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9일 일기: <건담 디 오리진>, <데빌맨>, <여자 제갈량>

Comment 2016. 4. 10. 00:09
1. 2주 전에 야스히코 요시카즈의 <모빌수트 건담 디 오리진> 코믹스를 다 읽었다. SF 장르가 갖는 독특한 특성 중 하나가 세계의 '설정'을 디테일하게 파고들어갈 수 있는 데 있다면, 건담 월드는 (특히 UC는) 그것을 갖추었다고 말할 수 있다. 70년대 후반부터 거의 40년 가까이 다양한 분야로 확장된 이 시리즈를 최초에 만들었던 작가들은 플롯과 이야기, 메카닉을 만들기 이전에 세계를 만들 준비가 되어있던 이들이었다. 퍼스트건담 극장판을 봤던 게 아마 고등학생 때였을텐데, 10년도 지나 코믹스로 재구성된 퍼스트건담은 내 기억보다 훨씬 더 섬세한 터치가 가해진 작품이었다.

전장에 내던져져 쉴틈없이 찾아오는 죽음과 대면하는 청소년들이 그들에게 강요된 상황의 무게를 아무런 흉 없이 매끄럽게 받아내기란 불가능하다. 압도적인 무게로 촉발된 감정의 뾰족한 모서리는 종종 최선의 선택은 아닌 방식으로 그들의 '정상적 삶'을 찢고 튀어나오지며 때로 서로의 살갗을 관통한다(제타를 포함해서 이 시기의 건담 제작진은 속에서 무언가가 언제든 튀어나올 것 같은 청소년을, 그리고 그 청소년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장벽과 같은 어른들을 매우 잘 그렸다...아무로나 카미유를 보면 조금만 잘못 손 대면 폭발해나올 듯한 우울한 정념의 덩어리가 깃들어 있다). 그러나 이들이 속한 세계는 그런 사소한 것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들의 운명을 어디론가 끌고 간다--때로 시체를 매달아 바닥에 질질 끌고가는 전차처럼 말이다.

이 모든 것을 어색하지 않게 설득력 있는 모습으로 그려내는 것은 노련함과 섬세함 뿐만 아니라 미세한 지점까지 완결성을 추구하는 끈기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예술작품에는 완성을 위해 선험적으로 주어진 공식 따위는 없기 때문에, 무언가를 완성된 것처럼 만들기 위해 필요한 기교의 수준은 실제로는 매우 높다.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인공적이지만 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여야 한다(물론 실제로 퍼스트건담의 경우 주의 깊은 독자들은 곳곳에서 이야기를 지탱하기 위해 여기저기로부터 끌어온 클리셰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작품이 리얼한 드라마로서 완전성을 끌어올리는 시점은 제타건담에 들어서이다). 건담은 내게 이토록 높은 수준의 재능과 숙련도를 갖춘 이 세대 일본 SF 애니메이터들이 어떤 성격의 집단이었을지, 그들이 살던 그 시기의 일본사회란 어떤 것이었는지 새삼 묻게 만든다.



2. 어제 나가이 고의 <데빌맨> 애장판을 읽었다. 학부생 때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곳곳에 말도 안 되는 검열이 행해진) 해적판으로 보면서도 큰 충격을 받았던 작품인데, 2011년에 한국에 정식 발매되었고 다행히 아직도 별다른 어려움 없이 구매할 수 있다. 1972년 작이지만 40년이 지났어도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전율은 줄지 않았다. 한 눈에 과거의 것임을 알아볼 수 있는 작화 스타일에도 불구하고 <데빌맨>은 곳곳에서 한 마디 대사 없이 그림만으로 엄청난 에너지를 표출하며, 때때로 귀기에 가까운 것조차 느낄 수 있다. 나는 자신이 어떻게 이 작품을 그릴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는 나가이 고의 말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이 작품을 이해하는 독자라면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건담이 정밀한 지점까지 파고들어가는 노력과 의지의 산물이라면, <데빌맨>은 뛰어난 감각만이 아니라, 우리가 천재성이라는 것을 좀처럼 이야기하지 않는 세계에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재능 혹은 정신이 빚어낸 결과물이다. 이미 공인된 걸작이지만, 나는 이것이 10년, 20년이 더 지나도 여전히 그 섬뜩한 힘으로 사람을 끌어당길 거라 생각한다.



3. 마지막으로는 망중한 속에서 잠깐 본 <여자 제갈량>. 몇몇 대사를 인용한다.

76화 마지막 대목: (서서의 회상 혹은 어린 서서의 독백) "어머니의 그 한숨 소리에 / 온 몸이 두들겨 맞는 것 같았다. / 왜 그랬는지는 몰라도."

78화 유비와 관우의 대화:
유비: '나라 하나를 세울 수도 멸망시킬 수도 있는 재능의 여자 책사' / 이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네. / 첫번째로 그런 재능을 갖고 있다는 것. [관우: 그러니까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두번째는 / 그건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것. / 재능있는 부하가 상관을 배신하는 건 드문 일이 아니지. 조조도 본래 원소의 부하에 가까운 위치였고 / 한신도 고제를 배신하고 독립할 뻔한 적이 있었어. / 하지만 이 여자 책사들은 그게 불가능해. / 자네도 봐서 알겠지만 / 그들은 주군의 강력한 지지가 없으면 / 발언권을 얻는 것조차 불가능하지. [관우: ... 그야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있으니까요.] 그래. / 그게 핵심이네. /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있는 것. / 쓰고 버리기 좋은 / 최고의 장기말이야.

관우: 조맹덕도 같은 생각이었을까요?

유비: 글쎄... / 나야 모르지만 / 아닐걸... / 기분파니까 / 그냥 그 사람이 마음에 들어서 기용한 거겠지. / 하지만 말이지. 그걸 가지고 / 자신이 누군가를 이해했다든가 / 무언가를 바꾸어 냈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 그런 위선자 바보 자식이야말로 / 제발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79화 서서가 제갈량에게 : 유현덕은 어떤 사람이었냐면 / 똑똑하고 / 욕심 많고 / 무정하고 / 외부의 시선에 집착하는 사람이었어. / 군주로 모시기에 / 최적의 조건인 사람. / 우리들의 장기말이 되기에 / 최적인 사람.

81화 삼고초려, 유비가 제갈량을 설득하며 : 어째서입니까? / 왜 그런 재능을 갖고도 출사하지 않는 겁니까? [제갈량: ... / 아무 소용이 없으니까.] 내가 줄 수 있소. / 권력도 자유도. / 그대가 나를 돕는다면...

제갈량: 설령 네가 황제가 되더라도 / 내게 줄 수 있는 권력도 자유도 / 황제가 행사할 수 있는 재량 뿐이겠지 / 나는 아무것도 기대하지도 바라지도 않아. / 자, 이제 그만 돌아가시죠.

유비: 거짓말이야. / 재능있는 자가 야망을 가지지 않을 리 없어. / 실패할 걸 알더라도 / 뭐든지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거라고. / (제갈량의 소매를 붙잡으며) 뭐든지... / 뭐든지 주지. / 권력이든 [제갈량: 이거 놔.] 그래. 원한다면 황제의 자리도 줄 수 있어. [제갈량: 놔.] 불가능한 일이 아... [제갈량: (일그러진 표정으로 유비의 가슴을 주먹으로 치며) 제길!] ...(정신을 차린 듯 멍한 표정으로 제갈량의 소매를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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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김달의 작품이 위의 두 작품과 같은 강점을 지녔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의 작품과 같은 시대에 살아가는 독자는 아주 작게나마 분명 축복받았다고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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