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보예 지젝.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131103]

Reading 2014. 3. 18. 13:12

* 2013년 11월 3일 페이스북


슬라보예 지젝의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세계금융위기와 자본주의>_First as Tragedy, Then as Farce_ 국역본을 읽었다. 제목 자체가 (내가 오늘날 한국의 상황을 빗대어 설명하기 가장 좋은 텍스트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브뤼메르 18일>의 한 구절에서 따왔는데, 원저자의 조롱이 담뿍 담긴 의도도 그렇고, farce의 원래 뜻에서도 그렇고 희극comedy보다는 소극笑劇이 좀 더 적절한 번역어가 아니었나 싶다. 단순히 희망적이라는 뜻이 아니라 바보 멍청이들이 나오는 한심한 상황으로부터 웃음을 끌어내는 극이라는 얘기니까(역자인 김성호 선생이 이걸 모르진 않았을텐데, 유쌤의 책도 그렇고, 창비는 학술서를 학술서답지 않게 취급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지젝의 이 책이야 순전한 학술서는 아니지만). 부제는 국역본에서 임의로 붙인 듯 싶은데 대충 큰 이야기에서는 들어맞고 나름대로 흥미도 끌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지젝의 문제의식을 지나치게 경제체제로서의 자본주의에 국한시킨다는 아쉬움이 있다. 이 점은 역자해설에서도 마찬가지고. 개인적으로 주변에서 마주친 지젝 좀 읽는다 얘기하는 사람들 중에서 실제로 지젝이 보여주고 있는 래디컬한 지점에까지 도달하는 경우는 별로 보지 못했다. 이 책의 역자해설도 마찬가지인데, 몇몇 지점에서는 흥미로운 문제제기가 있지만 책의 전체적인 테마를 이해하는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지젝이 가고 있는 지점에 독자가 도달하는 것을 방해하기까지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지젝의 주요 저술들을 거의 읽지 않았지만(기껏해야 비교적 초기저술인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_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_과 <까다로운 주체>_The Ticklish Subject_ 정도다), 상대적으로 최근의 대중적인 저술들, 곧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_In Defense of Lost Causes_와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를 보면서 지젝에 대해 단순히 "글을 재미있게 쓰는 적당히 비판적인 철학자" "지젝이 생각하는 저항은 인터넷에서 트윗질하는 것" 정도의 코멘트를 다는 사람들은 그의 최근 작업을 전혀 따라가지 않거나 충분히 꼼꼼하게 텍스트를 읽지 않는다고 밖에 생각이 들지 않는다. 분명히 말하건대, 지젝은 한국의 지젝 독자들이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근본적이고 극단적인 차원에서 문제를 제기한다. 단지 그 독자들이 지젝을 이해하기를 거부할 따름이다(이 점에서는 <트랜스크리틱> 이후의 가라타니가, 아니 극단을 사유하는 모든 이론들이 받는 대접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아무리 국역본이라고는 하지만 300쪽 짜리 이론서를 읽는데 3시간도 걸리지 않을 정도로 잘 읽히고 재밌다. 악명높은 라캉에 대한 언급도 거의 없고.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를 슬쩍 Toni Negri(나는 당연히 토니 블레어를 떠올리는데)로 인용하는 센스 같은 건 이 사람이니까 할 수 있는 짓일 터이다. 책은 두 파트로 나뉜다. 1부에서는 2007년의 금융위기를 이야기하면서 이런 종류의 '경제적 위기'가 현 체제에서 발생한 우발적인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본질로부터 기인한, 또 반복될 수밖에 없음을 주장한다. 물론 애초에 지젝이 경제구조에 대한 이론을 독자적으로 주장하거나 괜찮은 레퍼런스를 선정/참고할 정도는 아님을 유념해두어야겠지만, 동의불가능한 주장은 아니다. 다만 1부에서 가장 매력적이고 잘 읽히는 부분은 경제위기를 둘러싼 다양한 입장들의 반응을 분석하고 재정리하는 내용이다. 그게 지젝의 특기이기도 하고. 이론적으로 훨씬 흥미로운 부분은 물론 2부다. 제목 및 구체적인 내용은 여러가지 상황상 이 게시물에 적을 순 없고...어쨌든 지젝은 자신이 생각하는 대안=이념을 다른 동료/경쟁자들(예컨대 바디우)과 구별해가면서 꽤나 섬세하게 그려낸다. 그러나 특히나 국가 문제에 관련해서 지젝의 입장이 충분히 분명하지 않다는, 완성된 그림이라기보다는 여러 장의 스케치를 나열해놓은 파편적인 것이라는 불만제기는 가능하다; 그러나 그게 지젝의 잘못인가? 미래의 상을 완벽히 그려내는 작업은 현재로서 엄밀함을 추구하는 이론가에게는 불가능하다; 보다 구체적인 지점으로까지 이론을 밀어붙였던 가라타니가 어떤 비난을 받았는지 생각해보라. 개인적으로 내가 생각했던 정도보다 가라타니의 문제의식 및 입장과 지젝의 입장이 매우 가깝다는 걸 깨닫고 지젝에게 예전보다 더 흥미를 느꼈다는 사실 정도만 적어둔다. 예컨대 칸트의 '이성의 공적 사용'에 관한 두 사람의 코멘트는 거의 완전히 일치한다(사실 지젝이 <트랜스크리틱> 영문판을 거의 나오자마자 읽었던 걸로 알긴 하는데, 뭐 지젝의 입장에서 이런 얘기가 나올 수 없는 것도 아니고...). 어쨌든 (특히나 새로운 계급대립구도를 지적/발명하는 것을 포함해--이처럼 대립구도를 통해 행동의 주체를 재발명하는 작업, 지젝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서구 실천철학의 오래된 문제였던 agent의 문제를 재숙고하는 작업과 같은 것은 가라타니의 이론틀에서는 결여된 지점이다)지젝의 몇몇 코멘트들은 보다 진지하게 숙고할만 하다; 다만 그 코멘트들에 반영된 입장이 수년 뒤에도 마찬가지로 지젝에게 유효할지는 두고 보아야겠지만. 이데올로기적 구축물로서의 국가를 사유하는 지젝의 오랜 작업이 최종적으로 어떤 결실을 맺을지는 아직까지 불분명하다.

번역은 대체로 잘 읽힌다. 창비식 외국어 표기법은 좀 낯설긴 하지만...못 읽을 정도도 아니고. 다만 가끔 고유명사를 잘 못 옮긴 사례가 있었다고 기억한다(사실 연구실 옆자리의 책을 멋대로 빼내어 읽은 거라 상세한 재검토가 불가능하다; 지젝을 본격적으로 파기 전에는 이 책을 따로 사지는 않을 것 같고). 이 책에서도 언급되는 수전 벅-모스Susan Buck-Morss의 책 <헤겔, 아이티, 보편사>_Hegel, Haiti, and Universal History_ 국역에도 보이지만, 김성호 선생은 가끔 고유명사를 황당하게 틀리게 번역할 때가 있다. 솔직히 악셀 호네트Axel Honneth를 알렉스 호네스Alex Honneth로 옮겼던 건, 물론 애초에 오식이 있었겠지만, 당황스러웠다(벅-모스 책 번역본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때 모 편집자와 함께 폭소했던 기억이 있다).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는 그 정도는 아닌데 완벽한 건 아니었다. 뭐, 그래도 이 정도만 해도 말끔한 번역인거지...싶지만.

지젝의 다른 최근작업, 예컨대 비교적 전에 나왔지만 좀 더 주저에 가까운 <시차적 관점>_Parallax View_과 같은 텍스트를 살펴보기 전까지는, capitalist-democracy system의 한계지점을 사유하는 또 하나의 대표적인 텍스트로 간주될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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