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스타브 플로베르. <감정교육>. 국역본. [131123]
Reading 2014. 3. 18. 13:05* 2013년 11월 23일 페이스북
<감정교육>_L'education sentimentale_을 읽었다. 1869년판을 번역한 2012년 국역된 나남판으로. 전에 홉스의 <리바이어던>을 읽을 때도 느꼈던 거지만, 나남의 책표지 디자인과 광고문구 감각은 정말 최악이다(한 90년대쯤에 나왔을 하루키 책 홍보문구 느낌이 2012년판 플로베르 책에 달라붙어 있다). 엄청난 속도로 플롯이 움직이고 인물들의 처지가 뒤바뀌는 발자크(특히 곧바로 읽은 <잃어버린 환상>)에 비하면 확실히 완만하고 느린 진행을 보여주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역자해설이나 주인공이 단지 가능성 사이에 머물기만을 고집한다는 모레티의 코멘트(<세상의 이치>)는 약간 과장된 면이 없지 않나 싶다. 초반부 1/5 정도까지는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은 채로 지나가기 때문에 조금 지루한 감이 있을 수 있지만, 그 뒤부터는 오늘날의 감각으로 볼 때 이 소설이 그렇게까지 정지해있다고 느껴지지는 않는다.
역자해설에서는 부분적으로밖에 동의가 안 되는 진술들을 많이 보게 된다. 프레데릭 모로가 아르누 부인을 이상적인 대상으로 삼고 지고지순한 사랑을 한다는 식의 해석은 소설의 결말부만 봐도 전혀 동의가 안 된다. 발자크를 끌어들여 비교한다면, 발자크가 직접적으로 세상과 세상의 일부로서의 인간군상을 묘사하려 했다면 플로베르는 내면의 탐구에 집중했다고 보는 편이 더 옳을 것 같다. 사실상 내면이 그렇게까지 깊지는 않은, 관계들의 변동에 따라 내면의 진폭도 크게 오가는--그리하여 그 관계망들로 구성된 '사회'를 그려내려는--발자크에 비교한다면 특히 <감정교육>의 결말부는 이 텍스트의 가장 주된 초점이 모로가 어떠한 내면을 가진 인물인지, (시대와 엮을 수 있다면) 특정한 시대에 어떠한 형태의 내면이 형성되는지를 그리는 데 있음을 보여준다. 프레데릭 모로의 우유부단함, 혹은 바깥의 단순한 자극들에도 금방 변하는 특성을 가진 그의 성격을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게 <감정교육>에서 저자가 행하는 일이라고 한다면, 확실히 <감정교육>은 <보바리 부인>의 연장선에 있는 작품이다. 엠마 보바리가 경제적으로, 내적으로 파산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 과정에서 어떠한 정신상태에 빠져드는지를 보여주는 게 후자의 목적이었듯, 전자의 목적이 아주 잘 드러나는 부분은 결말부에 나이 든 아르누 부인을 만난 프레데릭 모로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그리고 그 생각을 감추기 위해 어떤 진술로 부인과 자기 자신을 '기만'하려고 노력하는지를 서술하는 대목이다; 그 기만이야말로 모로를 대상으로 하는 '감정교육'의 결과물이고. 일전에 강쌤 수업에서 헨리 제임스Henry James의 <보스턴 사람들>_The Bostonians_을 읽으면서 제임스가 (내면을 관찰할 수 있는) 3인칭 시점을 사용하면서 개별 인물의 내면과 화자의 내면을 오간다는, 그래서 주의깊게 읽어야 한다는 설명을 들었던 기억이 나는데, 그런 기법상의 문제에 관해서라면 플로베르도 이미 그러한 장치를 사용한다(그런데 제인 오스틴도 그런 면이 없지 않았던가? _Emma_부터는 약간 그런 느낌이 나는 대목이 있었던 것 같은데...물론 플로베르만큼 그 장치를 명확하게 의식적으로 사용한다고까진 말하긴 어려울 수 있겠지만 말이다). 거리를 두고 인물을 그리되 인물의 속까지 그려내려는 명확한 목표를 가진 19세기의 소설작가라면 결국 이러한 기법을 사용하게 되지 않나 싶다. 제임스도 그렇고 플로베르도, 발자크도 이 사람들이 자신들의 작품을 어떻게 정의하고 또 어떤 방식을 채택하는지 자의식을 드러내는 소설 외적인 텍스트들을 보는 게 중요할 것 같다.
프레데릭 모로가 활보하는 세상은 특히 두 부분에서 나의 주목을 끌었다. 다른 사람들도 많이 언급할 대목은 역시 1848년의 (결국 루이 보나파르트가 정권을 잡는) '혁명적 상황'의 전후다. 혁명상황에 사람들의 정서가 어떤 식으로 변모하는지를 보여주는, 그리하여 혁명의 당사자들이 '질서'를 요구하고 서로의 입장이 뒤바뀌는 상황은 예컨대 가라타니 고진이 그려주었듯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을 민주주의와 파시즘의 문제로 엮는 해석과 아주 잘 결부될 수 있다(M&E의 플로베르 평을 아직 읽지 않았는데, 이들이 <감정교육>을 읽었다면 자신들의 견해를 어떻게 표명했을까?).
다른 이유로 눈길을 끄는 것은, 소설 중간에 한 번 벌어지는 파티 장면이다. 그 대목에서 부유한 인물들은 제각기 비천한 인물들의 복장을 하고 난잡하게 각자의 동물적인--'참된'--쾌락추구를 그대로 보여준다. 프랑스와는 조금 다른 맥락이겠지만, 영국에서 18세기에 '감수성의 문화'culture of sensibility가 유행하면서 상류층이 자신들의 '내적 진실함'을 보여주기 위해 하녀라든가 목동의 복장을 하고 파티를 열었다는 유쌤의 설명이 떠오른다. 특히 결말부에서 프레데릭 모로의 "외적인 태도"와 내적인 감정의 괴리를 의식하는 독자라면 외면=표현과 내면=감정의 분리구도가 고착화되는, 정확히 그러한 것이 한 시대의 '교육결과'라는 이 소설의 묘사를 가볍게 넘어갈 수는 없으리라. 마음에 들지 모르겠지만, 전역 후에 G.J. Barkerr-benfield의 _Culture of Sensibility_를 읽어보면 조금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아마 위의 두 대목을 연결시켜 설명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그리하여 (모레티는 <감정교육>의 독해에서 직접적인 정치적 상황을 과감히 배제하고 그 시대의 '감정구조'로 들어가는 전술을 택했지만) 다시금 역사와 텍스트를 연결하는 작업이야말로 역사적 해석의 한 과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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