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소. <학문예술론> / 헤르더. <언어의 기원에 대하여>

Intellectual History 2015. 8. 25. 03:34

장 자크 루소. <학문예술론>("Discours sur les sciences et les arts"). 박은수 역. 성문각, 1984. [<루소 전집> 전 7권 중 7권]


: 루소의 <학문예술론>을 읽었다. 박은수 선생 역본으로 3-40쪽 정도 분량밖에 되지 않는 짧은 글이다. 보통 루소의 데뷔작으로 불린다. 이 글 못지 않게 이 글의 탄생을 둘러싼 비화가 매우 유명하다. 루소는 수감된 디드로에게 면회를 가던 중 뱅센에서 디종 아카데미가 "학문과 예술의 부흥은 풍습을 순화하는 데 기여했는가"란 주제로 논문공모전을 연다는 기사를 읽게 된다. 갑작스럽게 계시와 같이 영감이 떠올라 글을 쓰게 되었고 1등으로 당선, (나중에 <고백>에서 저주하게 될) 문필가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짧은 글이지만, 루소 사유의 핵심적인 지점들은 이미 깃들어 있다.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물려받은 소박한 미덕이 있다면, 예술과 학문을 비롯한 문명적인 요소들이 그 덕을 무너트리고 인간을 타락과 악덕의 상태로 이끈다는 이야기다. 벌거벗은 몸의 투사야말로 가장 많은 덕을 갖춘 이라고 말할 때, 학문과 상업으로 인해 타락한 아테네를 비판하고 질박하며 굳건한 스파르타를 칭송할 때의 루소는 정말 고대 그리스-로마 공화정의 이미지에 한껏 빠져든 것처럼 보인다. 상업과 사치를 비판하고 검약의 덕을 옹호할 때, 페늘롱으로부터 기원하는 18세기의 사치논쟁luxury debate의 맥락을 알고 있는 독자라면(Istvan Hont의 luxury debate에 대한 논문을 참조) 루소 역시 이 논쟁을 의식하고 있었음을 알아차릴 것이다. 물론 루소의 태도는 그 자체로는 고대의 유산을 대대적으로 재활용했던 당대의 지적 유행에 비추어 볼 때 특별히 별다를 게 없다; 그러나 디드로와 백과전서파를 포함한 계몽주의자들이 이성과 문명사회의 장밋빛 전망을 꿈꾼 것과 달리 루소는 이것 또한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고, 결과적으로 이후의 과정에서 볼 수 있듯 '자립적인 덕'을 외치던 루소는 근대적 내면의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루소가 덕성으로의 회귀를 외치면서 일종의 문명비판론을 전개할 때 그는 한 가지 근본적인 난점과 부딪힌다. 이성의 작용과 지식의 축적이 인간의 삶을 더 낫게 만들어준 측면이 단 하나라도 없는가? 통상적으로 우리는 루소에게 전면적인 문명비판적 태도를 예상하기 쉽지만, 실제로 루소는 강경한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우회로를 하나 만들어둔다. 첫째, 특히나 군주와 같이 나라/공동체를 통치하는 이들에게는 국가를 다스리기 위한 지적인 역량이 필요하다. 여기에서 루소는 (암묵적으로) 생산적인 지식과 낭비적인 지식을 구별하며, (명시적으로) 사회를 생산적인 지식을 활용할 소수의 사람들과 바로 자기 자신처럼 아예 지식으로부터 멀어져 덕을 실천하는 다수의 사람들로 나눈다. 둘째, 생산적이고 가치있는 지식은 누구의 어떤 지식인가? 인간을 얽매고 나약하게 만드는 관습과 예의범절, 학문과 예술이 타락한 지식이라면(그리고 역시 스콜라 학자들은 조소받는다), 베이컨 경(Verualm), 데카르트, 뉴턴은 인간을 더 자유롭게 만드는 데 기여한 인류의 진정한 스승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지점은, 루소가 세 명의 '근대적' 지성(그리고 나중에 여기에 로크가 추가될 것이다)을 칭송할 때, 그가 거부하는 것은 지식 일반이 아니라 과거의 퇴락한 문명으로부터 물려받은 잘못된 지식이라는 사실이다. 17세기의 화두가 어떻게 과거와 다른 새로운 '과학적' 지식을 만들어내는 데 있었다면--홉스, 로크, 데카르트, 스피노자 모두 여기에서는 공통된 문제의식을 보유하며 직전 세대의 스콜라 학자들은 이들의 공통된 적이다--, 루소는 그러한 지식이야말로 잘못된 전통의 산물이 아닌 자연으로부터 직접 물려받은 참되고 가치 있는 앎이라 옹호한다. 그리고 이러한 지식과 자유, 자연이라는 주제들로부터 인간을 자유롭게 만들기 위한 올바른 교육방법, 이후에 <에밀>에서 본격적으로 전개될 문제의식이 싹트게 된다.




요한 고트프리트 폰 헤르더. <언어의 기원에 대하여>. 1772. 조경식 역. 한길사, 2003. Trans. of _Über den Ursprung der Sprache_ by Johann Gottfried von Herder.

 

: 테일러를 읽으면서 흥미가 생겨 헤르더의 책을 찾아 읽었다. 번역대본은 이전에 유실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1959년 베를린 독일 학술원에서 발굴되어 출간된 헤르더의 논문 원본이다. 번역문이 아주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닌데, 이게 헤르더의 탓인지 역자의 탓인지는 모르겠다. 중간중간에 모호한 문장들이 존재하지만 어쨌든 큰 요지를 이해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다. 표면적으로 헤르더는 언어의 자연기원론(루소, 콩디약) 및 언어의 신 기원론(쉬스밀히) 양자를 비판하며 언어가 인간의 고유한 성격에 기인한다는 논변을 펼치는데, 이 자체로는 18세기 계몽의 맥락에서 크게 예외적인 입장은 아니나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헤르더 자신의 '발생적' 언어관 및 그 언어가 개인을 넘어 민족과 인류로 확장시켜나가리라는 사고가 오늘날의 독자에겐 가장 흥미로울 것이다. 예전에 읽어서 기억에 별로 남아있지 않지만, 루소의 언어 기원론과 함께 비교해서 읽어본다면 18세기 사유의 갈림길을 이해하는 좋은 척도가 될지도 모른다.


헤르더의 텍스트는 1부 "인간은 타고난 능력으로 언어를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2부 "인간은 어떤 경로로 가장 알맞게 언어를 발명할 수 있었고, 또 그래야만 했는가"의 총 2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3개의 장, 2부는 4개의 "자연 법칙"에 대한 설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두 부분의 부제에 함축되어 있듯 언어에 대한 헤르더의 논변은 궁극적으로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고찰까지 포함하고 있다.


"인간은 이미 동물로서 언어를 갖고 있다"(17)는 명제로부터 출발하는 1부 1장에서 헤르더는 언어의 자연적 속성을 지적하면서 우선적으로 신적 기원론을 비판한다. 곧 자연적인 존재로서 인간은 어떤 동물적인 감정을 가질 뿐더러--우리는 헤르더 역시 18세기의 감각론적 인간학의 자장 하에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흥미롭게도 헤르더가 처음으로 언급하는 정념은 고통이다--그것을 "표현"하려는 경향을 갖는다. "생생한 느낌들을 내면에 간직해두지 못하고 예기치 못한 최초의 순간에 자신도 모르게 또 아무런 의도도 없이 그것을 각각 소리로 표현해야만 하는 감각적인 존재가 여기에 있다"(19). 그러나 정념-표현의 메커니즘을 공유한다고 해서 그것이 보편적 언어를 전제하지는 않는다. 헤르더는 다시금 언어의 자연 기원론 또한 비판한다. "자연의 언어는 원래 개개의 종 내에서 서로를 위한 군집 언어이므로 인간 역시 자신의 언어를 갖고 있다"(21). 여기서 두 가지 사항이 추론가능한데, 먼저 각각의 민족들이 고유한 언어를 갖는 것처럼, 각각의 종들 또한 자신만의 언어를 갖기에 인간의 언어와 자연의 언어 사이에는 종적인 차이가 마치 장벽처럼 자리하고 있으며, 다음으로 언어는 단순히 개체 내적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같은 종에 속한 개체들 간의 대화를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사항은 자연스럽게 인간의 종적인 고유성에 대한 물음으로, 그리고 인간의 사회적/민족적 성격에 대한 강조로 이어진다. 헤르더는 신적인 기원과 동물적인 기원 양자를 비판하면서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관을 제시한다(물론 이 자체는 헤르더만의 사고는 아니며, 우리는 이미 동시대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자들에게서 이러한 전제에 기초한 사고를 볼 수 있다). "모든 종류의 동물들이 자기 활동 영역 안에서, 그에 맞게 자기 언어를 본능적으로 갖고 있듯이, 인간이 (앞서 말한 기계적인 [18세기 감성의 문화에서 기계적인 것과 감성적인 것은 동일한 의미론적 연결망 안에 포함되기도 한다는 걸 염두에 두자--begray] 언어 이외에) 어떤 언어를 그렇게 본능적으로 갖고 있는가? [...] 아예 없다!"(41)


 따라서 2장은 자연스럽게 인간이 (동물적인) 본능 이외에 어떠한 특성을 갖고 있는가를 살핀다. 동물이 자신의 강력한 본능에 따라 주어진 영역 내에서의 탁월한 기능을 보여준다면, 이러한 '전문적인' 기술을 부여받지 못한 인간은 역으로 자신의 의지와 노력에 따라 새롭게 많은 것들을 이룩할 수 있는 가능성의 역량을 간직한다; 칸트가 인간의 고유한 덕으로서의 자유를 이성에의 자율적인 합일에서 찾았다면, 헤르더는 이를 자기표현/창조/실현의 가능성에서 찾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에게는 교정이 불가능한 행동을 초래하는 작품이란 있을 수 없다. 분명히 그는 수많은 것을 통해 자기 훈련을 할 수 있으며, 그럼으로써 자신을 항상 개선할 수 있는 자유의 영역을  갖고 있다. 일체의 사고는 자연의 직접적인 작품이 아니며, 사고는 바로 이런 이유로 인간 자신의 작품이 될 수 있다"(45). 인간은 "자연의 손아귀에 놓여 있는 실수 없는 기계"가 아니며, "스스로에게 자기 행동의 목적이자 목표가 된다." 따라서 인간의 고유한 본성은 "오성, 이성, 성찰 등이라고" 불리는 것, 스스로 지각, 인식, 의지(will)하는 능력의 기초가 되는 사고력에 있다. 그리하여 헤르더는 인간을 "성찰적인 피조물"로 정의한다(48). 중요한 것은 이 본성=성찰에 교육과 성장의 기제가 결합한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성찰을 그 고유의 본능으로 갖되, (헤르더의 '발생적' 모티프를 표현하는 아주 중요한 이미지로) "그 안에 이미 나무 전체가 포함되어 있"는 싹처럼 역량의 성숙한 발현을 위한 잠재력을 이미 간직한다. 언어는 성찰의 자유로운 작용의 산물이며, 성찰의 성숙/축적과 함께 언어 또한 최초의 자연적인 형태로부터 복잡화된 것으로 성장해나간다. 동시에 언어는 성찰을 가능하게 하는 외적인 실천이기도 하다--인간은 언어 없이 사고할 수 없다. "하나 이상의 언어에서 낱말과 이성, 개념과 낱말, 언어와 원인은 동일한 이름을 갖고 있으며, 이런 동의성이 발생적인 전체 기원을 포괄하고 있다. [...] 영혼의 바탕에서 이 두 행위는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 언어가 오성을 만드는 자연적인 기관이 되며, 인간 영혼의 그런 감각이 되는 것이다"(66). 이성=언어=대화를 통해 스스로를 표현하고 또 성숙해나가는 인간관이 제시된다.


3장은 언어표현의 질료라 할 수 있는 소리 및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 감각인 청각의 문제에서 출발한다. 이어 당대에 행해진 광범위한 민족지적 관찰들에 힘입어 헤르더는 근원적인 언어와 감정/감각의 관계를 추적한다. 이는 한편으로 자연의 언어에서 보다 문명화된 언어로의 발달과정을, 다른 한편으로 민족집단의 고유한 경로에 따라 그 발달과정 또한 상이하게 전개되어왔으리라는 판단을 함축한다. 물론 이러한 차이는 근본적인 공통점, 곧 "인간의 언어 창조 능력"(115) 위에서만 가능하다.


2부는 다시 4개의 자연법칙들 및 이에 대한 주해로 나뉘어진다. 제1법칙은 "인간은 자유롭게 사고하며 행동하는 존재이고, 그의 힘은 발전적으로 계속해서 작용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언어의 피조물이다!"이다(119). "발전적"이라는 표현에 주목하자; 인간은 자연에서, 또 성찰의 결과물에서 끝없이 지속적으로 무언가를 끌어내어 배우고 축적하는 본성을 갖는다. "인간 정신은 흔들리지 않고 수집하는 힘이 된다. 이와 같은 연결고리는 죽을 때까지 지속된다. 말하자면 인간은 결코 완벽해지지 않고 항상 발전 단계에, 진행 과정에, 완성을 지향하는 노정에 있는 것이다. [...] 우리 삶에서 본질적인 것은 결코 탐닉이 아니라 항상 발전이며, 우리는 끝까지 살아보기 전에는 결코 인간이 되어보지 못한다"(124). 공리주의적 혹은 한발 더 나아간다면 범박한 자유주의적 인간학이 인간본성을 쾌락추구의 원리에 연결시킴으로써 사실상 (도구적 숙련을 제외한) 탁월함으로의 발전이라는 개념을 봉쇄했다면, 헤르더는 여기에서 발전-완성이라는 서구 근대의 또 하나의 근본적인 인간학을 보여준다; 앞으로 헤르더적인 인간학은 공리주의적 인간학과 끊임없이 서로를 물어뜯으며 타도하려 하는 관계로 나아갈 것이다.


 사회는 인간의 발전을 위한 장을 마련해준다. "수많은 사람이 자신이 지닌 능력과 하나가 되고, 이 능력으로 만들어놓은 것과 하나가 되도록 합치시키는 우리 사회는 어릴 때부터 능력을 분배하고 계기들을 마련해주어 서로가 서로를 위해 발전하도록 만든다. 이렇게 되면 한 인간은 사회에게 이를테면 전적으로 수학적인 존재가 되거나 전적으로 이성이 되며, 또 다른 인간은 사회가 필요로 하는 마음, 용기, 주먹이 된다. 후자는 천재가 아니라 열심히 노력하는 존재로서 사회에 유용하며, 전자는 다른 모든 경우에는 아무 재능도 없고 오직 한 가지 경우에만 천재로서 사회에 유용하다. 개개의 바퀴는 나름의 균형과 위치를 지녀야 하며 그렇지 않은 경우 전체 조직은 이루어지지 않는다"(129). 각 인간의 발전경로는 결과적으로 사회의 유기체적인 분업구조와 맞닿을 것이다; 사회는 인간발달의 조건이자 동시에 발달의 경로를 지정하며 그로부터 자기 자신의 유기체적 완성을 끌어낸다.


 그러나 헤르더는 사회적 분업에 인간을 종속시키기를 거부한다. 헤르더는 특정한 영역만 과도하게 발달하고 다른 영역의 역량을 억제한 인간이 아닌 "분리되지 않은 인간 영혼 전체"(134)야말로 창조적인 역량을, 생동감을 간직했다고 강조하며 이미 굳어진 문법적 규칙들에 갇혀 언어 창조 능력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영혼의 힘들이 덜 발달되어 있을수록, 그래서 개별적인 힘들이 독자적인 영역으로 나아가지 못할수록, 그 뭉친 힘들은 더 강력하게 작용하고 그 힘의 강도의 중심부는 더 응축되어 있다. [...] 모든 감각들이 지속적으로 함께 합쳐지고 내적인 감각이 그 중심부에서 항상 깨어 있었을 때, 이것이 계속해서 새로운 특징들을 발견하고 정돈하며 관찰 관점을 지니고 신속하게 결정을 내려서, 그 결과 언어도 항상 새롭게 풍부해지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인간 정신이 내적인 욕구와 외적인 필요에 따라 움직여야만 했던 나머지, 사회가 주는 자극 없이 단지 스스로에 의해 더 많은 자극을 받아 모든 감각과 사고의 행위를 하는 한, 언어의 발전을 위한 최고의 영감을 받지 않았던가?"(135) 요컨대 헤르더는 인간이 항상 창조적인 존재로 남아있어야만 하며, "교육이라는 감옥의 먼지 속"에 갇히지 않고 "살아 있는 세계와의 관계"를 유지할 때에만 그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136). 헤르더의 사고에서 자연은 그 자체로 생명력과 생동감을 가진 영역이 되며, 그 에너지를 온전하게 이어받아 표현하고 자신의 언어를 확장/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자유로운 인간의 소명이 된다. 그러나 이것이 반드시 자연과 사회의 대립구도를 전제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제2법칙으로 가 보자.


제2법칙은 다음과 같다: "인간은 그 규정에 따르면 집단의 피조물, 즉 사회의 피조물이며 따라서 언어의 발전은 인간에게 자연스럽고 본질적이며 필연적이다"(137). 인간은 무력하게 태어나기에 역으로 서로에게 결속되어 있으며, 결국 동물과 달리 "내면적으로 결합된 전체를 형성"한다(140). 부모-자식 관계와 같은 사례에서 헤르더는 인간들이 서로 간의 채무관계를 통해 결합해 있음을 말한다. 이때 '채무관계'가 단순히 스스로를 돌봐 준 사람에 대한 개인 간의 종속이 아니라 전체 종족 혹은 민족/사회에 대한 것임을 짚어두자. "부모들은 가르침을 통해 자연에게 진 채무로부터 벗어나고, 아이들은 배우면서 관념 없이 본성의 욕구를 충족시키며, 또한 후에 이 재화에 자신의 재화를 더해, 이를 다시금 계속해서 증식시킴으로써 자연에게 진 채무로부터 벗어난다. 그러므로 어떠한 인간도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전체 종족에 끼워진, 이어지는 연속을 위한 하나의 존재일 뿐이다"(140-41). 개체의 발전이 집단의 발전으로, 집단의 발전이 다시 개체의 발전을 가능하게 할 때 언어는 양자의 매개가 되며, 가족을 통한 교육과정은 언어의 혹은 축적된 문명-정신의 전파과정이기도 하다(당연하지만 성장, 발전은 교육의 모티프와 분리될 수 없다). "원래 미성년자인 연약한 아이가 언어를 받아들여 언어를 통해 어머니로부터 젖을 빨고 아버지의 정신을 받아들여서는 안 되나? 그리고 무엇인가가 영원히 남아야 한다면, 이 언어가 영원히 남아서는 안 되는가?"(142) 언어를 물려받은 아이들은 다시금 새로운 언어를 창조해내기에, 집단의 언어는 "부분적으로 형성되어 있으나 계속 발전하는" 속성을 갖는다.


제3법칙은 "전 인류가 한 무리로 머물러 있을 수 없듯이 매한가지로 전 인류가 단 하나의 언어를 유지할 수 없었으므로 다양한 민족 언어의 형성이 이루어진다"이다(151). 앞서 지적했듯 헤르더는 다양한 민족 언어가, 방언이 존재했음을 인지하고 있었으며 각 민족 개체의 고유한 발달경로를 부인하지 않았다. 이는 제4법칙, "모든 개연성에 비추어 인류가 하나의 기원에서 유래하여 하나의 대단위 생계를 꾸려가는 하나의 발전적인 전체이듯이, 모든 언어 및 그 형성의 전체 고리도 그러하다"(163)로 이어진다. 개체가 각자의 독특한 조건에 따라 계속해서 발달해나간다면, 그리하여 "거의 계속해서 무한히 뻗어나가지 않는 사상, 발명, 완성이란 분명히 없다"면(164), 이것들은 단지 독립적인 원자로 존재하는 대신 상호간에 영향을 끼치며, 이 영향은 서로에게 축적되어 새로운 발전의 토대가 된다. 전체로서의 인류는 그 영향관계를 모두 포함하는 가장 완전한 단위다. "나와 인간에 속한 모든 피조물 역시 전 인류와 전 인류가 전수하는 전체의 것에 영향을 미친다. 각각은 커다랗거나 조그만 파도를 일으키며 개개인의 영혼 상태를 변화시키고, 그럼으로써 이런 상태들의 전체를 변화시키며, 항상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또한 이들의 마음 속에 무엇인가를 바꿔놓는다". 헤르더는 인류가 최초의 단일한 인간에서 기원했으되 지속적인 확장과 산포, 상호영향의 누적을 통해 무한한 발전을 이어간다고 말한다. 이때 언어란 "각자가 나름의 방식으로 기여하는 인간들의 생각이 모인 보고이자, 모든 인간 영혼의 작용의 총합이다"(165). 이때 헤르더가 암묵적으로 알파벳을 사용하는 민족공동체들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지적해두자--중국어는 예외로 간주된다.


"사회가 개인보다 더 많이 만들어내고, 전체 인류가 개개의 민족보다 더 많이 만들어낸다[...] 인간은 사회가 없으면 항상 일정한 방식으로 야만스럽게 되어버리고, 가장 급박한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을 행동의 중심으로만 삼는 경우에는 곧 지쳐서 더 이상 아무 행동도 하지 않게 된다"(170). 따라서 고립된 인간은, 고립된 민족은 이윽고 발전을 멈춘다. 인류라는 거대한 장 안에서 서로 간에 부대끼며 관계를 맺는--그것이 설령 적대적일지라도--개체들만이 개체와 전체의 진정한 발전에 복무한다. 헤르더는 신적인 기원을 다시 한 번 거부하면서 대신 초월적 심급에 매겨져 있던 우주적인, 세계적인 숭고의 감정을 인류의 세계와 결합시킨다. 인류는 그 자체로 하나의 전체이며, 영구한 발전을 통해 시간적인 완전성 또한 갖는 시공간,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공간적 완벽성을 확인할 수 있는 '세계'가 된다. "인간 영혼의 본질과 언어의 요소, 인류의 유사성과 언어 발전의 유사성--이것은 모든 민족과 모든 시대, 그리고 세계의 모든 지역에서 나타나는 위대한 범례이다!"(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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