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익 바캉. <가난을 엄벌하다> 와 새로운 계급분할 [130504]
Reading 2014. 3. 18. 13:59*2013년 5월 4일
로익 바캉 Loïc Wacquant 의 <가난을 엄벌하다>는 개략적으로 말해 복지국가 또는 사민주의 체제에서 신자유주의 체제로 전환하면서 '문제를 일으키는' 하층민들(이 표현은 그것에 담긴 모멸감까지 포함해 보다 진실에 가깝다)에 대한 정부의 대응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다루고 있다. 신자유주의 헤게모니가 확립되기 이전에 사회적 약자의 존재로부터 빚어지는 문제들을 사회적 약자의 생존권을 보완하는 방식으로 풀려고 했다면, 정부지출의 축소와 함께 이러한 경향이 최초로 우세하게 나타난 미국에서만이 아니라 서유럽, 남미에 이르기까지 빈자/약자의 범죄행위 및 존재방식에 대해 보다 억압적이고 징벌적인 행정적 대응이 나타나게 되었다. 뉴욕 시장을 지냈던 루돌프 줄리아니의 이름은 알만한 사람들은 잘 알테고, 우리는 대표적으로 삼진아웃제를 적용했던 아놀드 슈왈제네거의 캘리포니아를 모범적인 사례로 기억할 수 있겠다--교육 및 감화와 같이 시민주체를 적극적으로 (재)구축하는 비용이 '비정상적인' 시민주체들을 체포하고 가두기 위한 비용으로 옮겨간, 그래서 대학들의 재정이 대폭 하락한 대신 교도소의 건설비용이 폭증한 경우처럼. 바캉은 정부의 징벌적인 정책이 표면적으로는 문제의 여지가 있는 이들을 사회에서 치워버리기 때문에 '사회적 안전'이라는 면에서 효과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이 사회의 문제를 겉표면에서만 다루는 미봉책일 뿐 실제로는 사회구성원들의 삶을 더욱 악화시킬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저자와 번역자의 인터뷰를 포함하여 200여쪽밖에 되지 않는 짧은 책이지만 문제제기의 유효성은 더 논할 필요가 없다. 실제로 최근 한국에서 청소년 범죄 및 (아동)성범죄를 매스컴 및 제도가 다루는 방식은 <가난을 엄벌하다>에서 지적한 경향, 즉 문제의 원인과 문제발생의 구조를 사유하는 대신 처벌과 억압으로 문제를 눈 앞에서 지워버리려는 흐름에 매우 잘 들어맞고, 그래서라도 지금 이 책은 읽힐 가치가 있다.
최근의 정부정책의 경향을 단순히 대 범죄정책의 차원에서만 논한 게 아니라 신자유주의라는 흐름과 연결지어 설명하려 한 것이 이 책의 독서를 좀 더 풍성한 시간으로 만들어준다. 그러나 보다 지적으로 성실한 독자라면 로익 바캉이 암시하는 해결책, 즉 정상적인 사민주의로의 복귀--애초에 '문제를 일으킬 수 밖에 없는' 조건으로부터 사회구성원들을 구출하는데 정부비용을 지출해야한다는--가 과연 그 자체로 맞는 답인지 의문을 표할 수 있다. 오늘날 신자유주의 정책의 파산은 거의 공인되다시피한 상황에서는 바캉의 주장은 상식적으로 타당한 듯 읽힌다. 그러나 두 가지 질문이 가능한데, 애초에 복지국가의 이상 혹은 케인즈주의적 정책이 1970년대에 이르러 세계 경제체제의 황금기의 종료와 함께 더 이상 자명한 답이 아니게 되었으며 오늘날 케인즈주의가 쉽게 권좌에 복귀하지 못하는 사태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나듯 그때 사민주의자들을 휘청거리게 만들었던 구조적 문제는 (북유럽의 몇몇 국가를 제외하고는) 여전히 잔존한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 로익 바캉이 상식적인 해결책으로 생각한 사민주의 체제가 헤게모니를 상실한 조건을 묻지 않은 채로 단순히 과거의 방식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할 수 있는가? 로버트 브레너의 관점(<붐 앤 버블>)을 도입한다면 과거로 단순히 돌아가는 것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한다. 두 번째로, 보다 내 본령에 가까운 분야에서 질문한다면, 사민주의적 체제 하에서의 주체화는 과연 그 자체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인가? 사회구성원들의 기본생존권을 보장한다는 점에서의 정부비용지출은 예산의 한계를 일단 괄호 안에 넣어둔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동의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애초에 1960년대 후반의 전세계적 저항운동이 나타난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그것이 사실상 정부 혹은 '체제'에 의한 인간주체의 구성이라는 오래된 비판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는 어떠한 노력이 덧붙여져야 하는가? 알튀세르-푸코-들뢰즈와 같은 이론가들이 던진 질문들(이들의 질문들은 바로 전술한 역사적 맥락 위에서 출현한 것이다)을 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단순히 사회복지비용증대라는 답변이 만병통치약처럼 나타날 수 없음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바캉의 텍스트에서, 바캉이 직접 말하고 있지 않지만, 읽어낼 수 있는 제일 중요한 지점은 신자유주의 체제가 일부 사회구성원들을 대응하는 방식이 그 자체로 국민국가의 주체들을 더 이상 동일한 주체들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쉽게 말하자면, 20세기 국민국가의 이상이 그것이 어떤 정치경제적 체제를 채택하든 그 구성원들을 동일한 권리를 보장받는 공통된 주체들로 합일하는 것이었다면(가라타니 고진의 "네이션" 개념을 참조), 현재의 체제는 점차적으로 그 체제 내부의 구성원들을 분리된 복수의 주체로 다루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처벌하는(처벌을 원하는) '정상적인' 주체들과 처벌받는 위치에 놓인 '비정상적인' 주체들은 더 이상 동일한 주체로 간주될 수 없다! 18-19세기와 20세기 사회철학의 가장 큰 차이점들 중 하나는, 특히나 '계급' 개념의 유효성이 사라지는 데서 확인할 수 있듯, 사회구성원들을 분할을 부정하고 사회를 점차 동일한 구성원들의 단순한 집합으로 간주하는 경향에 있다(E. P. 톰슨이 <영국 노동 계급의 형성>에서 수정주의자들과 가장 날서게 대치하는 부분이 바로 여기다). 이러한 변천이 가능해진 까닭은 자본=국가=네이션의 체제가 그 사회구성원들을 적어도 당위의 차원에서는 동등하고 단일한 주체들로 다루었다는 데 있다. 그러나 <가난을 엄벌하다>에서 드러내는 현상은 현 시점에서 자본=국가=네이션, 즉 근대국가의 오래된 이상이 무너지면서 그 구성원들이 급격히 분할되고 있다는 것이다(이것은 얼마 전까지 유행한 정체성의 정치politics of identity와는 양적으로도 질적으로도 차원이 다르다). 좀 더 래디컬하게 말하자면, 현재의 체제는 계급분할을 재사유할 수 있는 토대를 점차 만들어가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바캉의 텍스트에서 얻을 수 있는 제일 중요한 교훈이다(더불어 우리는 19세기와 21세기 경제정책의 유사성을 재사유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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