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규환. <모차르트 타운> <댄스 타운> [130910]

Reading 2014. 3. 18. 13:21

*2013년 9월 10일 페이스북


항상 긴장하며 살고 있어서인지 유독 활자가 안 읽히는 날들이다. 생각의 에너지를 사용할 여력은 없고, 무언가를 보거나 읽기는 해야할 것 같아 영화를 틀었다(Qook TV에는 생각보다 많은 무료영화들이 있다). 그래서 주말부터 어제까지 전규환이 감독한 <모차르트 타운> <댄스 타운>의 총 두 편을 보았다. 나는 인간들과 사물들의 연결관계를 좀 더 지적/비판적으로 파악하는 걸 선호하기에 영화에서 보여주는 파편화된 삶들의 산만한 연결고리들에 충분히 만족하지는 않았다('타운 3부작'--두 번째 영화인 <애니멀 타운>은 쿡티비 리스트에 없다--중의 첫 편이자 마지막 편인 두 영화는 우리의 삶, 혹은 서울에서의 삶의 비참함만을 드러낼 뿐 그 원인은 묻지 않는다). 어쩌면 거의 無서사에 가까울 정도로, 특히 여러 인물들을 동시에 비추는 <모차르트 타운>에서 그 점은 좀 더 분명한데, 삶들을 파편화시켜 보여주는 것, 또는 이미 파편화된 삶들을 어떤 리얼리티로서 보여주되 그 파편들이 서로 느슨하게 이어져 있음을, 그러나 그 연결고리가 결코 강하지 않고 아주 희미할 뿐임을, 희미하되 없앨 수 없는 것인지 부정할 수 없으나--왜냐하면 우리는 하나의 사회에서 우리가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조차도 연결되어 있으니까--아주 옅어져 있는 것인지 결정하기 힘든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방식은 흥미로웠다. 전규환 감독의 작품들이 우리에게 단순히 파편화된 삶의 제시 말고도 보여주는 게 있다면, 우리를 붙들어주는 사회적인 연결고리가 점차 사라질 때 우리의 삶은 (아감벤으로 인해 유명해진 도식을 말한다면) bios 에서 zoe, 즉 벌거벗은 삶에 가까워진다는 점이다. <모차르트 타운>의 토하고 생리하는 여성(주유랑이 분한)도 그렇지만, 이 점은 <댄스 타운>의 탈북여성 리정림(라미란 분)에게서 분명히 드러난다. 남편을 포함한 북한에서의 모든 사회적 삶bios을 상실하고 남한에 도착한 정림이 자신을 신문하는 공무원들 앞에서 갑작스럽게 생리가 터지는 것, 술에 만취한 상태에서 경관과 길바닥 위에서 마치 동물처럼 섹스하는 것(이 장면을 단순히 사회적 약자로서 그가 강간당하는 것만으로 이해하기에는 이 장면에서 강조되는 '인간 이하'의 성격을 충분히 강조하지 못한다), 남편의 총살을 확인하고 몇 번이나 구토하는 것, 이 모든 장면들은 정림의 삶이 사회적으로 벌거벗겨질 때, 즉 zoe 로서의 성격을 띨 때 그로부터 육체적인 면모를 강조하는 것이 병치되고 있음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정림의 삶에서 육체의 성격이 강하게 드러날 때 그의 '주권을 상실한' 신분, 스스로의 삶을 지탱해줄 어떠한 고정점도 없는 상황이 드러난다; 이 점에서 <댄스 타운>은 전작과 비교할 때 서사없음 자체의 표현, 의도적으로 구축되는 서사와 인물들 사이의 연결고리들을 지워버림으로서 드러나는 또 다른 형식의 연결고리--아도르노나 벤야민의 konstellation이 떠오르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를 보여주는 '무구조의 구조적 힘'은 축소되었지만, 대신 벌거벗은 삶을 강조할 기회를 얻었다고 할 수 있겠다.

전역 후에 <애니멀 타운>을 볼 기회가 오기를 희망한다. 아주 우연적인 선택이었지만 (나는 전규환 감독 및 이 작품들에 대해 영화를 볼 때까지 어떠한 사전정보도 지니지 못했다) 기억할 만한 이름이 하나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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