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도르노. <말러: 음악적 인상학> / 티아 데노라. <아도르노 그 이후> [130420]

Reading 2014. 3. 18. 14:01

*2013년 4월 20일 페이스북


<말러: 음악적 인상학>_Mahler: Eine musikalische Physiognomie_과 티아 데노라의 <아도르노 이후: 음악사회학을 다시 생각하며>를 읽었다. 이제 맥스 패디슨의 책을 구해서 보고 (품절된 줄 알았는데 교보와 알라딘에서 아직 구매가능하다) <부정변증법 강의>까지 읽으면 얼추 한국어로 나온 아도르노 주요저술들은 한 번씩은 다 본 셈이 된다--예전에 나온 읽을 수 없는 번역들 및 몇몇 특별한 선집은 제외하고--. 아직 베토벤에 관한 책이 번역출간 예정이고(사실 불과 2년 전만해도 건드리지도 않았던 아도르노에 끌렸던 최초의 순간은 Fredric Jameson 이 아도르노의 베토벤 론을 소개하는 대목을 읽으면서였다), <음악사회학 입문>을 포함해서, 영역본을 제외하더라도, 국역본들 중에서도 한번 더 읽을 리스트들은 여전히 길긴 하지만.

<말러>에 대해 먼저 이야기한다면 솔직히 나는 아도르노의 음악론에 갈 것까지 없이 그가 다루는 음악적 용어들lexicon에 전적으로 무지하다. 보다 사회학적인 저술에 가까운 <음악사회학 입문>은 좀 예외일 수 있겠지만, <신음악의 철학>을 포함해 악곡과 그 진행을 미시적인 레벨에서 논의하는 텍스트는 엄밀히 말해 내 배경지식을 완전히 벗어난 지점에 있다고 해야 한다. 그는 통상적으로 매우 거시적인 관점에서 근대문명/정신의 비판을 수행한 사람으로 이해되지만, 그가 마음먹고 기술적인 분석을 하려고 할 때는 마디와 그보다 더 미시적인 음표의 단위에서까지 내려가며 바로 그런 것들로부터 색채와 뉘앙스를 말한다. <말러>는 아도르노의 음악비평 중 국내에서 출간되었고 비교적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는 소수의 문건들 중에서도 가장 기술적인 분석이 많이 수행된 텍스트다. 말하자면 나는 헤겔이나 데리다를 볼 때보다 아도르노를 읽을 때 더 '낯선 독자'가 된다. 나의 교양레벨의 부족을 탓하기 전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포함한 아도르노의 음악비평이 여전히 읽힐 만한 책이 되는 까닭을 말한다면, 우선적으로 그의 글쓰기는 단순히 기술적 분석들의 나열에 머무르는 게 아니라 그것들을 포괄해 ("인상학"이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보다 추상적이고 전체적인--그는 이런 표현을 싫어하겠지만--상image을 도출하는 작업이며, 더 나아가 그러한 상들은 하나의 총괄적인 근대비판으로서의 아도르노 사상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쇤베르크와 스트라빈스키가 그러했듯 그들보다 조금 더 앞 시대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 말러 또한 근대의 진행과정을 드러내며 또 그것에 자신의 의견을 덧붙이고자 하는 하나의 모범적 정신이 된다. 역으로 이런 사례분석이 아도르노를 방법론적 비판에 노출시키기도 한다. 데노라의 텍스트에서 암시되듯 아도르노가 자신의 추상적이고 거대한 인상을 (그에게는 쉽게 "체계"라는 표현을 쓰기 어렵다) 구체적인 수준의 분석에서도 반복할 뿐이라는 비판에 말이다. 물론 그러한 비판에 쉽게 자신의 유효성을 상실하기에는 베버를 포함한 사회학의 시조들로부터 유래한 아도르노의 입장이 짊어지고 있는 역사가 가볍지 않을 뿐더러 그가 정신의 내용을 이끌어내는 원천이 되는 고도의 형식분석이 갖는 힘이 작지는 않다. 어쨌든 쇤베르크/스트라빈스키가 마주해야만 했던 거역할 수 없는 그러나 그대로 받아들일 수도 없는 세계운행=근대진행의 흐름 앞에서 (아도르노는 말러를 자신이 작곡의 긍정적 모범으로서 간주했던 쇤베르크에 가깝게 위치시키긴 하지만) 그것을 직시하면서도 양자와는 조금 다른 대응을 했던 사람으로 볼 때 이 텍스트를 읽는 의의가 조금은 더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어떤 텍스트에서도 그러했듯 여기에도 탈출구로서 제시되는 정답은 없다. 아도르노가 쇤베르크와 아도르노를 높이 평가하는 공통점은 바로 그런 손쉬운 정답을 도출하는 대신 거의 수도자에 가까운 엄격함에서--이 점에서 아도르노의 이상적 인간상이 문자 그대로 순수한 근대인, 자신의 삶을 하나의 이념으로서까지 끌어올리는 근대인임을 떠올려도 무리는 아니리라--자신의 원칙을 고수하고 그것이 이끌어내는, 혹은 그것으로도 극복할 수 없는 암울한 사태를 직시했다는 점에 있으니까. 역으로 스트라빈스키가 대가의 레벨이면서도 부정적인 상으로 제시되는 까닭은 그가 근대적 정신의 전개로부터 초래된 퇴행을 목도하면서 그것에 대한 저항 자체를 자포자기하면서 냉소적인 태도로 퇴행에 몸을 맡기는 데 있다--여기에서 아도르노로부터 포스트모던적 소비사회의 예견을 읽어내는 흐름이 출발한다.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말한다면, 아도르노의 근대음악비평은 베버가 제시한 합리화의 진행에 대한 서로 다른 대응들을 면밀히 분석한 사례들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진 않겠다. 번역본의 질을 논의하기엔 내 배경지식이 너무도 없다. 다만 크게 무리는 없게 읽힌다(어려운 책의 번역과 엉터리로 된 번역 정도는 구분할 수 있다). 아쉬운 점은 저자 자신이 말미에서 덧붙이는 말러에 대한 두 편의 글, 각각 말러 비평에 대한 총괄 및 에필로그로 기능하는 글들이 함께 번역되지 않았다는 점 정도.

데노라의 책은 음악사회학자의 입장에서 아도르노의 이론(문제의식과 방법론을 포괄한)과 현대의 보다 경험주의적인 색채를 띤 음악사회학의 연구경향을 어떻게 접근시키는가에 있다. 나는 음악사회학은 커녕 현대사회학의 구체적인 연구방법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기에 이 텍스트 또한 마찬가지로 철저히 국외자로서 독서를 수행했다. 아무래도 아도르노 자체에 관심을 갖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방법론의 형성을 중요한 문제로 삼는 나와 같은 연구자=독자에겐 여러 모로 숙고할 점이 많은 텍스트다. 적어도 데노라가 정리/제기하는 아도르노의 (경험주의적 연구에서는 양립하기 힘들 것처럼까지 보이는) 방법론 상의 취약점들은 이른바 추상적인 레벨에서 정신/문화를 숙고하는 사람들에게도 한번쯤은 돌파해야할 문제들이기도 하다. 경험주의적 경향이 갖는 마치 즉석사진과 같은 명백함--당연히 나는 이러한 명백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은 그 자체로 비판적 논의의 대상이지 냉소와 회피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거기에 어디까지나 음악사회학자로서의 입장이 강조되기는 하지만 데노라의 아도르노 이해 및 아도르노 이후의 음악학/음악사회학 연구에 대한 인용들도 나처럼 비전문적으로 아도르노를 읽은 사람들에게 꽤나 유용한 지도그리기를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고. 어쨌든 한번 읽어야 할 책이라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이 책의 논점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은 권하고 싶지 않다. 내게는 여기서 저자가 도출하는 '절충안'이 결과적으로 가장 미시적인 레벨에서의 형식분석(아마 저자는 이 영역을 음악학자들에게 맡겨버리는 것 같다) 및 사회의 지배적인 경향 자체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부분은 비평가들과 철학자들에게 방기하는 것일까?) 양자를 놓치고 있는데, 사실상 이 둘의 결합이야말로 아도르노의 가장 매력적인 부분이지 않은가? 나는 '형이상학'이 없는 아도르노를 상상할 수 없다. 물론 아도르노가 보다 정교하고 부분적인 쟁점들을 그냥 간과해버린다는, 그래서 나의 표현으로 옮긴다면 아도르노가 벤야민에게 했던 비판에 따라 '무매개적'인 비평처럼 읽힌다는 데노라의 지적은 타당하게 들린다. 그러나 그러한 비판으로부터 곧바로 경험주의적 연구로 전이해가는 결론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 텍스트는 언젠가 세미나의 대상이 된다면 부분부분 발췌독하면서 논쟁점들을 만드는 데 유용하게 쓰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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