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게이. <계몽주의의 기원>. 1권. [140204]
Reading 2014. 3. 18. 12:35*2014년 2월 4일 페이스북
피터 게이의 <계몽주의의 기원: 근대 이교의 부흥>_The Enlightenment: An Interpretation : The Rise of Modern Paganism_을 읽었다. 전에 언급한 대로 제2권 _The Science of Freedom_(자유의 학문 정도로 번역하면 될까나)이 번역되지 않은 게 매우매우 아쉬운 책이다. 게이는 1920년대에 독일에서 태어나 40년대 중반 북미에서 미국생활을 했다. <기원>은 그가 박사학위를 받고 몇 년 지나지 않은 1966년에 발표한 대작으로, 90년대까지도 염가본으로 계속 출간되었다고 하니 반세기가 지났어도 생명력이 남아있는 책인 것 같다. 막상 읽어보면 충분히 그럴법하다고 생각이 드는 게, 국역본 기준으로 본문만 600쪽이고 참고문헌해제, 그러니까 본인이 참고한 1,2차문헌들에 대한 해설 및 코멘트만 170쪽에 달한다. 쉽게 말하면 1960년대까지 영미권과 프랑스/독일어권에서 나온 거의 대부분의 연구서를 망라해서 봤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텍스트도 거의 백과사전에 가까운 느낌이다. 물론 중심서사와 주체, 주인공들(볼테르, 디드로, 달랑베르, 흄, 기번, 레싱 등등)이 있는 텍스트임에도 불구하고, 그 지식의 광범위함은 그가 다루는 계몽사상가들의 사상적 세계에 풍성함을 부여한다. 큰 줄기만 정리하자면, 게이는 여기에서 계몽사상가들이 자신의 과거'들'과 어떤 관계를 맺었는가를 계속해서 조명한다. 그들은 그리스-로마의 지적 전통을 계승하고 또 자기식대로 활용하고 싶어했고, 마찬가지로 그리스-로마의 유산으로부터 일정량을 물려받았던 중세인들에게 격렬한 거부감을 느꼈으며, 계몽사상가들의 직속선배인 인문주의자들이 고전을 활용하는 방식에는 조금 더 친밀함을 느꼈다. 최종적으로 자신들의 방식으로 고전을 전유하고 그로부터 힘과 무기를 얻은 계몽사상가들은 동시대 최대의 적인 기독교 지배체제에 날을 세운다(물론 계몽사상가들 또한 기독교 지배체제로부터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을 수는 없었지만). 게이의 서술은 과거와 현재의 복잡한 상호참조관계를 생생하게 그려내는데 초점을 맞춘다. "modern paganism"이란 표현은 이런 점에서 과거-현재 양자의 중요성을 함께 강조한다. 중세의 교부철학자들, 13-17세기의 인문주의자들, 18세기부터의 계몽주의자들은 모두 그리스-로마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지만, 그들이 참고할 수 있었던 자료들과(이 점에서는 후대로 갈수록 보다 많고 풍성한 사료를 이용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들이 과거를 대할 때의 태도는 서로 사뭇 달랐다. 이는 단순히 참조할 수 있었던 텍스트의 차이에 있다기보다는, 그들에게 기독교 지배체제가 가할 수 있었던 지배권의 엄격함에도, 다시 말해 그들이 처했던 현재적 조건에도 상당한 요인을 찾을 수 있다. 즉 계몽사상가들은 이전의 시대보다 좀 더 폭넓고 자유롭게--물론 완전하게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자신의 양식으로 삼을 수 있었던 고전들과 정치/경제/자연과학/기술/문화 등 제반 영역의 진동으로 인해 빠르게 무너지기 시작한 기독교 시대라는 배경이 상호작용하는 과정을 통해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마 이 책을 처음 읽는 독자들은 자신들의 바람과는 달리 17-18세기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리스-로마의 문인들에 대한 논의가 계속해서 쏟아지는 것에 당황하고 지루해할지 모르겠지만, 게이의 관점에서 볼 때 그리스-로마적 전통과 기독교적 전통/체제가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는 계몽사상가들의 출현과 역사적 역할을 묘사함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작동한다; 그리고 계몽주의자들--이신론자, 무신론자, 회의주의자들을 향해 나아가던--은 드디어 본격적으로 중세 이래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무너트리기 시작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저자가 참고문헌 해제에서 다루는 분야는 그리스-로마 시대 문헌들, 중세, 르네상스, 17-18세기를 포괄한다. 게이와 (그가 필사적으로 미국 진출을 막으려고 노력했던) 푸코가 똑같이 프란시스 베이컨 경이 참 중요함에도 연구가 별로 되지 않았다고 아쉬워하는 것도 흥미로운 지점. 참고로 게이는 자신이 에른스트 카시러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이야기한다. 이후 70년대 정신분석적 방법론을 본격적으로 배운 뒤 게이에게 프로이트는 엄청나게 중요한 사람이 되는데, 카시러든 프로이트든 20세기 후반 미국의 인문사회학도들에게 확실히 유럽의 영향이 주요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실증적" 연구자들도 예외는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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