)

-슈니윈드는 잠시 멈춘 상태인데, 어차피 한국어책이니만큼 빨리 읽고 넘기고 싶다.


책과 공부에 대해 쓸 때가 제일 마음이 편안하다. 잔뜩 쌓인 설거지거리를 하나씩 닦아나가면서 마음이 차츰 정리되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다. 물론 거기에서 다시 뒤돌아보면 처리해야 할, 아직 처리되지 않은, 아마도 결코 처리되지 않을 문제들과 다시 만나야겠지만, 그러한 문제와 씨름할 때 비로소 깨어나는 두뇌의 영역도 있는 모양이니 원망하는 마음은 없다.

그리고 오랜만에 사람들의 소식을 접하면서 여러 선생님들의 부고 또한 함께 접하게 된다. 당혹스러운 마음으로 명복을 빌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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