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 대 일베' 구도와 페미니스트 전략

Comment 2018. 6. 12. 00:22

간만에 의도치 않은 일로 SNULife에 접속했다가 경악했다(사실 접속할 때마다 놀라는 것 같다). 로그인 후 대문에 노출되는 베스트 게시물 중 하나로 어느 인터넷 BJ"페미""일베"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열등한 존재라고 비속어를 섞어 성토하는 내용의 스크린샷 묶음이 올라와 있던 것이다. 물론 학교 온라인 커뮤니티가 여성주의에 호의적이지 않음은 익히 알고 있으며, 온라인 논쟁의 전개 상 그런 내용이 많은 사람들의 추천을 받는 경우 또한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해당 게시물에 300명 이상의 추천을 받는 동안 비추천은 거의 0에 가까웠다는 것, 그리고 댓글이 페미니즘을 조롱하는 내용들로 가득했다는 것은 상당히 경악스러운 일이었다. 아마도 해당 포스팅을 올리고 좋아하고 댓글을 다는 대부분의 사용자들은 여성주의·페미니즘을 온라인의 격렬한 논쟁국면에서, 그러니까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언행을 넘어서는 예들로 처음으로 접했거나, 아니면 자신들이 자주 이용하는 커뮤니티에 유통된 안티페미니즘 자료묶음을 통해 수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두 가지 경험은 서로를 강화한다. '부정적인' 언어의 접촉은 안티페미니즘을 통해 학습된 관점이 더 확고하게 자리잡도록 해주고, 안티페미니즘을 통해 학습된 관점은 온라인 페미니즘의 여러 행위 중에서도 부정적인 측면에 더욱 잘 주목하게 만든다.

 

 

1.

 

그러나 내가 좀 더 의미심장하게 바라보게 된 지점은 따로 있다. "페미들이 혼란과 혐오를 조장하는 세력임은 명백하지만, 언론과 정치권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페미의 이해관계에 복무하고 있다"는 식의 유사-음모론이 여러 이용자들의 댓글을 통해 등장하고 또 퍼지고 있는 것이다. 뒤집어 말해 적어도 해당 포스팅에 직간접적 형태로 참여하는 다수의 유저들은 일부 적극적 안티페미니스트를 제외하고도 자신들의 고유한 '상식의 세계'를 형성하고 그에 따라 자신들의 세계 바깥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기묘하게 왜곡하여 수용하는 셈이다. 스스로를 "일베", "페미"도 아닌 상식인들로 간주하는 (주로 남성으로 구성되었으리라 추측되는) 집단은 메갈리아 이후 지속적으로 확대되어 온 걸로 보이는데, 이제 이 집단에서 단지 "페미"에 대한 고유의 설명틀만이 아니라 "페미"의 요구에 동의하는 다양한 공적 행위자들에 대한 자의적인 음모론까지 만들어져 유통되고 있다. 당분간 이 커뮤니티에서 안티페미니즘의 승리는 확고해보인다. 2010년대 중반 온라인 페미니즘의 대대적인 부상에 비하기는 어렵겠지만, 여러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안티페미니즘 혹은 페미니즘 혐오가 확고한 우세를 점하게 된 속도 및 그 규모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여기서 앞으로 한 세대가 지난 후, 혹은 그보다도 앞선 시점에 한국사회가 정말로 상식과 합리성을 공유하지 않는 집단들 사이의 극단적인 대립으로 귀결되는 것, 그리고 안티페미니즘이 그 자체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공적인 정치언어로 데뷔하는 광경을 떠올리지 않기란 어렵다. 우리가 워마드 이용자들 및 TERF에게 합리적인 논의를 기대하기 힘든 것처럼, 이미 고유의 음모론적 세계관을 구축한--그리고 그러한 '정리자료'를 대규모로 만들어 퍼트릴 수 있는--안티페미니스트들도 합리적인 대화가 불가능한 집단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높다. 이들은 이미 페미니즘에 대한 거부감을 온라인에서 표현하는 정도를 넘어 페미니즘에 동의하거나 지지하는 '동조자'에 대한 자료 아카이빙과 공격을 수행하고 있으며, 공격범위에는 직접적으로 직업적 전망과 결부된 요소도 있다(특히 남성향 게임 소비자집단을 보라). 적극적 안티페미니스트들이 지금보다 더 큰 규모가 되었을 때 정책 행위자·언론의 움직임을 타겟팅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가령 나무위키에서 홍익대학교 누드모델 몰래카메라 건 때 '진보 언론의 편향된 보도'를 그 자체로 길게 서술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언론동향이 그 자체로 안티페미니즘의 중요한 관찰대상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온라인 전장은 더 이상 온라인에서만의 전장이 아니다.

 

 

2.

 

한국사회의 관찰자들은 지난 20여 년에 걸쳐 대규모의 여성소비자 집단들을 발견해왔으며 현재는 페미니스트 발화자 집단·페미니스트 유권자 집단의 대두를 바라보고 있다. 그 실질적인 규모가 어느 정도일지 현재로서 알기 어렵지만, 우리는 지금 안티페미니스트 소비자·발화자 집단이 매우 빠르게 스스로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광경 또한 보고 있다. 온라인 페미니스트 집단이 386부터 이어지는 이전 세대의 여성주의자들과 매우 달랐던 바와 마찬가지로, (온라인) 안티페미니스트 집단 또한 386 남성들과 상당히 다른 심성·행동양식을 보여주고 있음을 고려할 때 우리는 앞으로도 예측하지 못한 사태를 마주할 가능성이 높다. 우리가 과거 여성주의를 보던 방식으로 메갈리아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처럼, 과거 메갈리아 대 일베·소라넷을 보던 방식으로 지금 또 앞으로 안티페미니즘의 대두를 바라볼 수 없다. 확실한 건 현재와 같은 형태로 안티페미니즘이 커질 경우 페미니스트 및 그에 동의하는 사람들도 상당한 피해를 입을 것이며, 나아가 안티페미니스트 집단이 완전히 대화불가능한 대상으로 남게 될 때 우리가 감당해야 할 피해는 그 이상이라는 사실이다.

 

단순한 관찰자가 아닌 행위자로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만약 현재와 같은 전개가 결코 좋은 방향이 아니라면, 이제부터는 어떤 방식의 실천이 효과적일까? 불과 2-3년 전 메갈리아와 "미러링"이 많은 사람들에게 호응받았던 것은 그러한 방식의 행위가 이전의 보다 '온건한' 방식들과 달리 일베를 공격하고 억제하는, 적어도 그런 기분은 들게 하는 효과적인 방법처럼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이제 시간이 지나 성평등과 여성주의의 기본정신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메갈(페미) VS. 일베"라는 구도가 더 이상 유리하게 작용하기는 커녕 일베 바깥에서 대규모로 출현한 안티페미니스트들의 좋은 무기가 되어주고 있음을 점차 깨닫고 있다. 똑같은 혐오표현으로 대응하고, 조롱·경멸하고, 상대의 '밥줄'을 끊고, 필요하다면 자료도 조작하는 방식의 공격패턴은 이제 더 이상 과거와 같은 효과를 내지 못한다. 나는 그러한 공격패턴을 지속하는 게 오히려 안티페미니스트들이 짜놓은 프레임에 알아서 뛰어드는 것, 그리하여 더 많은 안티페미니스트들을 만들고 그들로 하여금 페미니즘 사냥을 할 수 있는 동력을 제공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상황이 바뀌었으면 전략도 바뀌어야 한다. 나는 제도적으로는 합리적인 성평등의식의 교육, 일상에서는 좋든싫든 서로를 대화가능한 상대로 바라보고 합리적으로 설득하는 방식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모든 사람이 대화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상대를 대화불가능한 상대, 타격을 주어야 하는 적으로 간주한다면 잠재적이나마 대화상대로 남을 수 있었던 사람을 잃을 뿐만 아니라 안티페미니스트의 수만 늘리는 결과만을 가져온다. 반드시 지금 당장 상대방에게 페미니스트냐 여성혐오자냐의 양자택일을 요구해야 할 이유도 없다. 중립지대에 있는 사람은 언젠가 대화와 설득이 가능할 수 있지만, 아예 선을 넘어간 사람은 되돌리기 매우 어렵다. 나의 주장이 여러 온라인 페미니스트들에게는 또 다른 "도덕", "코르셋"을 강요하는 것처럼 읽힐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묻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목적에 비추어 볼 때 지금 가장 효과적인 방식이 도대체 무엇이냐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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