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5월 초 일기 및 독서목록

Comment 2016.05.04 02:34
3월부터 지금까지의 기간은 내 과거에서 딱히 비교될 만한 때가 잘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바빴다(하지만 언젠가 이 기간을 경신하는 때가 또 올 것이다). 총선 전후까지가 원총 업무 및 투고 작업으로 채찍을 맞으며 일하는 기분이었다면, 이후 3주 간은 앞서의 무리에 따라 찾아온 신체적 반작용과 그동안 제쳐놓았던 다른 일들을 조금씩 따라잡기 위해 또 다시 잠을 줄일 수밖에 없었다. 소화기관이 다소 너덜너덜해진 상태이긴 하지만, 어쨌든 과거보다 짊어진 삶의 무게를 좀 더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게 되었음을 확인하게 된 건 다행으로 생각한다. 지난 몇 년의 크고 작은 실수들을 거쳐서 매 끼니를 거르지 않고, 위가 더 안좋아지기 전에 약을 꾸준히 먹고, 신체 기능이 망가지기 전에 억지로라도 정기적을 시간을 내어 근력운동을 하며, 30분 정도 더 자고 performance를 약간 떨어트리는 걸 감수하고, 짧게 눈을 붙일 때는 (어차피 평소에도 눈가리개는 하고 자지만) 귀마개를 끼고 머리를 비우는 것 등등의 자잘한 노하우들을 축적하게 됐다--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피로와 스트레스가 쌓여 만사를 몸 가는 대로 하고 싶은 때일수록 최대한 효율적으로 행동하기 위해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지난 10여년 간 내 삶에서 효율성은 지속적으로 증가해왔고, 이는 효율적으로 활동하는 만큼 남는 몫을 재투자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나는 확실히 나 자신과의 관계에서만큼은 매우 탐욕스러운 자본가처럼 행동하고 있다.

이번 학기에 매주 돌아오는 고정 업무목록을 정리해보면, 대학원 수업 수강 2과목, 청강 1과목, 학부 수업 조교 1과목, 교육공동체 나다 수업 1건이다. 여기에 (비정기적으로) 원총 업무가 있고, 위의 것들과 부분적으로 겹치지만 항상 그렇지는 않은 내 공부를 따로 해야하고, 무언가 쓸 거리가 생각나면 글을 써야 한다. 스스로를 솔직하게 돌아보면, 유학을 떠나는 지인들을 볼 때마다 "한국에 남을 거면 그만큼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부채감 비슷한 것을 늘 짊어지고 살게 되는 면이 분명 있다(사실 본격적인 외국어공부를 뒤로 미뤄놓고 있는 건 늘 마음에 걸린다). 물론 그것만 있는 건 아니고, 다른 종류의 의무감, 그러니까 내 삶이 의미있는significant 무언가가 될 수 있도록 살아가야 한다는 아주 오랫동안 이어져온 명령이 있기에--어떠한 종교도 갖고 있지 않으면서도 종종 스스로로부터 종교적인 면모를 찾아내게 된다면 아마도 이 때문일 것이다--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일과 마주쳤을 때 좀처럼 거부하지 못한다; 최소한의 퀄리티를 유지할 수 있으리라는 전제만 주어진다면 말이다. 건강을 연소시키는 것이 결코 현명한 일이 아님을 알면서도, 동시에 그 연소를 통해 불길을 피워내는 대신 차갑게 굳어있는 질료로서의 삶에 만족할 수 없는 이율배반 위에서 균형을 잡는 일은 언제나 쉽지 않다.

총선 준비과정에서 나의 모토는 '기본만 하자'였다. 최선을 다했다간 다른 영역들을 포기해야 할 게 뻔했고 그럴 생각은 없었다. 어떤 일을 처음으로 시도하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특권 하나는 비교할 만한 전례가 없기 때문에 정말 자기 자신이 설정한 기본적인 기준만 달성해도 충분하다는 것이다--나는 그 특권을 십분 이용했고, 나름대로 만족한다(나의 장점 중 하나는 거의 모든 결과를 그럭저럭 합리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곧 대학원 평가가 시작될 지금부터 무엇을 할지, 할 수 있을지가 더 중요하다. 다음 학기까지 다니고 수료와 함께 스스로 설정한 임기 또한 끝내려는 입장에서 가장 큰 과제는 권리장전을 준비하는 것과 후임자를 찾는 거고, 둘 다 쉽지는 않겠지만 못 할 일은 아니다.

논문투고는 불행하게도 다소 낮은 가능성으로 예상했던--바꿔 말하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닌--결과를 맞이 했고, 나는 내게 주어진 선택지에 따라 할 수 있는 걸 할 거다. 어쨌든 짧은 시간에 공부는 진짜 많이 했다. 8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한국사회가 겪은 엄청난 변화의 궤적을 적어도 일부는 보았고 나름대로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서사도 짤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사상을, 사유의 체계들을, 이데올로기를, '정신'을 학적으로 다루는 방법을 찾아가는 또 한 번의 습작을 했다. 작년 말 18세기 말-19세기 초 영국을 배경으로 썼던 첫 습작과 비교해보면 확실히 전반적으로 많은 진보가 있었다. 한 5년에서 10년 정도 계속 만들어가면 어느 정도 쓸만한 틀이 잡히지 않을까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다. 여튼 현재 예상하는 방향으로 갈 경우 중간에 짬을 더 내서 원고를 보충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많은 분들께 큰 도움을 받았고 또 받을 것이기에 다시 한 번 학적인 작업이 결코 개인의 지성의 산물이 아니며 제도와, 네트워크와...체계의 산물임을 깨닫는다.

미숙한 장거리주자처럼 숨을 몰아쉬며 겨우겨우 따라가고 있을 뿐인 대학원 수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지적 자극을 준다. 흥미롭게도 모든 수업에서 '과거의 전통이 이후에 어떻게 변주되고 또 달리 활용되는가'라는 문제의식을 만나고 있다. 지난 1년 여간 맥락주의적 사상사를 계속해서 쫓아온 입장에서 이런 지적 자극이 때맞춰 주어진다는 것은 정말 기쁘고 감사할 일이다. 기말페이퍼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도 앞이 보이지 않지만, Wordsworth와 Scott을 19세기 초반의 idyllic moment / the romantic / civic(manly) virtue 라는 맥락에서 연결시켜보는 건 어떨까라는 질문 하나는 갓 손에 넣었다. 중세극(Medieval Drama)를 읽는 수업은 아직은 여전히 낯선 전통 사이를 헤매고 있지만, 성경을 끼고--<사도행전>이나 <토비트 서> 같은 건 이번에 처음 읽었다--성체축일 순환극Corpus Christi Cycles이나 성인전을 옮긴 극을 죽 읽다보면 확실히 어떤 거대한 형체를 갖춘 세계 속에 들어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린 시절 나갔던 교회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르고, 기독교 전통의 흡인력을 느끼다가 현실의 반동성애 개신교인들을 보고 정신을 차리는 시간을 반복하고 있다. 이번 주는 도덕극(Morality Plays)을 몰아서 읽을 차례다. 그린블랫Stephen Greenblatt의 셰익스피어 전기 <세계를 향한 의지>_Will in the World_ 국역본을 선물받았고 틈나는 대로 계속 읽어갈 생각이다.

나다에서 하고 있는 17세기 정치철학 수업을 준비하기 위해 그동안 계획만 짜놓고 읽지 못하고 있던 글들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다. 오늘 드디어 Richard Tuck의 <자연권 이론>_Natural Rights Theories_ 1회독을 마쳤다(이게 턱의 박사논문을 기초로 한 책이었다는 사실은 다 읽고나서 알았다). 한국에서는 홉스Hobbes에 대한 짧지만 알찬 입문서가 예전에 번역되언 나온 것을 제외하곤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퀜틴 스키너Quentin Skinner는 거의 너댓 권이 번역되었고, 포칵J. G. A. Pocock도 주저 하나는 번역되었으며, 던John Dunn도 최소 두 권은 번역되었다), 턱 또한 케임브리지 사상사학파의 전성기를 이끄는 일급의 사상사가 중 한 명으로서 특히 근대 법사상사에 관해 여러 책을 썼다.
<자연권 이론>은 고전기 및 중세부터 르네상스를 거쳐 17세기 후반 로크까지 자연권 개념이 어떻게 형성되고 또 정치사상에 영향을 끼치는지를 정리하고 있다. 170여쪽 밖에 되지 않는 분량에 저 많은 것을 넣어놓았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서술의 밀도가 매우 높고 한 문단을 읽어가는데 상당한 공을 들여야 한다--특히 1장을 포함해 라틴어 용어가 수시로 튀어나온다--아무래도 법학 베이스가 없어서인지 나 역시 몇몇 대목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로 넘어갔다. 이처럼 '낭비없는' 정신을 반영하는 턱 고유의 문장 스타일이 있는데, 처음에 적응하는데 꽤 애를 먹었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별다른 기교를 부리지 않는 스타일임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지금도 까다롭지만 꾹 참고 읽다보니 나름 정이 든 것 같은 생각마저 든다. 모두가 잘 알고 있다고 친숙하게 생각하는 홉스와 로크에 대해 상당히 많은 재고를 하게 만드는 책인데 여기에서 더 논할 건 아니고, 따로 시간을 내어 부족하게나마 정리를 하려 한다. 그 뒤는 같은 저자의 _Philosophy and Government, 1572-1651_를 보고 17세기 후반을 다룬 James Tully의 작업(_An Approach to Political Philosophy: Locke in Context_)으로 넘어갈 계획이다.



3월 말부터 5월 초까지 읽은 책들을 (언젠가 따로 정리할 것을 포함해) 간단히 목록만 적어놓는다:

스티븐 샤핀. <과학혁명>. 한영덕 역. 영림카디널, 2002. _The Scientific Revolution_ by Steven Shapin, 1996.
피터 디어. <과학혁명: 유럽의 지식과 야먕, 1500~1700>. 정원 역. 뿌리와이파리, 2011. _Revolutionizing the Sciences: European Knowledge and its Ambitions, 1500-1700_ by Peter Dear, 2001.
[17세기 유럽 과학혁명 관련 한국어로 읽을 수 있는 문헌으로 피터 보울러와 이완 리스 모러스가 편집한 <현대 과학의 풍경>_Making Modern Science: a Historical Survey_ 국역본 1권에 수록된 1장과 2장을 함께 볼 것]. 이후 18세기를 다룬 <과학과 계몽주의>로 넘어갈 예정. 17세기 과학혁명에 관해 한국어로 단 한 권의 책을 읽는다면, 디어의 책이 가장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셸던 월린. <정치와 비전: 서구 정치사상에서의 지속과 혁신>_Politics and Vision: Continuity and Innovation in Western Political Thought_. 전3권: 현재 국역본 2권까지 읽었고 3권을 마저 읽을 예정.
장 보댕. <국가에 관한 여섯 권의 책>. 전6권. 현재 국역본 2권까지 읽었고 언젠가 나머지를 따라 읽을 예정.

프레더릭 바이저. <헤겔 이후: 독일철학 1840~1900>. 이신철 역. 도서출판b, 2016. _After Hegel: German Philosophy 1840-1900_ by Frederick Beiser, 2014. *따로 간략하게 정리할 것.

존 던. <민주주의의 수수께끼>. 강철웅, 문지영 역. 후마니타스, 2015. _Setting the People Free: the Story of Democracy_ by John Dunn, 2005.

강미옥. <보수는 왜 다문화를 선택했는가: 다문화정책을 통해서 본 보수의 대한민국 기획>. 상상너머, 2014. **충분히 평가되지 않은 매우 시사점이 많은 책. 간략하게 리뷰 예정.

조한혜정, 엄기호 외. <노오력의 배신: 청년을 거부하는 국가 사회를 거부하는 청년>. 창비, 2016. 내가 기대한 종류의 책은 아니었다.

피터 브라운. <성인숭배>. 정기문 역. 새물결, 2002. _The Cult of the Saints: Its Rise and Function in Latin Christianity_ by Peter Brown, 1981. 두 번째로 읽은 브라운의 책. 짧지만 매우 배울 게 많아서 정리를 하고 싶은데 그게 가능할지 자신이 없을 정도. 고대 후기Late Antiquity 로마 제국의 잔해로부터 기독교 사회가 성립하는 과정을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흥미로운 스케치를 제공한다. 2002년도면 새물결이 본격적으로 문제적 출판사가 되기 전인 것 같은데, 의외로 어순배치가 이상하거나 교정을 덜 본 것 같은 대목들이 좀 있어서 읽다가 종종 걸린다. 이후 드디어 <아우구스티누스>를 읽을 예정.

조지프 R. 스트레이어. <국가의 탄생: 근대국가의 중세적 기원>. 중앙대학교 서양중세사연구회 역. 학고방, 2012. _On the Medieval Origins of the Modern State_ by Joseph Reese Strayer, 1970. 찰스 틸리(Charles Tilly)의 서문이 실린 좀 더 최근 판본을 옮겼다면 더 좋았겠지만, 번역 자체는 이물감 없이 무난하게 읽히며 뒤에 수록된 역자들의 논문은 스트레이어를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 나름 도움이 된다(단 내가 중세 및 국가사에 있어 비전공자라는 사실을 감안하시라). 스트레이어는 1100년부터 1600년까지의 서유럽--주로 영국과 프랑스--을 배경으로 "시간상으로 지속적이고 공간적으로는 고정적인 정치단위의 출현, 항구적이고 비인격적인 제도의 발전, 최종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권위의 필요성에 대한 동의, 권위는 신민들의 기본적인 충성을 반드시 필요로 한다는 관념의 수용 등"(23)을 포함하여 왕권과 행정, 사법기구 등으로 이루어진 근대국가의 원형이 어떻게 성립해갔는지를 설명한다. 1장은 기본적인 흐름과 배경을, 2장은 관료제의 성립과정을, 3장은 새로운 관료제와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다룬다. 이후 틸리의 작업을 포함해 서구에서 근대국가, 행정, 관료제의 역사를 느릿하게나마 읽어갈 예정.

Tuck, Richard. _Natural Rights Theories: Their Origin and Development_. Cambridge: Cambridge UP, 1979. ***따로 정리할 예정.

Scott, Walter. _Waverley: Since Sixty Years_. Oxford WC판으로 읽었음.


엔리케 두셀. <1492년 타자의 은폐: '근대성 신화'의 기원을 찾아서>. 박병규 역. 그린비, 2011. _1492: el encubrimiento del otro: hacia el origen del "mito de la modernidad" : conferencias de Frankfurt, octubre de 1992_ by Enrique Dussel, 1994. : 수업 리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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