헉슬리-오웰 서한, 디스토피아, 흡혈귀, 좀비, 공포의 감각
Comment 2015. 3. 21. 16:13편지 원문링크: http://www.openculture.com/2015/03/huxley-to-orwell-my-hellish-vision-of-the-future-is-better-than-yours.html
"21 October, 1949
Dear Mr. Orwell,
It was very kind of you to tell your publishers to send me a copy of your book. It arrived as I was in the midst of a piece of work that required much reading and consulting of references; and since poor sight makes it necessary for me to ration my reading, I had to wait a long time before being able to embark on Nineteen Eighty-Four.
Agreeing with all that the critics have written of it, I need not tell you, yet once more, how fine and how profoundly important the book is. May I speak instead of the thing with which the book deals — the ultimate revolution? The first hints of a philosophy of the ultimate revolution — the revolution which lies beyond politics and economics, and which aims at total subversion of the individual’s psychology and physiology — are to be found in the Marquis de Sade, who regarded himself as the continuator, the consummator, of Robespierre and Babeuf. The philosophy of the ruling minority in Nineteen Eighty-Four is a sadism which has been carried to its logical conclusion by going beyond sex and denying it. Whether in actual fact the policy of the boot-on-the-face can go on indefinitely seems doubtful. My own belief is that the ruling oligarchy will find less arduous and wasteful ways of governing and of satisfying its lust for power, and these ways will resemble those which I described in Brave New World. I have had occasion recently to look into the history of animal magnetism and hypnotism, and have been greatly struck by the way in which, for a hundred and fifty years, the world has refused to take serious cognizance of the discoveries of Mesmer, Braid, Esdaile, and the rest.
Partly because of the prevailing materialism and partly because of prevailing respectability, nineteenth-century philosophers and men of science were not willing to investigate the odder facts of psychology for practical men, such as politicians, soldiers and policemen, to apply in the field of government. Thanks to the voluntary ignorance of our fathers, the advent of the ultimate revolution was delayed for five or six generations. Another lucky accident was Freud’s inability to hypnotize successfully and his consequent disparagement of hypnotism. This delayed the general application of hypnotism to psychiatry for at least forty years. But now psycho-analysis is being combined with hypnosis; and hypnosis has been made easy and indefinitely extensible through the use of barbiturates, which induce a hypnoid and suggestible state in even the most recalcitrant subjects.
Within the next generation I believe that the world’s rulers will discover that infant conditioning and narco-hypnosis are more efficient, as instruments of government, than clubs and prisons, and that the lust for power can be just as completely satisfied by suggesting people into loving their servitude as by flogging and kicking them into obedience. In other words, I feel that the nightmare of Nineteen Eighty-Four is destined to modulate into the nightmare of a world having more resemblance to that which I imagined in Brave New World. The change will be brought about as a result of a felt need for increased efficiency. Meanwhile, of course, there may be a large scale biological and atomic war — in which case we shall have nightmares of other and scarcely imaginable kinds.
Thank you once again for the book.
Yours sincerely,
Aldous Huxley"
헉슬리가 오웰에게 부친 편지를 보면, (소수자에 의해 독점되는) 국가권력이 개인을 어떻게 장악하고 통치할 것인가에 대한 불안이 20세기 중반의 시점에 그들의 의식에 얼마나 깊숙히 자리잡고 있는지가 잘 드러난다. 이는 헉슬리와 동시대인으로서 계몽과 이성의 자기파멸적 진행으로 인해 시민계급이 쇠퇴하고 (영화를 포함한) 대중문화에 의한 국가-자본의 대중지배가 전면화된 '관리되는 사회'administered society를 거론한 아도르노, 그들보다 한 세대 뒤이지만 국가권력이 어떠한 장치와 테크놀로지, 앎 등을 통해 개개인에 대한 통치를 수행하는가를 탐구한 푸코의 작업에도 깃든 감각이기도 하다. 어떤 면에서 이들의 작업은 국가와 같은 거대한 권력이 최후의 자율적인 개인까지 집어삼킬 수 있는 때가 되었다는 근원적인 불안감을 염두에 두고서만 이해할 수 있다.
오웰과 헉슬리가 그리는 디스토피아적 상황의 디스토피아적 성격은 거대한 권력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그러한 권력에 의해 행해지는 주체성의 박탈가능성에 있다. 덫을 놓고, 고백을 이끌어내고, 무한한 고문을 통해 문자 그대로 권력이 신체적 규율로부터 정신을 구축하는 과정을 재현하는 <1984>, 최면과 암시, 감각적 쾌를 통해 인간이 '자발적으로' 정해진 경로를 따라 움직이도록 설정하는 권력 메커니즘을 예견하는 <멋진 신세계>, 그리고 마치 어떠한 질서도 뿌리뽑지 못할 '사랑' 혹은 내면의 가장 근본적인 감정을 꺼낸 뒤 이를 문자 그대로 소거해버리는 예브게니 자먀찐의 <우리들>을 보라. 20세기 중반의 대표적인 디스토피아 소설들은 그 최대의 악몽이 이처럼 17세기 홉스와 스피노자, 로크의 시대 이래 서구 근대 인간됨의 핵심이었던 '독립적인 내면' 및 이로부터 발원하는 주체성이 소거되는 순간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철저히 근대적이다.
이는 디스토피아 장르의 곁에서 성행한 공포물들에게서도 마찬가지로 드러난다. 대표적으로 1897년, 19세기의 세기말에 출간된 <드라큘라> 이후의 고전적인 흡혈귀물들을 보자. 고티에의 <죽은 연인>이나 셰리던 레파뉴의 <카르밀라>의 핵심이 흡혈귀의 유혹에 있다는 점에서 고전적인 덕성 대 타락이라는 도식을 반복한다면--물론 덕성과 유혹의 주제는 그 자체로 자유로운 주체성의 문제로 나아갈 수 있는 계기를 포함하고 있지만--, <드라큘라>의 주된 희생자 루시 웨스턴라는 (거의 직유에 가깝게) 성적으로 타락했을 뿐만 아니라 본래 자신이 갖추었던 주체성을 상실하는 존재로 나온다는 점에서 새로운 흡혈귀물을 향한 과도기적 성격을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는 해머영화사 및 그로부터 기인한 20세기 중후반의 수많은 흡혈귀물에서 공포의 초점이 주체성=정체성의 박탈로 점차 이동하는 과정을 서서히 목격한다. 물린 순간 그는 더 이상 그 자신이 아니다. 쉽게 말해 내가 '나'로서 있을 수 없다는 사실, 다시 말해 자유로운 개인으로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이 이 시대 특유의 공포 감각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리고 20세기 후반, 조지 로메로와 함께 일종의 유사-흡혈귀물로서의 좀비물이 등장한다. 이전의 좀비물과 로메로 이후의 좀비물이 갖는 근본적인 성격 차이는 후자에게 흡혈귀의 흡혈과 대응하는 모티프인 물림-감염의 계기가 극대화된다는 데 있다(그리고 21세기 <트와일라잇>과 함께 흡혈귀물에서 흡혈은 더 나은 삶을 향한 기회가 되었다). 이는 리처드 매드슨의 1954년 소설 <나는 전설이다>를 살펴보면 분명한데, 매드슨의 소설은 흡혈귀들로 포위된 곳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인간 주인공을 그려낸다는 점에서--그리고 흡혈귀들은 인간에게 자신의 유일한 정체성을 포기하라고 '유혹'한다--이후 새로운 좀비물에서 익숙해질 구도를 선구적으로 도입했다; 흡혈귀물의 변종과 새로운 좀비물의 인접성은 여기서 분명해진다. 물론 새로운 좀비물은 이전의 흡혈-흡혈귀화의 모티프를 매우 다르게 활용한다. 고전적인 흡혈귀물이 개인으로서의 인간, 개인으로서의 흡혈귀 사이의 갈등을 다루었다면, 좀비물에서는 그러한 갈등구도가 '인간 덩어리'로서의 군중을 통해 표현된다. 좀비들이 인간을 덮치는 스펙타클에서 좀비는 결코 흡혈귀처럼 (잘해봐야 소수의 협력자를 가진) 고립된 존재가 아니며 압도적인 다수로 등장하며, 피해 인간 역시 '개인'이 아니라 다수인 것이다. 핵심적인 것은 바로 '개인'이 지워진 공포물이 일반화된다는 것에 있다.
다시 말해 오늘날 우리에게 최대의 악몽은 더 이상 자유로운 개인이 주체성을 상실하는 상황에서 기인하지 않는다. 그런 것은 애초에 없을 뿐더러 설령 잃어버린다고 해도 대수롭지 않은 무언가가 되었다. 좀비물은 한편으로 대량살상을 포함해 통제불가능한 종말론적 상황을 스펙타클로 표현하면서 주체성의 상실 따위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오늘날의 좀비물이 종말론적 상황을 다루고 있는 것은, 좀비물이 괴물-공포물의 계보가 디스토피아적 악몽의 계보와 겹쳐지는 장소이기도 하는 것을 보여준다. 좀비들이 지배하는 세상은 다시 말해 인간 사회가, 아니 문명이 소거된 영역이다; 20세기 중반의 디스토피아적 악몽이 헉슬리와 오웰이 그린 것처럼 국가가, 사회가 개인을 압살하는 것이었다면--그리고 냉전기의 키워드는 '세뇌'였다--, 20세기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종말론적 악몽은, 핵전쟁의 서사가 보여주는 것처럼, 애초에 인간 문명 자체가 마치 재난을 맞은 것처럼 사라지는 데 있다; 디스토피아와 핵전쟁의 서사가 어떻게 연결되고 또 변이형을 낳는지는 그 자체로 추적해볼 주제다; 좀비물은 한편으로 종말론적 상황을, 다른 한편으로 물림-전염이라는 모티프를 결합하여 활용하면서 오늘날의 지배적인 악몽이 되었고 그 악몽 속에서 개인 주체의 존립근거는 흔들린다.
다른 한편으로 좀비물은 신체훼손의 특수효과를 통해 주체성이라는 추상적인 관념 대신 신체와 감각의 문제를 전면화한다--좀비물은 엄밀히 말해 과거와 같은 의미에서 공포를 준다고 할 수 없는데, 이는 그 영화는 주체성의 박탈이 아닌 신체의 손상을 전면화하고 여기에서 심지어 일종의 감각적 쾌를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흡혈귀물에서 신체 고문의 쾌락은 주로 관에 누운 (여성) 희생자의 심장에 말뚝을 '삽입'하고 목을 자르는데 있었다면, 좀비물에서는 문자 그래도 온 몸을 파편화하는 장면이 일상적인 것이 된다. 여기서 우리는 공포의 감각 자체가 20세기 초중반의 고전적인 모델과는 다른 형태로 나타남을 볼 수 있다. 문명의 파괴 위에서 인간의 파괴는 그 자체로 하나의 감각적 쾌와 뒤섞인다. 이처럼 공포의 감각 자체가 변한 것은 역사적으로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자유롭고 자율적인 개인을 집어삼키려는 거대한 권력의 작동이 20세기의 악몽이자 견제대상이었다면, 오늘날의 사회적 조건은 애초에 주체성의 상실과 공포감의 연결 자체를 끊어놓았다는 점에서 20세기의 비판적 사상가들을 우회해버렸다. 특정한 공포를 현실화시키는 것보다 그 공포를 공포가 아니게 만들어놓았다는 것, 이러한 상황이야말로 진정 가공할 만한 대상이 아닌가? 인간 정신에 대한 비판적인 독해는 이처럼 변해가는 공포의 감각을 역사적 조건 안으로 기입하는 데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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