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인문학 교육 위기론'에 관하여: "청춘이여, 인문학 힐링 전도사에게 속지 마라"에 대한 단평

Comment 2015. 3. 4. 03:36

나는 주변의 인문학 전공자들에게 짜증을 불러일으킨 김인규 교수의 글(http://news.donga.com/Column/3/all/20150228/69852847/1)을 읽고도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부분적으로 그가 '힐링의 인문학'에 낀 거품을 비판하는 논지 자체에 동의하는 것도 있지만(냉정히 말해 '힐링의 인문학'은 '사치재'가 맞다), 무엇보다 그의 글이 일말의 반성도 거치지 않은 전제들 위에서 전개되기 때문에 누구나 쉽게 반박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신문 칼럼란에 뒤이어 실린 글(http://news.donga.com/List/Column/3/04/20150303/69911821/1)을 보면, 인문학계 종사자라고 해서 자신들의 작업을 정당화하는 일에 능숙하지만은 않다는 것 또한 확인하게 된다. 김희원은 "경제적으로 풍요로움에도 불구하고 그 풍요가 인생을 채워주지 못하기 때문에 인문학을 통해 채우려는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이것이야말로 정확히 김인규가 '사치재'라고 부르는 대상이라는 점에서 김희원의 반박은 비판의 외양을 뒤집어 쓴 투항에 가깝다. 따라서 나는 좀 더 건전한 비판을 수행하고 싶다.



김인규의 글에 드러나는 무지를 몇 가지 짚어보자. 첫째, 그는 '힐링의 인문학'이라는 특정한 분야와 대학에서 이뤄지는 전체 인문학 교육을 자의적으로 동일시한다. 생활과학대학 교수인 김난도를 "인문학"의 대표주자로 드는 걸 보면 그는 인문학에 대해 심각할 정도로 무지한 듯 싶다. 나는 학생들의 과제를 첨삭해줄 때 자신이 잘 모르는 분야를 잘 아는 양 쓰는 것은 들키기 쉬운 사기와 같다고 코멘트하곤 하는데, 김인규는 학부 1학년생들이 배워야하는 내용을 벌써 잊어버린 모양이다. 인문학을 잘 모르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지만 잘 모르는 대상에 대해 엉터리 주장을 하는 건 학자로서 심각하게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사실관계만 짚자면, 대중적 인기를 끄는 인문학 상품과 학부 과정에서 다루는 인문학적 교양교육, 대학원 이상의 전문적인 인문학 연구는 그 목표와 내용 모두에서 상당히 다르다. 그가 인문학의 이름을 단 상품들을 싫어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인문학의 이름을 달고 있는 다른 영역들을 싸잡아 비판하는 논리적 오류가 허용될 수는 없다.


둘째, 그는 인문학 정원을 가능한한 최소한으로 축소한다면 실업자를 줄어들 것이라고 가정한다. 김인규가 대학 정원을 줄이자는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있기 때문에, 나는 그가 암묵적으로 이공/상경 계열 정원을 더 늘리자는 주장을 한다고 이해했다. 직관적으로 보면, '인구론', 인문학 전공자의 상당수가 실업자가 되는 상황은 일차적으로 한국사회의 노동에 대한 수요가 적다는 것에 기인하며, 이는 지난 2년간 이공/상경계 졸업자들의 취업률이 상대적으로 높을 뿐 절대적으로 그렇게 만족스러운 수준이 아니라는데서도 알 수 있다. 2013년 하반기 대학알리미 통계를 보면 전국 10개 국/사립대의 이공계 졸업생들의 취업률은 47.8%, 다시 말해 절반도 되지 않는다(http://hankookilbo.com/v/9fdac3fa07494bc496730c1a33abbaae). 그의 주장처럼 인문계 정원을 축소하고 이공/상경계열로 그 인원을 옮긴다면, 그해의 총 고용인원 자체가 급증하지 않는 한 우리는 "이공계 취업률 매우 낮아"와 같은 기사를 보게될 가능성이 높다. 김인규의 글에는 애초에 왜 인문사회계 취업률이 낮을까를 고민한 흔적조차도 없기 때문에 나는 그의 정책적 제언을 과감하게 무시해도 좋다고 확신한다. 학과의 정원변경 및 통폐합과 같은 주제를 다루고 싶다면 이것보다는 신뢰할만한 논증을 제시하길 바란다.


셋째, 결정적인 요인으로, 그는 학문의 목적과 기능이 아니라 시장에서의 단기적 수요에 학문의 의미 및 필요성을 종속시킨다. 예를 들어 그는 '중장년층이 인문학 상품을 사치재로 구매한다'(물론 이는 검증이 되지 않은 이야기다; 이 현상은 그가 이야기하는 것보다 복잡하게 이해될 필요가 있는데, 글을 다섯 번 정도 읽어보면 그는 복잡한 사회현상을 이해할 능력이 없는 것 같다)는 진술에서 '인문학은 사치재다'로 넘어가는 놀라운 논리적 비약을 단행한다. 당연히 그의 주장은 틀렸다. 학부 교양/전공수준에서 가르치는 인문학은 사람들의 수요와 별개로 그 나름의 기능을 갖는다--예를 들어 필자 자신은 아마도 구매하지 않았을 논리학이 그가 저지르는 것 같은 초보적인 오류를 예방하는 데 쓰일 수 있듯이 말이다. 쉽게 말해서 학문의 기능 및 목표는 단기적 시장수요로 환원될 수 없다--대학 행정의 임무는 장기적 전망을 갖고 양자 사이에서 나름의 균형을 잡는 것이다. 나는 이 엉터리 논증들을 보면서 한국의 대학이 (장기적으로 합리적이라는 보장이 없는) 시장수요에 따라 재편되는 대신 자신이 수행하는 기능을 조금 더 철저하게 수행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학부 때 기초적인 글쓰기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점에서 김인규 교수는 한국의 부실한 인문교양교육의 희생자인 셈이다!



그렇다면 사회적으로 인문학이 수행하는 역할은 무엇인가? 앞서 말했듯 우리는 '인문학'이라는 이름으로 굉장히 다양한 활동들을 묶어 부르기 때문에 이 질문에 간단하게 답하기는 어렵다. 전문적인 영역을 제외하고 간략하게 말해보자면, 기술적으로 (문자로 구성되지 않은 텍스트를 포함한)읽기-비판적으로 사고하기-쓰기의 과정을 가르치는 인문학/교양교육은 다른 무엇보다도 사회구성원들 간의 합리적인 소통가능성을 증진시킨다. 우리는 인문사회교양 교육과정을 통해 타인의 언어/비언어적 표현을 이해하고, 나름대로 판단하고, 우리의 의견을 올바르게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며, 나아가 그러한 실천들을 통해 구축되는 우리 자신의 사회문화적 정체성을 보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때로는 비판적으로, 이해한다--통상적으로 인문학으로 분류되는 언어, 문학, 역사, 철학은 그 모두가 의사소통의 축적물이자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방식을 다룬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다. 기업가들의 믿음과는 달리, 이공계 종사자들을 채용하고 그들에게 단기적으로 인문학 교육을 시킨다고 해서 전자가 인문학적 사고능력을 습득할 가능성은 낮다. 공학적 사고가 상당히 강도높은 교육을 통해 훈련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문학적 사고능력의 습득은 상당히 많은 시간 및 노동의 투여를 요구한다.


물론 인문학 교육이 기업들이 당장 활용할 수 있는 인간자원을 생산하는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하나의 사회는 경제적 삶으로만 채워지지 않으며, 우리가 5년 동안 최소 3번의 투표를 실천하고 일상에서 수많은 사회적 이슈에 대한 입장을 정해야 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삶 혹은 시민으로서의 삶 또한 한 사회가 나아가는 방향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우리가 소수의 철인통치자들에게 정치적/사회적 안건에 대한 판단을 위임하는 삶으로 퇴행하기를 선택하지 않는 이상, 정치적 영역과 시민사회적 영역에 대한 판단 및 소통능력은 그 사회의 미래를 직접적으로 결정짓는 요인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단적으로 정치적 문맹들로 가득한 민주주의 국가에서 합리적인 정치적 결정이 이뤄지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인문사회교육의 주요한 기능 중 하나는 바로 이처럼 합리적인 소통과 판단을 수행할 수 있는 사람들을 기르는 것이다(당연하지만, 사회가 이런 능력을 갖출 때 우리의 직장도 좀 더 효율적이고 합리적으로 작동한다). 김희원이 말하는 '인생의 공허를 메꿔주'고 '현실을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인문사회학의 역할은 이러한 측면과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김인규의 주장은 겉으로 보면 인문학의 전망에 대해 사회과학적인 분석을 수행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인문사회학의 사회적 기능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나온 오류에 불과하다. 이는 그의 사고에서 애초에 시민사회라는 영역 자체가 결여되어 있음을 보여주는데, 결과적으로 여기에서 인간의 삶은 재화를 획득하는 과정과 등치되어 매우 협소해진다(그가 사고와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이었다면 원고료도 별로 나오지 않는 칼럼을 쓰는 대신 좀 더 기대소득이 높은 다른 일을 했을 것이다). 이런 관점이 경제학적 분석을 수행하는데 유용할 수는 있겠지만, 사회현상과 정책을 이해하는 데는 부분적인 효용만을 갖는다는 걸 잊어버리면 안 된다. 한 마디로 교육정책의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지적 노력에 크게 미달한 김인규의 글은 무묭할 뿐만 아니라 해롭기까지 하다. 자신의 한계를 망각한 학문은 한갓 이데올로기로 전락한다는 것을 깨우쳐주는 게 인문학 전통의 대표 중 한 명인 칸트의 목표였음을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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