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마녀사냥 혹은 public shaming 에 대한 노트

Comment 2015.03.02 21:08

기사 원문링크: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80352.html


주요 인용:


"미국에서는 트위터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주로 나타나는 이 현상에 ‘공개적으로 망신주기’(Public shaming)라는 이름을 붙이고 주목하고 있습니다. ‘망신주기’는 대개 어떤 이들의 부적절한 행동을 누군가 비판하는 글(트위트)을 올리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망신당하고 해고당한 이들을 인터뷰해 칼럼을 쓴 존 론슨도 소셜미디어 이용 초기에는 동물을 학대한 저널리스트를 앞장서서 비판하면서 사람들의 열렬한 반응을 이끌어냈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초기만 해도 집단적인 분노가 정당하고 힘 있고 효과적으로 느껴졌다. 계급이 사라지고, 정의가 민주적으로 이뤄진 것 같았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망신주기 캠페인이 단지 강력한 기관이나 공인이 아닌, 거슬리는 뭔가를 한 보통 사람 누구라도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 또한 얼마나 나쁜 죄였는지와는 별개로 처벌을 즐기는 잔혹함에 놀라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최근의 ‘망신주기’는 온라인 말고는 현실적인 저항의 공간이 없는 약자들이 사회적 강자를 공격하는 형태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전철에서 음식을 먹는 낯선 여성 사진을 올리고, 사소한 공중도덕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나무라고, 편견에 가득한 말을 내뱉었거나 비과학적인 말을 하는 사람들의 신상을 털어 전시합니다. 사코의 예처럼 오해받기 쉬운 발언들도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채 따로 퍼날라져 공격 대상이 되었고 사코는 직장에서 해고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만약 사코가 인종 차별 관련 업무를 처리하는 공무원이나 법관 등 편견을 지녀서는 안 될 위치였더라면 모르겠으나, 그는 그저 보통 직장인이었습니다."


"공격은 또 다른 공격을 불러옵니다. 존 론슨이 조사한 사례 중 하나를 보면, 한 남성이 IT 컨퍼런스에서 친구와 성차별적인 농담을 했다가 해고당했습니다. 뒷줄에 앉아서 그의 말을 듣게 됐던 여성이 불쾌함을 느끼고 그 남성의 뒷모습을 찍어 트위터에 올렸기 때문입니다. 이 둘은 서로 전혀 모르는 사이였습니다. 남성이 ‘해고당했다’는 글을 올리자, 이번엔 고발한 여성에게로 역풍이 불어닥쳤습니다. 신원이 공개되고 남성단체 등에서 협박물이 날아드는가 하면, 일하던 사이트는 디도스 공격을 받았습니다. 이 여성도 해고당했습니다. 남성도, 여성도 그저 평범한 회사원일 뿐이었습니다."






이하는 기사에 대한 나의 코멘트.



끄트머리에 인정욕망 이야기로 가는 건 지나치게 안이한 구성이라고 생각하지만(더불어 앞에 호네트를 인용하면서 마지막에 저렇게 처리해버리면 내용이 꼬일 수 있다), 기사에서 다루는 현상은 숙고할 만한 것이다. 온라인 마녀사냥과 같은 행위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자신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는지, 그리고 자신의 공격적 언어사용으로 인해 누군가가 깊은 상처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얼마나 둔감한지--다시 말해 자신의 행위에 거의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은 쉬이 넘기기 어렵다. 이는 부분적으로 온라인 시민사회의 관심사가 공적인 사건/기구에서 사적인 일상으로 급격하게 변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비교적 초기의 시점에 온라인 상의 공격적인 댓글은 (일대일 논쟁 등을 제외하고는) '공적인' 성격을 갖는 사안들을 향했고 그래서 (대상이 정부나 대기업, 범죄자 등이었으므로) 공격적인 표현이 얼마든지 용인되고 때로는 정당성을 가질 수조차 있었다면, 지금은 그와 같은 표현이 사적 개인들에게 어떠한 여과 없이 퍼부어진다; 즉 우리는 거의 유사한 행동양식을 대상을 바꾸어 행하고 있는 셈이다. 과거 정부와 같은 공적 기구, 대기업/재벌과 같은 비인격적인 '권력'에 대한 비판이 사회적으로 정의를 실천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면, 오늘날 시시한 개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정신적/언어적 폭력의 과잉은 사실 폭력을 휘두르는 이의 내적인 불만을 해소한다는 것 말고는 어떠한 사회적 정당성/의미를 획득하지 못한다. 


이는 사태의 진정한 요점이 어쩌면 우리 시민사회가 공적인 영역에 제대로 개입할 수단을 상실했다는 데, 우리가 개입할 수 있는 영역이 우리 자신과 같은 사적 개인들의 일상 뿐이라는 데 있을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정부와 자본을 견제하면서 독자적인 힘을 생성하던--혹은 그럴 수 있다고 믿었던--시민사회는 오로지 소비와 클릭, 공유만이 가능한 개인들의 느슨한 연결망으로 바뀌었고, 이제 시민-개인들은 스스로의 무력감에 대한 불만조차도 소비, 클릭, 공유라는 제한된 행동양식을 통해서만 표현가능하게 되었다. 실질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없고 그래서 어떠한 책임도 진지하게 고려할 필요가 없는 행동양식만이 유일한 선택지일 때 그 메시지가 점차 극단적으로 공격적인 내용을 담게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더불어 우리는 지금 우리가 공격하는 대상이 우리 자신과 '같은' 약해빠지고 시시한, 일상을 살고 있는 시민-개인이라는 사실을 거의 고려하지 못한다. 바꾸어 말해, 서로에 대한 공격성이 과잉으로 가지 않도록 막아주던 것이 (민족감정과 같은) 동질성에 대한 의식이었다면, 오늘날 그와 같은 의식이 더 이상 교육/생성되지 않는 상황은 서로에 대한 공격성의 표출을 제약하는 사회적인 기제가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을 뜻한다. 온라인 상의 폭력을 제약하는 것은 (물질적인 폭력으로 곧바로 이어질 수 없는) 온라인 공간 자체의 한계와 법적인 처벌체계 뿐이다.


다시 말해, 그것을 public shaming이라 부르든 온라인 마녀사냥이라 부르든, 서로에 대해 최소한의 책임감/인정recognition감정을 가지며 개인의 에너지를 보다 유의미한 공적인 활동에 행사할 수 있는 경로가 마련된 시민사회 자체가 재구축되지 않는 한 이러한 폭력은 지속적으로 반복될 수밖에 없다. 그저 '시민A'일 뿐인 개인들 간의 폭력이 반복되고 또 더 커지는 상황은 우리의 내면에 그와 같은 폭력을 불러일으키는 동력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태에 무의미한 조소와 훈계로 대응하는 대신 실제로 존재하는 에너지 자체를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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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소년의 노래 2015.03.03 23:25 Modify/Delete Reply

    역시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어김없이 이와 관련한 좋은 글 하나 링크해야겠네요.

    http://xenga.tistory.com/195

    (제가 스스로의 의견을 개진할 만큼 유능하지가 못해 매번 링크로 대충 때우는 식의 댓글을 달아 죄송하네요.
    안 읽어보셔도 되고 답글 안 다셔도 됩니다.)

    마지막 문단 '시민사회의 건설' 부분은 심히 공감합니다만, 소비자형 개인주의가 팽배해져가고 있는
    현 시대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호응해 줄지는 의문입니다. 결국 중간계급에 해당하는 시민들을 어떻게
    회유할 것이냐가 문제일 텐데 이게 참 쉽지가 않을 겁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연대를 통한 시민사회는 곧 전체주의요.
    그것은 우리의 (소바자로서의)자유를 방해할 뿐이라고 생각할 테니까요. 이 난국을 헤쳐나갈 수 있는 좋은 방법은
    국가라는 엘리트집단의 힘을 빌리는 것일 텐데 현 정부의 상태를 봐서는 그마저도 쉽지가 않다는 겁니다. ㅠㅠ

    • BeGray 2015.03.04 00:04 신고 Modify/Delete

      소년의 노래 님// 링크 감사합니다. 벌써 저 일이 3년 전이군요...

      저는 "소비자형 개인주의" 혹은 포스트모던적 자유주의/소비주의자들의 등장을 가능하게 만드는 조건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뒤집어 말한다면, 그러한 조건이 소비자로서의 인간의 삶 자체를 위협할 때, 소비자형 개인주의는 필연적으로 다른 형태의 주체화방식을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http://ewsngod.nayana.kr/zexe/net1/9381 같은 글에서 소비형 생활양식이 아닌 다른 형태의 생활양식을 촉구하는 요인은 단순히 후자의 삶이 더 주체적이라는 믿음에서가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통치의 파행과 함께 나타나는 현실적인 어려움인 것처럼요. 이러한 현실의 위기를 감안한다면, 일베, 어버이연합과 같은 새로운 국가주의자들의 등장은 자유주의자들의 곤경에 대한 우파적 반작용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맑스주의 변증법의 전통이 가르쳐주는 주요한 교훈이 있다면, 자본주의적 체제의 변동 하에서 정치적 정세는 결코 고정된 상수값으로 남아있을 수 없다는 것이겠지요. 소년의 노래 님께서 목도해오신 시민사회/공동체의 와해 자체가 특정한 정치경제적 조건 위에서 만들어진 것처럼 말입니다.

      정리한다면, 좋든 싫든 현실적인 어려움이 소비주의-자유주의적 개인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고 있는 상황에서, 오늘날 좌파는 우파~중도우파 자유주의자들 못지 않게 새롭게 등장하는 국가주의/파시스트 극우파들 역시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 저의 입장입니다. 물론 이것이 현실에 존재하는 국가권력에의 철저한 비참여을 뜻하지는 않겠지요. 그러나 국가권력과 시장으로부터 어느 정도의 자발성을 획득한 시민사회를 현실적인 힘이자 공동체로 어떻게 구축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잊고 갈 수는 없을 겁니다(저는 오늘날 협동조합 운동과 같은 흐름들이 시민사회에 대한 요구가 되돌아오고 있음을 부분적으로나마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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