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도르노, 비트겐슈타인, 보편성과 비판[130728]

Reading 2014.03.18 13:39

* 2013년 7월 28일 페이스북


아도르노의 "Why Philosophy?"를 드디어 다 읽었다. 1962년에 행한 라디오 강연 원고인데 (이런 내용을 라디오 강연으로 들을 수 있다니, 한국에서는 상상이 잘 안 된다) 기본적으로는 거의 30년전에 행한 교수취임연설인 "The Actuality of Philosophy"의 연장선 격에 있다. 근본적인 관점이 달라지지는 않았지만 몇 가지 강조점이 변한 게 있다. 자세한 건 나중에 적고.

<탐구>를 1/3 정도 읽었다. 아직까지는 논지를 명료하게 정리한다기보다는(과연 이 텍스트가 그러한 이해를 허용하는지부터 불분명하지만) 부분적으로 흥미있는 내용들에 머물러 생각하면서 넘어가는 읽기에 가깝다. 적어도 일부분에선, 비트겐슈타인은 거의 의도적으로 극단적인 경험주의자의 위치를 점하면서 우리가 자명하게 생각하는 언어-의미-대상의 연결이 사실상 언어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인지구조의 형식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드러낸다. 200절 정도까지 비트겐슈타인은 어떤 답변을 제시한다기보다는 집요하게 우리 인식구조가 어떠한 우연적인, 특수한 형태로부터 비롯되었는지를 질문한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히 인식구조, 언어-인지구조의 우연성과 불확실성만을 강조하는데 머무르지는 않는다; 예컨대 그는 개인의 내면에서 언어와 의미 간의 연결고리의 불확실성을 드러낸 뒤 곧바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 간의 의사소통이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분명히 말한다. 행위를 가능케 하는 구조의 불확실성과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는 행위 양자를 함께 고려한다는 점에서 그는 확실히 참된 경험주의자다. 그러나 경험주의자라는 표현이 함의하는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 덧붙인다면, 비트겐슈타인이 <탐구>에서 행하는 작업은 (재닉과 툴민이 주장했듯) 칸트적 비판의 연장선에 있음을 분명히 해야한다. 우리의 언어-인지구조와 그것이 낳는 필연적인 가상의 탐구, 그리고 우리가 확정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 있기에 발생하는 오해에 한계를 부여하려는 시도는 명확히 칸트적인 주제며, 실제로 비트겐슈타인의 태도는 적지 않게 칸트를 연상하게 한다.

아도르노가 "Why Philosophy?"에서 철학의 임무로 주장하는 역할도 칸트적인 비판과 매우 흡사하다. 30년 전의 취임강연 원고에서 헤겔 이후 당대까지 철학의 진행을 파편화와 실재reality의 포기로 진술했다면, 60년대의 강연에서 아도르노는 철학사를 오해를 교정한다는 의미에서 비판criticism의 반복으로 본다(여기에서 들뢰즈와 가라타니를 떠올린다).

<부정변증법 강의>에서 3강을 읽고 있다. (이렇게 여러 텍스트를 쪼개서 읽으니까 진도가 안 나가는 것이기도 하다...) 아도르노가 헤겔로부터 이후 포스트모던 계열의 철학에서 다루어질 주제들을 미리 읽어내는 것(1966년도에 아도르노가 알튀세나 푸코가 누군지 알고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자신의 극복대상으로서 헤겔에 대한 존중. <강의>는 확실히 보다 친절하고 구체적인 맥락에 기반한 텍스트다.

<탐구>를 읽으면서 아도르노와의 유사성을 떠올린다. 아도르노의 언어로 표현한다면 개념이 대상을 포착하는 행위 자체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 비트겐슈타인은 물론 언어라는 보다 한정적인 대상을 다루고 있지만, 어떤 총체적인 틀 자체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태도(이것은 둘의 공통점으로 보아야할 것인가, 아니면 20세기 전반 독일-오스트리아에 살았던 이들에게 공통적인 것으로 보아야 할까?). 결정적인 것은 비트겐슈타인의 가족유사성과 아도르노의 짜임관계konstellation가 갖는 함의다. 그것들은 각각 일반자에 흡수될 수 없는 특수자, 개별자들의 고유성을 강조하면서도 그것이 어떤 전체적인 연관관계 안에서 함께 묶일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함께 지닌다. 조금 성급하게 앞질러서 말한다면, 우리는 아도르노와 비트겐슈타인이 모든 개별자들을 통일해서/압축해서 묶을 수 있는 총체성과 오로지 개별자만을 인정하는 실증주의/경험주의적 태도 양자에 비판적이었으며 개별자들을 인정하는 보편성의 형식을 탐구했다는 점에서 유사한 성격을 지닌다는 주장을 떠올릴 수 있다--이것은 좀 더 오래된 용어로 실재론과 유명론 양자를 한꺼번에 초월하고자 하는 칸트-헤겔적인 기획의 연장선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The Actuality of Philosophy"와 "Why Philosophy"를 연결시켜 설명하는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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