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올린 라이트. <리얼 유토피아> [130506]
Reading 2014. 3. 18. 13:57*2013년 5월 6일 페이스북
에릭 올린 라이트Erik Olin Wright의 <리얼 유토피아: 좋은 사회를 향한 진지한 대화>_Envisioning Real Utopias. 2010(국역본은 권화현 역, 들녘, 2012)를 읽었다.
제목의 낭만적인 인상과 달리 저자가 직접 진술하는 자신의 관점 및 목표는 날카롭고 분명하다. 라이트는 자신이 '실천철학적 전통'(내가 어떤 상황 하에서 이 글을 쓰는지 감안해주길 바란다) 위에 서 있으며 따라서 현존 capitalist 체제를 극복하는 과정이 보다 이상적인 사회로의 여정에 필수적임을 분명히 한다. 즉 현재 인류가 목도하는 사회적 부정의의 상당수는 capitalist 체제의 근본적인 원리 그 자체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체제 극복 및 변혁에 도달하기 위한 "해방적 사회과학"의 일환으로 집필된 이 책은 세 가지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짧고 교과서적인 인상을 주는 1부 "진단 및 비판"Diagnosis and Critique은 capitalism 에 대한 짧고 핵심적인 정의("사적 소유와 무산 노동자들에 의해 정의되는 계급관계, 그리고 탈중앙집권적 시장교환을 통해 조직되는 조정"이 결합된 체제 및 그로부터 파생된 제도들)와 함께 그것이 초래하는 해악을 정치, 경제, 사회, 그리고 윤리적 차원을 포함한 다각도의 층위에서 열거한다.
이 책의 절반 정도 분량을 차지하며 가장 주의깊게 읽어야 할, 그리고 독자들이 배울 게 많은 2부 "대안"Alternatives은 (저자가 사실상 국가주의적 대안과 연결시키는) 고전적 실천철학적 대안을 포함해 지금까지 제기되어온 다양한 대안들을 검토한다. "자원의 배분, 생산과 분배에 대한 통제"로서 정의되는 경제 영역에 국가, 시장, 시민사회가 각각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따라 분류되는 대안들은 앞서 세 영역과 연결되는 각각 국가주의, market-capitalism, socialism의 혼합물("하이브리드")로서 제시된다--라이트는 사실상 다른 영역과 전혀 섞이지 않은 '순수한' 체제가 바람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제대로 성립할 수조차 없다고 생각한다. 이 부분을 다루는 국역본 175-207은 거시적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데 흥미를 느끼는 독자들에게 가장 의미심장하게 읽힐 수 있는 중요한 대목이다(나는 여기에서 가라타니 고진의 도식 국가=자본=네이션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순수한 형태의 시장주의와 국가주의를 거부하는 라이트에게 시민사회적 권력의 헤게모니가 중요시되는 것, 즉 "사회권력 강화"가 가장 옳은--비록 그것만으로 체제의 변혁이 가능하다고 그가 진술하지는 않지만--길임이 암묵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당연하다. 정치 및 경제적 제도들의 지배구조를 분석해온 미국의 학적 전통이 간략하게나마 종합된 흔적을 보여주는, 그래서 저자의 연구범위의 광범위함에 새삼 감탄하게 되는 제도분석 및 구체적인 개선책(혹은 아이디어)의 제시가 겨냥하는 방향이 특정한 체제로의 전환책이라기보다는 현재의 사회적 조건 위에서 시민사회의 권력을 어떻게 강화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도 라이트의 일관된 입장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비판적인 독자들은 포퍼적 사회공학의 냄새를 맡을 수도 있을텐데, 실제로 실천철학적 전통 위에 서 있음을 분명히 말하는 저자의 주장이 어째서 미시적 정책들의 축적에 의한 장기적인 개선과 크게 달라보이지 않는지는 흥미로운 분석거리가 되겠다. 다만 저자가 제시하는 개선책들 중 "무조건적 기초소득"(한국에서 수년 전부터 조금씩 언급되고 있는 "기본소득"을 연상케하는)과 같은 매우 급진적인 정책이 포함되어 있음을 언급하는 게 좀 더 공정하겠다.
3부 "변혁"Transformation은 "그렇다면 체제를 어떻게 바꿀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위한 이론적인 답변이다. 라이트는 기존 체제에 대한 입장의 스펙트럼에 따라 변혁 이론을 단절적/틈새적/공생적의 세 입장으로 나눈 뒤 각각의 가능성 및 부작용을 언급한다. 저자에게 약간 거리를 두고 2부를 읽은 독자들은 라이트의 입장이 사실상 틈새적인 변혁이론에 제일 호의적이며 단절적 이론에 제일 비관적임을 알아도 그다지 놀랍지는 않을 것이다(우리는 여기에서 라이트가 "선진 자본주의 체제"가 역사의 승리자로 등극했던 20세기 후반부, 그것도 그 중심부였던 미국에서 살아왔다는 사실을 유의해야 한다--그가 중남미를 포함한 다른 지역의 대안적 실천을 아우르는 넓은 시각을 보여주는 건 사실이지만, 세계 체제의 위기가, 물론 그것이 그 자체로 체제의 붕괴를 의미하지는 않지만, 점차 명확해지고 있는 오늘날에는 라이트가 조금 수세적인 입장에서 서술한 게 아닌가라는 질문이 가능하다).
라이트의 "해방적 사회과학"은 대부분의 국내독자들에게 꽤나 이질적으로 읽힐 것이다. 그 자신이 일원이기도 한 "분석적 실천철학 그룹"Analytical M-ism Group"계열의 저서가 G. A. Cohen의 책 한 권만이 국역되었을 뿐인 현재, 그가 자신의 입장으로 표명하는 실천철학적 계열 독자들에게는 미국식의 정치 및 지배구조 연구가 낯설게 느껴질 것이며 역으로 미국에서 출발한 분석적인 정치이론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실천철학적 입장 자체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다. 얼핏 볼 때 라이트의 야심찬 저술은 이질적인 지적 전통들이 공존하는 미국의 지적 풍토 위에서만 가능한 융합물, "하이브리드"인 것처럼 보인다. 바로 그 점이 보다 급진적인 대안을 요구하는 독자들에게는 거리감을 줄 수 있겠지만, 어쨌든 라이트의 분석적인 방법이 가진 장점들, 곧 상식적인 수준에서 어렵지 않게 이해될 수 있는 명쾌함과 실용주의적 경향이 폭넓은 연구범위와 만났을 때 그 결과물이 결코 무시될 수 없다는 것만큼은 강조하고 싶다(더불어 보다 전문적인 관심을 가진 독자들에게는 이 책 곳곳에서 인용되는 저술들 또한 주의깊게 살펴볼 대상이기도 하겠다). 무엇보다, 지난 10년 간 우리에게 가장 절실했던 게 실현가능한 대안의 존재 그 자체였다고 한다면, 라이트의 책은 그 입장의 미묘함(저자 자신이 이야기하듯, 자신이 제기하는 대안들이 사실상 현존 체제의 장기적 유지에 기여하는 꼴을 낳지 말라는 보장은 충분하지 않다)에도 불구하고 조심성 깊은 저자의 현실적인 태도가 마치 우리의 손에 충분히 닿을 수 있는 거리에 답변이 존재한다는 느낌을 준다. 다만 그 지적 전통들 및 사유의 종합적인 면모가 실제로 유기적인 통일을 이루고 있는지에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다른 무엇보다도, 라이트의 책에 가해질 수 있는 최대의 비판은 (특히나 일국적인 관점에서 체제를 보는 것을 비판하는 이들에게는) 시장과 공존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라이트의 대안들이 국가들 간의 경쟁을 초래하는 capitalism 의 중대한 속성을 어떻게 넘어설 수 있는지, 다시 말해 양차대전에서 사민주의의 역사가 보여주었던 안타까운 경로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에 있다. 이는 일종의 '다양한 지적 흐름들의 공존'을 자랑으로 하는 현대 미국의 대가에게 가해지는 전문가들의 일격이기도 하다(나는 여기에서, 로익 바캉의 저술에 대한 코멘트와 마찬가지로, 로버트 브레너 및 만델을 염두에 두고 있다).
읽고 생각할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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