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대 회화과 도촬사건과 페미니스트들의 선택에 관하여

Comment 2018. 5. 8. 15:52
한동안 일이 너무 많아서 뉴스도 못 챙겨보다가 인터뷰를 보고 깜짝 놀랐다(http://www.nocutnews.co.kr/news/4966076). 워마드에서 이 행위를 뭐라고 부르는지 모르겠지만, 이건 명백한 성범죄이며 페미니즘이든 미러링이든 이런 행위를 정당화하는 용도로 사용될 수 없다(도촬 후 2차 가해도 마찬가지다). 가해자가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하든 아니든, 그는 범죄자이며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아야 하며, 2차 가해 참여자 또한 면죄될 수 없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 대가는 대부분의 페미니스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클 것이 명백하다.

여러 페미니스트 친구들에겐 내가 이 사건에 경악감을 감추지 못하는 것이 무척 의아스러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특히 한국에서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적인 도촬문화가 일상적으로 퍼져 있음을, 또 그에 대한 단속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한 명의 남성이 피해자가 되는 것은 상대적으로 사소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분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특히 한국사회에서 진보·여성주의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 사건을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이번 케이스는 단순한 미러링의 소선이 아니라 페미니즘의 이름·논리를 악용하여 범죄적인 일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정당화한 또 하나의 사례로 봐야한다. 천 명의 페미니스트에겐 천 개의 페미니즘이 있다는 말로 퉁치고 넘어간다면, 우리는 페미니즘의 이름을 걸고 더 심한 짓들이 자행되는 광경도 목도하게 될 것이다. 나는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페미니스트들 자체에 대한 공격이 자행될 최악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페미니즘의 다양성이, 그리고 페미니스트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사람들 사이의 우애가 페미니즘의 악용을 제재하는 걸 가로막아서는 안 된다.

둘째, 이 사건에서 페미니즘은 범죄를 저지른 다음 죄의식을 닦아내는 용도로 사용되는 휴지 취급을 받고 있다. 이러한 악용을 막지 않는다면 결국 페미니즘은 아무런 용도에나 쓸 수 있는 아무말이 되어 최종적으로는 담론의 쓰레기통 속에 버려질 것이다(담론의 역사는 매 시대 이렇게 폐기처분되는 논리들이 산처럼 쌓여있음을 가르쳐준다). 실제로 우리는 한국사회에 만연한 안티페미니스트들이 이 사건이 페미니즘을 휴지통에 처넣을 좋은 기회로 간주하고 있음을 곧바로 확인할 수 있다. 나무위키 해당사건 항목(https://namu.wiki/w/홍익대학교%20회화과%20도촬%20사건)의 7.2가 대표적이다. 이 항목의 '페미니즘 비판'을 보면, 비록 내용을 조금만 상세히 뜯어보면 논리적인 비약으로 점철되어 있음을 알 수 있지만, 이런 형태로 "페미니즘=여성의 모든 행동을 정당화하는 비합리적 논리"라는 공격이 안티페미니스트들을 통해 확산되고 있음은 무시할 수 없다. 이번 사건처럼 페미니즘의 논리를 악용하는 사례를 방치할 경우, 다른 누구도 아닌 페미니스트들이 자신들의 무기를 망가트리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셋째, 만약 이런 행위가 용인 혹은 묵인될 경우, 적극적 혹은 소극적 안티페미니스트들 혹은 인권에 별다른 감수성을 지니지 못한 사람들에 의한 보복전이 자행될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 쉽게 말해 우리는 저 가해자와 워마드의 2차 가해자들이 자신들의 범죄적인 행동을 정당화한 것처럼 앞으로 수많은 남성들이 여성을 대상으로 한 각종 성범죄를 정당화하게 되는 결과가 초래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지금까지 남초커뮤니티의 포르노문화가 '이런 것쯤은 사소한 일이지'라는 형태로 정당화되어 왔다면, 앞으로는 '어차피 서로 몰카 찍는 건데 왜 나만 문제냐'의 형태로 성범죄 정당화의 논리가 변화할 수 있으며 그 경우 이를 교정하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오늘날 페미니즘·인권운동의 중요한 과제 중 하나는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만이 아니라 사건발생을, 즉 피해자의 발생 자체를 최소화하는 데 있다(일단 사건이 발생하면 가해자가 설령 극형을 받는 경우라고 해도 피해자의 영혼과 삶은 심각한 타격을 입으며 이는 무척이나 회복되기 어렵다). 나는 진정한 페미니스트, 즉 실제 여성의 삶이 어떻게 더 좋아질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페미니스트라면, 이러한 사건들을 통해 워마드에서 자행되는 문제적 행위들을 묵인하는 태도가 결과적으로 여성의 삶과 안전을 더 악화시키는 결과에 일조할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고 믿는다.

위와 같은 이유에서 나는 진지한 여성주의자들이 다음과 같은 입장을 견지하는 게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첫째, 이 사건은 페미니즘에 부합하지도 않고,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도 없는 범죄로서 응분의 처벌을 받고 피해자에겐 (그 상처가 쉽게 회복될 수 없을지라도) 합당한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 이건 페미니즘 활동이 아니라 성범죄고 다른 성범죄와 마찬가지로 엄격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둘째, 그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즘이 모든 행위를 정당화하는 용도로 쓰일 수는 없으며, 설령 페미니스트 정체성을 가진 사람의 행위라고 해도 모든 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만약 페미니즘이 사회규범에 안착하기를 바란다면, 합당한 사회적 규범으로 포함될 수 없는 요소들은 비판받아야만 한다. 특히 래디컬·포스트이론 전통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이것이 무척 불편하게 느껴지겠지만, 우리가 페미니즘이 사회적 규범으로 자리잡기를 바란다면 이 결론은 필연적이다.

셋째, 설령 남성에 대한 것일지라도 도촬·2차 가해에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는 커뮤니티라면 그것은 페미니스트 커뮤니티가 아닌 범죄의 온상에 불과하다. 만약 성범죄·2차 가해가 자행되는 온라인 커뮤니티가 폐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우, 이러한 주장의 비판범위에는 자칭 여성주의 커뮤니티도 예외일 수 없다.

페미니즘은 분명 한때 '소수자'의 담론이었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때로 이상한 일들이 벌어질지라도 서로 눈을 감고 넘어가는 일이 가능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페미니즘이 소수자의 담론에서 사회 전체의 규범으로 적용되기 시작하는 과정에 들어서고 있으며--그 편이 더 많은 소수자를 더 효과적으로 보호할 수 있다--이때 과거에 용인되었던 기준이 그대로 용인될 수 없음은 당연하다. 현재의 변화를 인식하고 그에 맞는 행동양식을 새로이 설정하지 않는 한 페미니즘은 계속해서 주변부 담론으로밖에 머물 수 없다. 도촬과 2차 가해는 페미니즘이 아니며 그걸 즐기고 용인하는 행위는 페미니즘이 아닌 범죄라고 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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