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푸코의 권력이론> 일부 인용. [140207]

Reading 2014. 3. 18. 12:33

*2014년 2월 7일 페이스북


<미셸 푸코의 권력이론>(정일준 편역, 새물결 1995)에서 일부 인용. 후기 푸코의 글/대담 다섯 편과 정치철학/사회이론의 관점에서 푸코를 읽은 논문들 네 편을 수록하고 있다. 원문이 프랑스어로 된 것도 전부 영어판을 번역대본으로 삼고 있고 번역도 아주 매끄러운 편은 아니다. 앞의 글 두 편은 사실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 특히 <안전, 영토,인구>와 매우 겹치므로 가급적 후자를 읽기를 권한다. 다만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작업에 대해 짧지만 흥미로운 코멘트를 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2. 사람들 사이의 모든 관계에서는, 많은 요인이 권력을 결정합니다. 그런데, 거기서도 합리화는 부단히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합리화에는 고유한 형식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경제롸정에만 특정하거나, 또는 생산과 소통테크닉에 특정한 합리화와는 다른 것입니다. 그것은 과학의 담론과도 다릅니다. 인간에 의한 인간의 통치는--그들이 작은 집단을 형성하는가 또는 큰 집단을 형성하는가?, 그것이 여자에 대한 남자의 권력인가, 또는 한 계급의 다른 계급에 대한 권력인가, 또는 인구에 대한 관료제의 권력인가? 등등에 따라--특정 유형의 합리성을 수반합니다. 권력은 폭력을 도구로 수반하는 것이 아닙니다.

3. 따라서, 한 형식의 권력에 저항하거나 반항하는 사람들은 단지 폭력을 비난하거나 하나의 제도를 비판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이성 일반에 대해 비난을 가하는 것으로도 충분치 않습니다. 의문이 제기되어야 하는 것은 문제가 되고 있는 합리성의 형식인 것입니다. 정신질환자나 광인에게 행사되는 권력에 대한 비판이 정신병치료제도에만 한정될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처벌하는 권력에 대한 의문이 감옥을 전체주의 제도total institutions라 비난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의문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그와 같은 권력관계가 어떻게 합리화되고 있는가? 그렇게 묻는 것이야말로 같은 목적과 같은 효과를 지닌 다른 제도들이 그들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 <정치와 이성> 82-83("Omnes et Singulatim: Towards a Criticism of Political Reason")

"이성을 법정에 세워볼 것인가? 내 생각에 이보다 더 헛된 일은 없다. 첫째로, 이 영역은 죄가 있느냐 없느냐와는 전혀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둘째로, 이성을 비이성nonreason에 대한 반대실체로 간주하는 것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끝으로 그런 재판은 우리를 합리주의자인가 또는 비합리주의자인가 하는 자의적이고도 지루한 논의 속에 가두어 놓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근대문화에만 특수한 것으로 보이는, 계몽주의로부터 유래한 이런 종류의 합리주의rationalism를 탐구해야만 하는 것일까? 내 생각에 그것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몇몇 성원이 시도한 접근방법이다. 그렇지만, 내 목적은 비록 그들의 저작들이 매우 중요하고 가치있는 것들이긴 하더라도, 그것들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 나는 합리화와 권력의 연계를 다른 방식으로 탐구할 것을 제안하고자 한다.
사회나 문화의 합리화rationalization를 하나의 전체로서 다루기보다는, 이 과정을 광기, 질병, 죽음, 범죄, 성 등등과 같은 각각의 근원적인 경험a fundamental experience에 근거하는 몇 가지 준야로 나누어 분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나는 합리화라는 말은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항상 일반적으로 합리화의 진보과정을 불러일으키는 것보다는, 오히려 특정한 합리성들specific rationalities을 분석하는 것이다.
우리의 역사에서 그리고 정치테크놀로지의 발달에서 비록 계몽주의 시대가 매우 중요한 시대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해서 우리 자신의 역사에 구속되게 되었는가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좀 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서 진행되어온 과정에 대하서 언급해야 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주체와 권력> 88-89 (드레이퍼스와 래비노우의 책에 푸코 자신이 영어로 써서 덧붙인 후기)

"나는 해방이라는 일반적 주제에 대해서 늘 약간의 회의를 품어왔습니다. 해방이라는 문제를 몇 가지 안전장치나 한계를 의식하면서 다루지 않는다면, 인간에게는 어떤 본성이나 근거가 존재하며 그러한 본성이 특정한 역사적, 사회적, 경제적 과정으로 인해 억압적 기제 속에 은폐, 소외, 또는 감금되어 있다는 생각으로 되돌아갈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한 가설 하에서는 억압적 족쇄를 풀어버리는 것만으로 충분한데,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자기자신과 조화를 이루고, 자신의 본성을 재발견하거나, 또는 자신의 근원과 새롭게 만나며, 자신과의 완전하고도 긍정적인 관계를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이러한 주제가 엄밀한 검토없이 수용될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나는 해방 또는 그러한 형식의 해방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식민지 민중들이 해방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말뜻 그대로의 '해방'에 들어맞는 진정한 해방의 행위입니다. 그러나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이러한 극단적인 예에서도 해방의 행위는 자유의 실천을 확립하기에는 불충분합니다. 이 자유의 실천들은 차후 이들 민중, 이 사회, 그리고 개인들이 스스로 수용할 수 있는 존재형식 또는 정치 사회를 결정하는 데 필수적인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나는 자유의 실천을 고집하는 것입니다." --<자유의 실천으로서 자아에의 배려: 권력, 다아, 윤리> 101-02 (1984년 1월의 대담, 영역본은 _The Final Foucault_에 수록).

"나는 하버마스의 시도에 흥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가 나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나는 그보다는 약간 더 그에게 동의합니다만--그러나 거기에는 내가 보기에 항상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그가 의사소통관계에 매우 중요한 위치, 즉 "유토피아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기능을 부여한다는 점입니다. 진리놀이들games of truth이 아무런 장애물이나 제약, 억압적 효과 없이 자유롭게 순환될 수 있는 의사소통 상황이 존재한다는 생각은 내게는 유토피아로 여겨집니다. 그러한 시각은 권력관계가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니며, 자아가 권력관계로부터 반드시 해방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권력관계가 없는 사회가 존재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약 권력관계가 행동을 하려는 개인들, 그리고 타자의 행위를 결정하려는 개인들의 수단이라고 이해한다면 말입니다. 문제는 권력관계를 완전히 투명한 의사소통의 유토피아로 해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아에 법의 규칙, 운영의 기술, 그리고 윤리, _에토스_, 자아의 실천을 부여함으로써 권력놀이가 지배를 최소화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같은 글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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